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울진창유계 사건, 후손의 피맺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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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5년 2월 22일(토)
● 장소: 매화면 매화 2리, 독립유공자 최황순 선생의 후손 최중봉씨 자택
● 사회 · 기록: 김진문
● 참석 후손(무순)
최황순(자: 최중봉, 매화), 윤대규(손: 윤동수, 매화), 윤종수(자: 윤영재, 금매),
남정성(손: 남상균, 금매), 최연덕(자: 최대래, 행곡), 전남출(자: 전병순, 울진읍)
왼쪽부터 윤영재, 남상균, 김진문, 최중봉, 전병순, 최대래, 전병순, 윤동수<매화 최중봉씨 자택에서. 2025. 2. 22. 토>
사회 김진문(이하 사회)
안녕하세요? 오늘 대담에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올해는 삼일혁명 106주년, 광복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울진 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이곳 매화에서 1943년도에 일어난 당시 강원도 항일투쟁의 최선봉이자 최대 희생자를 낸 창유계 사건에 대해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창유계 사건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좋습니다. 말씀하실 때 본인(후손) 소개와 독립유공자분 이름 소개해 주십시오.
독립유공자 최황순 선생(좌), 훈포장(우)
최황순 선생 매화 생가, 후손 최중봉씨(지금은 타인 소유)
최황순 선생(건국훈장 애국장)
후손 최중봉(매화2리 거주)
제 어른인 제 항자 순자 아들 최중봉입니다. 제가 어릴 때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 위에 증조할아버지가 울진에서 큰 장사를 하셨다고 해요. 아버지가 점방(가게)에서 잡혀가셨다 그러더라고요. 울진경찰서에 잡혀 나중에 거의 죽기 직전에 석방이 돼서 왔는데 고문을 하도 받아서 말을 못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셋째 누님 말씀이 무슨 시킬 일이 있으면 아버지가 밥뚜껑 가지고 툭툭 두드렸대요. 그래서 누나들이 그 소리를 듣고 마실 물 갖다주고 그렇게 하셨다는 얘기를 누님이 하셨고,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때 해방되고 난 다음에 고등계 형사들 중 한국 사람은 아마 경찰서에 있었는가 봐요. 이광호 형사가 괘씸해서 항의하러 어머니하고 우리 동네 윤석 선생님 모친 되는 분하고 같이 거기 갔대요. 들고 간 대창살로 이광호를 찔러 죽인다고 대들었더니 그 인간이 하는 말이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래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보고 우리 집에 왔다가 고생만 하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이러더라고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버지가 고문 휴유증으로 집에서 돌아셨는데요. 아버지 방에 문제의 사진인 우리도 꽃이 필 때 있다는 글귀가 있는 사진이 형사들에게 압수당했다고 해요. 그 사진 그걸 보고 그때부터 창유계 사건이 시작이 됐다고 봅니다.
사회: 참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창유계 사건 희생자 대개가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으로 울진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옥중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또 다른 분들도 말씀해 주시죠.
독립유공자 윤종수 선생(좌), 훈장증(우)
후손 윤영재씨와 윤종수 선생 금매(몽천) 생가
윤종수 선생(건국훈장 애국장)
후손 윤영재(금매 거주)
독립유공자 종자 숫자 큰아들 윤영재입니다.
우리 할머니한테 얘기 들었어. 내가 두 살 때인 일정 시대 때 아버지는 나이 26세에 매화면사무소에서 회계사무를 봤어요. 체포되던 날에 도락꾸(트럭)가 한대 오더니 그냥 순사가 체포해 밀어 넣어버리더래요. 사람을 짐짝 취급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고문치사 당했는데, 당신 때문에 종군인 대규 할배도 예심을 받다가 고문으로 돌아가셨다고, 내가 종군을 죽였다고 이래 가지고 감옥에서 대규 할아버지가 겨울이니까 솜바지에서 솜을 빼서 먹고 이거를 먹고 창자가 막혀 돌아가셨다네.
아이고…… 일본 놈들이 고문이 말도 못 했다고 그래. 더러워서 입에 담기도 싫지만 문조 심지를 거기에다 심지를 박아가지고. 아까도 이광호 형사 얘기를 했지만, 이 새끼가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놈이 사람들을 다 고문하고 두드려 패 잡아놨어.
우리 아버지는 옥중사 했기 때문에 판사 판결문이 없어요. 검사 취조문뿐인데 거기에 보면 참 눈물이 나는데 이 자식들이 뭐라 해놨냐면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합작하여 대일본 제국을 멸망하기 위한 비밀 사조직을 구성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것 때문에 박정희 때 우리가 그 애를 먹은 거야. 이 사회주의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내 진짜 참 많이 울고 댕기고, 나하고 같이 다니던 강순이 형님 중학이 형님하고 얘기하면서 이거를 밝히기 위해서 했는데 박정희 시절에는 반공이 국시예요. 반공이 국시니까 일절 안 됐어요.
내가 72년도에 아버지 영혼에 이끌려 고향에 내려온 사람이요. 자네들은 잘 모르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유공자 배상받기 위해 우리가 그동안에 많이 싸웠다.
노태우 때 이종찬 씨가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보훈청에 있는 독립유공자 명단을 빼 왔어. 그때는 이종찬 씨 끗발로 아니면 안 됐다. 그걸 빼 온 것만 해도 우리가 좋아서 박수치고 만세 불렀다네.
사회: 1982년 전두환 정권 때 창유계 사건 관련자 열아홉 분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습니다. 그간 지정받기까지 과정을 말씀해 주시죠.
윤영재: 72년도에 내가 고향에 와 가지고, 82년까지 10년간 7번을 경주 보훈청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올렸어.
내 손으로 작성하여 올리고 나는 저거를 봤지. 간사를 봤어요. 회장 부회장 총무는 광수 형님, 중학이 형님이 회장이고 그때는 분회를 했습니다. 모든 심부름 내가 다 했지. 젊으니까.
어느 날 인편으로 연락이 왔어. 그때는 전화도 없지 이러니까 뭐 핸드폰이 있나 뭐가 있노, 인편 연락이 왔는데 빨리 아버지 서류 가지고 보훈청에 가서 신청해라. 이래 내가 눈이 번쩍 띄었지.
신청서 하고 도장을 가지고 택시 타고 경주 보훈청까지 갔어요. 그날이 마지막 신청서 접수하는 날이야. 경주까지 가보니까 서류를 다 해놨는데 내 도장이 없어 신청 못 한 거야. 담당자가 잘 오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유공자 신청이 접수되어 보훈청에서 인정을 받았어.
최연덕 선생(사진 왼쪽)
최연덕 선생 생가, 후손 최대래(행곡 구미)
최연덕 선생(건국훈장 애족장)
후손 최대래(행곡리 구미 거주)
저의 아버지는 최연덕인데요. 제가 해방 전 42년도에 태어나서 두세 살로 아주 어릴 때라서 아버지 얼굴도 전혀 모릅니다.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해방 후에 근남면사무소에 다녔다고 합니다. 6·25 사변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다른 거는 남긴 것이 없고, 책이 하나 있어요. 일본어로 된 책입니다.
최연덕 선생 아들인 최대래 씨는 올해 나이가 여든둘이라고 했다. 그가 가지고 온 일본어로 된 해묵은 경제학 이론서를 내보인다. 아버지가 일제 때 읽은 책이라면서 펼쳐 보였다. 선친은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남상균: 최연덕 선생은 해방 후 근남면 사무소에 근무하실 때 한문 글씨가 명필로 이름이 났고, 그분의 글씨체가 표본이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연덕 선생은 독립유공자 10번도 넘게 정부에 신청했지만, 공적 심사에서 탈락했다가 작년(2024년)에 서훈, 지정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 어른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연좌제 때문에 고생했고요. 최연덕 선생의 동생이 최연학 선생인데 창유계 사건 관련자로 형제를 다 감옥에 보낼 수 없다 해서 동생은 감옥에 가지 않은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동생 최연학 선생도 유공자로 지금은 안 되어 있는데 제 개인 생각으로는 집안에서 누군가 신청해 볼 필요가 있어요. 후손인 손자가 있다면 신청해 보았으면 합니다.
전남출 선생 후손 전병순씨
전남출 선생 매화 생가터에서(후손 전병순씨)
전남출 선생(대통령 표창)
후손 전병순(울진읍 거주)
저는 전자 남자 출자의 아들인데 제 아버지 독립유공자 지정은 2021년도에 됐습니다. 사실 제 위에 형님들이 계시다 보니 창유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죠. 우리가 전에 20세 미만까지는 이런 얘기를 전혀 들은 거 한마디도 없어요. 그 후에 어머니가 얘기한 거는 그때는 뭐 창유계인지, 후란계인지 잘 모르고, 그저 독립운동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그래요. 붙잡혀 감옥에 있는 거를 뭐 쉽게 말해 옆에서 뭐 이렇게 해가지고 꺼내 왔다 이러더라고요. 지금까지 어머니한테 그 얘기 밖에 딱 한 한마디밖에 못 들었어요. 그러다가 뒤에 작은형님이 관심이 많아서 자료를 수집해 2021년도에 신청하여 유공자로 지정받았어요.
윤대규 선생 매화 생가, 후손 윤동수씨
윤대규 선생 훈장증과 국가 유공자증
윤대규 선생(건국훈장 애국장)
후손 윤동수 (매화2리 거주)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윤대규라는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때 한 한 10살밖에 안돼 가지고 할아버지 돌아가실 쯤에 그때는 우리 할머니는 또 뭐 남자가 밖에서 하는 일을 무슨 일을 하는 줄 전혀 몰랐대요. 할머니 얘기 들어보면 예전에는 할머니는 위로 시부모 있고 자식 있고 이러니까 그때는 뭐 일하는 데 바빠 남편이 밖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감옥에서 한 1년 남짓 계시다가 이제 44년도 1월 17일인가 돌아가셨는데 유골만 받았답니다. 울지를 못했대요. 왜냐하면, 내가 내 남편인데도 내 시어른이 둘이 계시는데 내가 울려고 그러니까 차마 울지를 못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80년도 중후반쯤에 우리 삼촌이 친구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어느 날 서울 동대문에 무슨 중고 서적 사러 서점에 갔다가 우연찮게 한국 독립사라는 책을 봤대요. 거의 마지막 장쯤에 윤대규라는 사람 얼굴이 있더라 이거예요. 우리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자체를 했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 책에 그게 나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연락하셔서 『야 너 아버지, 지금 이거 책에 나와 있다.』 이래서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 제가 1985년 무렵에 매화초등학교 교사사절 윤석 교장선생님과 함께 근무했는데요. 장영인 교감선생님께서 윤 교장선생님 부친이 창유계 사건으로 독립유공자라고 하더라고요.
필자는 당시 창유계니 푸른보자기(당시 장교감선생님은 흑두건을 푸른보자기로 표현했다)이니 하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장영인 교감선생님이 창유계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셔서 울진 사람들의 항일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1986년도 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서 펴낸 『내 고장 호국정신』이라는 책자에『창유계와 푸른보자기』라는 제목으로 창유계 사건을 기고한 바가 있습니다.
장영인 선생은 부산초량상업학교 졸업 후 울진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장기 3년 형을 받았다고 그래요. 1944년 7월부터 김천 소년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고 합니다.
장 교감 선생님은 교직 퇴직 후 당시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형사사건부 773호, 판결문 등을 찾아내 독립유공자로 상신, 1993년 정부로부터『독립유공건국훈장애족장』을 서훈받았고요.
필자는 장영인 선생의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하여『울진사향 창간호』(2007년)에『생존독립유공자 장영인과 조선독립당』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독립유공자 남정성 선생과 훈장증
일제강점기 남정성 선생 생가(매화 금매) 현재는 개축되었다.
남정성 선생(건국훈장 애족장)
후손 남상균(금매2리 거주)
저희 할아버지는 남자 정자 성자로 창유계 사건으로 울진경찰서에 구속되어 징역 4년 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으로 풀려났어요. 당시 창유계 사건으로 끝까지 살아오신 분이 6분인데 거기에 할아버지가 포함돼요. 해방 때 나오셔 가지고 다시 6.25 때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창유계 사건에 연관된 분들을 보면 가까운 혈연이나 문중, 동창 등 정말 서로 믿을 수 있는 사람끼리 계원으로 가입시키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창유계의 독립 정신을 이어갈 것인가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사회: 남 선생님께서 좋은 지적으로 창유계 독립정신 계승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울진에는 독립유공자가 90여 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독립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킬 방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울진독립운동학술대회』,『울진항일독립운동기념관건립』등과 같은 사업 말이죠. 필자는 수년 전에 이런 방안을 광복회 울진지회에 모 사무국장을 통해 제안한 바 있었습니다만, 앞으로 울진독립정신을 좋은 방안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상균: 제가 금년에 국가보훈부에 울진 독립운동 관련 학술대회 신청했더랬습니다. 어제 최종 연락이 왔어요. 국비 800만 원이 확정됐다고. 신청 주체는 매화선양회 이름으로 했습니다. 앞으로 군비 등을 신청해서 재원이 확정되면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학술대회를 하는 이유는 울진 독립운동사가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지도 않지만, 검증이 안 되어 틀린 내용도 있고 이거를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이 발상을 했고요. 그래서 마침 그 보훈부에다가 신청했더니 선정되었습니다. 학술대회 시기는 올해 9월경에 예정하고요. 발표자로 교수 6명, 토론자 3명입니다. 발표와 토론자 참여 기준은 박사학위 가진 사람이라서 향토사학자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참여가 어렵다고 하네요.
그리고 또 하나는 창유계 사건 기념 비석 건립 건입니다. 건립에 따른 재원이 수천만 원이 필요합니다. 군에다 비석 건립 건을 얘기했는데 군에서도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울진군 입장에서는 각 단체에서 지원 요구가 많아 우리가 요구하는 신청 건을 먼저 지원해 주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창유계 사건 비석 건립 건도 계속해 군에다 지원 요구를 하겠습니다.
사회자: 남선생님께서 학술대회 신청과 노력으로 선정도 시기에 알맞게 잘 되셨습니다. 창유계 사건 기념 비석 건립문제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방 이후 이런 말이 있었어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했어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해(2024년) 6월 5일, 대한민국 보훈 가족에 대한 보상과 예우를 확대하고, 보훈 문화를 확산시켜 온 국가보훈청이 국가보훈부로 승격됐습니다. 그만큼 국가보훈부 역할 확대에 대한 보훈 가족들의 기대감도 큽니다. 국가보훈부에 바라는 점이 있으실까요?
윤영재: 제일 피해자는 우리 할머니, 어머니와 가족이겠지만 나도 제3의 피해자예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내가 대학을 나왔을 텐데. 나는 중학교도 옳게 못 나왔어요.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대학을 못 했겠어요. 내가 대학을 나왔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단 말이죠. 후손들이 더욱 보훈 복지혜택을 받도록 했으면 합니다.
전병순: 유공자 연금은 수권자 1명이 연금을 받고 있고요. 모든 혜택을 수권자 위주니까 다른 형제들은 그냥 약간의 혜택만 주어지는 거죠. 예를 들면 공원 입장료 복지시설, 영화관, 박물관 등의 입장료 할인 정도죠. 다 같은 형제인데도 말입니다. 법적으로 더 확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영재: 유공자 관련 직계 형제들에게 의료 보험 혜택을 확대하는 방안도 필요해요, 저 같은 경우는 우리는 손자 아이들까지 대학 등록금에서 혜택을 받아 대학을 잘 마쳤어요.
최중봉: 저 같은 경우는 유족 수권자라서 대학등록금 전액 면제 4년간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학점이 장학금 기준 범위에 들어야 하는 조건이 있지만. 그래서 대학을 갔지. 그렇지 않았다면 힘들었지요. 앞으로도 보훈 가족의 복지혜택이 제도적으로 잘 만들어져 안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자: 『조선혁명선언』을 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꽃 필 때가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조선 민족의 끈질긴 항일투쟁 의지와 독립 정신을 뜻하는 이 글귀 하나에 일본 경찰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따라서 일제 말기 일본 경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패망을 앞두고 최후 발악으로 울진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탄압한 것입니다. 창유계 사건의 주인공들도 단재 선생의 말처럼 유구한 우리 역사와 민족정신을 지키고 잃지 않기 위해서 항일투쟁으로 목숨까지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정신인 『우리도 꽃 필 때가 있다』라는 독립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오랜 시간 대담에 고맙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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