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들의 항일투쟁, 그 길을 걷다(2)

기사입력 2026.01.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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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선생 탄생 170주년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길림성+하얼빈+심양(4박5일) 일정>


제1일(10월 25일, 토) 인천공항(12:15) 출발→ 하얼빈 태평국제공항 도착(13:30)→ 하얼빈 정율성기념관, 조린공원(안중근의사 유묵비)→ 하얼빈 금곡호텔

제2일(10월 26일, 일, 7:30 출발) 하얼빈 731부대 유적→ 하얼빈역 안중근기념관→ 하얼빈역(15:37) 고속열차출발→ 이도백하역(19:40) 도착→ 이도왕조 온천호텔

제3일(10월 27일, 월) 백두산 천지, 월, 08:00)→ 대체 프로그램으로 보트 유람, 백두산 천지 일대 3D 영상물 감상함→ 통화이동(버스 4시간)→ 통화 라툰모건호텔

제4일(10월 28일, 화, 08:00) 버스로 길림성 출발,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추가가→ 고산자→ 양세봉장군 동상→ 심양으로 버스 이동(4시간 30분)→ 심양 화부호텔

제5일(10월 29일, 토, 08:00) 심양고궁(청나라 누루하치고궁)→ 9·18 기념관(만주사변을 기념하는 역사박물관)→ 심양공항(16:35 출발)→ 인천공항 도착(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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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도시 하얼빈역 광장 

 

둘째 날: 2025년 10월 26일 오전 (일)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安重根义士纪念馆)→고속열차 이동→이도백하


극동과 대륙을 잇는 철도의 도시, 하얼빈

하얼빈의 아침 공기는 차고도 분주했다. 시내는 사람과 차량이 쉼 없이 오가며 대도시의 박동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얼빈역 앞 광장은 뜻밖에도 넓고 한가로워, 오히려 시간의 여백처럼 느껴졌다. 그 광장 앞 도로에 놓인 사회주의 선전 표어 조형물은 이 도시의 현재를 또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자유·공정·평등·법치’, ‘부강·민주’, ‘애국·성신’ 같은 단어들이 간판식 입체 글자로 서 있었다. 중국 당국이 지향하는 가치이자 인민에게 끊임없이 되새기려는 약속처럼 보였다. 철로 위에 세워진 도시답게, 이곳의 이념 또한 단단한 구조물처럼 광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역광장을 지나 역사 옆에 자리한 안중근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고, 전시관은 차분했다. 안내원들의 응대는 공손했고, 공간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20세기 제국과 제국이 맞부딪히던 근대사의 심장부였다.


20세기 초,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던 격랑의 시대에 하얼빈은 러시아·청·일본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교차점에 놓여 있었다. 오늘날의 번화한 대도시 풍경과 달리,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이곳은 황무지에 가까운 변방이었다. 1898년 러시아가 중동철도 건설에 착수할 당시만 해도, 하얼빈은 지도 위에 작게 표시된 지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십여 년이 흐른 1909년 무렵, 이 도시는 인구 10만에서 15만 명에 이르는 국제도시로 급격히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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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광장 앞 도로에 있는 사회주의 선전 표어 조형물

 

그 변화의 중심에는 철도가 있었다. 하얼빈의 성장은 자연스러운 도시 발달이라기보다, 철로를 따라 밀려든 제국의 의지와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얼빈은 분명 청나라의 영토였으나, 중동철도는 러시아가 자금과 기술, 인력을 총동원해 건설한 철도였다. 이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전략 그 자체였다.


왜 러시아는 남의 나라 땅 한복판에 철도를 놓으려 했을까. 그 배경에는 19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가 놓여 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국력이 급속히 쇠락한 청나라는 일본의 팽창을 견제할 우군이 필요했고, 러시아는 극동으로 세력을 확장할 발판을 찾고 있었다. 그 이해가 맞물려 1896년, 러시아와 청나라는 비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청·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비밀 동맹조약

조약의 대가로 청나라는 만주 철도 부설권을 허용했고, 러시아는 형식상 청의 주권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러시아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를 통해 유럽과 극동을 잇는 대륙 철도의 핵심 구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아무르강 북안을 따라가는 노선은 험준한 지형과 혹독한 기후로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만주 평원을 관통하는 노선은 1,000킬로미터 이상을 단축할 수 있는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여기에 부동항 확보라는 군사적 목적이 더해졌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면 바다가 얼어 해군 운용에 큰 약점을 안고 있었다.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와 남하 정책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러시아의 장기 전략이었다.


조약에 따라 철도 연선에는 치외법권이 적용되었고, 철도 경찰과 법원, 행정기구가 설치되었다. 하얼빈은 청나라의 도시였지만 행정 언어는 러시아어였고, 도시의 질서 또한 러시아식으로 운영되었다. 거리의 간판과 건축 양식, 법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하얼빈은 러시아가 지배하는 도시와 다름없었다.

이처럼 하얼빈은 청나라의 자본과 기술 부족, 그리고 러시아의 대륙 철도 건설 야망과 남진 정책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도시였다. 철길을 따라 사람과 자본, 언어와 문화가 밀려들었고, 변방의 황무지는 순식간에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오늘 하얼빈의 거리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는, 철로를 따라 흘러 들어온 제국의 시간과 동아시아 근대사의 무게가 여전히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하다.


하얼빈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핵심 분기점이었다. 치타에서 만주리로, 하얼빈을 거쳐 수이펀허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노선이 이곳을 통과했고, 서쪽으로는 유럽 러시아로, 동쪽으로는 극동으로, 남쪽으로는 창춘을 거쳐 여순과 대련으로 뻗어 나갔다. 평양에서 오는 철도와 대련에서 올라오는 철도 또한 이곳 하얼빈에서 만났다.


그리고 바로 이 교차점에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한 발을 내디뎠다. 기념관을 나서며 다시 역광장을 바라보니, 넓은 공간이 더 이상 한가롭게 보이지 않았다. 철로 위를 오가던 제국의 야망과 그 틈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한 인간의 결단이 겹쳐져 있었다.


지금의 하얼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다. 인구는 급증했고, 철도망은 사방팔방으로 뻗어 중국 극동 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도시의 중심에는 여전히 철도가 있고, 그 철도 위에는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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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군의사 기념관 내부 모습(일부)과입구, 답사단에게 안중근의사 일대기를 설명하는 민족문제연소 방학진 실장(사진 맨앞) 

 

겨레의 항일 혼이 서린 안중근의사기념관!

우리는 731부대 유적 답사 후 하얼빈역 광장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향했다. 하얼빈역 광장 앞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도로와 거리에는 사람들과 차들이 많았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하얼빈역과 바로 붙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역광장에서 방문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 외관에서부터 엄숙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안내자 점검을 받으면서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관람했다. 들어가자마자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서 있었다. 오른쪽에는 그의 유명한 유묵들이 액자에 넣어져 쫙 전시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안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안중근을 모르면 간첩이지하는 어떤 분의 농담 아닌 농담을 생각하면서 그를 만나는 것은, 그것도 중국 땅에서 히또히로부미를 저격한 거사를 일으킨 역사의 현장에서 말이다. 뭔가 뭉클함이 느껴졌다. 나는 안중근 동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동포여, 이제 오시는가 반갑소! 우리보고 인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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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고향 해주(위), 안 의사 부인과 두아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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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지은 시

 

기념관에는 여러 사진과 설명 게시판과 전시물이 아주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어제 본 하얼빈 조린공원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새겨진 『청초당』 유묵비도 그렇고 이 안중근의사기념관도 중국당국이 건립했다고 하니, 그가 중국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안 의사가 중국 현대사에서도 비중이 아주 큰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보고자 했던 곳이『히또히로부미』 저격 위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위치와 거리를 표시해 놓았는데,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에는 삼각형이 안중근 의사가 적격한 곳, 네모가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던 곳이다. 정말로 가까웠던 위치 그곳에는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옆쪽에 있는 창문으로는 하얼빈역 안을 볼 수 있었는데, 당시 여기가 실제 저격이 이뤄졌던 공간이라고 한다. 삼각형과 네모 위치를 똑같이 볼 수 있었다. 하얼빈 여행 계획이 있다면 그저 가서 볼만한 곳이 아닌 반드시, 이곳 장소는 꼭꼭, 가 봐야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 거사 당시 하얼빈에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거주하고 있었을까?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138쪽)』에는 당시 하얼빈에 거주한 조선인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나온다.

『일본 총영사관은 하얼빈에 거주하는 조선인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인구는 이백육십명 정도인데 이들 대다수가 담배팔이, 막노동꾼, 세탁업자, 나무꾼, 석공들이고 수입은 월 십오 루불에서 이십오 루불 정도로 밥값과 방값이면 고작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리고 이들 중 스무 명 정도가 반일사상을 가진 자이고 김성백이 그 중심이라고 보고했다.』

* 김훈 소설『하얼빈(138쪽)』문학동네, 2022.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하얼빈 14-5만 인구에서 한인들은 269명이라는 극소수였고, 대다수가 떠돌이로 흘러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였던 것 같다. 여기에 나오는 김성백이라는 인물은 건설업자로 경제 형편이 한인 사회에서 가장 부유했다고 한다. 그는 한인회장이었다. 안중근과 우덕순이 거사 전날 김성백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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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부 모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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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 동상에 헌화하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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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에 대한 설명 게시판

 

죽음 앞에서 쓴 글씨,‘초사체(超死體)’를 마주하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들어서자, 벽면을 따라 그의 유묵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단지(斷指)의 흔적이 또렷한 손도장이 찍힌 글씨들, 대부분은 한자로 쓰인 작품들이었다. 글씨체를 인터넷에서 보아온 온 문구도 있었고, 처음 마주하는 글귀도 있었다. 전시된 유묵들은 모두 같은 크기와 형식으로 게시되어 있어, 우리 범인들의 눈에는 원본인지 복제본인지는 한눈에 분별하기 어려웠다. 

 

해외 전시에 소개되는 유묵의 상당수가 대여본이나 복제본인 점을 고려하면, 이곳의 전시 역시 ‘기억과 상징의 전시’라는 성격이 강해 보였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하얼빈 의거 이후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되어, 1910년 3월 순국하기까지 약 다섯 달의 옥중 생활을 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그가 남긴 유묵은 200여 점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일본 교도관과 간수, 주변 인물들의 요청으로 글씨를 써 주었다고 하나, 그 글들은 단순한 휘호가 아니었다. 죽음을 예감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신념을 응축해 남긴 기록이었다.

 

유묵을 바라보는 동안, 한 획 한 획마다 비범한 힘이 느껴졌다. 삶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이미 죽음을 넘어선 자의 평정과 단호함이 글씨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서체를 두고 ‘초사체(超死體)’라 부르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초월한 상태에서 써 내려간 글씨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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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수인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묵은 현재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실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작품만 해도 30여 점에 이르며, 현존하는 진품 유묵은 대략 50~60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유묵에는 왼손 손바닥으로 찍은 수인(手印)이 남아 있는데, 이는 진품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원본 여부를 떠나, 유묵에 담긴 말의 무게는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한자에 능숙하지 못한 나는 함께 간 일행이 읽어 주는 글귀와 해석을 귀 기울여 들으며, 몇 점의 유묵 앞에서 오래 발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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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부터 ①②③④는 본문 내용 참조

 

첫째로 눈에 들어온 글은 다음과 같았다.

① 人無遠慮 難成大業 (인무원려 난성대업)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사려가 없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의 수양을 넘어,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장기적 안목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다음 유묵은 유교의 인내 가치를 담고 있었다.

② 百忍堂中 有泰和 (백인당중 유태화)

백 번을 참고 견디는 집 안에는 큰 화합이 깃든다는 말이다. 분노와 원한이 아니라, 절제와 인내를 통해 도달하는 평화를 말한다.


세 번째 유묵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③ 思君千里 以表守誠/忘安苟生 行而不正(사군천리 이표수성/망안구생 행이부정)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임금을 생각하며, 성실함을 지키는 뜻을 드러내고, 안일함을 좇아 구차하게 살지 않으며, 바르지 않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충성과 절개, 그리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말로, 안중근 의사의 삶 전체를 압축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오래 머문 유묵은 다음의 글이었다.

④ 欲保東洋 先改政界/時過失機 追悔何及(욕보동양 선개정계/시과실기 추회하급)

동양을 보전하고자 한다면 먼저 정치의 세계를 바로잡아야 하며, 때를 놓쳐 기회를 잃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와 질서를 위한 냉철한 역사 인식이자 정치관이다. 안중근의 행동은 충동이 아니라, 시대를 읽은 사유의 결과였음을 이 짧은 문장이 웅변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묵들이 모두 진품인지 여부는 중요할 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글들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남긴 글씨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삶의 태도와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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