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사건[제5화(2회)]

신분 상승을 노린 지능적인 성폭행
기사입력 2025.03.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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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들이 일하는 모습을 감시하고 있는 양반

 

“그러니까…… 아씨께서 어린 아씨들과 과주로 내려와서 저희와 함께 살면 어떨까… 하구요…….” 

실구지는 고개를 들고 내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내은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그리하시면 과주의 전답을 관리하기도 훨씬 편하지 않겠습니까요? 저희도 아씨를 더 잘 모실 수 있고요. 사실은…… 저희도 일이 있을 때마다 과주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요.”

 

내은이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너무 놀랐다. 과주의 가노들이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내은이는 과주의 전답 규모가 얼마인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즈음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것도 장롱 속에 보관되어 오던 문서로만 확인했을 뿐, 토지와 노비 등의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과주의 가노들이 연례행사처럼 늘 해오던 대로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불편해하거나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은이는 이제 실구지의 말을 듣고 나니 비로소 현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로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은이는 더럭 겁이 났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긴 최근 들어 내은이는 어린 나이에 집안을 이끌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점점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막상 이런 일을 마주하고 보니 부모님께서 해오셨던 대로 아랫것들을 관리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침내 올 것이 온 기분이었다. 실구지의 말을 듣고 보니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도 너무나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내은이가 대답을 못 하고 침묵을 지키자 방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실구지는 무릎을 꿇은 채로 힐끔힐끔 내은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 이 판사가 살아 있을 때는 감히 주인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가노였다. 그런데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곧이어 세상을 뜨자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집안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과주에 살면서 집안의 전답을 관리하는 가노들도 주인인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뀐 것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집안에 나이 어린 여자 셋만 남게 되자 그동안 조심스러워하던 태도들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다. 내은이는 이럴 때일수록 주인으로서의 위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얼굴빛을 고치고 근엄한 자세로 실구지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여자의 도리는 안방문(閨門)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물며 비록 내가 여자이지만 지금 부모님 상중(喪中)에다 삼년상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집을 떠날 수 있겠느냐?”

내은이의 말은 단호했지만,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양반가의 규수로서의 글을 읽었고 법도도 배운 터라 그녀의 말과 태도에는 위엄이 배어있었다. 

 

내은이의 말이 끝나자, 실구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내은이는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옷 속에서 주먹을 폈다 감았다 하는 동작을 몇 번 반복했다. 

실구지는 내은이의 반응은 짐작하고 있던 대로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이 모여서 의논한 대로 내질러야 한다. 물러서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어디 첫술에 배가 부르겠는가?

 

“아니…… 아씨. 제발 생각 좀 해보세요.”

실구지가 상체를 세우고 정면으로 내은이를 보면서 말했다. 내은이는 그의 태도가 이미 평소에 익히 봐왔던 아랫것들의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씨. 아씨도 생각 좀 해보세요. 지금 집안의 의식주가 모두 과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 형제들 손에 달려있는데……, 저희 형제의 청대로 하지 않으면 대체 어쩌겠다는 겁니까요?” 

이건 아예 대놓고 협박이었다. 내은이는 속으로 놀라 움찔했지만, 평정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내은이가 몹시 당황해하는 표정을 짓자 실구지가 굽히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정 그렇다면 과주의 전답을 관리하는 일은 아씨께서 알아서 하시지요. 저희도 이제는 지쳤습니다요……” 

실구지는 다시 자세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직접 내은이를 보지 않고 상체를 숙이고 곁눈질로 힐끗힐끗 내은이의 반응을 보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 

 

실구지는 분위기가 짐작하고 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작심한 대로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내뱉었다. 

“솔직히…… 우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네요……. 너무 지쳤습니다요. 아씨께서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우리도 장차 농사를 돌보지 않고 도망가면 그만입니다요. 아씨께서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전답도 돌보고 농사도 지어보셔야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실 것입니다요.”

자기 형제들이 주인의 전답을 관리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데, 저들이 농사를 지어주지 않으면 당신들이 어떻게 살겠느냐는 뜻이었다. 이건 순전히 으름장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협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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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 ‘동작진(銅雀津)’.

지금의 동작대교가 있는 동작나루를 한양 쪽에서 바라본 모습을 그린 작품

 

내은이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실구지 말대로 그들 형제가 정말 도망가 버려서 과주의 전답을 관리하고 농사도 지어줄 사람이 없다면 자신과 동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거기다가 집안에는 이 일에 대해 상의할 사람마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실구지의 말에 따라 과주로 이사를 하자니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다. 삼년상도 이제 막 시작하지 않았던가.

 

내은이의 나이 이제 겨우 열여섯이었다. 그동안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다. 실구지의 말을 듣고 있던 내은이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숙였다. 

실구지는 내은이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옳거니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시 허리를 숙이면서 이번에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니 아씨. 과주로 이사만 하신다면, 아씨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 형제들이 모두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요. 지금까지 해오셨듯이 과주에 오셔서 똑같이 하시면서 살면 되지요.”

“……” 

내은이는 할 말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실구지의 말대로 어린 나이에 두 동생을 챙겨가며 과주의 전답과 노비들까지 관리해 나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벅차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내은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실구지는 기회를 놓칠세라 두 손을 아래위 좌우로 흔들며 과장된 몸짓을 해가며 말을 이어갔다. 

“아씨. 정말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 어르신 삼년상은 과주에서 모시면 되잖아요. 이미 우리 형제가 의논해서 다 준비해 놓았습지요. 우리 형제가 더 잘 모시겠습니다요.”

“준비해 놓았다고? 뭘 준비해 놓았다는 것인가?”

눈을 감고 골똘하게 뭔가 생각하고 있던 내은이가 눈을 뜨면서 물었다. 실구지는 이때다 싶어 얼른 대답했다.

“삼년상이요.”

“삼년상……? 지금 삼년상이라 했나?” 

“예. 아씨. 어르신 내외분 삼년상이요. 어르신 삼년상은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요. 우리 형제가 이미 아씨께서 내려오시면 계실 거처와 두 분 어르신 삼년상을 무사히 치를 수 있게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요. 그러니까 아씨는 몸만 내려오시면 됩니다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실구지는 내은이의 약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사실 지금 내은이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양반가의 여식으로서 부모의 삼년상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녀는 실구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 아닌가. 

 

만약 과주로 내려가기로 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포함하여 가산의 처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누구와 의논해야 하는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로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당장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다. 우선은 이 숨이 막힐 듯한 이 순간은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은이는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네. 쉽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말미를 좀 두고 생각해보겠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해가 짧으니 빨리 일어서야지…… 어두워지기 전에 남태령을 넘으려면 서둘러 가야 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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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소달구지

 

실구지는 얼른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잽싸게 마루턱에 내은이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씨.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려오기만 하면 저희가 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요. 잘 생각해보세요”

 

내은이는 신발을 신고 뜰로 나왔다. 실구지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곳간에 짐을 모두 채워 넣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노들이 내은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연지가 내은이의 안색을 살피면서 머뭇거렸다.  

내은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머금으면서 연지의 손을 잡았다. 

“아씨. 곳간에 짐을 다 부려놓았고 정리도 다 했습니다요.”

만복이가 이마를 훔치며 내은이를 향해 웃었다. 

“그래? 잘했다. 모두 수고했네. 뭐…… 요기라도 좀 했느냐?”

“예. 아씨.” 

마당을 쓸고 뒷정리까지 마친 가노들이 소달구지에 빈 광주리와 멍석을 담으면서 대답했다. 

 

중천에 걸렸던 해가 어느덧 기울고 있었다. 오늘 과주로 돌아가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남태령을 넘어야 했다.

“그럼. 아씨. 안녕히 계세요. 또 찾아뵙겠습니다요.”

실구지와 가노들이 내은이에게 인사를 마치고 달구지를 끌면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내은이는 마당에서 이들을 전송하고, 연지와 만복이가 실구지 형제들을 골목 입구까지 따라가 배웅했다. 

이웃 사람들이 지나가며 연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아는체했다. 연지는 가볍게 눈인사했다.


실구지 형제가 이끄는 달구지가 당나무가 있는 삼거리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은이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멀리 남태령이 바로 눈앞에 가까이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늦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길가 나무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내은이는 문득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어린 두 동생은 언니를 올려보며 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함께 울상을 지었다. 

내은이는 두 동생을 와락 껴안으며 힘을 주었다. 동생들은 언니 품에서 훌쩍거렸다.

 

“아씨……” 

어느새 돌아왔는지 연지가 수건을 내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만복이는 빗자루를 들고 대문 앞을 쓸면서 힐끔힐끔 내은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알았어. 그만 들어가자. 연지야. 과일 좀 씻어 오렴.”

연지가 앞장서서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연지를 보며 말했다.

“예. 아씨. 바로 가지고 올게요.”

연지가 활짝 웃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가자, 막내 여동생이 연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걸터앉은 내은이는 동생의 머리에 달린 댕기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분주했던 집안은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내은이에게 오늘은 너무나 길었던 날이었다.


실구지 형제가 다녀간 후, 내은이는 며칠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실구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임종 전에 자신을 불러놓고 과주의 전답과 관련된 토지문서와 가노들의 신상을 적은 노비문서를 보여주면서 잘 관리하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 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해하기에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설마 이렇게 두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자, 모든 것이 현실로 닥쳐왔다. 그녀로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여를 따라 장지로 결정된 과주로 가본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주의 가노들이 무슨 거짓말을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먼 길을 일일이 오가며 챙길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내은이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의논할 수 있는 가까운 친척이라고 해봐야 동대문 밖에서 살고 있다는 집안 어른 외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부모님 두 분 장례를 치를 때 만난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과 두 동생을 불러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겼던 그 친척 어른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후, 이른 아침에 내은이는 만복이를 찾았다. 

주인아씨가 찾는다는 말에 마당을 쓸어놓고 장작을 부엌으로 나르고 있던 만복이가 냉큼 뛰어왔다.

“아씨. 찾으셨습니까요?”

“그래. 네가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

“어디요?”

내은이가 내미는 서찰 꾸러미를 받아 들고 만복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었다.

“너…… 동대문 밖 답십리에 산다는 그 친척 어른 혹시 생각나느냐? 부모님 두 분 장례식에도 다녀가신……” 

“아…… 예…예…… 아씨. 생각납니다요. 그…… 약간 키가 크고…… 그런데…… 그 어르신은 왜요?”

내은이의 말을 듣자마자 기억을 떠올린 만복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맞다. 기억하는구나. 네가 급히 좀 다녀와야겠다. 내가 집안일로 급히 의논드릴 게 있다고 전하거라. 다녀가실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내가 찾아뵙겠다고 전하거라. 이 서찰을 보여드리고 답을 받아서 와야 한다.”

“아, 예. 아씨. 준비해서 바로 출발할게요.”

“예서 한 시오리길 쯤 되니 지금 가면 오후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야. 조반은 먹었느냐?”

“예. 그럼요. 그럼 준비해서 오겠습니다요.”

만복이는 잽싸게 행랑채로 가서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눈치 빠른 연지가 부엌에 들어가 주먹밥과 물이 든 표주박을 챙긴 괴나리봇짐을 들고나와 만복이에게 건넸다. 

만복이는 내은이에게 서찰 꾸러미를 받아 보자기에 둘둘 싸서 괴나리봇짐에 깊숙이 넣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요,”

만복이가 문을 나서며 씩씩하게 말했다. 내은이는 어린 동생의 댕기 머리를 만지면서 웃었다.

“그래. 어르신께 정중하게 안부 전해드리고…….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해가 넘어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뜀박질에는 자신 있습니다요. 헤헤헤……”

만복이는 웃으면서 내은이를 안심시켰다. 

내은이와 두 동생, 연지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만복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젊은 청년의 몸놀림은 날렵하고 빨랐다. 

만복이는 손을 흔들며 골목길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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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전경


“아씨. 아기씨. 모두 점심 드세요.”

연지가 부엌에서 상을 들고 마루로 올라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랑채에서 두 동생과 바느질하던 내은이는 동생들을 데리고 마루로 나왔다. 

며칠 전에 과주에서 가노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와 다녀간 뒤로 음식이 제법 풍성해졌다. 간단하게 차린 음식이지만 이전에 비하면 반찬거리가 많아졌다. 

점심을 먹은 두 동생이 다시 마당으로 놀이하려고 깔깔거리며 뛰어나갔다.

연지가 부엌에서 숭늉을 들고 와서 내은이 앞에 놓았다. 내은이가 그릇을 잡고 호호 불며 입으로 가져갔다.

“드셔보세요. 구수해요.”

“정말 구수하네. 잘 끓였구나.”

내은이가 그릇을 놓고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근데 아씨. 저……”

연지가 말을 하려다 머뭇거리자 내은이가 되물었다.

“뭔데? 궁금한 게 있어?”

“아, 예. 저…… 지난번에……”

“응? 지난번에 뭐?”

“실구지가 아씨에게 드린 말씀이 뭔가…… 해서요.”

“아… 그거?”

내은이가 하던 숟가락을 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우리더러 과주로 내려오라고 하더구나.”

“예? 과주로 내려오라고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연지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세를 고쳤다. 내은이는 그날 실구지가 자기에게 한 말을 그대로 연지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았다. 혹시 좋은 의견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사실 내은이는 실구지가 제기했던 문제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의 멍한 상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물리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자기로서는 해결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은이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연지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입을 손으로 가리며 다물지 못했다.

내은이가 밥상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접시에 담긴 약과를 하나 집어 연지에게 건넸다.

“연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만약 우리가 과주로 내려오지 않으면 다 도망가겠다는데…… 걱정이구나. 이런 일을 의논할 가까운 친척도 없고…… 그래서 생각 끝에 만복이를……”

내은이가 건네는 약과를 두 손으로 받아 들면서 연지가 말했다.

“아하. 그래서 만복이 더러 답십리로 다녀오라고 서찰을 써서 보내셨군요. 어쩐지……”

“그래. 의논할 친척이라고는 답십리에 사는 그 어른뿐이구나. 그래서 생각 끝에 편지를 썼다. 바쁘지 않으면 좀 와주셨으면 좋겠는데……”

연지가 고개를 끄떡이며 내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암요. 아씨. 오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은이가 잎으로 다가앉아 손수건으로 연지의 눈가를 닦고 안아주었다. 내은이도 연지를 안고 함께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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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찰


오후 늦은 시각에 만복이가 돌아왔다.

만복이가 돌아왔다는 연지의 고함소리에 내은이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마당 한 가운데 땀으로 흠뻑 젖은 만복이가 웃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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