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산문] 1871영해+울진동학혁명이야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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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최초의 울진동학 관련 이야기를 95년도에 울진지역신문에 짧게 기사화한 바 있다. 그리고 울진뉴스(대표, 김흥탁)지에 2020년 12월호에 풍경이 있는 산문을 연재하면서『울진과 동학교도, 대동세상을 꿈꾼 사람들』주제로『울진동학지도자 전의철, 남두병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란 글을 썼다. 이후 2023년 2월호부터『1871영해+울진동학혁명』이야기를 연재한 지 2년이 되었다. 글의 제목도 바뀌었다. 처음은『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19회를 연재하고 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왔다.
혹자는『1871영해동학혁명』은 울진과는 별개인 그쪽 영해 이야기가 아니냐는 문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 동학혁명의 주도자로서 울진 쪽의 동학도였던 남두병, 전의철 등이 깊숙이 관여했다. 여기에는 울진의 주요가문이었던 남씨, 전씨, 황씨, 김씨 등의 친인척들과 적게는 수십에서 백수십 명의 울진 동학 민중들이 참가하여 백십 수명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영해혁명 결과 조선 정부에서 처벌받아 자진, 물고, 효수, 교전 사망, 능지처사, 교형 등으로 사망한 사람만 90여 명이고, 중형으로 유배된 사람도 24명에 이른다. 총 116여 명이 희생되었다. 평해·울진 지역 사망자도 13여 명이다. 총 30여 명이 처벌받았다. 영해부 관아 공격 시에는 동학도 5백여 명이 참가했으나 이후 조선 정부의 진압과 탄압으로 퇴각 과정에서 각자도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도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는 글의 마무리 부분과『1871영해동학기념사업회』의 임원과 대담을 실었다. 기념사업회는 2020년 11월 창립되어, 그간 수차례 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동안 학회에서는 영해동학의거를민란, 변란, 병란, 소요, 혁명 등으로 이름하였다. 하지만 2024년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연회와 기념비 제막식을 계기로 민란, 병란 등에서 영해동학의거는『혁명』이다. 라는 개념을 대중들에게 선포하여 인식의 지평을 열게 하였다. 이것이 기념사업회의 또 하나의 작은 실적이지만 큰 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영해혁명은 국내 최대급 희생자가 난 동학 탄압사건이다.
1871년 3월 10일 밤 영해 관아를 일시 점령했던 동학도들은 이튿날 11일 오후 3시경 퇴각했다. 이들은 퇴각하면서 지도부는 영양 방향으로, 일부는 평해 울진 방향으로, 또는 경주 방면으로 각자도생했다는 것은 지난번 이야기에서 기술한 바 있다. 이후 신미아변시일기에 따르면 도유사 남유진)은 영해부 관아의 침탈 소식을 듣고 각 향리에 통문을 보내 자체적으로 토벌계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영해 유림에서는 각 향리의 젊은이들을 소집, 무장시켜 관군과 함께 동학군 검거에 나섰다. 3월 14일에는 관군이 대구 감영에서 출동하여 동학도 색출 등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영해 유림 측에서 170여 명, 관군이 500여 명이 동원되어 토벌 작전이 실행되었다고 한다. 이 검거 작전에는 5개월간이나 계속되어 동학도에 대한 탄압과 색출이 병행되었다.
3월 21일, 조선 정부는 박제관 안동부사를 영해부 안핵사로 삼아 안동진에 국청을 설치, 운용하여 영해, 청하, 평해, 울진, 영양, 영덕, 청송, 경주, 밀양, 삼척, 전라도 남원 등지에서 체포된 수백 명의 동학도는 가혹한 심문을 당했다. 6월 24일에는 이들 동학도에게 형량이 다음 표 1과 같이 결정되었다.
도올 선생의 저서 동경대전에 따르면 처벌자는 자진 1명, 물고(고문치사) 12명, 효수 29명, 중형 정배 24명)으로 총 66명이다. 하지만 필자가 교남공적, 적변문축 등의 자료에 따라 조사한 결과 자진 1명, 물고 28명, 효수 35명, 교전 사망 25명, 능지처사 3명, 중형 정배 24명이다. 따라서 처벌자는 총 116명이다. 당시 국내사건 중 최대급 희생자가 난 사건이었다. 수배자도 32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물고자(28)가 효수자(38명) 다음으로 많았다. 물고는 고문치사로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가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1871영해동학혁명은 국내 최대급 희생자가 난 동학 탄압사건이었다.
표 1. <1871년 영해동학혁명 관련 처벌자 수)>
1871년 영해동학혁명 이후 1894년 영해에는 무슨 일이?
우리가 알다시피 동학하면 대체로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이 일으킨 동학혁명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23년 전에 1871년 3월 10일(음) 영해에서 동학 역사상 최초로 동학도들이 주축이 된 1871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났음을 최근 들어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상 1894년 동학혁명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동학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당대 정치, 사회 구조변혁은 물론는 외세에 압박에 대항한 조선 민중의 거대한 항거였다. 이는 세계사와 우리 민족사의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였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거론하지 않고는 안되는 역사 통과 의례와 같다. 그런 까닭으로 23년 후 일어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거론할 때 1871년 영해동학혁명은 그 위의 연장선에 있다. 1871영해동학혁명은 1894동학농민혁명의 그 선구자 역할을 한 셈이다. 따라서 최초의 동학혁명의 시발지는 영해이다.
그렇다면 1894년도에는 전라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동학 이념으로 무장한 농민들이 교조신원, 보국안민을 기치로 들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다시 영해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1871년 영해혁명으로 동학도들은 조선 정부의 5개월간에 걸친 수색과 탄압 등으로 궤멸을 당했고, 지도부는 깊은 산골 오지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영해 출신의 혁명 관련 동학도들은 유림 등 양반 가문에서 족보에도 등재하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그들은 인척들에게는 가문을 불명예스럽게 한 불한당이요, 나라에서는 중죄인으로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태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봄이 되면 싹이 틀 수도 있지만, 인간사회의 정치적 편 가르기는 곧바로 회복되기는 어렵다. 당시 신분제가 폐지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소안동을 자처하는 영해에서도 양반이나 유림은 지역사회 좌지우지하는 기득권으로 최고 권력층이었다.
한편 영해 유림 등 양반 사족들이 1871년 영해동학혁명후 초기 수습 과정에서 관아에 들어가 임금의 위패를 이관, 보호하고 부사 이정의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등 조치는 초기에 동학군 진압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지역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왕조로부터 지역에서 기득권을 보장받고, 지키기 위한 눈치 빠른(?) 조처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이 영해부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린 뒤 이틀 뒤 물러나자 곧바로 관군과 합동 토벌에 들어간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1871영해동학혁명 이후 영해를 비롯한 북부 평해, 울진 등지에서는 동학도의 씨가 마를 정도로 동학 도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동학에 대한 신망이나 표현이 들키거나 탄로 나면 곧 역적이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동학과 동학도를 바라보는 생각을 신미아변시일기에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빙탄 관계였다.
『이와 같은 흉적들은 결단코 체포하여 전멸시킨 뒤에야 끝날 것이오. 무릇 우리는 이들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으로서, 모름지기 각기 心力을 다해 사람마다 죽창 한 자루 쥐고 식량으로 각각 닷 되의 쌀을 휴대하여, 내일 새벽에 일제히 府中으로 와서 기다리다가 지휘를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동학도들을 진압 후 축하잔치를 벌이고 축하하는 기념으로『신미동학시 영해수호에 관한 시첩』을 남겼다. 필자도 읽어 보았는데 동학군을 궤멸시키고 영해부를 보존한 공을 칭송하는 시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지역 유림들이 탐관오리 이정의 충성심을 기리고 조선왕조에 대한 아부와 충성이 담긴 시첩이었다.
하지만 23년이 지난 1894년도에 영해에도 민중들의 작은 봉기가 있었다. 최근 발표된 동학연구자 신운용 박사 논문)을 참고하여 간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1898년 8월 23일 자 승정원일기에 영해부 봉기 사실이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계화된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방금 받아보니 영해에 민란이 또 일어나 본관(영해부사:필자 주)을 끌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무슨 연유로 격변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성들의 습성이 완악하고 도리에 어긋난 것이어서 너무도 놀랍고 통탄스럽습니다. 이 문제는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영남 선무사 이중하를 안핵사로 겸차하여 우선 해당 고을에 가서 조사해 등문하게 한 다음 품처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대해 임금께서 계자인을 찍었다.
이 승정원일기에서 보듯이 1894년 8월 23일 자 기록이다. 정확한 일자는 미상이다. 같은 해 음력 7월이다. 주도자는 남응복, 박경분, 권용평 등이다. 봉기에 참가한 사람 수는 미상이다. 봉기의 발단은 승정원일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생략) 이번 영해부 백성들의 집단 청원은 오직 결가(結價)를 줄여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서 여러 날을 버티다가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려 하는 데 느닷없이 쫓아가 체포하자 완악한 마음이 북받쳐 드디어 관장을 들어다 내버리는 변고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하생략)
결국 농민들이 토지에 매겨진 과도한 세금 부담을 내려달라는 청원을 관장인 영해부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감액 요구가 관철되어 봉기가 끝난듯하였다. 하지만 가혹한 형벌을 일삼는 부사 김헌수와 하급 관리인 전곡을 담당하는 신쾌한의 부정에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조정에 보고서를 올린 안핵사 이중하는 부사 김헌수뿐만 아니라 하리(下吏) 신쾌연도 함께 지목하였다. 영해 봉기의 주요인은 과중한 세금부과와 관리의 폭정이었다. 당시 영해부사의 과도한 세금부과와 폭정, 하급 관료들의 부정 축재였다. 1894 영해 봉기는 안동봉기가 일어난 8월 22일 이전에 일어나 10월 무렵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약 3개월간 집요하게 전개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영해 봉기 주도자 남응복, 박경분, 권용평은 형벌을 처분받아 원지에 유배되었다. 지금까지 이들의 행방은 미상이다.
1871영해동학의거 기념사업회 관계자와 함께(2025. 1. 30.)
도올 선생이 쓴 기념비석 전문
1871영해동학혁명은 피눈물이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른바『영해동학혁명』는 1871년 3월 10일(양 4월 29일) 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 7주기 순도일을 맞아 동학교도, 비교도(농민, 지식인) 등 5백여 명이 최제우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 척결 등을 대의명분으로 영해부 관아를 16시간 정도 점거하였던 사실을 말한다. 최시형을 비롯하여 이필제, 박사헌, 강수, 김낙균, 남두병, 전동규 등이 주도하였다.
『1871 영해·울진동학거사』는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동학도 입장은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과 지방 관리의 탐학을 척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하늘같이 모셔야 한다는 천부인권적 동학의 시천주 사상과 백성은 임금을 하늘같이 섬겨 충성해야 한다는 노예적 불평등 사상이 맞부딪친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 이 거사로 조선왕조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봉건 신분 질서 파괴, 평등의식 고양 등 민중들의 주체적 의식 자각이 싹틈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를 좌도난정左道亂政으로 규정, 관련자를 색출, 모질게 탄압하였다. 이 결과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00여 명 이상이 처형, 고문 등으로 사망했고, 30여 명이 징역, 유배 등으로 백수십 명이 희생당하였다.
일시적으로 영해 거사는 실패했지만, 그 불씨는 1894년 동학혁명으로 치달았다. 1817 영해동학거사는 23년 후 1894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후 동학 관련 신봉자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 3.1운동과 중국 등지에서 조국 해방을 위한 일제와 투쟁한 독립운동의 주역이었다. 1871년 영해울진동학도의 일부 후손들도 그 후 의병, 독립운동 활동 등으로 조국광복의 제단에 몸 바쳤다. 이들 애국선열이 있었기에 오늘 대한민국이 존재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역사는 사람이 만들고, 그 역사가 살아 움직일 때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의 영해·울진동학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 역사는 과거를 비추어 현재와 미래를 밝혀 다시는 이와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는데 있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가 오기까지 역사의 진보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 있다. 조선 후기 우리 역사에서 동학이 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1894년 동학혁명은 지난 2019년 2월,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 공식 기념일(5월 11일)로 제정하여 그들의 역사적 업적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따라서 천도교 등에서는『1971 영해·울진동학 거사』관련한 희생된 동학도와 민간인들에 대한 명예 회복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 또한 천도교 등에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최초로 2024년도에 공식으로 문서화하여 천도교 중앙본부에 제기했으나 문제 해결에 관한 뚜렷한 공식 해답은 없었다.
둘째, 비록 영해부를 16시간 점거 또는 길게는 2일 천하로 끝이 났지만,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격동하는 조선말의 사회변화 모습을 보여주는 역동적 과정이었다. 지금에 와서 이 사건의 성격을 두고 적변, 민란, 병란, 혁명, 변혁운동 등으로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 계급의 저항인 것은 틀림없다.
또 하나는 의거 과정에서 이필제의 대의명분이었던 교조 신원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이 거사의 성격 규명에 걸림돌로도 작용한다.
지금까지 영해동학거사와 관련 학술 대회개최 수회, 3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영해동학거사에 대한 학계 공통분모의 성격 규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건과 관련 최근 군지 등에서 이필제의 난. 영해 민란 등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영해동학의거는 이필제가 주도했다고, 하나 최시형의 결단이나 동학교도라는 집단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셋째, 1817년 영해동혁명과 관련하여 현재 영해지역에서는『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공동위원장, 권대천)』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영덕군의 지원을 받아 학술대회개최, 형제봉 탐방로(답사길) 개설, 영해동학혁명일기념식과 추모 행사(양 4월 29일) 등을 전개하고 있다. 울진의 경우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 2022년 북면도서관 주최 동학 관련 향토사세미나가 1회가 있었다. 또한, 관심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동학 관련 공부, 생가 탐방, 후손 찾기 등을 제안하고 싶다. 한편 필자 개인 생각이지만 후손들이 중심이 된 합동 추모비 건립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넷째, 지난 2022년도에 영덕문화원에서 발간한 신미아변시일기와 신미동학시영덕수호에관한 시첩 발행은 향후 영해거사에 관한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관변측 기록 문헌인 적변문축, 교남공적, 천도교측 자료들이 함께 번역되어 나오면 더욱 좋을 것이다.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측에 따르면, 두 문헌은 2025년도인 올 4월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다섯째, 지금까지 영해 거사에서 울진쪽 인물(전의철, 남두병 등)과 거사에 참여한 동학교도가 아닌 일반 민중들의 참여 의도, 생각, 친인척 관계, 분위기, 후손들의 전승등 대한 분석으로 입체적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동학 정신은 그 당시에 하늘과 같이 동등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모두가 신분제에서 해방되어 평등의 가치를 누리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의 건설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 것 같다. 따라서 1871영해동학은 1894년의 동학 정신과도 맥을 같이하여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동학혁명은 투쟁과 저항 정신의 발로였다. 당시 동학이라는 이념으로 대동단결한 소수의 피지배층과 유학 이념으로 기득권층이 된 지배자에 저항한 조선 최초 민중들의 피눈물 나는 싸움이자 혁명이었다. 동학은 눈물이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계속)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와 대담
일시: 2025년 1월 30일. 금.
장소: 영해 김진기 고문 사무실.
대담/사회: 김진문(시인)
참석자: 김진기(고문, 전 경북도의원), 권대천(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위원장),
기록: 권태용(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사진: 김용록(기념사업회 미디어국장, 사진작가)
김진문 시인
김진문(이하 김): 제가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일상에 바쁠 텐데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이 대담의 취지를 잠깐 말씀드릴게요. 제가 『울진뉴스』라는 월간 잡지에 『풍경이 있는 산문』이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54회째 연재를 하고 있고요. 그 가운데 『1871영해+울진동학혁명이야기』를 18회째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면을 내어주신 울진뉴스(대표 김흥탁) 측에 감사드립니다.
동학 이야기는 이제 거의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동학하면 1894년도 전라도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일으킨 동학혁명은 대체로 알고 있는데요. 수운선생이 1860년 동학 창도 3년 후 조선 정부 탄압으로 순도했습니다. 동학의 인간을 하늘같이 대하라는 인권 중시와 평등사상은 당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좌도 난정으로 역적의 불온사상이었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 삼정 문란과 세도가의 부정부패 등으로 수탈당하는 일반 평민들에게는 구도와 같은 복음이었습니다. 수운 선생 순도 후 잠시 동학 전파가 주춤했지요. 왜냐하면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동학은 지하로 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동학초기에 영해는 동학 전파의 전진기지였습니다. 이후 1871년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보다 23년 앞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대의명분도 교조 신원 회복과 제폭구민이었습니다. 이것은 1894년도 동학혁명의 대의명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위원장 권대천)』가 창립되어, 동학유적지 탐방로 개설, 학술대회와 추모제를 여는 등 특기할 만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더구나 2024년도에는 영덕군이 지원하고 기념사업회가 함께 한 세계적인 학자인 도올 선생님을 모셔다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동시에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이를 계기로 1871동학혁명이 대내외적으로 민란이 아닌 혁명으로서 그 개념을 확실히 정립하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대담은 기념사업회가 그간 추진한 사업을 한번 뒤돌아보는 기회와 앞으로 그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이 역사적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후세들에게도 계승시켜 지역의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의식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도 있고 해서 대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영해동학혁명은 인접군인 평해, 울진 지역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해혁명에 평해, 울진 지역 인사들이 주도자로 개입했고, 울진 지역의 동학도가 다수 참여하여 전체 1백여 명의 희생자 중 울진인만 13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당시 혁명 주도자였고 고문치사로 희생당한 남두병 선생의 후손인 울진 매화 금매리의 남상균님이 참석했고, 기성 방율의 전의철 선생 후손인 전동철씨(대구 거주)는 개인 볼일로 참석지 못했습니다. 양해를 바라고요.
먼저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위원장님께서 인사 겸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대천 위원장
권대천(기념사업회 위원장): 제가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90년대 중반에 지역 어른들한테서 1871영해동학혁명(이하 영해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더랬습니다. 그러다 창수의 김기현 선생이 고향신문에 영해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했고요. 저도 영해 동학에 관심이 있었고, 제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몰랐던 게 더 많았습니다.
마침 영덕에서 좀 의식있는 사람들이 영덕 참여시민연대를 결성하게 되었어요. 제가 거기에 공동대표로 참여하면서『우리 지역에 역사적 대의를 가진 큰 거사가 있었는데 우리가 이걸 좀 규명해보자』라고 제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영덕 시민연대가 흔쾌히 좋다고 했고 또 현재 고문이신 김진기님과 뜻이 있는 분들과 함께『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게 됐습니다. 준비위를 결성하면서 형제봉에 가서 기념제를 지내고, 그 후부터 본격으로『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활동을 하게 된 거죠. 이후 학술대회를 했고요.
도올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성주현 교수님을 통해서였죠. 도올 선생님과 만남으로 강연회도 열고 했죠. 도올 선생님은 영해 동학혁명 모의장소인 형제봉 병풍바위에 한번 기행을 가고 싶다해서 2023년도에 2박3일 일정으로 영해에 오셔서 영해동학 관련 유적지가 있는 형제봉 병풍바위, 박사헌 집터, 영해 창수마을, 인천리, 관어대 등을 탐방했지요. 이후 기념비가 세워지고 도올 선생님을 통해 영해동학혁명이 새롭게 대외적으로 부각되고, 그 의미가 민란에서 혁명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도올 선생님이 작성한 기념비문에는 영해동학이 혁명으로서 개념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여 확고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 그다음 사무국장님이 영해동학혁명기념비를 제작·건립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말씀해 주세요.
권태용 사무국장
권태용(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저희도 기념사업회를 준비하고 2020년 11월에 창립을 합니다. 우리가 기념비를 세우기 전에 하나의 사업이 있었는데요. 그게 바로 1871년 영해동학혁명 유적지인 박사헌 집터, 병풍바위까지 가는 탐방로 개설이었습니다. 이 탐방로 사업비를 영덕군 주민 참여 예산제 공모에 신청, 확정되어 탐방로가 개설이 됩니다. 이게 개설되고 난 다음에 23년도 6월이나 7월경에 이제 상징적인 어떤 상징물이 없잖아요. 여기 병풍마을까지 사람들이 갈 수가 없으니까 영해지역에 왔을 때 뭔가 영해동학혁명을 알릴 수 있는 게 뭐냐? 고민하다가 기념비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제대로 된 기념비를 세워야 하는데 이제 세울 거냐 아니면 나중에 제대로 세울 거냐를 고민하다가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지금 하는 것이 낫다고 해서 주민참여예산제 공모에 참여했죠. 공모 결과 2023년 11월에 기념비 예산이 확정돼요. 그래서 2024년도 4월 29일, 추모제 때 기념비를 현재 영해 면사무소 앞 소공원에 건립하게 되죠. 그때 도올 김용옥 선생님을 포함한 전국의 동학 관련 단체와 그리고 지역민들과 함께 기념비 제막을 했습니다.
김: 주민참여예산 공모를 잘하셨네요. 작년 24년도에 도올 선생을 모시고 기념사업회가 주도하여 영해동학혁명기념비 제막식을 했습니다. 역사는 기억입니다. 이러한 역사 기념비 등은 후손들에게 역사를 상기시켜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미에서 아주 좋은 교육 표상물이죠. 그러한 뜻에서 1871영해동학혁명기념비 건립과 제막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먼저 김진기 고문님께서 한 말씀 하시죠.
김진기 고문
김진기(기념사업회 고문): 저는 뭐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만 이게 지역에서는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들인데 잊혀 가고 있었던 게 좀 안타까웠죠. 그래서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이 90년대에서부터는 이런 학술 연구를 하시는 분들 쪽에서는 조금 있었어요. 이게 논문으로도 나온 것들도 있었고, 그러다가 이게 뭔가 우리 젊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우리 영덕 참여시민연대가 앞서서 일을 시작했고, 같이 힘을 좀 합쳐서 하게 되었죠. 그리고 동학혁명 기준으로 근대사 얘기를 한다고 하면 그 중심이 어쩌면 우리 영해와 영덕이 되는 건데요. 그래서 이건 지역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을 했죠. 제가 한 것은 별로 없고요. 권 위원장, 권 사무국장, 김용록 위원 등 기념사업회 위원분들이 고생했지요. 지역주민들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고 앞으로 긍정적으로 될 것으로 봅니다.
김: 김 고문님이 선도 역할을 많이 해 주셨네요.
김용록 위원
김용록(기념사업회 위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사회적 역사적 관심도에서 1894년도 동학농민혁명은 많이 알려졌지만 1871영해동학혁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게 거의 없었잖아요. 그래서 도올 선생님이 참여하면서 이게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역사적인 어떤 의미랄까 전체적으로 재조명이 됐거든요. 그리고 지역사회 홍보도 되고, 지역 문화관광 쪽으로도 활용이 되고, 역사적으로 동학의 초기 확산 과정을 어떤 반증할 수 있는 연구 자료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민중 저항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그런 사례도 되고요. 더구나 기념비 건립은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어떤 교육 자료도 될 수가 있죠.
권대천: 지금 지역 사람들이 주면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가도 막상 세워놓고 나니까 적은 예산으로 이 정도의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워하고 또 도올 선생님이 쓴 비문도 좀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해요. 모 군의원은 주민참여 예산제의 가장 모범적 사례라고 하면서 격찬을 해요.
김진기: 그렇죠. 기념비가 세워짐으로 가장 큰 의의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주민들이 근데 무슨 최초의 동학 기념비에 이거 뭐지? 이래서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냥 1894년 전봉준 동학은 알아도 최초 1871년 동학혁명 발상지가 우리 영해라고?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이렇게 해서 이제 이렇게 많은 관심을 지금은 가지고 있다고 봐요. 저희가 이거 3천만 원으로 시작을 할 때도 일부에서는 반대도 했어요. 아니 3천만 원 가지고 조그맣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큰 의의가 있는 기념비라면 남들이 보더라도 거창하게 국가 예산이라도 받아서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기념사업회에서는 그래도 작게라도 처음 시작하고 난 뒤에 알려지고 나면 그게 힘이 돼서 나중에 더 크게 할 수도 있고 해서 시작을 하게 된 겁니다.
김: 영해동학혁명과 관련하여 당시 가혹한 처벌로 116명(자진 1, 물고 28, 효수 35, 교전 사망 25, 능지처사교형 3, 중형과 정배 24)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조선 역사에서 역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필자가 2023년 12월에 천도교 중앙본부에 문제 제기를 했는데요. 당시 교령이 직접 필자에게 전화가 왔길래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 말씀이 유족을 중심으로 증거자료를 갖추어서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이후 천도교 측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답변이 없습니다. 조선 정부로부터 가혹한 탄압과 처벌을 당한 이분들을 이제는 신원 복원(명예회복)을 시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상균씨(남두병 선생 후손)
남상균: (1871영해동학혁명 주도자인 남두병 선생 후손,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거주) 그런데 그 부분을 지금 천도교에서는 일단은 처음부터 영해 거사를 처음에 반대했지 않았습니까? 어떤 이유든간에 지금에 와서 그런 부분들이 해소가 되고 했겠지만, 그 당시에 희생된 분들이 울진만 해도 13분이다. 천도교에서 그분들한테 어떤 사면을 해준다고 할까요, 저는 그거 힘들다고 봐요. 이거는 후손들이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유족이나 안 그러면 기념사업회라든지 이런 쪽에서 시작이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요.
김: 시작은 누가 하든 좋은데 그분들의 명예 회복을 시켜야 하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걸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유족 측과 기념사업회 등이 협조하여 힘을 모아야 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유족으로 알려진 분은 울진의 남두병 선생 후손인 남상균씨와 기성 방율의 전의철 장군 후손인 전동일씨입니다. 함께 기념사업회와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권대천: 저는 명예 회복과 관련하여 희망적이거든요. 기념사업회가 몇 차례 학술대회를 거쳐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동학학회에서는 1871영해동학혁명을 혁명적 가치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또, 천도교 내부에서도 상당한 사람들이 지금 저희 기념사업회의 취지와 사업 목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노력을 한다면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분들의 서훈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명예 회복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유족 후손들하고 앞으로 명예 회복을 위한 그 길은 좀 찾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상균: 좋은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직 그분들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게 많아요. 이때일수록 영해동학혁명 관련 책이 번역되면 그런 내용을 더 확실하게 좀 알자. 그래서 당시 이분들의 행적을 더욱 알고 나서 이제 이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신원을 회복해 줄 것이냐는 문제가 따라야 하는 거지요. 지금 신원 회복 얘기를 꺼내면 좀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올해 추진할 사업에 대해 권 국장님이 말씀을 해주시죠.
권태용: 올해는 당시 조선 정부에서 기록한 적변문축과 교남공적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됩니다. 그와 아울러 154주년 추모제와 학술대회가 개최되고요. 문헌 기록이 번역되면 물론 관에서 기록한 문헌이라서 한계는 있겠지만 기존에 저평가됐던 부분들이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경북 지역 동학 단체와 전국 동학 단체의 연대 부분입니다. 경북 지역 단체들과『전국동학연대(전동연)』와 연대하여 영해가 동학과 근대의 최초 시발지라는 동학 성지로서 알려주는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김: 다음으로 사업 추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추진에 따른 문제점은 없었는지요. 그에 따른 대안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용록: 가장 중요한 게 전문성인데요. 어떤 행사라든가 학술적으로도 하고 있지만 전문성도 있어야 하고 재정도 확보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정부 기관, 학술기관, 문화기관 등과 협력하여 영해동학혁명 관련 사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예산지원, 연구지원, 홍보 협력 등을 통해 사업 추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 대상으로 역사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동학 유적지인 형제봉 탐방로 체험도 좋고요, 그래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사무국장 혼자 밤새 자료집 만들고 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솔직히 돈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 이제 역할 분담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권태용: 문제는 대중들의 참여입니다. 아직 우리는 시작 단계라고 보고요. 지난해 추모제 때 우리가 지역 다문화 센터 어린이들이 출연해 동학 관련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 등을 부르게 해서 상당히 반향을 일으킨 점은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지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대중 친화적 프로그램도 개발하면서 동학 정신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사업도 추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역시민단체와 연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3.18 영해독립만세기념사업회 같은 경우는 영해중고등학생들이 출연한 공연으로 분위기가 좋고 평가도 괜찮더라고요. 3.18 기념단체는 재정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 개인적으로 재정만 된다면, 우리 기념사업회가 앞으로 지역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행사를 개방하는 방안도 괜찮다고 봅니다.
김: 세 분이 말씀하신 것 동의하고요. 그런데 영해기념사업회의 경우는 1871영해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명제를 전제로 창립된 시민단체이기에 초창기는 학술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그런데 너무 학술대회 쪽으로 가버리면 딱딱합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대중들하고는 자꾸 거리가 생기게 되죠. 학술대회도 하면서 한편으로 대중적 확산을 시키려면 문화 프로그램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예산이 문제입니다. 이제 정리하고요. 이 자리에 영해혁명 당시 주역의 한 분이었던 남두병 선생의 후손이신 울진 매화 금매리에 사시는 남상균님께서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울진 기성 방율의 전의철 선생 후손인 대구에 거주하는데요. 오늘 참석이 어렵다고 필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남상균님께서 울진 동학과 관련하여 말씀해 주시죠.
남상균: 영해는 열심히 움직이는데 울진은 현재 알다시피 이 사건으로 13분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1871년 영해동학혁명 당시 주도자인 이필제는 동학도인지? 그게 김기현 씨가 번역한 자료에 나오니까 앞으로 그건 연구가 더 되어야 할 것 같고요. 1863년도에 이필제라는 분이 동학도인지 아닌지도 논란이 있고 합니다. 당시 이필제하고 우리 남두병 할아버지하고 꽤 오랜 친분으로 알고 지낸 것 같습니다.
현재 울진은 참 이렇게 단체를 만든다든가 하는 게 쉽지 않은 부분이고요, 당시 사건으로 13명이나 죽고 희생했지만, 지금에 와서 이분들의 후손들이 누군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김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저와 이렇게 하는데 몇 분들이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단체가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향후에는 자꾸 조금씩 어떤 기회를 만들어서 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저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 가지 맡은 게 많다 보니 지금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요. 적절한 시기에 젊은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했으면 합니다. 하여튼 좀 두고 보십시다. 후손으로서 저도 그냥 지나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 남 선생님의 울진 동학 관련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요. 앞으로 작게라도 뭔가 될 것 같습니다. 기대를 하고요. 초창기 동학은 영해하고 평해, 울진이 연결되어 있고, 1871의거는 한 몸과 같은 더욱 밀접한 관계라고 봅니다. 그래서 함께 할 것은 함께, 따로 할 것은 따로 하여 서로 힘을 보태어 동학 정신을 이어가는 연결고리가 되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울진 근남 노음(매림)에 전의철 방계 후손이 한 분 살고 있습니다. 대구 거주 전동일씨 하고는 사촌이랍니다. 참고하고요. 올해 기념회 사업으로 당시 관변측의 한문 기록문서인 적변문축과 교남공적이 우리말로 번역된다고 하는데 권 국장님께서 이 사료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권태용: 아까도 얘기했지만 영해혁명은 150여 년 전의 사건이라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은데 교남공적과 적변문축이 있습니다. 이 책이 번역되면 그 당시에 그 관에서 토벌 일지 이런 걸 통해서 훨씬 더 지금보다 많은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역사적 사건을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연구자 중에는 일부 번역을 하여 겉핥기식으로 인용을 많이 해왔어요. 이제 이 책이 나옴으로써 총체적인 맥락을 짚을 수 있고, 구체적인 역사 사실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비록 관에서 기록한 문서이지만 한글로 번역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도 쉽게 다가가고, 연구자들에게는 1차 사료로서 획기적이라고 봅니다.
권대천: 저는 이 교남공적과 적변문축이 번역되고, 그에 따라 학술대회가 이루어지면 1871영해동학혁명이 역사적으로 한국 근대사를 연 최초의 혁명이었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를 더 확증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고 보고요. 그렇다면 영해는 최초 동학혁명과 한국 근대사를 연 시발지이자 성지로 자리매김하리라 감히 기대해 봅니다.
김: 영해동학혁명의 역사적 교훈을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으로 확산시키냐는 것입니다. 영해울진동학혁명은 향토사에서도 지역 정체성과도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하고 향토애를 기르기 위해서 학교 교육 과정과 연계하는 방안도 있어 보입니다. 현재 지역 교육과정에 1871동학혁명이 교재로서 반영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예를 들면 각 시군의 지역교육청 단위로 3학년 교과과정으로 지역사회 교과서가 발간됩니다. 여기에 반영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요.
모두: 그거 좋은 교육 방법이네요. 지역 사회교과서가 발행되는 줄 몰랐네요. 관계기관에 알아보고 지역사회 교과서에 교재로 편성되도록 협조를 요청해 보겠습니다. 그 외 확산시키는 방안을 강구해 보아야죠. 아까 말씀드린 행사 연계 방안, 글쓰기 공모 등도 되겠고요.
김: 끝으로 기념사업 등과 관련하여 관계기관이나 지역 주민 등에게 자유롭게 한 말씀을 해 주시죠.
권대천: 이제 우리 기념사업회가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죠. 그래서 앞으로 전국이나 경북 지역 등 동학단체들과 연대 강화도 중요하다고 봐요. 조직적 체계가 되어야 사업도 공유하고 당국에 요구도 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념사업을 하자면 돈이 들기 마련인데 당국에서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으로 지원받기 위해서는 재정지원 조례같은 것을 제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까 울진 지역 얘기가 좀 나왔는데 울진뉴스 독자들도 이제 울진 지역의 동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울진 지역에서도 이런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동학은 현대적 의미로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기념비는 세웠지만 희생당하신 분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를 꼭 세워야 한다는 여론도 있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수님한테 추모비를 건립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관심을 바랍니다.
김진기: 제일 중요한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영해동학이 널리 알려져야 하는데 아직은 그 부족함이 지역적인 한계성이 있습니다. 또 행정당국에서 지속해서 예산을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그전에는 또 잘 모르다가 지금 현 군수님은 이런 게 있었나 하면서 조례안도 만들어 이번에 군에서도 협조를 하여 예산도 하나도 안 깎고 이번에 통과를 다 시켜주기는 했는데요.
그리고 지금처럼 학술대회 등의 행사추진에 기념사업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는데 내가 자랑스럽게 하면서도 자기 시간적인 뺏기는 만큼의 어떤 보상이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또 하나는 위원장님도 60대 중반인데 앞으로 이러한 일을 할만한 젊은 분들이 지역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젠가 영덕향토사를 해설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문화관광해설사는 있지만, 영덕에는 영덕역사(향토사)를 잘 설명하는 해설사는 거의 없어 보여요, 그래서 향토해설사 양성 필요성도 제기해봅니다.
남상균: 오늘 참 좋은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일단 당시에 동학을 하신 그 어른들의 정신은 나중에 우리나라 의병항쟁과 독립운동하고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동학을 했던 분들이나 그 후손들이 지역에서 한말 의병항쟁이나 독립운동과도 연결되는 과정도 역사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김용록: 우리가 영해 동학과 관련된 책들과 연구 자료들을 확보해야 되고요. 그다음에 영해동학혁명 관련 유적지 발굴을 계속하되 발굴된 유적지 보존을 확실히 해야 돼요. 박사헌의 집터 같은 경우는 그냥 돌덩이들만 쌓여 있어요. 복원의 필요성도 있고요. 그다음에 아까 사회자께서 말씀하셨던 학교 교육과정에 꼭 반영되어야 하고 또 그런 과정들에 대해서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민들한테 또 얘기하고 싶은 거는 영해가 최초의 동학혁명 시발지라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역사잖아요. 그런 거를 지역민에게 교육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동학 정신은 그 당시에 하늘과 같이 동등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모두가 신분제에서 해방되어 평등의 가치를 누리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의 건설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1871영해동학은 1894년의 동학 정신과도 맥을 같이하여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동학 정신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계승해야 할 가치입니다.
특기할 것은 1871영해동학혁명이 그 시발지로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 상징이 2024년 영해동학혁명기념비 건립 제막입니다. 이런 과정까지에는 지금의 영해혁명기념사업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겠습니다. 수고하셨다는 박수를 보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한강이 말했습니다. 과거는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린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에는 당시 영해, 울진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동학도들의 피눈물이 서린 살아있는 역사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이 기념비문에 담긴 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대담에 함께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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