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경징이풀 5회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기사입력 2026.01.2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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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도(江華府圖). 강화도와 김포 통진 교동 일대와 한강과 임진강 하구를 그린 지도이다. 갑곶, 광성진, 월곶 등이 표시되어 있다. 출전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

 

청 태종이 병자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은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 수성하는 것이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전쟁은 틀림없이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과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 태종은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기병으로 편성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속도전으로 한양으로 들어가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조의 강화도행은 막았지만, 왕세자를 포함한 왕실 일부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것은 인조가 쉽게 항복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청 태종은 항복을 거부하고 버티는 인조를 제압하는 방법은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였다. 청 태종으로서는 매우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실제로『청 태종 실록』에는 청 태종이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2월 15일(음력 1월 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청 태종의 지시를 받은 도르곤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등 병선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한강과 임진강 일대의 청군 점령지 곳곳을 뒤져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찾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버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목재를 이용해 뗏목과 작은 병선(兵船)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수리하고 제작한 배를 육지에서 강화도로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고 부르는 작은 운반용 수레도 만들었다.

 

병선을 만드는 일에는 한강과 임진강 일대를 뒤지며 포로로 잡은 조선인 기술자(船匠)들도 동원되었다. 그들이 만든 배는 크기는 비록 작았지만, 물 위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청군은 그렇게 만든 병선들을 동거에 실어 갑곶(甲串)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던 2월.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계절에 김경징을 비롯한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이렇다 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로지 천연의 험세(險勢)만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청군이 육로로 배를 운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된 군대’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 앞에서 강화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것은 바로 만주벌판에서 크고 작은 전투로 임기응변에 능한 청군의 전략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대가였다.

 

바다에서 싸운 경험이 거의 없어서 수군 전력은 무시해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까지 제작하며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에 대한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조선군의 의표를 찔러 바다를 건널 수만 있다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 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明)에서 귀순해 온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선군은 이런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청 태종은 이들에게 수군을 지휘하도록 하고, 저들의 주 무기 가운데 하나인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청 태종은 도르곤에게 강화도 공략을 지시했다. 도르곤은 호게(豪格), 공유덕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강화도 공략 방법을 놓고 고심했다. 

그는 수군 출신 명나라 장수들의 조언대로 현장에서 급히 제작한 작은 병선 80척을 동거에 싣고 1만 6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가 보이는 해변에 이르러 상황을 탐색했다. 

 

마침내 청 태종이 공격 준비를 끝내라고 지시했던 기일인 2월 15일(음력 1월 21일), 도르곤의 청군은 갑곶을 지키는 조선군의 상황을 염탐한 군사들의 보고를 토대로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은 갑곶에도 수군을 배치하여 청군의 침공을 대비하라는 대군과 조정 대신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강화도가 절대로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당시 강화도를 지키는 조선 수군은 두 군데에 배치되어 있었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이 지휘하는 주력부대는 갑곶보다 남쪽인 광성진(廣成津)에 주둔하고 있었고, 섬의 북쪽 월곶 연미정(燕尾亭)에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200여 명의 수군이 병선 7척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곶에는 조선 수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강화도의 맞은편 김포 주변을 감시하기 유리한 곳이어서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김경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을 과신하고 방어를 위한 준비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전략적인 방어 태세 구축을 하지 않았다. 


육지로 보낸 첩보원들이 돌아와 청군이 한강과 임진강 강변에서 병선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허위 보고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길길이 뛰었다. 

그는 “바다가 꽁꽁 얼었는데, 어떻게 배가 뜰 수 있느냐?”라며 첩보 내용이 허위라고 무시하였다. 

 

그는 강화도를 천혜의 요새로 굳게 믿고 오래 버틸 요량으로 오로지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군량미만 확보하면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화도 방어와 종묘사직 수호의 중책을 맡은 자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전체적인 상황 판단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하자 그때마다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자기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뒷날 효종(孝宗))조차도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인조를 호송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요 실세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그를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도 무능한 기회주의자였다. 그가 강화도에서 김경징과 어울려 허송세월하는 동안, 육지에서는 남한산성에 포위된 왕을 구하기 위해 각지에서 군사들을 조직하여 속속 남한산성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들을 이끌고 인조를 구하러 오다가 남한산성에서 불과 30리가량 떨어진 용인(龍仁) 험천(險川, 수지 머내)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남한산성의 조정에서는 강화도에서 수비하고 있는 감찰부사 이민구를 충청감사로 임명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민구는 크게 당황했다. 왜냐하면, 강화도에서 나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 전쟁통에 강화도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래서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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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방어전

 

『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조정의 결정을 피하려고 모든 인맥을 동원했다. 심지어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에게까지 애걸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는 데 성공했다. 


1637년(인조 15년) 2월 16일(음력 1월 22일) 새벽, 예친왕 도르곤은 청군 1만 6천여 명을 앞세워 강화도 공격에 나섰다. 청군은 군사 1만 6천여 명을 삼판선 수십 척에 나누어 타고 갑곶진으로 향했다. 동이 트기도 전 새벽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바다를 뚫고 상륙작전을 위한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조선군에게 청군의 움직임이 보고되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이 달려와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김경징은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같은 한겨울에 강물이 얼고 바다까지 얼어붙었는데 어떻게 배를 운반하고 띄울 수 있느냐면서 김적을 체포했다. 그는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허위 보고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갑곶(甲串)을 지키는 군사들이 달려와 똑같은 내용을 보고하자, 그제야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는 급히 전령을 보내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부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 명을 이끌고 갑곶의 진해루(鎭海樓)에 지휘 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방어를 위한 군사 훈련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방책이라는 것은 임기응변밖에는 없었다.

그는 군사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 각종 장비와 보급품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화약을 조금씩 나누어 주면서 그것을 누구에게 얼마의 수량을 지급했는지까지 일일이 기록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적과 싸움을 앞두고 군사들에게 장비를 나누어주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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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현장에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군이 홍이포(紅夷砲) 포격으로 갑곶진 공격을 시작하자 조선군은 모두 두려워하며 참호 속으로 숨어들었다. 포격이 집중되는 동안 조선 수군의 반응이 거의 없자, 그 틈을 이용하여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 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나누어 태운 다음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바다 건너 1만 6천여 명이나 되는 적군이 갑곶으로 상륙하고 있다는 급보를 전해 들은 김경징이 뒤늦게 달려와 현장을 확인하고는 기겁했다. 

 

갑곶은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바다의 폭이 매우 좁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작은 거룻배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런 지형적 여건이 적에게는 유리한 점을 제공하고 있었음에도 김경징은 갑곶 방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작전의 목표를 갑곶으로 정한 것은 정보 수집 결과 상륙하기가 비교적 쉬운데다가 결정적으로 조선 수군의 배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경징은 급히 모든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급보를 전달받은 충청수사 강진흔은 월곶에 주둔하고 있던 수군 200여 명을 병선 7척에 나누어 태우고 갑곶으로 내려갔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바다 위에서 수십 척의 배로 새까맣게 바다를 건너가는 청군의 수군을 본 조선 수군은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용감하게 부딪혀 나갔다. 

강진흔의 조선 수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며 접전을 벌였다. 조선 수군은 적선 3척을 침몰시켰지만, 지휘관인 강진흔이 타고 있던 배도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파괴되면서 전사한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수적으로 엄청난 열세임에도 강진흔의 부대는 끈질기게 청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이 틀 무렵에 이르자 점점 패색이 짙어졌다. 

조선 수군이 거의 궤멸할 위기에 이를 무렵에야 비로소 주사대장 장신이 이끄는 광성진(廣成津) 주둔 수군이 현장에 도착했다. 

 

장신은 강진흔이 이끄는 충청 수군보다 훨씬 많은 수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광성진에서 배를 정비하고 있다가 갑곶으로 오라는 명령을 받고 장비도 미처 다 싣지 못한 채 현장에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후원군이 도착한 것을 알게 된 조선 수군들이 다시 용기백배하여 청군을 협공해 나갔다. 장신은 정포만호(正浦萬戶) 정연(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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