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5화(7회)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신분 상승을 노린 지능적인 성폭행
기사입력 2025.07.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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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허어……. 이게 뭔 일이여? 삼경이 지났는데도 이부자리도 안 깔아놓고……? 잠은 자야지. 응? 우리 아씨 마님.”

방안으로 들어 온 실구지가 내은이 앞에 앉으며 다정스러운 척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빈정거림도 느껴졌다. 

 

내은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인데도 그녀는 이부자리도 깔지 않고 방 윗목에 펴놓은 방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마치 실구지가 다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

 

내은이가 이미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실구지는 다소 의외라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눈치를 살폈다. 

“뭔 일이여……? 왜 그러시오. 아씨? 뭔가 불만이 있나 보네요……. 응?”

그가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그녀의 몸을 잡으려 들었다. 그가 다가오자 역겨운 술 냄새와 사내의 땀 냄새가 났다. 순간, 내은이가 매몰차게 실구지의 손을 쳐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야심한 밤에 아녀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고……. 네 놈이 어찌 감히……”

내은이가 몸을 뒤로 물리며 호통치자 다가서던 실구지가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내은이는 머리맡에 둔 촛대를 당겨 초에 불을 붙였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어두웠던 방안에 사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실구지는 그녀가 초에 불을 붙이자 의외라고 생각했다. 사납게 앙탈을 부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녀의 행동은 전혀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촛불이 휘청거렸다.

 

“우리가 아무리…… 어리기로 서니…… 엄연히 양반가의 규수이고…… 네 놈의 상전이니라. 네 놈이 지금…… 하는 짓이…… 얼마나 중죄(重罪)인지 알기나…… 하느냐?”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며 중간중간 말이 끊어졌다. 그녀는 윗방에서 잠든 동생들이 깰까 봐 겁이 났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제법 준엄했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나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사지가 마비될 것 같았다. 육중한 체구의 사내를 앞에 둔 지금 그녀는 무척 겁에 질려있었다.

 

사실, 그녀는 오늘 밤 틀림없이 실구지가 다시 찾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상황이 온다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연지와 만복이를 만나야 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도록 도와줄 사람은 연지와 만복이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유도하려면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왕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도박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치고 앉아 정면으로 실구지를 바라보았다. 촛불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은이는 한 차례 몸을 부르러 떨었다. 마치 한 마리 짐승이 먹이를 앞에 놓고 압박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허…… 참. 아씨. 내은이 아씨. 지금 이거 왜 이러시나? 아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요.”

 

내은이의 반응에 순간 당황한 실구지는 술기운이 확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자태를 보니 욕정이 다시 끓어올랐다. 그는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봐요. 아씨. 내 말 잘 들어요.”

 

실구지가 주위를 쓱 훑어보고 말을 이었다. 내은이는 몹시 긴장되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손바닥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이 골짜기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알 수 없어요. 사람이 죽어 나가도 밖에서는 아무도 모른다고요.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예? 아씨. 무슨 뜻인지 몰라요?”

 

실구지는 소반에 담은 물그릇을 들고 단숨에 들이키고는 캬아 소리를 내며 입술을 닦았다. 내은이는 실구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모로 앉아 듣기만 했다. 그녀도 목이 말랐지만 참고 있었다. 실구지는 말을 이어갔다.

“아씨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 온 걸 아는 사람은 이곳 과주(果州)에는 없어요. 엊그제 만난 사람들도 그냥 봄이 되어 한양에서 주인이 농토를 둘러보러 왔다가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예……?”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누가 눈여겨보기나 할까? 아씨 가족이 이 골짜기에 오가는 걸……? 우리가…… 뭐…… 아씨 가족이 한양에서 이 골짜기로 이사 온다고 소문이라도 냈을까 봐 그래요? 응? 우리가 그 정도는 준비했지. 그 정도는……. 흐흐흐……”

실구지가 말을 끊고 웃으면서 내은이의 어깨를 툭 쳤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내은이가 몸을 뒤로 젖히며 움츠렸다.

 

그러고 보니 이사 오는 날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동네에서는 굴뚝마다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이었다. 오가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도 거의 없었던 게 떠올랐다. 

그녀는 어쩌면 지금 실구지가 하는 말이 모두 틀린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방석 모서리를 잡고 손을 비볐다.

 

“그러고 보니…… 우리 자매를 이곳 과주로 이사 오도록 한 게…… 모두 네놈들의 치밀한 간계(奸計)였구나. 모두가 다 네놈들이…… 네놈들이 미리 꾸민 게로구나.”

“그렇지. 이제 알았구먼그래. 그런데…… 이봐요. 아씨. 간계라니?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좀 억울하지. 그동안 우리가 이곳 과주에서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이런 정도의 보상은 진작 했었어야지. 안 그래? 아씨……. 응?”

 

내은이는 이제야 이들이 사전에 아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이 가깝지도 않은 한양으로 오가며 그렇게 과주로 이사하자고 감언이설로 꼬드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렇지. 모든 게 다 이놈들이 꾸민 거야. 꾸민 거라고……. 그런데 만약 그런 거라면 만복이와 연지도 이들과 한패인가? 한패……? 아니야. 아닐 거야. 암…… 아니고말고. 우리가 어릴 적부터 얼마나 친하게 지내온 사이인데……. 비록 상전과 하인 사이지만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온 사이인데…….’

내은이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도리질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렇게 하자구.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이제부터 아씨와 작은 아씨들은 걱정 안 해도 돼.” 

실구지는 눈물을 흘리는 내은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역겨운 술 냄새가 풍겼다.


그는 자기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 판서 가족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재산이 많지 않았던 이 판서의 재산이, 그동안 저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제는 제법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으로 일구어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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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노비의 삶(풍속화)


그는 시시때때로 한양 본가에서 호출하면 바로 올라가서 온 집안의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과, 판서 어른과 부인이 병중일 때도 정성으로 오르내리면서 온갖 보약과 약재를 구해 날랐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과주에서 이 판서댁의 전답과 과수원을 관리하면서 그렇게 노력했지만, 저들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이 고작이었다는 푸념도 곁들였다. 주변의 다른 외거노비들 가운데는 주인으로부터 노력과 수고의 대가로 전답도 물려받아 제법 재산을 일군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도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런 평소의 소소한 불만들이 이 판서와 부인이 돌아가시고 어린 아씨 자매들만 남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씨도 이제 꽃다운 16세가 되었으니 곧 혼담이 오갈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어린 아씨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데 앞으로 이 판서댁의 재산을 일구고 지키려고 노력해봐야 아씨가 다른 양반과 결혼이라도 하는 날이면 저들의 평생 노력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될 게 뻔하다는 결론이 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과 처남 박실에게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고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은 궁리를 해왔다고 했다. 그 결과 저들이 내린 결론은 이 판서댁의 재산도 지키고 저들의 신변도 보장받을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최우선 과제는 아씨를 한양으로부터 이곳 과주로 이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아씨의 먼 친척들로부터 예상되는 여러 가지 간섭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아씨를 설득하여 과주의 만만하고 가난한 양반을 골라 결혼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씨의 이사가 결정되고 나자, 자기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굳이 아씨를 다른 사람과 혼인시킬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처로 삼아버리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외거노비 가운데 제법 큰 재산을 일군 자들은 가끔 가난한 양반가의 규수를 아내로 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곳 과주에서도 그는 자기가 아는 몇몇 외거노비 가운데 그렇게 가난한 양반가의 규수를 처로 들인 사례를 봐왔기 때문에, 그가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계획은 그렇게 섰지만, 그가 정말 아씨를 처로 삼으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오랜 궁리를 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택한 것이 아씨를 강제로 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내은이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믿고 따라준다면 자식을 놓고 살면서 과주의 이 판서댁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아 지키고 일구어 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돌아가신 이 판서와 부인의 삼년상도 치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실구지가 목이 말랐는지 다시 주전자의 물을 한 사발 따라 들이켰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사경이 지난 것 같았다. 사립문 밖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위에서는 가끔 부엉이가 울었다.

실구지의 쉴 새 없는 손짓과 몸짓에 따라 촛불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촛농은 계속 흘러내려 촛대 언저리에 쌓여갔다. 

 

내은이는 실구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자신의 처지로서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가 생각보다 훨씬 영악하고 교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몹시 두려웠다.

“방금 내가 말했지만……”

 

실구지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이 골짜기에 우리 아씨 자매가 들어와 사는지는 아무도 몰라. 당연히 알 수가 없지. 그러니 아씨는 그냥 여기서 살면 돼. 자네는 그냥 나하고 이 골짜기 전답 관리하면서 자식 놓고 살면 되는 거여. 별도로 무슨 예식을 치를 필요도 없어. 작은 아씨들은 좀 더 클 때까지 내가 잘 보살펴 줄 거야. 그러면 되지. 사는 게 별 건가? 안 그래 아씨? 응?”

 

실구지가 속내를 털어놓자 내은이는 큰 충격에 빠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손바닥에 땀이 고이자 내은이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내은이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실구지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 생각했다. 우선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그러면 연지와 만복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겠구나. 그것들도 너희들과 함께 모의했겠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아니지. 아니야. 그 애들은 모르지. 혹시라도 우리 계획이 탄로 날까 봐 그 애들에게는 쉬쉬했지. 그 애들은 우리하고 처지가 다르니까…….”

 

그녀는 순간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목소리는 여전히 심하게 떨렸다.

“나는…… 네가…… 지금…… 하는 말을 내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찌…… 네가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오너라. 나도 생각을 좀 해야겠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아씨가……”

“알았다니까. 내가 지금…… 몹시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구나. 오늘은 그만…… 하자니까…….”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모로 쓰러지자, 실구지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얼른 이불을 깔고 쓰러진 그녀의 몸을 안아 이불 위로 눕혔다. 그녀는 축 늘어지는 상황에서도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에서 그냥 마음뿐이었다. 눈물이 계속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실구지가 일어나 방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자 촛불이 심하게 흔들리다가 마침내 꺼졌다. 방안이 다시 어둠에 싸이긴 했지만, 달빛이 스며들어 사물의 윤곽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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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민속문화재 8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농가주택(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햇살로105번길 36-7)

 

실구지는 쓰러진 내은이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정 때문에 욕심을 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았네. 내가 알았어. 오늘은…… 그냥 갈게. 암…… 그렇지.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지. 내일 낮에 다시 오겠네. 그때 다시 얘기하세……. 잘 생각해 보라구.”

 

그는 더 시간을 끌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그는 얼른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섰다.

술기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조심스레 마당을 지나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물레방앗간을 지나 집으로 돌아갔다.

 

내은이가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간이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두 동생이 자신을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힘이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도로 누웠다. 동생들이 와락 그녀 품에 안기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누운 채로 얼굴을 돌려 방안을 훑어보았다. 실구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비로소 안도했다. 설마 동생들이 눈치챈 건 아니겠지.

“너희들 밥은 먹었니? 응?”

두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아. 좀 피곤했을 뿐이야. 나 좀 일으켜 주렴.”

 

두 동생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는 동생들을 꼭 안아주면서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동생들의 귀에 대고 괜찮다고 속삭였다.

큰동생이 방안에 갖다 놓은 조반 그릇의 보자기를 걷어내고 내은이 앞으로 가져왔다. 고깃국에 하얀 쌀밥과 반찬 몇 가지가 있었다. 밥과 국은 아직도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언니. 밥 먹어야지. 배고프잖아.”

그녀는 무척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밥을 먹는 것조차도 힘들 만큼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집어주는 밥숟가락을 들고 흐느꼈다. 세 자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동생들을 사립문 밖을 돌아보면서 봄 경치를 감상하라고 내보낸 그녀는 툇마루 모퉁이에 앉아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간밤에 모든 것이 실구지 형제와 처남 박실의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확인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부모님이 남긴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과 동생들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모든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 자기와 동생들을 겁간하여 자기들의 처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합법적으로 빼앗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까운 친척도 없는 마당에 과주로 이주까지 했으니 누가 찾아올 리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실구지의 말 대로라면 내은이 가족이 누구의 도움 없이 이 골짜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녀는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이 골짜기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자매들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상태인 셈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너무 무서워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바가지로 물을 들이켰다. 갈증이 가시면서 배고픔이 밀려왔지만,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세숫대에 물을 담아 간단하게 얼굴을 닦고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사립문을 열고 느티나무 아래에 펴놓은 평상에 걸터앉았다. 멀리 물레방앗간 주변으로 들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게 보였다. 동생들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마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 가에서 놀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 걱정스러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느티나무 잎사귀를 올려보며 그녀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이제 자기 몸은 더럽혀졌고 이런 몸으로 어느 양반가의 총각과 혼인한다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또 눈물이 흘렀다.

‘이대로 실구지의 여자가 돼야 하나?’

그녀는 강하게 도리질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떡하지……? 이곳을 벗어나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지와 만복이가 아직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선 먼저 두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고 도움을 받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사흘이 지나도록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그들도 감시받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녀는 모질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수모를 갚으려면 일단은 고통을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그런 방법밖에 없어……. 할 수 없지. 내 반드시…… 반드시 이 원수를 갚을 거야.’

그녀는 뭔가 굳게 작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양털 구름 몇 조각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해가 서산에 걸칠 때까지 느티나무 밑 평상에 앉아 있었다. 동생들이 개울가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일어나 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몹시 시장기를 느꼈다. 

동생들이 웃으면서 달려와 그녀에게 안기자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두 동생을 꼭 껴안았다. 


해가 지자 갑분이가 저녁밥을 이고 올라왔다. 툇마루에 밥상을 차려 놓으면서 갑분이는 계속 내은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갑분이에게 수고했다는 덕담을 하고 돌려보냈다. 

 

갑분이는 뭐가 그리 궁금했는지 요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자꾸 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대답은커녕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동생들과 재미있게 조잘대며 먹는 것을 보고 인사를 하고는 사립문을 열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내려가면서도 몇 번을 돌아보곤 했다.

 

그녀는 갑분이의 행동을 보면서 실구지 형제들의 계획이 세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좀 더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위가 어둑해지고 그녀는 두 동생을 씻기고 지난밤처럼 일찍 재웠다. 오늘 밤에도 틀림없이 실구지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낮에 개울가에서 나물을 캐며 즐거워하던 동생들은 피곤했던지 일찍 잠이 들었다.


삼경이 가까워지자 사립문을 열고 실구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른 날보다 좀 일찍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는 내은이 방에 불이 켜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던 실구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씨. 주무시는가요? 아씨……”

 

방안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실구지가 짐짓 헛기침하면서 툇마루에 올라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응……?”

예상과는 달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사이에 설마 내은이의 마음이 풀렸을 리는 없을 텐데…….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내은이가 촛불을 켜놓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어젯밤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사이에 아씨 생각이 정해진 모양일세. 허어…… 다행이로구먼. 그래야지. 그래야 서로 좋은 거야. 잘 생각한 거지. 근데…… 이불도 깔아놔야지. 서방이 왔는데. 흐흐흐…….”

실구지 앉으면서 씩 웃었다. 방안에 계속되던 고요함이 흐트러지면서 촛불이 심하게 흔들렸다. 

 

“조용히 하거라. 아이들이 자고 있다.”

내은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윗방을 기웃거렸다. 윗방에서 자는 동생들이 신경이 쓰였다. 실구지도 알았다는 표시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는 시늉을 했다.

 

“내 오늘은 자네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답을 받으려 하네.”

“자네……? 지금 아씨가 나더러 자네라고 했는가?”

“왜 그러나? 그게 싫으면 다시 예전처럼 하대하겠다.”

“아니……아니. 아니지. 아니야. 고맙지. 그렇게 불러주니. 흐이구야……. 진작 그랬어야지. 근데…… 근데 뭘 물어보려고? 물어보슈. 내 얼마든지 들어줄게.”

 

실구지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머리를 크게 흔들며 반색했다. 그는 흥분되고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지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전이 하인더러 자네라고 부르는 예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미 실구지 자신을 하인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느낀 것이다. 

 

실구지는 순간 감동한 나머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내은이는 정말 자기 여자가 되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촛불이 심하게 흔들리자 실구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내은이는 그가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들뜨자,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내은이가 뜸을 들이자 실구지가 재촉했다.

“뭔 얘긴지 빨리 말해 보소. 내가 다 들어줄 거니까. 응?”

“그러면 내가 몇 가지 조건을 말하겠다.”

“조건? 무슨 조건인지 다 말해 보소. …… 이제 우리 식구가 되는 건데…… 까짓거 뭐 별거 있나? 얼른 말해 보소.” 

 

실구지가 눈을 크게 뜨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내은이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말하는 걸 자네가 다 들어주면…… 그러면…… 나도 자네가 하자는 걸 깊이 생각해 보겠네. 안 그러면…….”

“아니…… 아니. 말해 보라니까? 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거니까 말이야. 어서 말해 보소. 어서.”

 

실구지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분명 지금 예상치 못한 내은이의 반응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내은이는 다시 한번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실구지의 반응을 살피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은이는 먼저 이곳에서 지금처럼 살 수 없다고 전제한 다음,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예전 한양에 있을 때처럼 연지와 만복이를 이 집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허락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과 한 식구와 다름없이 살아오면서 불편한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 줘야 살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여기서 살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포함하여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감시하지 말고 편하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편하게 살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두 가지를 보장해 주는 것을 약속한다면, 실구지가 요구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이제 갓 16세가 지난 어린 소녀로서는 여간 당돌한 제안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병 든 부모의 병시중을 도맡아오면서, 장차 자신이 홀로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을 늘 해왔다.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고난을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까운 친척도 없었으므로 오로지 몸종 연지와 마당쇠로 자란 만복이를 믿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전을 찾아 읽으면서 각오를 단단히 다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고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일어났으므로 그녀로서는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 것이다.


내은이가 말을 마치고 소반에 따라놓은 물을 마셨다. 촛대의 초는 벌써 반쯤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실구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은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알았네. 무슨 말인지 알았어. 두 가지라……. 그 두 가지 요구를 들어주면 내 색시가 되어주겠다…… 이건가?”

“아니다. 생각해 보겠다는 거지. 그 두 가지를…… 들어준다면…… 말이다.”

 

내은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실구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바뀔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실구지가 대답하지 않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에게는 여삼추같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길동이와 갑분이도 충분히 잘 보살펴 드릴 거야. 내가 잘 해드려야 한다고 말해 뒀으니까……. 감시하는 거야 뭐…… 아씨들이 도망이라도 가면 곤란하니까 그러는 건데……. 사실…… 그걸 가지고 뭐…… 감시라고 하면 좀…… 그렇고…….”

“만약……”

 

내은이가 실구지의 말을 끊었다. 넋 놓고 자기 얘기만 하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만약? 만약…… 뭐…… 어쩌겠다고…….”

“만약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나는 자진(自盡)할 거야. 여기서 자진하고 말 것이야.”

그녀가 손가락으로 실구지를 가리키며 목소리는 낮았지만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가 놀라 상체를 뒤로 젖히며 물러났다.

“뭐라고? 자진…… 자진한다고?”

“그렇다. 네 놈이 감히 나를 네 놈의 노리개로 삼으려는 것이구나? 내가 굳이 이 골짜기에 갇혀서 너희들에게 짐승처럼 대우받으며 살 이유가 없느니라. 내 마땅히 죽음으로써 이 능욕을 벗어날 것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서슬이 시퍼렇게 느껴졌다. 그는 상황이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몹시 당황했다.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치맛자락 끄트머리를 살짝 잡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아니야. 내가 다 들어줄게. 잠시 진정하라고. 잠시. 내 말 좀 들어보고 얘기하자고. 응?”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연지와 만복이를 그녀 자매들과 함께 거주하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조하면 그녀 가족을 감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자신의 요구도 받아달라고 했다. 그가 요구하는 내용은 그녀가 예상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자의든 타의든 서로 합방했으므로, 자기를 서방으로 믿고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골짜기에서 단란하게 가족으로 살면서 돌아가신 이 판서와 부인의 삼년상과 제사를 이어가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소름이 돋는 말이었지만 이 골짜기에서 실구지 형제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면 받아들이는 척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을 생각해 보는 척, 시간을 끌면서 그를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구지는 내은이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생각해 보겠다고 하자 마음이 들떴다. 무척 흥분되는 일이 아닌가? 오랜 세월 동안, 이 판서댁 노비로 일하던 자신이 이제 이 판서댁의 사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뛸 듯이 기뻤다.

 

마침내 내은이는 실구지에게 연지와 만복이가 위채로 올라와 예전처럼 시중을 받으며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내일부터 당장 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로서는 일단 첫 단추를 끼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바탕 입씨름하며 펼치던 신경전이 금방 마무리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실구지가 슬그머니 촛불을 껐다. 방안이 다시 어둠에 잠기고 달빛에 겨우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어둠 속에서 실구지가 겉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덮쳐오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순순히 그를 받아들였다. 만약 약간이라도 반항해서 그의 기분을 거스르기라도 하면 방금 겨우 받아낸 약조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는 오랜 시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요하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 베개를 적셨다. 사경을 훨씬 넘겨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그가 곁에서 잠이라도 들까 봐 그를 밀어냈다. 그는 방을 나서면서도 그녀의 귀에 대고 약속을 잘 지키라고 말했다. 그녀도 그에게 약조한 것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아내는 걸 잊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모로 누워 흐느끼다가 잠이 들었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 되자, 만복이와 연지가 위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은 ‘아씨, 아씨.’하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작은 아씨 두 사람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뛰어나가 연지에게 안겼다.

만복이는 엉거주춤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내은이가 있는 방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아씨. 내은이 아씨. 저 왔습니다요. 저…… 만복이 하고 연지가 왔습니다요. 아씨……”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면서 내은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내은이의 모습을 본 연지가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평소 익히 봐오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씨…… 죄송해요. 아직 기침(起寢)하지 않으셨네요.”

“아니다. 요즘…… 내가 좀 피곤하고……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내 정리하고 나가마.”

 

잠시 후, 내은이가 툇마루로 나오자 연지와 동생들이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고 울음바다가 되었다. 서로 어떻게 된 거냐면서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또 흐느꼈다. 

 

만복이는 뻘쭘하게 서 있다가 사립문으로 가서 아래채 쪽을 바라보며 동정을 살폈다. 혹시 누가 오는지 이리저리 살폈으나 아래채 쪽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연지가 어린 아씨들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자, 내은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두 동생에게 사립문을 나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놀게 하고 연지와 만복이를 불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지난 나흘 동안 아래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자세히 물었다. 

 

이사 오던 날 밤에 실구지 형제와 처남 박실 가족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잔치 분위기부터 오늘까지 여러 가지 수상했던 행동들에 대해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보고들은 내용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특히 실구지가 자신들을 아씨 자매로부터 떼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것과, 이 골짜기로 올라오는 마을 사람들까지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 등도 이상했다고 털어놓았다.

 

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내은이는 연지가 뭔가 말할 듯하다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인데, 막상 말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내은이가 주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만복이가 얼른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으로 나가 밖을 살폈다. 아래채 쪽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보이긴 해도 가까이에는 인적이 없었다. 느티나무 밑에서는 작은 아씨들이 공기놀이하며 재미있는 듯 깔깔대고 있었다.

 

만복이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내은이가 연지에게 무슨 말인지 어서 말하라고 채근했다. 

“예…… 그런데…… 그게…… 좀……”

“괜찮아. 여기 아무도 없잖아. 무슨 말인데 그래?”

“아…… 예. 그게…… 갑분이가 부엌에서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요……. 그게…… 너무 황당해서…….”

그녀가 다시 괜찮다면서 채근하자, 연지가 머뭇거리며 만복이 쪽을 보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 글쎄…… 실구지가 아씨에게 장가들…… 거라고 했대요. 자기가 뭐…… 판서댁 사위가 되기로 했다면서……. 글쎄…… 하도 말 같지 않아서…….”

“그래서……? 계속해 보거라.”

 

연지는 그녀가 뜻밖에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보며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연지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실구지의 처 복실이가 이 얘기를 듣고 길길이 뛰며 난리가 났대요. 두 사람이 대판 싸웠나 봐요. 복실이가 실구지한테 얻어맞았는지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얼굴이 못쓰게 됐나 보더라고요. 근데 아씨. 이 말이…… 대체 무슨 말……”

“알았다. 무슨 말인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야.”

“그리고 실구지가 만복이와 쇤네를 불러 앞으로 아씨 자매는 저들이 모시기로 했다고 하면서…… 위채로 올라가지 말라고…… 올라가면 가만 안 둔다고……. 그래서…… 그래서 못 올라왔지 뭐예요.”

 

연지가 훌쩍거리면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연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느닷없이 우리를 불러 앞으로 예전처럼 위채로 올라가서 아씨 자매를 잘 모시라고 하지 뭐예요. 거기에다 아예 위에서 같이 살면서 모시라고…… 흑흑흑…… 그래서 이렇게 올라왔구먼요. 아씨…… 미안해요. 아씨. 흑흑흑……”

 

연지는 그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연지를 감싸 안으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느 정도 짐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실구지 형제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내은이는 만복이를 불러 두 사람과 함께 툇마루 모퉁이에 걸터앉았다. 거기에서는 멀리 아래채에 사람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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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주택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내은이는 비장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그녀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는 먼저 연지가 들은 내용이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구지 형제가 꾸미고 있는 일이 바로, 이 판서댁 재산을 노리고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을 자기 처로 삼기 위해서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차마 실구지에게 이미 여러 차례 겁간을 당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골짜기에서 탈출해 관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두 사람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이니 되도록 빨리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은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씨……” 

연지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안절부절못했다. 만복이는 사립문에 다가가 아래채 쪽을 유심히 살피다가 돌아왔다. 그녀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다가섰다.

 

“연지는 우선 패물을 다시 챙기거라.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아직 패물 상자를 챙겨보지 못했구나.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이야. 그리고 사람이 많고 분주할 때 움직여야 하니…… 만복이는 닷새마다 열리는 과주 장날이 언제인지 빨리 알아보거라. 혹시라도 왜 묻느냐고 하거든, 급히 이사를 오너라 부족한 게 있어서 아씨가 장에 가서 사야 할 물건이 좀 있다고 하시더라고 말을 흘리거라.”

 

두 사람은 열심히 그녀가 하는 말을 새겨들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심호흡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초승달로 바뀐다. 달이 없는 밤이니 움직이기 좋을 거야. 우리가 움직이는 날은 바로 장날 새벽이다. 조용히 이 골짜기를 빠져나가면 즉시 사람이 많은 곳으로 들어서야 한다. 그리고 관가로 바로 달려가야 한다. 만복이는 과주 관가가 어딘지 빨리 알아놓고…….”

 

“염려 놓으세요. 아씨.”

만복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아씨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자, 두 사람은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게 아니고 우리가 모두 함께 같이 움직이면 금방 탄로가 나고 말 것이야. 그러니 누군가는 남아서 우리가 되도록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최대한 끌어주어야 한다.”

“어떻게요……? 어떻게 하면 돼요?”

연지가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그녀는 다시 사립문 쪽을 힐끗 살피고 연지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연지야. 네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다.”

“걱정하지 마시고 뭐든 말씀하세요. 아씨.”

“고맙구나. 연지야. 이렇게 하자.”

그녀는 연지의 손을 잡았다.

“내가 먼저 만복이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거야. 그러나. 얼마 안 가 들통이 나거나 의심을 받을 거야. 이때 네 도움이 필요하다. 네가 동생들과 여기 남아서 시간을 끌어줘야 한다. 연지. 네가 잘해 줘야 성공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지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내은이는 연지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떠나는 날 새벽에 동생들이 자는 동안에 내가 만복이와 함께 조용히 빠져나갈 거야. 연지 너는 동생들과 함께 아침까지 모른 체 하고 그냥 자면 돼. 아침에 누가 와서 깨우고 소동을 피우더라도 모른다고 잡아떼야 해. 그들이 자꾸 다그치면 오늘이 장날이 아닌가요?… 하고 되묻는 거야. 맞는다고 하면 그때 가서 아하…… 아씨가 장날 아침에 일찍 물건을 사러 간다고 그랬는데…… 아마 거기에 갔을 거라고 둘러대는 거야.”

 

“만복이는 어디 갔냐고 물으면요?”

“그거야 당연히 아씨 모시고 장에 갔겠죠…… 하고 능청을 떨어야 해. 동생들도 내가 장에 간 것으로 알고 있어야 해. 연지. 네가 동생들에게 그렇게 말해 둬. 언니가 장날의 장에 가서 예쁜 노리개 사다 줄 거라고 말이야. 이건 절대 실수하면 안 돼. 알았니?”

연지는 약간 두려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내은이는 계속 그녀에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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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그리고 만복이에게 몇 가지를 지시했다. 우선 장날이 언제인지 알아볼 것과 과주 관청의 위치 그리고 위채에서 물레방앗간과 아래채를 거치지 않고 시장통으로 이르는 지름길이 있는지 등을 자세하게 알아볼 것 등을 주문했다. 또,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챙긴다는 핑계로 아래채를 오가며 저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무슨 낌새라도 있으면 즉시 알리라고 일렀다. 

 

“나는 장날을 이틀 남기도 몸이 아프다고 드러누울 거야. 두 사람은 아무도 내 방안으로 사람이 못 들어오게 하거라. 만복이는 아래채에 내려가서 육포가 있는지 살펴보고 조금 챙겨놓거라. 달아나면서 배가 고프면 밥 먹을 장소도 시간도 없다. 모두 실수 없도록 해야 한다.”

 

내은이는 말을 마치고 만복이에게 먼저 아래채로 내려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장날이 언제인지 빨리 알아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말을 아끼고 진중하게 행동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에게는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만복이가 아래채로 내려가자 그녀는 연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패물 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내은이가 세운 탈출계획은 열여섯 어린 소녀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정교했다. 

오후 늦게 올라온 만복이는 이틀 후가 과주 장날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별로 없다.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두 사람을 다시 불렀다.

 

“해가 지면 실구지가 올라올 거야. 그러면 실구지에게 아씨가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미 기다리고 있다고 안심시키고 내 방으로 들이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실구지가 나올 때까지 사립문 밖에서 누가 오는지 살펴보거라.”

 

“괜찮을까요? 아씨?”

연지가 겁도 나고 걱정이 되어 물었다.

“괜찮다. 내 오늘 그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만약 방에서 무슨 큰소리가 나더라도 모른척하고 가까이 오면 안 된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모든 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이야.”

연지와 만복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씨의 태도가 워낙 씩씩해서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연지에게 저녁 식사를 일찍 준비하라고 이르고, 만복이는 실구지가 올 때쯤 해서 부엌에서 탕약을 끓이라고 말했다. 그가 물으면 아씨가 몸이 아파 약을 달이는 중이라 하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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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둑해지자, 실구지가 사립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약 냄새를 맡고 코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섰다. 만복이가 탕약을 끓이다가 실구지를 보고 일어나 인사했다.

“형님. 오셨어요?”

“그래. 응?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예. 아씨가 아프다고 몸져누우셨어요.”

“응? 어디가 아프시대? 어디…… 방에 계시나?”

실구지가 부엌을 나서면서 내은이 방으로 향했다. 만복이는 얼른 실구지를 따라가며 말했다.

“자금 방에 누워 계세요. 아무래도 과로하셨나 봅니다.”

내은이 방 앞에 이르자 만복이가 방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씨. 실구지 형님 오셨습니다요.” 

 

내은이 방의 문이 열리더니 연지가 나왔다. 그녀는 실구지를 안으로 들라는 시늉을 했다. 실구지는 거드름을 피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내은이는 머리에 수건을 싸매고 있었다. 

“아씨. 어디가 아프시오? 어제까지 멀쩡하시더니…….”

내은이가 몸을 일으키며 만복이와 연지를 향해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연지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마당으로 물러났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이불을 걷어내고 자세를 고치자 촛불이 휘청거렸다. 실구지가 얼른 촛대를 감쌌다.

“잘 듣게.”

내은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짐작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말을 거침없이 꺼냈다. 이제 시간은 이틀뿐이다.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한 가지 지켜주어야 할 일이 있네.”

“뭔데 그러시나……? 조건은 다 들어주었는데…… 또 있다고……?”

실구지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연지와 만복이 그리고 내 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자네가 양반인 나를 처로 삼으려면 그럴싸한 명분을 들어서 그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이해시킬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일리 있는 말에 실구지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두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면 나로서도 어려운 일이지. 양반가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실구지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촛불에 비친 그의 얼굴에 고민스러운 표정이 스쳐 갔다. 내은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네는 이미 처자식이 있는 몸이 아닌가? 지금 내가 자네를 서방으로 맞는다면 주인 양반인 내가 내 집의 종에게 첩실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닌가? 이게 만약 바깥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나부터 먼저 자진하고 말 걸세. 그렇게 되면 아마 자네도 결코 온전하지는 못할 것이야. 나라 법이 지엄하니……”

 

그녀의 말은 너무나 조리가 있어서 그로서는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실구지가 해결할 수 없는 약점을 파고든 것이다. 

내은이의 입에서 또 자진한다는 말이 나오자 실구지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한 마디 덧붙였다.

 

“솔직히 내가 이왕 몸도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자네와 합방하고 살고 싶네만……. 어쩌겠나.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 문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내가 한나절이나 이 문제로 고민하다 보니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나 보네.”

“그…… 그럼…… 내가 어찌해야 하는가?” 

“하긴 뭘 어떻게 해? 제일 먼저 처자식 문제를 해결하고 혼자 몸이 돼야지. 그래야 일의 순서가 맞지. 주인 양반인 내가 설마 집안 종의 첩실로 들어앉으란 말은 아닐 테지……? 안 그런가?”

“알았소. 며칠간 말미를 좀 주시오. 내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하고 오리다.”

“좋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위채로 오지 말게. 그래야 나도 떳떳하게 연지와 만복이를 설득할 수 있으니까. 약조하게.”

 

실구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내은이가 여러 번 채근하자 그제야 할 수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내 몸이 좀 아프니 그만 나가주게. 밖에서 지켜보는 눈도 있으니……. 그리고 약조했으니 빨리 해결하게. 나도 빨리 홀가분하게 자네와 합방이라도 할 게 아닌가? 기다리겠네.”

실구지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귓가에는 기다리겠다는 내은이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실구지가 아무 일도 없이 밖으로 나오자 만복이와 연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실구지가 사립문을 나가 물레방앗간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내은이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약속대로 실구지는 다음 날 위채에 나타나지 않았다. 만복이와 연지는 내은이의 지시를 받고 아래채를 오가며 아씨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흘리면서 동정을 살폈다. 

 

지난밤에 실구지가 처 복실이와 여자 문제로 크게 싸우면서 가재도구를 마구 부수는 소동이 있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실구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랫동네 주막거리로 내려가서 술이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고는 집에 와서 또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아래채의 분위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내은이는 쾌재를 불렀다. 모든 일이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내일 새벽에는 만복이가 미리 알아놓은 지름길을 이용해 과주(果州) 관아로 내달리는 것이다.

 

내은이는 신중히 처리하려고 만복이를 불러 아래채로 내려가 실구지를 꼬드기라고 시켰다. 실구지 내외가 싸웠다는 소식을 들은 아씨가 실구지 형님 안부를 걱정하더라는 말을 은근히 흘리라는 것이었다. 화를 더 돋우면 그가 또 주막을 찾아 술을 마실 것이고 밤새 곯아떨어지면 달아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내은이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가 실구지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는 만복이의 말을 들은 그는 내은이가 마치 자기 여자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도 아래채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초저녁부터 일찍 잠이 들었던 내은이는 멀리 사찰에서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연지와 만복이를 불렀다. 만복이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놓고 내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은이는 만복이에게 다시 한번 조용히 아래채로 내려가 동정을 살피고 오라고 시켰다. 그믐이 가까워진 때라서 달빛은 없었다. 하늘에는 펼쳐진 은하수 사이로 별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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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어두운 소로를 따라 물레방앗간을 지나 아래채 담장으로 다가간 만복이는 조심스럽게 아래채의 동정을 살폈다. 누렁이가 만복이의 기척을 알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만복이는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발소리를 죽이고 마당을 가로지른 후, 뒷간을 돌아 다시 입구 사립문으로 나왔다. 방마다 불빛은 없고 적막에 싸여 있었다. 실구지가 자는 방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만복이가 물레방앗간으로 걸음을 옮기자 누렁이가 앞장섰다. 위채로 올라온 만복이는 내은이에게 아래채는 조용하다고 알렸다. 내은이는 두 동생이 자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당으로 나온 그녀는 연지의 귀에 대고 두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눈물을 훔쳤다. 연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 흐느꼈다. 그녀는 연지를 꼭 안아주면서 걱정하지 말고 동생들을 부탁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만복이는 안채로 들어가 미리 꾸려놓은 등짐을 등에 지고 나왔다. 등짐을 짊어진 만복이가 뒷간 옆의 작은 문으로 내은이를 안내했다. 내은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연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연지도 울음을 참아가며 손을 흔들었다. 

 

어둠은 금방 두 사람을 삼켰다. 연지는 두 사람이 사라진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씨가 있던 방을 바라보며 연지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흐느끼다가 조용히 작은 아씨들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뒤로 이어진 밭으로 들어선 내은이는 앞서 달리는 만복이를 따라 뛰었다. 두 사람은 밭고랑을 지나 산자락 지름길로 들어섰다. 

평지가 이어지자 두 사람은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누렁이도 따라 뛰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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