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사건(제5화(3회))

신분 상승을 노린 지능적인 성폭행
기사입력 2025.03.1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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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밤하늘

 

“아씨. 다녀왔습니다요.”

만복이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은이가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다그치듯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어르신은 만났느냐? 서찰은 전했고? 그래…… 뭐라 하시더냐?”

내은이가 만복이 앞으로 다가서며 쉬지 않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아…… 예. 아…… 그러믄요. 마침 어른이 안 계셔서 기다리느라 좀 늦었구먼요. 서찰을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읽어보시더니 알았다고 했습니다요. 가족들과 의논을 좀 해보고 내일 아침 일찍 오겠다고 하셨습니다요…….”

만복이도 덩달아 마음이 급했던지 쉬지 않고 대답했다. 만복이가 잠시 뜸을 들이자, 부엌에서 냉수 한 바가지를 들고나와 잠시 우물쭈물하며 서 있던 연지가 만복이에게 물바가지를 건넸다. 

“물 좀 마셔……. 땀도 좀 닦고……. 애고 적삼도 다 젖었네.”

연지가 만복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오. 그래. 고맙구나. 오신다니 다행이다. 수고했다. 좀 쉬거라. 옷도 좀 갈아입어야지. 연지야. 만복이 시장하겠다. 뭘 좀 준비하거라.”

내은이는 연지에게 만복이의 먹을 것과 씻을 물을 데우라고 말했다. 내은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지가 만복이 손을 잡고 행랑채 부엌으로 끌었다. 연지는 이미 물은 다 데웠고 먹을 것도 미리 준비했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씨. 그럼……”

만복이는 연지에게 등을 떠밀려 행랑채 부엌으로 향하면서 웃었다. 모처럼 집안에 웃음이 가득했다.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자 어둠이 깔리고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밤이 되자 내은이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멀리 한강을 내려보았다. 서리가 내리고 입동(立冬)을 앞둔 날씨는 제법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잠긴 한강은 고요했다. 강 너머로 멀리 군데군데 불빛들이 깜빡거렸다. 

저 불빛을 따라 멀리 하늘과 맞닿은 산 남태령을 넘으면 거기가 바로 과주가 아닌가. 어둠에 싸인 남태령 위로는 은하수가 눈부시게 빛났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 동쪽으로는 반달이 마당 행랑채 입구에 서 있는 느티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별똥별이 여러 차례 은하수를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밤공기가 점점 차갑다는 느낌이 들자 내은이는 안방으로 들어왔다. 

 

어린 두 동생은 곤히 잠들어 있다. 내은이는 동생들을 보면서 다시 부모님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은이는 동생들 옆에 누워 차례로 뺨에 입맞춤했다. 

동생들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뒤틀어 돌아누웠다. 이불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촛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순간 놀라 멈칫하던 내은이는 상체를 일으켜 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든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면서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직 어린 소녀의 생각으로는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나 힘들었던 며칠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뭔가 해답이 나올 것이다. 

내은이는 잠자리에 누워 부모님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도와달라고 빌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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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의 신정부는 1394년 11월 21일부로 한성(漢城)을 새 국가 조선(朝鮮)의 수도로 지정했다. 

이어서 1395년 6월 6일, 한양부(漢陽府)에게 속하고 있던 지역을 한성부(漢城府)와 양주군(楊州郡)으로 분리, 개편했다. 수도인 한성을 관할하는 관청으로는 한성부(漢城府)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설치된 한성부는 1910년 10월 1일, 일제에 의해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기 전까지 만 515년 동안 조선의 수도로 기능하며 존속한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되자, 서울로 개칭되고 특별자유시가 되었다. 다시 1949년에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수도이자 특별시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은 고려시대까지 ‘한양(漢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한성부로 분리되어 설치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종래의 관습대로 ‘한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사람들 사이에 이미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려 오고 있었다. 

 

당시 한성부는 전주부(全州府), 경주부(慶州府), 평양부(平壤府) 등 다른 부(府)와는 달리 특정 도(道)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서, 상위 행정구역을 두지 않았다.

한성부를 다스리는 관리는 정2품의 품계를 가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었다.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한성부판윤이라는 관직은 조선 초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가, 1466년(세조 12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567년(명종 22년)에 판윤(判尹)으로 격상되었다. 

본래 부윤(府尹)은 종2품이었는데, 한성부는 국가의 수도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판서(判書)와 격(格)이 같은 정2품에 놓았다. 서울특별시장이 광역자치단체장임에도 불구하고 1961년부터 다른 광역시장이나 도지사들과 같은 차관급이 아닌 장관급으로 대우를 받는 것과 같은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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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북촌. 양반과 관료 등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았다.

 

한성부의 전신은 고려 남경(南京)이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입지가 워낙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문종은 양주목(楊州牧)을 남경으로 격상하여 고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로 삼고, 오늘날 청와대 자리에 남경의 별궁을 지었다. 


공민왕은 남경을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고 천도를 추진하면서 강력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갑자기 피살되는 바람에 그의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후 1382년(우왕 8년)에 잠시 한양으로 천도했지만, 이듬해 다시 개성으로 되돌아갔고,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한양으로 천도했으나 이듬해 또다시 개성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은 다시 수도로 낙점되어 1394년 11월 21일에 천도를 단행했다. 그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부를 옛 수도였던 개성부(開城府)의 전례에 따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옛 양주(楊州)를 한양에서 분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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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칠패시의 모습. 역사풍속화가 혜촌 김학수 화백이 고증 자료를 모아 조선시대 숭례문 밖 칠패시 모습을 재현한 그림(1994년)

 

이에 따라 한양도성은 5부 52방으로 나누었다.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현(高陽縣)과 양주군(楊州郡)으로 각각 편입시켰다. 즉, 오늘날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고양군에, 동쪽은 양주군에 편입시켰다.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두었다.

그러나 정종이 즉위한 직후 다시 개성으로 환도했으나, 2년 후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426년(세종 8년)에 보고된 인구 통계에 의하면, 한양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다. 

조선 건국과 함께 개경에서 이주해 온 혁명의 핵심 세력들은 도성 안에 자리를 잡았고, 원래 성안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은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상경한 사람들이 성 밖 주변에 정착하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성 밖에 상주하는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도성 내부를 드나들면서 자기 출신 지역의 특산품 등을 가지고 와서 파는 등, 활발하게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긴 세월 동안 수도 서울은 오늘날과 같은 국가 중심의 경제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도성 안에는 당시 개천(開川)이라 불리던 청계천이 동서로 관통하면서 흘렀고, 성 밖에서는 중랑천, 만초천, 홍제천, 불광천 등이 흘렀다. 특히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금의 성동구 일대는 토지가 비교적 비옥하여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한성부의 식량을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도성 내부에 사는 양반들은 3개 지구에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은 그 방향에 따라 각각 북촌(北村), 서촌(西村), 남촌(南村)으로 불렸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서 지금의 삼청동과 가회동 일대였고, 서촌은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동쪽의 사직동, 즉 청운과 효자동 일대였다. 남촌은 청계천 이남에서 남산 기슭에 이르는 곳으로. 이 지역은 오늘날에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의 종로는 육의전(六矣廛)이 형성된 성안의 중심지로서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렸다. 

숭례문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지금의 서소문 밖에는 ‘칠패(七牌)’라고 불리는 난전(亂廛) 시장이 설치되었다. 이 시장의 설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때부터 이현(梨峴)과 종가(鍾街, 종로)와 함께 서울의 가장 큰 상업중심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칠패에서는 시전(市廛)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건어물이나 농산물 등을 팔던, 지금으로 따지면 농수산물 시장이었다. 그중에서 어물전(魚物廛)이 가장 규모가 크고 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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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동산 매매계약서(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명문(계약서), 초사(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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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부동산 매매계약서(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소지(신청서) 


이 시장은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다가 6.25 전쟁 이후에는 구호물자 등을 파는 곳으로 바뀌었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날 남대문시장이다. 지금도 숭례문에서 염천교 가는 길에는 ‘칠패로(七牌路)’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성 밖에는 왕십리(往十里) 일대의 상권이 컸다. 이는 강원도나 청도 충주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품들이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치는 곳이었는데, 이런 이유로 왕십리에는 상인 계층이 많이 살았다.

만복이가 심부름으로 다녀온 답십리는 왕십리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다. 지금은 전농로, 천호대로, 사가정길 등의 도로가 지나고 지하철 1·2호선을 연결하는 신답역이 있어서 교통이 좋은 편이다. 답십리의 남쪽 대로변은 자동차 부품 종합상가가 있어 번화하며, 천호대로 변에는 고미술 상가와 상공회의소 동부지소, 농수산물 종합직매장, 동부시장 등이 있다.

 

‘답십리(踏十里)’라는 명칭은 여러 가지 유래설이 있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도를 정하려고 도성에서 10리 떨어진 이곳을 밟았다는 전설, 즉 동대문(東大門)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하여 왕십리(往十里)와 같은 의미로 답십리(踏十里)라 하였다는 설이 그것이다. 

또, 청계천 하류인 이곳은 들(논)이 10이 벌이나 될 정도로 넓어 답십리(畓→踏十里)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농사를 가장 중시했던 조선시대에는 국왕(國王)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농민들의 고통을 체험코자 이곳에 이르러 논둑을 밟으며 모내기를 했기 때문에 답십리(踏十里)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정작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답십리에 사는 친척 어른이 찾아온 것은 만복이가 다녀온 이틀 후의 일이었다. 

“아씨. 아씨. 얼른 나와 보세요. 답십리 어르신께서 오셨습니다요.”

“뭐…… 뭐라고? 오셨다고?”

마당을 쓸고 있던 만복이의 고함소리에 놀란 내은이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나왔다. 내은이는 마루를 내려서며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허둥거렸다. 이제나저제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상 친척 어른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은이는 바느질하던 일을 내던지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마당에는 답십리 친척 어른 내외분이 웃고 있었다. 내은이가 두 손을 안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내 기별을 받고 바로 왔어야 하는데 일이 있어 좀 지체했구나.”

답십리 친척 어른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내은이 곁에 서 있는 어린 두 동생의 손을 차례로 잡았다. 부인은 내은이의 손을 꼭 잡으면서 손등을 두드렸다. 순간 내은이는 콧등이 시큰거리는 걸 느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세 사람은 내은이가 안내하는 대로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섰다.

“연지야. 어서 다과를 좀 내오거라.”

내은이는 마루로 올라서면서 연지에게 말했다. 연지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재빨리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좌정한 친척 어른 내외를 향해 내은이는 두 동생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

간단한 찻상이 나오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은 후, 내은이는 친척 어른을 집으로 모신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추석이 되어 과주에 있던 노비 실구지 일행이 여느 해처럼 수확한 농작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실구지가 내은이에게 던진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간의 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침을 달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사실 실구지가 내은이에게 던진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가 말하는 태도는 거의 협박에 가까워 너무 무서웠다는 점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어린 나이에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소녀로서는 세상 물정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자신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도 고백했다. 

“그랬었구나. 흐음…… 마음고생이 많았구나.”

내은이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어른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은이가 말하는 중간중간에 가끔 헛기침하기도 하고, 눈을 크게 뜨기도 하는 등 그의 얼굴은 많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부인도 내은이가 말하는 동안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연신 혀를 차곤 했다.

“사실…… 서찰을 받고 많이 놀랐다. 과주의 아랫것들이 발칙하기가 이를 데가 없구나. 주인어른이 안 계신다고 해도 어찌 너희에게 그리 행동한단 말이냐? 허…… 이런 고얀 것들 같으니라고.”

 

내은이는 자기 말을 귀담아들어 주는 친척 어른 내외가 정말 고마웠다. 그녀는 찻잔에 찻물을 채우고 소매를 들어 눈가를 닦았다. 참으려고 애써도 눈물이 자꾸 나오려고 하는 걸 참고 있었다.

“내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친척 어른은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그는 지금 내은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내은이가 식솔들을 데리고 과주로 이사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만약 이사를 결정하면 지금 살고 있는 이 판서 댁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판단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정확했다. 문제 해결의 순서는 먼저 과주로 이사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사를 거부한다면 과주의 토지와 노비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하면 된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단추인 셈이었다.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당장 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 계절도 겨울로 접어들고 농한기가 되었으니 내년 봄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친척 어른은 내은이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 해결방안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동지(冬至)도 한 달 이상이나 남았으니 그때까지 방안을 여러 각도로 충분히 생각하고 난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자는 것과, 그때까지 자신은 내은이가 살고 있는 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친척 어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은이는 비로소 뭔가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일들이 이제 비로소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친척 어른은 내은이에게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과주의 토지, 노비문서 등을 보여달라고 했다. 내은이는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문서들을 꺼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문서이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문서들이었다.

친척 어른은 비단 보자기를 열어 문서를 방바닥에 펼치면서 지필묵을 내오게 했다. 내은이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꼼꼼하게 한지에 문서 내용을 요약해서 적으면서 말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만약 팔아야 한다면 그 토지 규모를 알아야 가격을 가늠할 수 있다. 과주의 토지 내용도 알아야 대비할 수 있고……. 요즈음 한양도성 안에 사람이 많이 늘어나서 집값이 많이 오른다고 하더구나. 그동안 나는 집주릅에게 부탁해서 시세도 알아보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해결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동지가 지나고 설밑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방안을 마련해 보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은이는 연지에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음식을 내오게 했다. 시간은 벌써 점심때가 되고 있었다. 

 

조촐하지만 제법 정갈하게 준비한 밥상이 들어왔다. 친척 어른 내외는 점심을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동안 절간처럼 조용하던 집안에 모처럼 사람 소리와 함께 간간이 웃음도 터져 나오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찻상을 물리고 난 다음 친척 어른이 일어났다. 그의 부인은 내은이와 어린 두 동생의 손을 잡으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모두 좋게 해결될 거라고 위로했다.

내은이와 두 동생은 친척 어른 내외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친척 어른은 내은이에게 어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새로 옮겨온 한양도성에 인구를 유입시키기 위한 묘안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 왕조의 중심지였던 개경의 토호들을 끌어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한양이 새 왕조의 도성이자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관료 세력의 협조가 필요했다.

 

조선왕조 개국 초기에는 한양도성의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종래의 수도였던 개경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을 신도시 한양으로 유인하기 위한 달콤한 유인책이었다. 

태조 4년(1395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장지화(張至和)라는 관리의 상소를 받아들여 신분에 따른 집터의 규모를 새롭게 정하고 그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따르면, 정1품의 집터를 35부로 정하고 한 품에 5부씩 내려 6품까지 10부를 주도록 결정했다. 일반 서민에게도 2부의 토지를 주었다.

 

1부는 조선시대 면적의 단위인데,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33㎡ 정도로 약 40평에 해당한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정1품은 약 4,655㎡(약 1,410평), 일반 백성은 약 266㎡(약 80평) 규모의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부동산 거래가 시작되고, 오늘날의 공인중개사에 해당하는 직업 또한 등장한다. 바로 ‘집주릅’이라는 이름을 가진 직업이다. 이들은 집 소개는 물론이고, 계약서와 도면 작성 등 부동산과 관련한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지금도 자주 그런 사건이 일어나듯이 당시에도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한양으로 이주하려는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어나니 한양 집값 역시 폭등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자연스럽게 물가의 인상과 연동되었다.


한양도성 안에서 봉직하던 관리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 대부분 가족을 도성에 남겨두고 본인만 발령지로 가서 조정에서 제공하는 관가 혹은 친척 집에 기거했다. 만약 임지로 부임할 때 집을 팔았다가는 다시 돌아올 때가 되면 다시 사대문 안에 집을 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부동산 가격 상승이 녹봉 상승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저잣거리에서는 ‘한 번 사대문 밖으로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았다.

이런 현상은 조선왕조 내내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도 이런 내용을 문집에 글로 남길 정도였다. 

“앞으로의 계획은 오직 한양으로부터 10리 안에서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해 한양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한양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한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서울 문밖에서 몇십 리만 떨어져도 태곳적의 원시사회 같은데 하물며 먼 시골은 어떻겠느냐?” …(중략)…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 가버린다면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뿐이다.”


어느새 동지가 지나면서 한겨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내은이는 연지와 만복이에게 여러 가지 의견을 물어보면서 저잣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수집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 방면으로 궁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주의 토지를 관리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실구지의 말대로 이사를 하는 수밖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실구지가 말한 대로 정말 노비들이 자기와 토지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그 이후에 닥칠 일들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무 겁이 났다.

 

설이 다가오면서 조바심은 더 커졌다. 이제 곧 봄이 오고 농사지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과주의 아랫것들의 동향도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이제 뭔가 결정해야 하는데 마음만 급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답십리의 친척 어른으로부터 그동안 알아본 내용을 가지고 방문하겠다는 서찰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얼마 전에 내린 눈을 깨끗하게 치워놓은 마당으로 친척 어른 내외분이 웃으면서 들어섰다. 

서찰을 받고 미리 음식을 장만하고 있던 내은이는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설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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