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사학의 전당,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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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 해설사 심상태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
연일 이어지는 폭염 속에서 사람들은 바다와 그늘과 바람을 찾아 쉼터로 발길을 옮긴다. 그러나 진정한 쉼터는 단순히 몸을 식히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선현들의 지혜와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곳, 바로 서원(書院)이다.
울진 곳곳에 자리한 서원은 그 자체로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품고 있다. 서원은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온 민간 사학의 전당이었다. 그 속에서 길러진 수많은 인재가 지역과 나라의 미래를 이끌었다.
오늘날 서원은 잊힌 공간이 아니라, 다시금 주목해야 할 정신적 휴식처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의 갈증을 느끼는 이 시대에 서원이 지닌 전통 교육의 가치와 정신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울진의 서원은 더위를 피해 머무는 그늘을 넘어 이 시대가 되살려야 할 정신적 자산이자 문화적 쉼터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싶다면 추석 연휴를 맞아 경북 지역 유네스코 등재 서원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서원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찌든 육체와 마음을 쉬게 하는 휴식처가 되어 줄 것이다. 여름철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되찾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서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원의 시원(始原)과 정신
서원(書院)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 때 세워진 여정수서원(麗正脩書院)에서 비롯된다. 이후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으로 이름이 바뀌며 학문연구기관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황실 주도의 학술 기관이었다. 그러나 한국 서원의 성격은 달랐다. 조선시대 사림이 직접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기능 면에서도 차이가 뚜렷하다.
중국의 서원이 주로 서적을 보관하고 편찬하며 황제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았다면, 조선의 서원은 학문을 가르치는 강학(講學)뿐 아니라 선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향사(享祀)까지 담당했다. 그래서 서원은 단순한 학술 기관을 넘어 정신적·문화적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조선 전기에 본격적으로 세워진 서원은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의 장이자, 선현을 기리는 제향의 장이었다. 동시에 향촌 사회의 유교적 질서를 지키고, 때로는 시정을 비판하며 사림 공론을 모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우리가 서원을 다시 찾는 까닭은 단순히 옛 건축물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선현들의 정신 그리고 지역 사회와 나라를 일깨우던 사림의 목소리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산실 그 첫걸음은 백운동·소수서원
1542년, 영주 풍기군수 주세붕은 고려 말 대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작은 사묘를 세웠다. 이어 이듬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서원을 건립했는데 바로 백운동서원이다. 안향의 옛집에 세워진 이 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로 꼽힌다.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백운동서원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조정에 지원을 건의했고 조정은 서적과 토지, 노비를 하사하며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소수서원은 4천여 명의 제자를 길러내며 전국적으로 서원 설립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울진 출신 격암 남사고 선생을 비롯한 7명이 소수서원 원생으로 등록한 기록이 울진 남사고 기념관에 남아 있어 울진과 서원의 역사적 연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배움과 성찰의 공간 그리고 학문
서원은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자리했다.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 원칙에 따라 정문에서 누각, 강당, 사당 순으로 배치되었고,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입구의 홍살문은 속세와 성역을 구분하며 서원이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닌 신성한 제향의 장소임을 보여준다. 또한 서원이 지역 사학의 전당이자 인재 양성의 핵심 시설임을 알림으로써 서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서원에서는『소학』,『대학』,『논어』,『맹자』등 유교 경전을 교재로 삼았다. 유생들은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서로 문답하며 의리를 탐구하며 학문을 쌓았다.
교학은 원장과 강장, 춘장이 지도했고 운영은 윤번제로 선출된 유사가 맡았다. 서원의 학문적 기반은 송시열, 김장생, 김집 등 당대 학자들이 다졌고 이황, 이이, 조광조 등은 성리학을 발전시키며 서원의 지적 토대를 한층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의 산실이자 유교 정신을 이어가는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백운동서원과 소수서원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조선 사림의 정신과 교육, 제향의 가치가 담겨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서원을 찾는 이유도 그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고 마음의 쉼터로 삼기 위해서다.
서원, 그림자와 개혁
조선 선조 시기 서원은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사화가 발생하고 벼슬자리를 둘러싼 당파 간 대립이 붕당정치로 이어지면서 서원은 정치적 경쟁과 분쟁의 한 축이 되었다.
서원을 중심으로 인재들이 사회·경제적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일부 양민은 서원의 노비로 들어가 군역을 피하고, 유생들은 학문보다는 붕당 형성에 몰두하며 국가 분열이라는 폐단을 초래했다.
영조, 정조, 철종 등은 서원 정비를 위해 노력했지만, 특권계급의 이해관계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644년(인조 22년) 서원 설립을 허가제로 하고 원장은 관찰사가 선임하도록 했으며, 1676년(숙종 2년)에는 기부금 모집을 금지하고, 1710년(숙종 36년)에는 사액서원의 원생 정원을 20명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서원을 입신출세의 통로로 삼았고 전국적으로 사액서원 설치 요구가 증가하면서 폐단은 계속되었다.
결국 1864년(고종 1년) 전국 서원 현황 조사가 이루어졌고,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은 오랫동안 나라 재정을 소모하고 농민을 괴롭힌 서원을 정비하고자,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서원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줄이면서 양반층의 경제력과 세력을 약화시키고, 향촌 사회 질서와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효과도 있었다.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자 문화유산이지만, 그 역사에는 학문과 교육뿐 아니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폐단이라는 그림자도 함께 남아 있다.
이 가운데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은 9개이며, 그중 경북 소재 서원이 5개로 이들은 조선시대 유학교육과 지방 사회 교육의 중심지로서 전통 교육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아 왔다.

울진 서원, 살아 있는 전통 공간으로
경북 울진에는 조선시대 학문과 인재 양성의 산실이자 지역 자치의 중심이었던 수백 년 역사의 서원들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서원은 귀중한 문화유산이자 지역 자산이지만, 일부 제향과 학술 활동에 머물러 있어 대중과의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서원을 단순한 유적이 아닌 ‘살아 있는 전통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탐방길 조성, 야간 개방, 계절별 문화행사, 지역 축제와 연계한 스토리텔링 관광 코스 등은 울진 서원을 새로운 명소로 만들 수 있다.
서원은 인성교육의 자원으로서도 활용 가치가 크다. 청소년 인문학 캠프, 전통 예절 교육, 고전 강독회 등 체험형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역사 교육을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다. 지역 학교와 연계하면 ‘열린 교실’로 기능하며 학부모와 교사들의 참여도 유도할 수 있다.
지역문화와의 연계도 주목할 만하다.
서원 마당에서 전시회, 전통 음악 공연, 향토 음식 체험 등을 열면 전통과 현대, 주민과 관광객이 어우러지는 문화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지역 기업·단체와 협력한 ‘서원 브랜드 상품’ 개발도 가능하다. 물론 보존과 상업화의 균형, 주민·학계·행정 간 협력 거버넌스 구축, 지속 가능한 프로그램 운영은 여전히 과제다. 이를 해결할 때 울진 서원은 과거와 현재, 지역과 관광객을 잇는 살아 있는 문화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특히, 안동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처럼 체험 중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울진 향교에 있는 유림을 재교육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울진 서원의 자산을 활용한 새로운 활용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한편, 현존 울진 서원 가운데 문화재 규모와 장서 보유, 유림 문중의 참여 정도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월계서원이 다른 서원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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