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 106주년·광복 80주년 울진창유계, 항일독립투쟁 사건 재조명

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
기사입력 2025.05.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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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가 고문치사 당했는데, 당신 때문에 종군이 돌아가셨다고, 내가 종군을 죽였다고 이래 가지고 감옥에서 대규 할배가 겨울이니까 솜바지에서 솜을 빼서 먹고 이거를 먹고 창자가 막혀 대규 할배가 돌아가셨다네. 아이고……』(본지 창유계사건 독립유공자 후손 대담 기사 53쪽 참조) 


일제 말기 1943년 항일독립투쟁 창유계) 사건(일명, 흑두건 사건))으로 옥사한 독립유공자 윤종수 선생 후손인 아들 윤영재(82. 매화면 금매리 몽천 마을 거주)씨는 필자와 대담하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말씀 도중 흐느꼈다. 그가 말하는 종군(종손을 말함: 필자 주)인 윤영재씨의 선친인 고 윤종수 선생을 말한다. 

 

당시 윤종수 선생은 매화 파평윤씨 일가의 종손이었다. 윤대규 선생과 윤종수 선생은 파평윤씨로 친인척이다. 아마 윤대규 선생이 나이 아래인 종손인 윤종수 선생을 창유계에 가입시켜 함께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대규 선생이 종손을 죽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그 죄책감과 안타까움으로 마음고생 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분 다 가혹한 고문으로 예심 중 옥사했다. 당시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 수법이 다양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지를 말은 심지를 남성 생식기에 밀어 넣고 심지 끝에다 불을 붙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고 하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그 후유증으로 출감 뒤에 몇 분은 생식불구가 되었다고 전한다.(경향신문 1982. 8.16일자)

올해는 3·1혁명 106주년, 광복 80주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피눈물 나는 항일독립투쟁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이른바 일제 말기 창유계 사건이다. 


필자가 창유계 사건을 재조명하고자 함은 1943년 당시 강원도에서 항일투쟁 규모 면이나 인명피해에서 한해의 단일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으로, 일제의 악랄한 고문 양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102명이 검거되어 61명이 무혐의로 석방이 되었지만, 41명이 입건 구속되어 고문치사, 옥사 등으로 16명이 사망하였다. 

징역 선고를 3~8년까지 받은 분 6명도 옥살이를 하다 8·15 광복으로 출감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갖은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 이분들의 피눈물 나는 항일투쟁사가 노둣돌이 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엄중히 인식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울진 지역 항일투쟁의 역사를 바로 알고, 민족정기를 엄정히 일으켜 그들을 표상하는 상징성을 마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울진의 정체성에서 한 축을 이루는 항일투쟁사와 독립유공자들을 기억하는 공간을 마련해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의 이글이 울진 항일투쟁과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기억의 공간을 마련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창유계의 원조, 적색농민조합은 어떤 활동을 하였나? 

창유계 원조격인 울진적색농민조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1930년대를 전후하여 국내 항일투쟁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경향을 띄었다. 울진 지역의 경우 신간회 울진지회, 청년운동 등은 민족주의 경향으로, 울진공작당, 울진적색농민조합 등은 사회주의 경향이 짙었다. 여기서 주목할 비밀 결사체는 적농이었다.  

적농은 1933년 3월 울진군 북면 덕구리에서 비밀리에 윤두현, 남왈성 등이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무너진 지역 항일투쟁 전선을 세우고, 새로운 결사조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적농을 결성하였다. 


적농은 이전 울진의 항일투쟁 운동이 계급성에 기초하지 못했음을 비판했다. 

적농 운동가들은 울진 농민대중의 교양과 사상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울진 정림리, 호월리 고원동, 용제, 북면 나곡리, 근남 행곡리 등에 야학을 운영,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한편, 독서회 운영으로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관련 서적 등을 탐독케 하여 교양을 쌓게 하고, 글쓰기 활동을 했고, 일제가 벌이는 농촌진흥 운동의 허구성 등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적농 활동 1년 경과 후 이듬해 1934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백여 명이 체포되어 22명이 기소유예, 14명이 기소되어 5명이 무혐의 처분, 12명이 징역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농민조합활동을 주도했던 윤두현은 6년 형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1939년 옥중 순국했다. 

 

최재소는 2년 6개월 선고받고 수감 중 1937년 순국했다. 주유만은 정신이상, 남석순은 불구가 되었다.

 

적농 와해 후 울진의 항일투쟁은 10여 년 동안 소강상태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지하에서는 그 맥이 끊기지 않고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계(契))의 형태로 나타났다. 당시 적농이 일제 경찰에 발각, 와해가 된 후 창유계, 후란계(갑계), 준향계, 독서회원 등이 비밀리에 결사, 활동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계원은 4개의 조직에 서로 겹쳐 가입하여 평소 비밀리에 각자도생하면서 활동하였다. 이중에서 계원이 가장 많은 창유계가 활동 주체로 보인다. 따라서 이 창유계가 적농의 맥을 잇고, 겉으로는 계의 형식으로 평범한 모임으로 위장했으나, 실상은 비밀결사체로서 울진 항일투쟁의 전위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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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창유계 사건 당시 후란계장이었던 주예득 선생이 생존시 1989년도에 후란계와 창유계 사건 내용을 기술한 책자인 울진항일투쟁사(울진읍 전병순씨 소장)(좌), 1964년 삼일동지회가 펴낸 울진창유계 사건을 기록한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 책자, 매화 최중봉씨 소장(우)121.jpg

일제강점기 후란계장이었던 주예득(朱禮得) 선생(앉아 있는 분)과 후손들이 찍었다. 주예득 선생은 창유계 사건 당시 기소유예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사진은 주예득 선생이 생존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출처 울진항일투쟁사. 사진 촬영 일자. 1989. 1, 울진읍 전병순 제공)

 

비밀결사체 창유계 사건의 시작과 끝은?

1943년 울진창유계 사건을 기록한 문헌에는 당시 재판기록, 울진군지, 울진독립운동사, ①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세칭 창유계사건 혹 흑두건사건)과 ②울진항일투쟁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문헌은 1964년 발간『울진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과 1989년 발간『울진항일투쟁사』이다.

 

①은 1964년 울진삼일동지회, 윤호규선생이 정부에 독립유공자 상신용으로 기록했다. 이 문헌의 목차는 투쟁의 동기, 조직의 비밀, 사건의 계획,확살동기와 그의 원인, 사건관계자 명단, 소화18년 예제 21호, 진정서>로 되어있다.

 

②는 1943년 창유계 사건 후란계장이었던 주예득 선생이 1989년 발간했다. 목차는 <후란계서, 좌목,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의 요,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 예비 종결결정, 사건관계자 명단, 계원명단, 판결문, 울진군지 등록초본, 후란계원제문>으로 되어있다.

이 글에서는 2011년 울진문화원 발간 『울진의 독립운동사』와 1964년 울진삼일동지회가 발간한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세칭 창유계사건 혹 흑두건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조직했는가?

창유계(暢幽稧) 조직 일자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1939년 10월 29일인가? 1941년 9월 15일인가? 『울진의 독립운동사』와 『항일투쟁학살사건 진상』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울진의 독립운동사) 기록

이 기록에 따르면 창유계 조직 일자는 1939년 10월 29일이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창유계 조직 기반은 준향계이다. 준향계는 농민조합 운동의 주축이었던 남원수, 전원강, 최학소 등은 1938년에 들어와 새로운 조직체를 건설하기 위해 동지를 포섭하여 1938년 2월 중순경 남원수, 장응두, 노하순, 최효대, 장세전, 전찬문 등이 준향계 조직(계원 9명:계장 최효대)하고, 1939년 10월 29일 남복이, 주한석, 주영석, 석가원영, 신전만호, 전원강, 전병찬 등이 모여 조직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에는 모임 장소 기록이 없다.


② 『항일투쟁학살사건 진상』) 기록

1964년 1월, 삼일동지회 울진분회(회장 윤호달)가 박정희 정부에 탄원한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 1964년 1월 발행』기록의 창유계 조직 과정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왜정 말엽 최대의 창유계 사건으로 피 끓는 청년 등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왜경의 눈을 피하여(이하 중략) 『1941년 9월 5일, 남원수, 임시헌, 장세전, 주진황, 윤대규 등 5명이 울진면 호월리 장씨 도곡정에서 밀의하고, 군내 건실한 유지 청년층의 포섭을 제1차 계획으로 수립하는 동시 각 부서를 조직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동년(1941년: 필자주) 9월 15일 울진면 정림리 남복이 가에서 밀회를 재개함에는 왜경의 발각을 방지키 위하여 부근에 입초를 세우고 동시 구구한 의안도 있었으나 단순한 친목이라는 구실에서 暢幽稧(창유계)라는 칭호로 가장하고 갑계(후란계)준香契, 독서회라는 칭호를 하여 감쪽같은 거사 매진에 주력하였던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요약하면, 1차 모임으로 1941년 9월 5일, 울진면 장씨 도곡정이라는 정자에서 남원수 외 5명이 지하공작 등 밀의를 하였다. 다시 2차 모임(필자 주)으로 10일 뒤에 1941년 9월 15일에 엄중한 보안으로 입초를 세우고,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날 밀의는 조직의 명칭을 창유계라는 단순한 친목 모임으로 위장하였다는 점이다. 이 창유계는 적색농민조합이 와해된 후 각자도생, 와신상담하던 갑계(후란계) 준향계, 독서회가 총단합해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유계의 조직일을 『울진의 독립운동사』에서는 1939년 10월 29일로, 『항일투쟁학살사건 진상』에서는 1941년 9월 15일로 기록하고 있다. 두 문헌 기록에서 조직 일자가 2년여의 차이가 있다.

필자는 이 기록에서 창유계라는 조직명칭이 처음 나오기에 1941년 9월 15일을 조직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는 앞으로 더 고찰해 보아야 한다.


활동 목적과 그 내용은 무엇이었나?

① 울진의 독립운동사 기록

창유계는 정기모임을 달마다 3월과 9월에 개최하였고, 계의 목적은 상호 친목으로 하였으나 내용에서는 조선을 일제의 통치 굴레에서 이탈, 독립시키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사회주의사회를 실현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조직 보안을 위해 비밀 서류 등 일절 남기지 말 것, 계원은 비밀을 유지할 것, 단결을 공고히 하여 동지를 획득할 것, 운동은 급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행동 방침을 세우고 활동하였다. 구체적인 활동 계획은 기록이 없다. 다만 대외 활동 개시는 1943년 3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국내 정세를 알리기 위해 남원수와 장세전을 파견하려다가 일경에 검거되었다. 하지만 창유계는 1942년까지 5월경까지 64회의 모임을 비밀리에 가졌음은 자체 모임 결속과 회원확보에 주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항일투쟁학살사건 진상』 기록

창유계는 이 문건에서 투쟁의 동기, 조직의 비밀, 사업계획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만 구체적 실행 장소, 방법 등은 기술되지 않았다. 아마 비밀 유지 등 보안 유지를 위한 강구책으로 보이나 1964년 이 문건을 작성 당시 창유계 관련 생존자의 증언을 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투쟁 동기>

『왜정의 착취와 민족 차별과 조국의 명성, 존재가 없어짐에 애통함과 선열의 성지를 계승하고 울진 사람들에게 애족 사상을 고취함에 있었다』고 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조직의 비밀>

당시 조직원의 과반이 행정, 금융, 통신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왜경의 세포들이 각처에 있으므로, 각별 유의, 조직이 탄로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비밀 서류 등 일체 서류를 남기지 말 것, 계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계원은 단결을 공고하게 동지를 획득할 것, 운동은 급히 하지 않을 것이라는 행동 방침도 세웠다.)이것을 볼 때 창유계원이 울진 지역 각 분야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직 비밀 등의 보안 유지와 왜경의 세포인 조선인 밀정 등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업의 계획>

-상해임시정부 연락과 연합군에 특파원 파견

-각 조직의 역할 분담

-금융기관 조직원- 자금 조달

-행정기관 조직원- 자재 담당

-인편 통신 조직원- 일반 연락 담당


<밀회 장소>

이들은 북면 신화리 전만수 집과 매화리 윤대규 집에서 밀회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 패망을 예견하는 비라를 뿌리고, 치안 혼란도모, 남원수 등을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하기로 하는 등의 모의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호와 맹세>

창유계원의 비밀모임 때 구호와 맹세는『우리는 죽음으로써 투쟁하자』였다. 이 구호를 모임 때마다 외쳤다는 것을 볼 때 당시 창유계원의 항일투쟁 정신과 결기를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두 문헌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의 활동이 일제 식민 착취에 투쟁함과 동시에 애족 사상 고취 등에 있었으며, 상해 임시 정부와 비밀리에 교류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제가 패망할 것을 예견, 삐라 뿌리기, 치안 혼란 도모 등을 계획하고 남원수와 장세전 동지를 중경의 임시정부에 파견하려다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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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최황순 사진글귀를 후손 최중봉씨가 자택마당에서 들고있다.(좌), 일제강점기 울진경찰서가 있던 곳을 창유계 사건 후손 전병순씨와 최중봉씨가 둘러보았다(우)

 

검거 빌미가 된 『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 

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 이 글귀 하나가 창유계원 102명을 검거하는 빌미가 되었다. 문제가 된 이 사진은 바로 창유계원 최황순 선생 댁에 걸려 있었다.

 

창유계는 조직 결성 이후 1942년 5월경까지 총 64회 걸쳐 비밀집회를 개최하였으나, 일경의 감시 눈길을 피해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43년 3월,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달 19일 계원 장세전이 지방 정세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중경으로 출발하려다 전날에 역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창유계원의 검거에 나선 일본인 울진경찰서장은 일본인 고등계 형사와 조선인 이광호를 앞세워 최황순(당시 원남면 매화리)의 집에 있던 사진을 근거로 수색을 시작하였다. 사진에 쓰인 『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는 글귀가 그 구실이었다. 더구나 근남면 수산천 도선장에서 통행하던 청년 1명을 검문하였는데 그가 지닌 계회 집회 통지서가 드러남으로써 그 증거 확실해지고 말아 창유계원 검거 선풍이 불었다. 102명이 검거되어 울진경찰서 연무장 등에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 등의 취조를 받았다. 


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 

필자는 이 글귀를 시적 표현으로는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미심장한 함의가 있다고 보겠다. 꽃이 핀다는 뜻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온다는 뜻이렸다. 혹독한 일제 식민시대가 곧 끝나고 민족해방과 광복은 끝내 온다는 희망의 언어였다. 일제 경찰은 이걸 문제 삼은 듯하다. 일제가 조선 민족에게 반민족 굴종의 언어를 강요할 때, 우리 선열들은 그것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민족 해방의 언어를 위해 항일투쟁에 목숨을 바쳤다. 결국,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에 몸 바친 많은 선조의 희생과 공덕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 오늘 우리는 감사할 따름이다. 


생식기에 심지를 박아 불을 붙인 천인공노할 고문!

한편으로 부록으로 기술한 <진정서>에는 당시 일제 경찰이 조직원들을 검거하여 가혹한 고문을 했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 고문으로 울진경찰서에서 6명이 사망했다. 이후 예심 중 옥사자가 7명, 복역 중 사망자가 3명이다. 이렇게 사망으로 희생한 분들이 모두 16명이고, 징역으로 고초를 겪은 분이 8명이다. 그리고 일제 경찰이 이들에게 가한 고문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양수에 철정으로 사슬을 매고 수갑으로 결속하여 원목에 넣어 매며, 흑건으로 복면하여 상호간 알지 못하게 하고(중략) 대소변도 시간을 정하여 자유케 못하여 바지에 세사를 하는 자가 불소하며(중략) 하루 종일 끓어 앉히고, 양수를 바로 들어 가창 독서형이라 하여 사지가 찢어지고 다리가 부증이 나며 뼈끝마다 파여서 종기가 되곤 하였다.(이하 생략) 


고문을 받게 되면 전기로서 사람의 심혈을 녹여가며, 문초하는 전기 고문, 줄에 달아매어 5-60회 돌려 정신을 잃게 하여 목총으로 난자하며, 문초하는 비행기고문, 또는 바로 눕힌 후 양수를 교자 다리에 매고 입을 막고, 코에 물을 부어 호흡을 못 하여 정신을 잃게 하는 음수 고문, 또는 세모잡이 장작을 깔고 그 위에 꿇어앉힌 후 구둣발로 올라서고, 미흡하면 재껴 차는 진압 고문 등을 3-4차씩 갖은 고문을 가하니(중략) 거꾸로 매달고 손톱에 침질하기(뾰족한 것으로 손톱 사이에 찌르는 고문:필자 주), 심지어 생식기에 지심(문종이를 빳빳하게 말은 심지 같은 것: 필자 주)을 비벼 넣은 인도상 용납지 못할 잔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이하 생략)』) 


자료에 따르면 광복 직후 전체 경찰관 중 20%가 일제 부역 경찰이었다. 일제하 조선인 경찰관들의 대다수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일제 폭압 통치의 첨병 역할을 했다. 이들 친일 부역 경찰을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단죄는커녕 미군정청이 그대로 기용하여 치안을 맡겼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그 첫 단추를 끼었던 것, 경찰의 경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친일 부역 경찰인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 등의 중용이다. 노덕술이 누구인가. 일제강점기에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죽였던 악질 경찰이었다. 

 

광복 후 1948년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해체되었다. 이러한 훼방 공간에서 노덕술은 적반하장으로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잡아들여 모욕을 주고 뺨을 후려쳤다는 일화가 있다. 

평생을 만주에서 풍찬노숙으로 항일투쟁한 김원봉 선생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따위 악질 노덕술 등의 고문 기술은 해방 후 그대로 전수되어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학생들에 대한 고문으로 이어져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았다. 

울진 창유계 사건에서도 나타나듯이 생식기에 문종이 등으로 심지를 만들어 박아 불을 붙이는 등의 악랄한 고문 수법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천인공노할 인권 탄압이다. 창유계원 중 임시헌, 최효대, 남용식 등은 45년 광복과 함께 출감했으나 생식기 고문으로 생식능력이 없어져 대를 잇지 못한 채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사망했다.) 


그리고 필자가 궁금한 것은 당시 울진경찰서에 근무한 조선인 이광호이다. 그가 정식경찰관이었는지, 아니면 보조원이었는지, 고등계 형사 끄나풀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는 창유계원 검거에 앞장서서 일본인 경찰의 통역은 물론 길잡이 노릇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강호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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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982년 8월 16일, 창유계 기사 「일제(日帝), 농민독립운동도 공산(共産)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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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울진경찰서『울진의 독립운동사, 죽변 이명동 제공』

 

고문으로 허위자백 강요, 공산주의자로 날조하다!

일제 경찰은 창유계 사건 관련자들을 악랄하게 고문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내 공산주의자들로 날조하려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항일투쟁 학살사건 진상』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저의 마음대로 작성한 죄목에는 우리들의 본 강령도 아니요, 공산주의를 생각하여 보자는 마음 가진 자도 없고, 실행에 운위하자는 자도 없었던 것을 취조관은 우리들 죄목을 날인까지 받아 검사국에 송치하였다는 것은 지방 인사들이 모두 다 억울한 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이하 생략) 』 


위 기록을 볼 때 창유계 사건 관련자들을 경찰서 취조관이 마음대로 공산주의자로 날조하여 허위진술서를 작성, 개인 날인까지 받아 검사국에 송치한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이는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 진술서이다. 1982년 8월 16일 자 경향신문은 창유계 사건 기사에서 『농민들의 독립운동도 共産 날조』라고 보도했다.


당시 창유계원들의 죄명은 일제 대구지방법원 공판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르면 치안유지법), 육군형법, 해군형법 등의 위반으로 되어 있다. 

 

예심종결일은 1944년(소화 19년) 5월 31일이다. 창유계는 조직원을 사업계획에 따라 상해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밀파한 남원수가 만주로 가다가 1943년 3월에 체포되었다. 또한, 계원 장세전이 뒤이어 중경으로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출발 하루 전인 1943년 3월 18일에 울진경찰서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따라서 창유계 사건 발생일을 3월로 본다면 예심종결까지 1년 3개월여가 걸린 셈이다. 이 기간에 20~30대 피 끓는 청년들을 잡아다 악랄한 고문을 해대고 순수한 농민운동을 공산주의 비밀결사라는 죄를 날조한 것이다. 이는 무고한 양민인 울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 수형자 명단에서 보듯이 창유계 사건은 고문치사자 6명, 예심 중 옥사자 6명, 옥중 사망자 4명, 징역을 살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나온 분이 6명이다. 당시 이 사건은 일제 사법 기관의 악독한 고문으로 사망자 수만 16명을 낸 강원도 최대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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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1982년 8월 15일, 창유계 기사「40년만의 광복」(매화 최중봉 제공)

 

후손,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한 피눈물의 세월!

창유계 사건과 관련한 인사들을 독립유공자로 수훈·지정하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있었다. 8·15광복 후 1964년 1월 『울진삼일동지회』에서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이라는 진정서를 당시 박정희 정부에 제출했으나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조선독립 투쟁의 한 수단으로 사회주의적 사회실현이라는 활동이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박정희 정권에서는 독립 유공을 공인받기 어려운 당시의 정치 현실이었다. 그런데 창유계 조직목적이 공산사회 건설을 계획했다지만, 공식 문건으로 표현된 것은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1964년 작성된 『항일투쟁학살사건 진상』 기록 문건에는 『경찰 취조관 마음대로 공산주의 운운 날조, 작성하여 검사국에 송치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 남원수나 장세정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중경으로 떠나가 전 검거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임시정부의 성격과 김구 주석은 결코 코민테른의 지시나 독립 자금을 받던 기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창유계가 임시정부와의 연결로 볼 때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후손들은 1964년 박정희 정부에서 무산된 창유계 독립유공자 지정 노력이 18여 년 만인 1982년 8월 16일 자 경향신문은 『일제, 농민독립운동도 공산 날조』라는 제목으로 창유계 사건 유공자 19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창유계 사건으로부터는 40년 만이다. 그리고 최근에 남정성 선생과 최연덕 선생 두 분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이제 창유계 사건 독립운동가 중 22명 중 21명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수훈을 받았다. 다만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중 사망한 주한석(북면 하당리) 독립운동가는 아직 서훈되지 않았다. 이분도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수훈 되기를 바란다. 


1943년 한해 지역에서 16명의 고문치사가 난 국내 최대급 사건

창유계 사건의 본격 시발은『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라는 사진에 인쇄된 글귀 하나였다. 계원이었던 매화의 최황순(崔晃淳) 집에 있던 사진이었다. 이것을 문제 삼은 일본인 울진경찰서장은 고등계 일본인 형사 여러 명과 조선인 이광호를 앞세워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 경찰은 창유계 관련자 102명을 검거하여 울진경찰서 연무장에 수감하였다가 61명을 무혐의로 석방하고 41명을 입건 구속시켰다. 

 

구속자 41명 중 19명은 기소유예, 불기소처분 등이 되었다. 그리고 22명이 울진경찰서에서 조사 심문 과정에서 고문치사로 6명이 사망했고, 대구법원 검사국에서 예심 중 옥사한 분이 6명이다. 결국, 이분들도 고문치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감옥살이에서 옥사한 분이 4명이었다. 사망자만 모두 16명이다. 감옥을 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풀려난 분이 6명이었다. 


해방 후 감옥서 풀려난 들들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받은 김인보 등 19명은 기소유예, 기소중지, 불기소, 범죄 혐의없음 등으로 풀려났다. 

 

1943년 울진 창유계 사건은 일제 말기 국내 독립운동에서 당시 단일 사건으로 다수의 인명 희생자를 낸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역사적 의의는 울진 지역에서 2~30대 젊은이들이 비밀결사체를 조직해 2차 대전에서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될 것임을 세계정세를 전망하고 목숨까지 내걸고 활동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분들은 지역에서 농사, 금융조합, 면서기 등 공직에 근무하면서 일제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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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삼일독립기념탑 소재 부속건물의『매화항일독립정신선양회』사무실

 

뉴라이트의 역사관 경계해야

최근 한국 사회에서 『뉴라이트』의 역사관이 심각한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 뉴라이트란 말은 『신보수우파』라는 뜻으로 읽힌다. 이들의 역사 인식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운다. 일제강점기를 단순한 억압이 아닌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한 시기로 미화하려 한다. 

이들은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폄훼하며,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뒤흔드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정통보수도 아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적 파쇼 이념을 추앙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반민족친일부역자』를 처벌키 위한 1948년도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 해산시킨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도 한다. 반헌법적 대한민국 부정이다. 


또한 과거 군사정권의 개발독재를 무조건 찬양한다. 여기에 공과를 비판·반대하면 빨갱이로 딱지를 붙인다. 이른바 『레드콤플렉스』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상대방을 매도한다. 하지만 철 지난 색깔론이라 대다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과 성숙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는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는다. 왜곡된 사실로 홍범도가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윤봉길, 안중근도 테러리스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고 말하는 장관도 있다. 36년간 일제강점기에 대해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 행위를 두둔하는 등, 이런 자들이야말로 『잠재적 신친일매국노』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왜곡된 망언과 발언은 해방된 지 8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계속되는 것은 해방정국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시 반민족친일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4년 8·15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지 않았다. 경축식이 열리지 않는 건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뉴라이트 계열 출신 독립기념관장 임명 논란 때문이다. 김형석 관장 임명은 독립운동역사에 반 폭거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자 관련 시민단체들은 항의 시위, 반대, 비판하는 성명을 쏟아냈다. 그런데 울진 지역의 독립유공자 관련 시민단체들은 비판 성명서나 반대하는 현수막 하나라도 내걸었는지? 좀 아쉬운 부분이다. 이제는 지역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도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에 폄훼 등 흠집을 내는 이들이나 단체에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발언해야 한다.

기억의 공간을 마련하자

 

하지만 최근 긍정할 만한 소식이 들려온다. 독립운동 관련 지역의 매화항일독립정신선양회에서에서 국비 지원을 받아 울진 지역 독립운동 관련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늦었지만,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이미 수년 전에 학술대회 개최와 울진독립기념관 건립 문제를 광복회 울진지회에 제안한 바 있었다. 

 

왜 지역에도 독립기념관이 필요할까? 독립기념관 건립은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이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기억이다. 역사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기도 하다. 역사를 기억하는 얼이 사라지면 역사는 왜곡된다. 역사의 얼은 기억의 공간에서 되살아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란 我와 非我의 투쟁이라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는 울진 지역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알고 지역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울진 항일투쟁의 피눈물 나는 이야기, 『우리도 꽃이 필 때가 되었다.』이 한마디를 다시금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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