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5화(마지막회)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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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참 혜음원(복원도)
그 시각, 내은이와 만복이는 남태령 아래 주막을 지나 역참 부근에 이르렀다. 내은이는 발에 물집이 터져 덧나는 바람에 도저히 더 걷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체력도 거의 바닥이 난 데다가 허기도 졌다.
두 사람은 역참 가까이에 이르자 주막을 찾아 들었다. 국밥을 시켜놓고 만복이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나오자 내은이는 만복이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숟가락을 들었다. 양반 체면이고 뭐고 따질 일이 아니었다.
밥알이 몇 숟갈 들어가자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너무나 힘들게 남태령을 넘어온 터라 아무리 참아도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내은이는 숟가락을 손에서 놓지도 못하고 그대로 탁자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만복이도 배는 고팠지만, 이 상태로는 아씨가 더 걸을 수 없다고 보고 말이나 우마차를 빌릴 생각으로 주막을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 바로 역참 맞은 편에 빌려주는 곳이 있어 들어가 흥정을 시작했다.
장날이라 운송수단을 빌리는 사람이 많아 가격을 비싸게 불렀지만, 그나마 빌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말은 없어서 빌리지 못하고 대신 작은 우마차 하나를 빌렸다. 목적지는 노량나루나 동작나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이 동작나루여서 거기를 선택했다.
만복이는 흥정을 마치고 짐꾼들이 우마차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주막으로 돌아왔다. 아씨는 가슴에 품고 있던 보따리에 얼굴을 묻고 탁자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만복이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겨우 열여섯 꽃다운 어린 나이가 아닌가? 그는 혹시 아씨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한쪽 구석에 앉아 국밥을 빠르게 비웠다.
그러는 사이에 우마차가 도착했다. 만복이는 조심스럽게 아씨를 깨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안내하여 조심스럽게 우마차에 태웠다. 잠이 덜 깬 내은이였지만 만복이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그의 행동이 너무 믿음직스러웠다. 두 사람을 태운 우마차는 덜커덕 소리를 내며 동작나루로 향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1첩에 실려있는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동작나루(銅雀津)는 지금의 반포아파트 서쪽의 이수천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던 나루터로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동재기나루, 동작도(銅雀渡)라고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루 위쪽에 모노리탄(毛老里灘)과 기도(棋島)가 있다.”라고 기록돼 있고,『해동지도』와『조선지도』,『대동여지도』 등을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 속에도 동작나루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에 속하였다가 한강에 여러 다리가 설치되면서 나루(津)의 구실은 없어졌다. 특히 이 부근에 동작대교가 설치된 후로는 한강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과천으로 통하는 교통로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동작나루는 서울과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한 나루는 아니었다. 당시 도성 주변 성저십리 지역에는 아직 거주민도 많지 않아서 이곳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동작나루를 건너더라도 남쪽으로는 남태령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남산이 앞을 막고 있어서 서울과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의 양쪽이 평지로 되어 이동하기가 훨씬 편리한 마포나루와 노량 나루를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양 도성에 인구가 늘어나고 물자 수요가 늘어나자, 경강(京江) 지역의 강변을 따라 여러 나루터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배를 이용하여 물자 공급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강 지역이 전국적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경강(京江)이란 조선시대 한양의 뚝섬에서 양화나루에 이르는 한강 일대를 이르던 말인데, 이 지역을 따라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세곡(稅穀), 물자 따위가 운송되거나 거래되었다. 특히 수원 화성이 건설되어 서울과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동작나루도 남쪽 지방과 통하는 주요 나루터의 하나로 기능하게 되었다.
인구의 이동과 도성의 편리한 물자 공급을 위해 조정에서는 한강나루와 노량나루, 양화나루를 관에서 직접 관리하는 관진(官津)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에 비해 교통량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동작나루는 관에서 관리하지 않았다.
동작나루는 본래부터 ‘험한 나루(險津)’로 알려진 데다가 관에서 나루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사람들이 나루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었다. 관청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개인이 관리하는 나루터(私津)이다 보니, 종종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나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훗날, 수원 화성이 건설되고 한양 도성과 수원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새로 개설되면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자, 관에서도 동작나루에서 강북으로 오가는 배, 진선(津船) 5척을 배치하게 되었다. 그래도 서쪽의 마포(麻浦)와 서강(西江)은 물이 깊고 넓어 큰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지만, 동작나루와 노량나루는 물이 얕아서 작고 가벼운 선박만 오갈 수 있었다.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으로 불리는 모래언덕과 기도(碁島, 바둑섬)라고 불리는 섬이 있었다. ‘탄(灘)’이란 모래톱을 말하는데, 모래가 쌓여 백사장이 형성된 곳을 이르는 말이다. 바닷가나 큰 강가의 굽이진 곳에 주로 형성되어 있다.
특히, 반포 한강공원 가까이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바둑 섬’으로 불렸던 ‘기도(碁島)’가 실제로 있었음이 옛 문헌을 통해 밝혀졌다.
즉,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기도’는 노량나루 북쪽 20리 거리에 있고,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흑석진(黑石津)’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한양의 동작동을 설명하면서 ‘북으로 18리인데, 나루 위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조오부도의 동작진 부근을 확대한 그림. 회색 원 안이‘기도(碁島)’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목멱조돈' 남산의 일출 모습(소장처. 간송미술관)
1861년 김정호가 만든『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제1첩에 있는「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는 지금의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사이의 한강에 ‘기도’가 자리하고 있다(사진 회색 원 부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양화 한강공원 내 선유도 공원의 안내센터 입구와 현관에서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그 부근의 ‘흑석동’이라는 이름의 유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 빛깔이 검은색을 띠고 있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에 ‘검은 돌 마을’이라 불렸고, 이를 한자 이름으로 바꾸면서 ‘흑석동’이 됐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흑석동 인근에 ‘기도(碁島)’라는 섬이 있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듯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관원들이 숙직 당번을 서면서 바둑을 두다가 적발이 되기라도 하면, 근무 태만이라는 죄목으로 ‘기도’로 하루 동안 유배를 보냈다는 야화(野話)도 전해지고 있어서 흥미를 더한다.
지금의 반포 한강공원의 인공섬인 서래섬 자리에 실제로 있었던 섬, ‘기도’는 한강 둔치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두 사람이 탄 우마차가 동작나루에 이르자 아침 해가 제법 솟아올랐다. 만복이는 다시 나루터에서 뱃삯을 낸 다음, 내은이를 안내해 배에 올랐다.
보부상 몇 사람과 그들을 태운 배가 나루를 빠져나가면서 동작나루가 점점 멀어졌다. 강 한 가운데에 이르러 내은이는 비로소 안심한 듯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봤다.
한강은 말없이 푸르렀다. 건너편에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자 내은이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배는 미끄러지듯 한강을 가로질러 강 건너 나루터에 닿았다.
만복이는 건너편 나루에 내리자마자 다시 한성부로 가는 말이나 우마차를 빌리려고 했다. 그러나 안내하는 사람은 오늘따라 우마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계속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급해진 만복이는 이리저리 뛰며 간신히 웃돈을 주고 숭례문(오늘의 남대문)까지 가는 우마차에 겨우 탈 수 있었다. 내은이는 만복이의 민첩한 판단과 수완에 감탄했다.
우마차가 용산을 지나면서 해는 중천에 걸렸다. 차갑던 바람도 오후가 되자 다소 누그러졌다. 어둠이 깔린 새벽에 집을 나선 지 꼬박 한나절 이상 걸린 것이다. 이제 숭례문까지만 가면 기어서라도 한성부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내은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내은이는 사당에서부터 단 몇 발짝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바닥난 데다가 발바닥이 부르터서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우마차가 남대문 시장통 입구에 이르렀다. 우마차는 계속 서대문 방향으로 가야 하므로, 내은이는 여기에서 내려야 했다. 내은이와 만복이는 동승을 허락해준 일행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고 우마차에서 내렸다.
발바닥이 땅에 닿자 내은이는 순간 극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모로 주저앉았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여들었다.
“아씨.”
만복이가 깜짝 놀라 내은이를 부축했다.
“괜찮다. 앞장서거라. 견딜만하구나.”
만복이는 그녀의 의지에 혀를 내둘렀다. 내은이가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짓자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다리는 오금이 당기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 조금만 걸음을 옮겨도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먼 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경칩이 막 지났지만, 날씨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직은 겨울이었다. 내은이는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입김을 불어 넣으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 분하고 억울함을 고변하고 동생들을 구해야 한다.’
내은이는 지난 며칠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서 끈적거리는 느낌이 계속 몰려왔다. 저고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너무 시리고 아프다.
그녀는 다시 앞섶을 가리고 쓰개치마를 둘렀다. 만복이를 따라가며 계속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아씨. 이쪽입니다요.”
만복이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고 눈빛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다리를 절뚝이며 걷기는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 이마를 찡그렸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걸었으니 눈도 절로 감겼다.
“아씨. 괜찮으세요? 좀 쉬었다 갈까요?.”
만복이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른쪽 길가 나무 그루터기 쪽을 가리키며 그녀를 끌었다.
“괜찮아. 빨리 가야지. 다 왔다면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만복이를 향해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알겠어요. 아씨. 저기를 돌아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한성부(漢城府)가 나와요. 조금만 버티세요. 도성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젠 누가 쫓아 와도 괜찮아요.”
만복이는 멀리 서 있는 느티나무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른 아침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앞장서서 길 안내를 하는 청년 노비는 그렇다고 쳐도 절뚝거리며 힘들게 뒤를 따르는 앳된 소녀의 행색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누구에겐가 쫓기는 모양새가 분명해 보였다.
내은이는 통증을 참아가며 어렵게 발걸음을 옮겼다.
기쁜 숨을 넘기며 남태령을 넘은 지 얼마나 흘렀나? 아직도 뒤에서 누가 금방 추격해 올 것 같은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만복이가 이끄는 대로 여기까지 힘들게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쳤다.
느티나무 삼거리를 돌아서자 맞은편에 한성부가 나타났다. ‘한성부(漢城府)’라는 커다란 현판이 있는 대문 입구에 서 있는 군졸들이 보였다. 마침내 도성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내은이는 믿기지 않은 듯 좌우를 둘러보았다.
만복이가 군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으리. 도와주세요. 여기요. 여기……”
군졸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달려왔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과 군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요. 고변하려 합니다. 도와주세요.”
만복이가 달려오는 군졸들을 향해 울먹이며 소리쳤다. 창을 든 군졸들이 달려오며 대장인 듯한 군졸이 만복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 아씨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요.”
상황을 직감한 대장이 군졸들에게 지시했다. 군졸들이 내은이를 부축하자 그녀는 긴장이 풀려 길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아씨. 아씨…… 한성부에 왔어요. 정신을 차리세요. 아씨. 아씨……”
“만복아……. 신문고를…… 쳐… 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아 정문 옆 망루에 설치된 신문고를 손으로 가리키며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마침내 의식을 잃은 것이다.
“들것을 가지고 오너라.”
대장 군졸이 소리치자 군졸들이 달려와 내은이를 들것에 실었다. 창백한 얼굴로 사지를 축 늘어뜨린 내은이는 들것에 실리는 동안에도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군졸들이 그녀를 싣고 한성부 안으로 뛰었다.
만복이가 울면서 내은이의 짚신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조선시대 숭례문 주변 모습(1904)
태종 4년(1404) 춘삼월 어느 날, 한성부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은 강서(姜筮)라는 인물로 조선이 개국하여 한성부를 만든 후 8번째로 임명된 관리였다.
한성부의 판윤은 조선시대 한성부를 다스리던 정2품의 관직으로서, 육조의 판사, 좌참찬, 우참찬과 함께 9경으로도 불리었다.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였고, 행정과 사법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성부의 관할 구역상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겸 수도방위사령관 겸 서울고등법원장 겸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에 해당한다.
한성부에서는 신속하게 조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여서 아직도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과도기였으므로 치안 문제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노비가 주인의 딸을 강간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국가의 기강을 뒤흔든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한성부판윤 강서는 사건의 중대성을 인지하고 사건 접수 즉시 포도대장에게 명하여 과주로 가서 신속하게 죄인 실구지 형제와 박질을 잡아들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압송한 당일부터 한성부에서는 이들을 국문했다. 처음에는 서로 억울하다고 버티던 죄인들은 고문이 시작되자, 순순히 모든 것을 자백했다.
조사를 마친 한성부에서는 바로 조사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했다. 한성부로부터 사건을 접수한 의정부에서는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의정부에서는 실구지 형제와 처남 박실의 치밀한 사전 모의 과정에 주목했다. 그래서 종(奴)이 계획적으로 상전(上典)을 능욕하여 아내로 삼아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한 것은 지능적인 범죄로 규정했다.
모든 자백을 다 받은 의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이 사건이 단순 강간 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기강(國紀)을 뒤흔든 대사건으로 간주하여 이 사건을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의정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어전회의에서 태종에게 직접 보고했다. 보고받은 태종 이방원은 크게 노했다. 그는 바로 죄인 실구지 형제와 박질을 대역 죄인을 다스리는 『대명률(大明律)』을 적용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하라고 명했다.

조선시대 죄수 형벌 집행 장면
이에 따라 실구지 형제와 처남 박질은 교수형도 모자라 사지(四肢)를 서서히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 형을 당했다. 그들이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상전을 계획적으로 강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한 불순한 의도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개국 후, 성종조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랐는데, 대명률에도 성범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추상같았다. 대명률‘형률(刑律)’의 ‘범간(犯奸)’ 조항을 보면 강간뿐만 아니라 화간(和姦)도 처벌했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杖)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 (『대명률』· ‘형률(刑律)·범간조(犯奸條)’)
“부모상 또는 남편상을 당한 자와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와 도사(道士)·여관(女冠·여자 도사)이 간음을 범하면 범간 죄에다 2등을 더해 가중처벌 한다.”(『대명률』· ‘거상급승도범간조(居喪及僧道犯奸條’)
즉, 합의에 따라 성행위를 한 화간(和姦)은 장 80대이지만, 여성에게 남편이 있으면 90대로 올라갔다. 여성을 유괴해 강간한 조간(勺姦)에 대한 형벌은 화간보다 무거운 100대였다.
어린이 성폭행범은 예외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어린아이를 강간하거나 꾀어서 성폭행했을 때는 더 강하게 처벌했다. 1395년(태조 4년)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해서 출간한 『대명률직해』 390-2조를 보면, 특히 12세 이하 어린아이를 간음하면 비록 ‘화간’이라 해도 강간죄로 적용하여 논죄했다.
그 예를 보면, 개국 초인 1398년(태조 7년) 윤5월 잉읍금(芿邑金)이라는 사노(私奴)가 11세 여자아이를 강간했다가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해졌다. ((私奴芿邑金, 强姦十一歲女, 絞。『조선왕조실록』 태조 14권).
세종도 성폭행범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했다. 세종 8년(1426) 11월 17일 자 실록에는 강원도 평해(오늘날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사는 김잉읍화라는 사람이 8세 여아를 성폭행했다 붙잡혀 교수형을 당했다. (刑曹啓 平海囚金仍邑火, 强奸八歲女, 律該絞。從之。『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 11월 17일 자).

청나라에서 집행된 능지형(1910년에 촬영되었다)
또, 세종 17년(1435)에는 강원도 철원의 사노(私奴) 문수생(文守生)도 11세 된 여아를 강간했다가 사형을 당했고, 중종 18년(1523) 윤4월 해주(海州)의 죄수 이천산(李千山)이 아홉 살 여아 검주리(檢注里)를 강간한 사건도 사형으로 다스렸다.
『대청률집주』에 따르면, “12세 이하의 어린 여자는 아직 남녀의 정의(情意)가 생기지 않아 음심(淫心)이 없고 또 속이거나 통제하기 쉬우므로 화간의 정상이 있더라도 속은 것이기에 역시 강간과 같이 논한다.”라고 하여 강력한 처벌을 명문화하고 있다.
조선왕조는『대청률집주』의 해석을 근거로 어린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한 성폭행범을 강력하게 다스렸다. 이는 곧 조선 사회가 여성의 정조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뜻한다. 즉, 어린 여아의 경우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이었기에 더욱더 강하게 처벌했다.
조선 사회에서 강간죄는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즉 국가의 경사 때 종종 시행한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성종(1469~1494)은 1471년(성종 2년) 1월24일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1438~1457)를 의경왕(훗날 덕종으로 추존)으로 추승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는데,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모반(謀反·역적모의)·대역 모반(大逆謀叛·다른 나라와 반역을 도모)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사람을 죽이거나 병에 걸리게 하려고 귀신에게 빌거나 방술을 쓰는 행위)한 것과, 강간 및 강도 등은 대사면령에서 제외한다.”
이처럼 강간죄를 대역 모반죄 및 존속살인죄 등과 같은 반열에 넣은 것이다.
능지(凌遲)란 고대 중국에서 청대까지 걸쳐 시행되었던 중국의 사형 방법의 하나로, 한국 등에서도 행해졌다. 산 채로 살을 회 뜨는 형벌로, 사형 중에서도 반역 등 일급의 중죄인에게 실시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또한 사형 종류 중 가장 잔인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대명률에서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 하였으며, 한국에서는 능지처참(凌遲處斬)이라고도 불리었다.
능지는 사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벌로 속칭으로 살천도(殺千刀)라고 하는데, 천 번 칼질하여 죽인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실제로 죄인에게 6천 번까지 난도질을 가한 기록이 있다.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우며 고통스러운 방법에 해당하는 사형 방법이다. 같은 사형수라 해도 어지간히 큰 죄를 짓지 않는 한 능지 형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다.
주로 죄질이 몹시 나쁘면서도 괘씸죄까지 덧붙을 정도로 형을 선고하는 사람이 죄인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어야 선고 및 집행이 가능한 것으로, 유사 이래 최고의 형벌이다.
여기서 더 발달한 능지형은 죄인의 몸에 양념을 뿌려가면서 살을 도려낸다. 대개 능지형이 끝난 후 토막 난 몸(뼈대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은 처형 직전에 입고 있었던 옷을 놓은 대바구니에 담아 장대 끝에 내장과 머리와 함께 걸리며, 처형 이튿날에는 각지로 보내져서 경고의 목적으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죄인의 사지를 말이나 소 등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인 거열(車裂), 오우분시(五牛分屍)가 ‘능지처참 형’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거열과 능지는 모두 사형수의 신체를 조각내어 죽인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방법은 차이가 있다.
거열은 사지를 소나 말에 묶고 달리는 방법으로 신체를 찢어 죽이지만, 능지는 사형수의 신체를 작은 조각으로 하나하나 잘라내는 방법으로 죽이는 차이가 있다. 이 형벌 역시 고대 중국에서부터 내려온 형벌이며, 중세 유럽과 한국에서 집행되었다.
실구지 형제 등은 계획적으로 모의하여 상전인 내은이를 자신들이 살던 과천으로 내려오도록 협박했고, 강제로 겁탈한 후 아내로 삼아 재산을 빼앗으려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부모 가운데 한 명이라도 양인(良人)이면 그 자식은 양민이 될 수 있었으므로 실구지도 내은이를 처로 삼음으로써 그 소생 자식의 면천을 노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단순한 강간 사건이 아니라, 노비가 상전의 딸을 강간한 뒤 아내로 삼아 재산을 가로채려 한 사건이라서 당시 새로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대역 죄인을 처벌할 때 적용하는 대명률이 적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성폭행은 가장 비열하고 반사회적, 반인륜적인 사건으로 세간의 혹독한 비난을 받는다. 조선왕조 태종실록에 실린 이 사건도 당시의 국가 기강을 흔든 사건으로 인식되어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그 이후 세 자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의 충격으로 내은이 세 자매는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생각할수록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태종실록 권 7 태종 4년(1404) 2월 27일(양력 4월 6일) (영락(永樂) 2년) 무술 2번째 기사
상전(上典)을 강간한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박질을 능지처참하다
誅私奴實仇知兄弟及朴質。
漢陽人判事李自知有三女, 長內隱伊年十六, 未適人, 餘皆幼。 自知夫妻相繼而死, 內隱伊與二弟, 率婢燕脂及小奴, 欲行三年之服, 家奴實仇知與其弟居果州, 一日來請下居果州, 內隱伊曰: "女道不出閨門。 況今父母沒, 豈可就爾居乎?" 奴曰: "主典衣食, 在吾二人。 若不聽吾計, 將不顧而逃之。" 內隱伊不得已至其家, 奴等欣然供饋。 夜深, 實仇知匿其妻弟朴質於房, 裸內隱伊而付質。 內隱伊大呼, 二弟與燕脂等亦然, 實仇知與其弟, 執二弟而不放。 內隱伊强拒, 至五更力盡, 朴質縛其手足而强奸。 內隱伊逃訴于漢城府, 漢城府執實仇知兄弟及朴質鞫之, 吐實。 報議政府以聞, 按律陵遲。
(번역)
사노(私奴) 실구지(實仇知) 형제와 박질(朴質)을 베었다.
한양(漢陽) 사람인 판사(判事) 이자지(李自知)는 딸 셋이 있는데, 맏딸은 내은이(內隱伊)로서 나이 16세에 아직 시집가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었다.
자지(自知) 부처(夫妻)가 서로 연이어 죽으매, 내은이가 두 동생과 더불어 종[婢] 연지(燕脂)와 소노(小奴)를 데리고 삼년상을 행하려고 하였다.
가노(家奴) 실구지(實仇知)가 그 아우와 더불어 과주(果州)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와서 과주로 내려가서 살자고 청하였다.
내은이가 말하기를,
“여자의 도리는 안방 문(閨門)을 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네게 가서 살 수가 있느냐?”
하였다.
종이 말하기를,
“상전(主典)의 의식(衣食)이 우리 두 사람에게 있으니, 만일 우리 계교를 듣지 않는다면 장차 돌보지 않고 도망하겠습니다.”
하였다.
내은이가 부득이하여 그의 집에 갔더니, 종들이 기쁘게 공궤(供饋, 높은 분께 음식 드리는 행위)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실구지가 제 처남(妻男) 박질(朴質)을 방에 숨겨 놓고, 내은이를 발가벗겨서 질(質)에게 맡겼다. 내은이가 크게 소리를 치고, 두 동생 연지(燕脂) 등도 또한 크게 소리를 쳤다. 실구지가 제 아우와 더불어 내은이의 두 아우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내은이는 굳세게 항거하다가 5경(五更)에 이르러 힘이 빠지니, 이에 박질이 그의 손발을 묶고 강간(强姦)하였다.
내은이가 도망하여 한성부(漢城府)에 호소하였다. 한성부에서 실구지 형제와 박질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니 사실대로 토설(吐說)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하니, 율(律)에 의하여 능지처참(凌陵遲處斬)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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