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6화(6회) 경징이풀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기사입력 2026.01.2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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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갑곶 나루터 진해루. 황선신이 진해루 인근에서 군사를 이끌고 맞섰으나 청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와 남문을 포위했다.

 

1637년 정축년(丁丑年) 2월 16일(음력 1월 22일).

그렇게 강화도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어이없이 청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과 사대부들이 한양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 온 지 겨우 38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이 이끄는 3천여 명의 청군은 갑곶에 상륙한 후, 아무런 저항 없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강화부성 남문 주변에 이르렀다. 강화도에 상륙할 때 바다에서 약간의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청 수군은 예상보다 쉽게 조선 수군을 제압하고 육지에 상륙했다. 

 

청군은 갑곶에 상륙한 후에도 강화부성에 이르는 동안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 않았다. 

『택리지(擇里志)』에는 “배를 댈 수 있는 동쪽의 갑곶진만 잘 지킨다면 외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라고 했던 강화도였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을 통해 그렇게 ‘천혜의 요새’를 자랑하던 강화도였지만, 당시의 강화도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은 평범한 섬에 불과했다.

 

강도검찰사 김경징도 이런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만을 굳게 믿고 ‘육지전에서는 천하무적인 청군이라도 수군이 없는 그들이 어찌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올 수 있으리오?’라는 안일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군의 전략과 기동 수준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점령지를 돌아다니며 집을 헐어 부수고 거기에서 확보한 재목으로 작은 배를 만들고 있다는 첩보원들의 보고를 듣고도 헛소리라고 무시했다. 

 

겨울이라 물이 얼어 배들이 다닐 수 없는데, 하물며 수군도 없는 청군이 어찌 바다를 건너겠는가라고 호언장담하며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를 두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갑곶에서 연미정까지 몽둥이를 들고 지키는 사람조차 없었다.”라고 한탄했다.

 

자질이 전혀 없는 무능한 자임에도, 시류에 떠밀려 왕이 된 인조.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그 책임을 모두 조정의 대신들에게 있다고 하는 무책임한 왕 인조. 

전쟁을 책임져야 할 자리에 적당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했어야 할 일임에도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세력의 말을 좇아 무능한 자를 등용한 인사 참사 등등. 하늘이 내려준 요새라는 강화도가 함락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도르곤은 강화성 점령 직후 역관 정명수(鄭命壽)와 김돌시(金乭屎) 등을 강화부성 안으로 들여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성안에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 가족은 물론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가족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제는 강도검찰사 김경징을 비롯한 지휘부가 도망가고 대항할 군사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지켜줄 병력은 사실상 없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봉림대군은 대신들을 긴급하게 소집하여 청군의 요구를 의논했다. 약간의 언쟁이 오가긴 했지만, 항복을 결정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봉림대군은 원임 대신 윤방(尹昉)을 청군의 사신으로 온 통역관 정명수와 함께 도르곤에게 보내 그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 길만이 그나마 백성을 살릴 희망이었다.

도르곤의 서찰을 든 정명수가 성으로 들어와 봉림대군 앞에 섰다. 그는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무릎을 꿇고 있는 왕족과 대신들을 향해 큰소리로 도르곤의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청군의 통역관 정명수는 조선인으로서 평안도 순천 은산(殷山) 출신의 노비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광해군이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해 조선군 1만 명을 압록강 너머로 원군을 보냈을 때, 그도 강홍립이 징발한 군대에 징집되어 출정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간 강홍립의 군대가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패배해 후금에 항복할 때 그도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의 신분으로 청나라 말을 배우고 청나라에 조선의 내부 사정을 자세하게 밀고해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청나라가 조선 포로들을 석방할 때,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남아 청나라에 아부하면서 살아남았다. 그는 비록 노비였지만 제법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자였다. 시세를 읽을 줄 알았고 권력의 향배를 잘 판단하여 움직일 줄 알았던 보기 드문 처세의 달인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킬 때, 그는 청군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통역관으로 입국해 조선 침략에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나고도 청나라와 조선으로 오가며 온갖 횡포를 부렸다. 

청나라 조정의 위세를 과시하면서 여러 차례 조정에 압력을 가해 여러 관직을 받았고, 마침내 그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까지 올랐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횡포를 두려워하여 뇌물을 주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는 데에 급급했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에 올 때마다 조선 조정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 그는 말을 탄 채로 창경궁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조선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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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도(京畿道地圖) 중 강화부(江華府)의 모습. 

 

그는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선 조정을 좌지우지하다가 심양(瀋陽)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도 인질로 간 왕자들을 모독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심지어 조선이 청나라로 보내는 공물을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조선인들에게는 매국노로서 공적(公敵)이 되었다.

그를 향한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1653년(효종 4)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시강원 서리 강효원(姜孝元), 성주 포수 이사용(李士用), 시강원 필선 정뇌경(鄭雷卿) 등에게 모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잣거리의 민심이 들끓고 있었다.

다수의 진(鎭)과 보(堡)가 배치되어 있고, 이를 연결하는 돈대(墩臺)와 외성(外城)에 둘러싸여 있는 강화부(江華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봉림대군의 항복문서를 접수한 도르곤은 휘하의 병력을 들여보내 강화부성의 정전(正殿)을 점거한 뒤, 청군을 풀어 성을 지키던 방어시설을 모두 헐어 버리고 행궁(行宮) 관사를 불태우게 했다. 그리고 두 대군과 부인을 포함하여 지위가 높고 낮음에 상관하지 않고 잡혀 있는 남녀를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도르곤은 “성안을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 한쪽은 조선 사람이 살고, 한쪽은 우리 군사가 살 것이다.”라고 통고한 뒤, 성안에 계엄을 실시했다. 

강화부성을 완전히 장악한 도르곤은 호서(胡書)가 쓰인 신표(信標)를 수십 개 만들어 성을 드나드는 조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 백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청군이 나눠준 신표가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그것을 받으려고 서로 몰려들어 아우성쳤다.

 

도르곤은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왕실과 고관들의 가족을 앞세워 남한산성의 저항 의지를 꺾어놓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점령 직후, 왕실과 조정 대신들에 대한 대우와 예우를 깍듯하게 하라고 엄중히 지시하고 단속했다. 사로잡은 포로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특히, 세자빈인 강빈 일행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바로 인조의 손자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의 아들인 원손(元孫)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르곤은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왕실과 고관들의 가족을 앞세워 남한산성의 저항 의지를 꺾어놓을 생각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장차 조선의 왕위를 계승할 후보자인 원손을 잡아 두는 것은 장차 남한산성에 들어가 버티는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도르곤의 엄중한 지시를 받은 청군은 강빈 일행이 움직일 때 병력을 풀어 호위하는가 하면, 지나는 길에 도랑이나 장애물이라도 있으면 미리 길을 수리한 뒤 지나가도록 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도르곤의 주력부대가 육지로 건너가기 직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소현세자의 비인 강빈은 청군의 감시가 느슨한 틈을 이용하여 감시망을 따돌리고 원손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녀는 친정 동생 강문성(姜文星)과 내시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반 백성의 복장으로 바꿔입고 민가에 몸을 숨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녀는 이제 태어난 지 9개월에 불과한 어린 원손을 강보에 싸서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 강문성과 내관 김인에게 원손을 부탁했다.

 

그들은 야음을 이용하여 원손을 등에 업고 성 밖으로 나왔다. 강문성과 김인(金仁), 서후행(徐後行) 등 다섯 명의 내관(內官)이 원손을 차례로 업어가며 뒤를 따랐다. 입춘이 갓 지난 2월의 밤 추위는 매서웠다.

성 밖으로 나온 이들은 약속 장소로 이동하여 미리 구해놓은 말을 타고 무작정 해안가로 달렸다. 뒤늦게 이들을 발견한 청군이 이들을 좇았다. 원손 일행을 추격하는 청군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앞서 달리던 내관 김인이 탄 말이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청군과의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강문성은 이대로는 모두 탈출하기란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강문성은 이대로 이들의 추격을 뿌리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여러 차례 방향을 바꿔가며 바닷가로 내달렸다. 작은 어촌에서는 미리 연락받은 어부 몇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 마을에서는 종묘서령(宗廟署令) 민광훈(閔光勳)과 송국택(宋國澤)이 원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손 일행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교동(喬桐)을 거쳐 인근 섬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비록 강화도에서 탈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젖먹이 시절부터 이렇게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나마 할아버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아버지 소현세자가 볼모가 되어 끌려갈 때, 다행히 조선에 남았다. 볼모로 끌려간 세자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조선에 남은 원손은 종묘사직의 안정과 조부 인조의 왕권을 지탱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소현세자는 청에 억류된 8년 동안 두 차례 귀성길에 오르는데, 그때마다 청에서는 세자를 대체할 존재로 원손을 요구했다. 청 조정에서는 원손이 심양을 향해 출발한 것을 확인한 후에 세자를 조선으로 출발시켰다. 

 

청이 원손의 북행(北行)을 요구하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자, 저잣거리 민심은 이 같은 조치가 조선의 국본(國本)을 흔드는 행위라며 들끓었다.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아이지만 종묘사직을 보존할 후보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이런 청의 조치에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인조실록』 18년 2월 13일 조의 기록에 보면, “시골 농부도 나이 어린 자식을 보전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모색하는 법인데, 일국의 왕이 되어 다섯 살 난 원손을 보전하지 못하고 이국(異國)으로 보내는 것은 부모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원손의 청나라행을 반대하는 상소로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청의 요구에 굴복한 조정이 할 수 없이 원손을 보내자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고 있던 세자빈 강빈은 돌이 되기 전에 헤어졌던 원손을 3년 만에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모자 상봉이 이루어지자 심양관소의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원손은 심양관에서 반년 남짓 머물다 1644년 8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2월에는 소현세자 부부가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곧 아버지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궁중에서 급사했다. 저잣거리에서는 부왕 인조가 그를 독살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어머니 세자빈 강 씨도 이듬해 3월 15일, 인조의 후궁 조 씨 등의 모함으로 왕인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다. 그녀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유로 한(恨)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소현세자는 서삼릉 소경원(昭慶園)에 묻혔지만, 그녀는 서인(庶人)이 되어 친정의 선영에 가까운 곳에 묻혔다. 숙종 때 그녀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져 신분이 복위되었지만 끝내 남편과 함께 묻히지 못했다. 처음에는 민회묘(愍懷墓)라 했지만, 고종 때 영회원(永懷園)으로 부르도록 했다. 지금의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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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빈 강 씨 무덤 영회원(永懷園).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다.

 

원손 또한 동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왕세자 자리에 올라 보지도 못한 채, 숙부 봉림대군(鳳林大君)에게 밀려났을 뿐 아니라, 귀양지에서 외롭게 죽어간 것이다. 병자호란은 원손과 부모 형제 모두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강화부성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강화도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혼비백산한 백성들은 황급히 짐을 꾸려 작은 외딴섬으로 또는 산속으로 숨어들었지만, 청군의 말발 굽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청군 가운데 만주 출신 병사들은 군율이 제대로 잡혀 있어서 도르곤의 지시가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갔다. 점령당한 직후에는 조선 조정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으로 편성된 청군의 주력이 육지로 가고 한병(漢兵)과 몽골 병이 주력으로 남은 강화도는 말 그대로 인간 사냥터로 변했다. 특히 명나라 장수였다가 청에 항복하고 귀순한 한병(漢兵) 출신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휘하의 병사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했다. 

 

그들은 몽골 병사와 함께 곳곳을 뒤져 패물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강간한 후 포로로 잡아갔다. 

기록에 의하면, 강화도를 점령한 지 9일이 되던 날의 정경은 처참했다. 청군은 대대적인 노략질을 감행하면서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거나 도망가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그리고 잡은 포로들을 묶어 배에 태워 육지의 청군 부대로 보냈다. 

청군에 의한 살육과 강간, 약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자살이 속출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강화도는 섬 전체가 말 그대로 지옥으로 변했다.

 

이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흘러 강물을 이루었다.’라거나, ‘숨이 붙은 백성들은 눈 위를 기다가 얼어 죽었다.’,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라는 등의 수많은 목격담이 실려 있다.

강화부성 안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성문이 열리기도 전에 죽음의 행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과 공포가 성안에 엄습했다.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모시고 빈궁(嬪宮)과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모시고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던 윤방(尹昉)은 강화부성이 청군에게 접수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종묘의 신주를 급히 땅속에 묻었다. 

 

그러나 강화부성을 점령한 청군의 주력이 육지로 돌아가고 점령지에 주둔한 몽골 병들이 성안을 샅샅이 뒤져 그가 묻어놓은 신주를 찾아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모두 누구의 죄라고 할 것인가. 

 

나중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조선 조정이 이를 돌려받기는 했으나 그 과정에서 명종(明宗)의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가 분실되었다. 

이 일로 윤방은 신주 봉안에 잘못이 있었다는 탄핵을 받고, 1639년 황해도 연안에 유배되었지만, 2개월 후에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기용되었다. 


청군이 강화부성을 장악하고 성안을 일일이 뒤지면서 온갖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성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군의 만행도 궁궐로 전해지면서 성안에는 온통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청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여자들은 극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여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다투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망설이던 여인들은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도망치다가 죽은 여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했다. 오랑캐에게 능욕(凌辱)당할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궁궐 안에 있던 소현세자빈 강 씨에게도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비록 세자빈이라는 지위에 있었지만 역시 여자였다. 

 

그녀는 품에 지니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자기 목을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곁에 있던 궁녀들이 깜짝 놀라 재빨리 세자빈의 팔을 잡는 바람에 그녀는 목에 가벼운 자상을 입고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강화부성 안팎의 분위기는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양반과 평민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살기 위해 도망치고 숨다가 청군에게 잡혀 죽는 이도 있었고, 목숨을 끊으려고 이리저리 허둥대는 사람들이 뒤섞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같이 보였다.’라고 말했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내 공주 이씨의 죽음은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이 씨는 갑곶을 지키던 조선군의 수비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맸다. 

그때 윤선거는 강화부성을 지키는 위사(衛士)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위사’란 궁궐이나 군영에서 수문장이나 호위병으로 근무하는 자를 말한다. 즉, 당시 윤선거는 강화부성의 궁궐 수비를 맡은 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무리 속에서 엄격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결을 결심하고 목을 맬 때까지 그녀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솔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적병 앞에서 취할 수 있는 당연한 처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아들이 어머니를 부르짖으면서 울어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사세가(辭世歌)를 부르고, 목에 감긴 줄을 당겨주는 계집종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죽어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목줄이 조여드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부르며 절규하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이제 막 20대 중반에 접어든 꽃다운 나이였다.

당시 겨우 9살이었던 아들 증(拯)은 어머니가 자결하자, 눈물을 훔치면서 자기 손으로 옷과 이불을 정돈한 뒤 빈소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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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고택 입구에 있는 열녀(烈女) 공주 이씨 정경부인 정려문

 

어린 꼬마는 사방 구석에 돌을 놓고 숯과 재를 덮은 후 통곡하면서 어머니에게 절하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이를 지켜보던 계집종이 그를 등에 업고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없었던 윤선거는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죽음을 알았다. 그는 황망한 가운데 차가운 아내의 시신을 안고 눈물을 뿌렸다. 

그는 훗날,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면 시(詩) 한 수를 남겼다. 바로 ‘도망(悼亡)’이라는 제목의 시다.

 

오열하던 당시의 일에 (嗚咽當時事),

서로 쳐다보며 말조차 못 하네 (相看語未明).

단지 그대가 죽지 않았다면 (但令君不死),

내가 사는 것과 어찌 다르리오 (何異我還生).

조용히 생각하면 말은 오히려 남아 있고 (默念言猶在)

행여 그대 모습 보이면 꿈속에서도 놀라네 (疑顔夢或驚).

백 년 길이 이별하니 (百年長已矣),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 바라보네 (垂淚對諸嬰).

 

윤선거는 부인의 주검 앞에서 약속했다. 남한산성에 가서 아버지 윤황을 뵙고 하직 인사를 한 다음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그러나 그는 끝내 죽지 못했다. 

1681년(숙종 7년) 전후로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과 감시가 심해지면서 반청(反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유림(儒林)의 요구로 그녀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 현재의 명재고택(윤증의 생가) 앞에 세워졌다.


윤선거는 부인 이 씨가 자결한 다음 날,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제안으로 그들 일행과 함께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당시 청군은 이세완 일행을 남한산성으로 가도록 해서 강화도 함락 사실을 증언하게 했는데, 윤선거가 여기에 합류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청군에 포위된 남한산성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조를 호위하고 있던 아버지 윤황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올리고 죽으려고 했던 계획도 실행할 수 없었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아버지의 유배지를 찾아가 만날 수 있었다.

당시 20대 후반 청년이었던 윤선거는 이 일을 깊이 참회하며 부끄러워하였다. 그는 평생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아내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평생 부인을 새로 들이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나라에서 아무리 벼슬을 내려도 진심으로 사양하는 징사(徵士)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 논산에서 30여 년을 더 살다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죽었다. 그의 시신은 파주 탄현리에 있는 부인의 묘지에 합장, 안치되었다. 

그는 비록 평생을 혼자 살며 부인에 대한 의리를 지켰지만, 과연 죽어서 저승에서 만난 부인 이 씨로부터 용서받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녀의 죽음은 죽을 이유가 없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이를 순절(殉節)이라 이름하였다. 

윤선거가 그렇게 해서 정성들여 키운 아들이 바로 서인(西人)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섰을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던 윤증(尹拯)이다. 

윤증은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 송시열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에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인물로 조정에 천거되어 여러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계기로 송시열과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졌다. 윤선거는 아들을 송시열의 문하에 보내면서 당부했다. 즉,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윤선거가 죽은 후 윤증은 스승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 그때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부인은 자결하고 윤선거는 살아서 진원군(珍原君)을 따라 강화도를 빠져나온 사실 등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소홀하게 지었다. 

 

윤증은 묘지명의 내용이 사실을 왜곡했다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글자 몇 개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그는 스승 송시열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그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비난했다. 이로써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졌다. 그 후 그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노론의 영수인 스승 송시열과 대립하며 치열한 당쟁의 중심에 섰다. 

그는 『명재유고』, 『명재의례문답』, 『명재유서』 등을 저술한 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조선은 성리학적 가치 질서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남성에게는 충신과 효자, 여성에게는 이 덕목에 하나를 더해 목숨으로 정절(貞節)을 지키는 행위를 ‘열녀(烈女)’라는 이름으로 칭송하며 가문의 자랑으로 내세웠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여성들이 ‘열녀다운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회적 분위기로서 여성들의 의식을 옭아매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죽어야 열녀가 되어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받았고, 개가하면 실절(失節)했다고 하여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직계 가족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이때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기록에 남은 숫자만 해도 60명이 훨씬 넘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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