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사건[제5화(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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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숭례문 모습( 문화재청 홈페이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숭례문(崇禮門, 오늘의 남대문)을 들어섰다. 통금시간이 해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새로 교대한 수문장들이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무심한 모습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 중요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일이 반복되고 있으니 도성 문을 지키는 군졸도 매번 하던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햇살이 거리를 비추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듯 내은이는 계속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가쁜 숨을 넘기며 남태령을 넘은 지 얼마나 흘렀나?
아직도 뒤에서 누가 금방 추격해 올 것 같은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만복(萬福)이가 이끄는 대로 여기까지 힘들게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쳤다.
다리는 오금이 당기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 조금만 걸음을 옮겨도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먼 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우수(雨水)가 막 지났지만 새벽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직은 겨울이었다. 내은이는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입김을 불어 넣으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 분하고 억울함을 고변하고 동생들을 구해야 한다.’
내은이(內隱伊)는 지난 며칠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서 끈적거리는 느낌이 계속 몰려왔다. 저고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너무 시리고 아프다.
내은이는 다시 앞섶을 가리고 만복이를 따라가며 계속 뒤를 돌아보곤 했다.
“아씨. 이쪽입니다요.”
만복이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내은이는 고개를 끄떡이고 눈빛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다리를 절뚝이며 걷기는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 이마를 찡그렸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걸었으니 눈도 절로 감겼다.
“아씨. 괜찮으세요? 좀 쉬었다 갈까요?.”
만복이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른쪽 길가 나무 그루터기 쪽을 가리키며 내은이를 끌었다.
“괜찮아. 빨리 가야지. 다 왔다면서……?”
내은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만복이를 향해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알겠어요. 아씨. 저기를 돌아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한성부(漢城府)가 나와요. 조금만 버티세요. 도성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젠 누가 쫓아 와도 괜찮아요.”
만복이는 멀리 서 있는 느티나무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른 아침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앞장서서 길 안내를 하는 청년 노비는 그렇다고 쳐도 절뚝거리며 힘들게 뒤를 따르는 앳된 소녀의 행색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누구에겐가 쫓기는 모양새가 분명해 보였다.
느티나무 삼거리를 돌아서자 맞은편에 한성부가 나타났다. ‘한성부(漢城府)’라는 커다란 현판이 있는 대문 입구에 서 있는 군졸들이 보이자 만복이가 손을 들어 흔들며 소리쳤다.
“나으리. 도와주세요. 여기요. 여기……”
군졸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달려왔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과 군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요. 고변하려 합니다. 도와주세요.”
만복이가 달려오는 군졸들을 향해 울먹이며 소리쳤다. 창을 든 군졸들이 달려오며 대장인 듯한 군졸이 만복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 아씨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요.”
상황을 직감한 대장이 군졸들에게 지시했다. 군졸들이 내은이를 부축하자 내은이는 긴장이 풀린 듯 길바닥에 쓰러졌다.
“아씨. 아씨…… 한성부에 왔어요. 정신을 차리세요. 아씨. 아씨……”
“만복아……. 신문고를…… 쳐… 야……”
내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아 정문 옆 망루에 설치된 신문고를 손으로 가리키며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마침내 의식을 잃은 것이다.
“들것을 가지고 오너라.”
대장 군졸이 소리치자 군졸들이 달려와 내은이를 들것에 실었다. 창백한 얼굴로 사지를 축 늘어뜨린 내은이는 들것에 실리는 동안에도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군졸들이 내은이를 싣고 한성부 안으로 뛰었다.
만복이가 울면서 내은이의 짚신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19세기초 의금부. (‘금오계칩((金吾契帖)’에 그려진 19세기 초 의금부(현 서울 종로구 종각 4거리 제일은행 자리) 모습, 고려대박물관 소장.)
이들이 한성부 대문 안으로 사라지자 군졸들이 사람들을 향해 모두 흩어지라고 손짓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모두 제 갈 길을 갔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한성부 남부 관아 앞의 소동은 관원들의 재빠른 조치로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관아 터 앞의 거리는 평상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스산한 바람 사이로 봄은 이미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러 도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기 시작했다.
우수(雨水)가 지나고 봄기운이 도는 계절이었지만 아침 날씨는 아직도 서늘했다. 밤새 길고 길었던 내은이의 탈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는 모든 일을 관아의 처분에 맡기면 된다.
태종 4년(1404) 겨울의 문턱을 갓 넘긴 춘삼월 중순에 일어난 조선 건국 최초의 외거노비에 의한 여주인 강간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의 근간(根幹)을 뿌리째 흔든 대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초기의 사회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에 온 힘을 쏟았다. 중앙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아직 남아있던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역대 신료들을 중심으로 정사가 이루어지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六曹) 직계제를 통해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게 하였다.
태종은 고려 말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10여 년 동안 관리로 지냈던 적이 있었으므로, 관료들 행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과거 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폐단을 과감하고 신속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태종은 가장 먼저 사대부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을 없애고 병권을 국가가 장악하도록 일원화했다. 의흥부(義興府)를 폐지하여 병조(兵曹)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사병의 혁파로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사병조직은 사라졌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농부가 되거나 국가의 군역에 편입되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전국의 사찰(寺刹)을 정리하고 사찰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그리고 태종 2년(1402)에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 모습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 보내거나 처형했다. 심지어 정사를 농단한다는 이유로 처남 네 명을 모두 죽이기도 하였고, 중전인 원경왕후를 교태전(交泰殿)에 사실상 유폐시켜 왕비와 외척이 어떠한 정치적 간섭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 조치는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으로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외거노비의 위계에 의한 여주인 강간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한양에 판사(判事) 벼슬로 재직하던 이자지(李自知)라는 고위 관료가 살고 있었다.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고려 시대의 판사는 그 기관 소속이 아닌 다른 관료, 즉 타관(他官)이 기관의 업무에 참여하게 할 때 주던 벼슬 가운데 하나였다.
판사는 타관 중 최고 등급에 해당한다. 실직(實職, 실제로 관직을 받아 근무하는 자리)과 겸해서 받는 관직이기에 겸판사(兼判事)라고도 한다. 판사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지방 관리를 감시하고 보필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였다.
중추원의 판사는 종2품이었다. 중추원의 판사는 원래 관직의 품계가 종2품보다 낮은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이 관함을 통해 2품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삼사, 상서육부의 판사는 중서문하성 재신들이 맡았다. 재신들은 2품 이상이고 삼사와 상서육부의 장관은 3품이기 때문에 여기의 판사직은 따로 품계가 없었다.
이들은 각 부서의 장관 위에서 감독관 역할을 했다. 판사의 하위 등급으로는 지사, 동지사(同知事) 등이 있다.
이렇게 고려 시대에 특수한 권력 구조로 되어 있던 판사라는 직함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제도적으로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후기 제도의 관례를 그대로 따랐는데, 도평의사사·삼사·사평부(司評府)·중추원·상서사·합문(閤門)·봉상시·전중시(殿中寺) 등의 장관이었다.
당시는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고려 시대의 관직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이자지도 고려말의 ‘판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2품 정도의 품계에 상당하는 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이 다소 해괴하여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의 성기를 칭하는 비속어에 속하지만, 그 당시에는 김자지, 조자지, 박자지, 최자지 등 이름에 널리 쓰였다.
성리학적 가치관이 새로운 시대 지성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던 당시 시대의 추세 속에서 ‘自知’라는 이름은 성리학을 배우는 양반 귀족 가문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사내아이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즉, 열심히 학문에 천착해서 ‘자신을 깨우치는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선 초기에 이런 이름을 가진 고위 관료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자지(李自知) 판사 부부는 딸 3명을 데리고 남대문 밖의 멀리 한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병약하던 이자지가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부인도 지아비를 잃고 상심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까지 잃은 세 딸은 큰 충격 속에 빠졌다. 하지만 슬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과 열여섯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린 내은이에게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앞에 닥친 것이다.
여자 나이 열여섯이면 시집을 갔어야 할 나이였지만 부모님이 지병으로 앓고 있었고 병간호를 해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혼담을 받아들이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분위기였다.
부모들도 죽기 전에 딸 내은이를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효성이 지극한 내은이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더구나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할 수 있는 가까운 친척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로서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일찍 결혼하는 조혼(早婚)과 늦게 결혼하는 만혼(晩婚)의 폐해를 막기 위해 국가에서 혼인하는 나이의 제한을 두었다.
조혼은 고려시대에 처녀를 몽골에 바치는 공녀제도를 피하기 위해 딸을 일찍 시집보낸 데서 비롯되었다. 물론 제사를 모시는 후손을 빨리 얻기 위함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장가나 시집을 가지 못한 처녀, 총각이 죽으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손각시와 몽달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돌며 가족들을 괴롭힌다고 여겼던 것도 혼인을 서두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본래 풍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나라가 바뀌었어도 조혼하는 풍습이 계속되자 나라에서는 혼인할 수 있는 나이를 정하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도록 법제화하게 되었다.
조선이 유학을 중시하던 나라였으므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준을 두고 남자는 16세부터 30세, 여자는 14세부터 20세가 혼인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경국대전』에는 남자나이 15세, 여자나이 13세가 되면 혼인을 논하도록 하고(議婚) 14세가 되면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의 평균 수명은 35세에 불과했다. 수명이 길지 못했으므로 손자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커서 조혼풍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1461년(세조 7년)에는 부모의 나이가 50세 이상이거나 병든 경우에는 10세 이상이면 성혼을 할 수 있게 했다가 5년 후에는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혼인할 수 있도록 정하였다.
혼인 적령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이의 상한선도 있었다. 적령기를 놓치는 원인으로 첫 번째, 혼인의 사치 풍조로 인해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체면이 상할 것을 두려워하여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고, 둘째, 부모가 한꺼번에 돌아가신 경우 욕심 많은 일족이 재산을 탐내어 일부러 혼인을 늦추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경국대전』 예전(禮典) 혼인조에 의하면, 혼기를 넘긴 집안을 엄격히 조사하여 호조(戶曹)와 영문(營門) 및 각 읍(邑)에서 돕도록 법으로 제정하였다. 형편이 어려운 경우 관에 고하여 혼례비용을 보조할 수 있도록 했다.
나라에서 보조를 해주면서까지 만혼을 억제했던 이유는 천지이변의 재앙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함이었다. 남자와 여자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마차.(19세기 말 20세기 초만 해도 조선에는 수레가 없었다. 상업을 천시하고 적의 침입을 염려해 도로를 건설하지 않은 탓이다. 이 때문에 물류 유통이 제한되어 경제도 낙후되었다. (사진 미국 헌팅턴도서관)
내은이의 경우도 부모가 한꺼번에 돌아가고 주위에 이를 챙길만한 가까운 친척이 없는 경우였기 때문에 자신의 혼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어린 두 동생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은이는 동대문 밖 답십리에 산다는 먼 친척 어른과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부모상을 치렀다. 그리고 아들이 없었지만, 양반가의 법도에 따라 부모의 삼년상을 치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선 13살, 10살이 된 어린 두 여동생을 챙겨야 했다. 그녀는 몸종 연지(燕脂)와 젊은 노비(小奴) 만복(萬福)의 도움을 받으며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연지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맘씨 고운 여종으로 내은이와 두 동생을 극진히 챙겼다. 만복이도 내은이보다 두 살 위로 이제 제법 청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이 판사댁에서 내은이와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사이여서 신분의 차이만 있었을 뿐, 각별하게 챙기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늘 든든하고 믿음직하게 집안의 힘든 대소사를 챙겼다. 내은이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연지와 만복이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서서히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도는 계절로 접어들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자, 이 판사의 논과 밭이 있던 과주(果州, 경기도 과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가노(家奴) 실구지(實仇知)가 그의 동생과 함께 찾아왔다.
실구지 형제는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작물을 우마차에 가득 싣고 도착했다. 그들은 경기도 과천에 살면서 이 판사 소유의 전답을 관리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던 집안의 외거노비였다.
양반과 노비(김홍도의 풍속화)
조선시대 노비는 소유 주체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노동을 제공했던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주인과 떨어져 살면서 그에 상응하는 신공(身貢)을 바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었다.
외거노비의 경우는 솔거노비와는 달리, 주인과 따로 거주하며 주인의 호적에 기재되는 외에 현 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적인 가정생활이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전호(佃戶)로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며 생활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하여 경제력을 높일 수도 있었다.
사노비는 고려 ·조선을 막론하고 솔거노비와 마찬가지로 주인의 재산으로 인정되어 상속 ·매매 ·증여가 가능하였고, 주인의 의사에 따라 솔거노비로 전환될 수도 있었다. 지금 내은이 자매와 같이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연지와 만복이는 곧 솔거노비였다.
당시 판사 이자지는 경기도 과천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그 토지를 경작하는 외거노비를 두었고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인 박살 등이 이 판사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록 과천에서 이 판사 소유의 전답을 경작하면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 판사의 집에 일이 생길 때마다 한양으로 올라와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리고 매년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의 일정량을 이 판사의 집에 납공(納貢) 형식으로 올려보내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실구지 형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마차에 가득 싣고 온 쌀과 각종 농작물 등을 창고에 일일이 쌓기 시작했다. 만복이와 연지는 이들을 도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처럼 집안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돌았다.
내은이는 마당에서 과일을 먹으며 웃고 떠들고 있는 어린 두 동생을 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과주에서 지은 농작물을 가지고 집을 찾아와 납공(納貢)하는 것은 매년 해오던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집안에 어른이 없어지자 과주에서 전답을 관리하는 노비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안 분위기의 변화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은이는 걱정이 되어 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곳간에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하자, 내은이는 연지를 시켜 사랑방에 다과상을 준비하도록 했다. 실구지가 내은이에게 집안일로 조용히 의논드릴 일이 있다면서 독대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내은이가 사랑채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물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실구지가 들어왔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오랜 농사일로 단련된 근육질의 사내가 풍기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거기 앉게.”
내은이가 위엄을 갖추고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양반가 규수로서의 위엄은 배어났다.
방 안으로 들어와 잠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실구지가 조심스럽게 앉으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씨.”
“그래 무슨 말인가?”
“다름이 아니라 아씨……” 실구지가 연지의 안색을 살피면서 약간 주저하며 뜸을 들였다.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인가?”
내은이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뭔가 썩 좋지 않은 말을 하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예. 그러니까 그게……”
실구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기가 좀 뭣합니다마는…… 주인 어르신 두 분이 이미 모두 돌아가신 지도 곧 1년이 다 돼가지 않습니까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내은이는 실구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그치듯 물었다.
실구지는 내은이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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