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만세 운동 주동자 故 윤병관(尹炳寬) 지사

기사입력 2026.01.2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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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자유기고자 김성준 

 

 

윤병관 지사 출생

윤병관(尹炳寬 1892. 1. 19~1977. 12. 10) 지사는 1982년 1월 19일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680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1일 매화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28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매화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매화리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된 11명의 청년들은 윤학규만 34세이고 나머지는 모두 30세 미만이었다. 윤병관 청년은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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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고 윤병관 지사의 생전 모습

 

매화리 지역은 매화면 중에서도 들판이 가장 넓어 쌀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았다. 윤병관 청년도 크지 않은 농토였지만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부모님을 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비록 시골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애국심은 누구보다 충만하였다. 이러한 염원은 조선의 국민이면 누구나 감추고 있었던 울분이었는데 이때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울진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는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동안 일제의 갖은 압박에도 말 한마디하지 못하고 압제 당해왔던 우리 민족의 울분이 상상외로 크게 분출된 것이다. 

 

서울에서 일어난 이 만세운동의 군중 속에는 장식(張植)이란 울진 청년이 섞여 있었다. 그는 독립만세 행사에서 독립선언서 한 장을 감추어 울진으로 내려왔다. 이것은 울진에 처음으로 전달된 중요한 문서였다. 당시 강원도에 속해 있던 울진은 서울과 거리가 먼 탓으로 서울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약 40일 후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셈이다. 

 

장식 청년은 울진으로 내려와 윤병관에게 최초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이것을 받아든 윤병관은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울진에도 만세 운동을 일으키자고 역설했다.  

울진에는 장식으로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 외에 또 한 장의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서울 중앙감리교회 전도사로 있던 홍규익씨가 자신의 외손자인 울진군 북면 고목리 지장골 감리교회 전병겸(田炳謙) 전도사에게 보낸 것이다. 

 

홍규익은 「독립선언서」 1장과 함께 「공약삼장」을 보내면서 ‘만세 운동은 기독교인이 앞장서야 한다’는 메모까지 전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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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품들을 보관했다는 만흥학교 터. 매화2리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윤병관과 전병겸은 동갑계원으로 친구 사이였다. 윤병관은 주로 매화쪽에서 활동하였고, 전병겸은 북면의 지장골 감리교인들과 매화만흥학교 동창들을 대상으로 울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계책을 논의하였다.  

 

1919년 4월 5일 윤병관은 윤학규(尹學逵)·남광호(南光鎬)·윤정규(尹定奎)·최중모(崔重模)·최효대(崔孝大)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논의했다. 그다음 날 고성리 주진휴와 고목리 전병겸과도 만세운동의 구체적 날짜를 정했다. 

 

만세운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택하기로 했다. 11일 매화장, 12일 울진장, 13일은 흥부장에서 거사하기로 협의하였다. 

 

『울진의 독립운동사』(2011) 3.1독립만세 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4월 5일 윤병관의 집에서 윤호규(윤강규), 남광호, 최중모, 윤정규, 최효대 등이 모여 울진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의논하고 그다음 날엔 북면 고목리 전병겸과 울진면 고성리의 주진휴와 더불어 거사의 구체적인 날짜를 밀의하여 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잡은 거사일은 11일에 매화장에서, 그 다음날에 울진장, 그리고 13일엔 흥부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당일 쓸 태극기를 각기 마련토록 하였으니, 거사일은 모두 장날이었다.」라고 적었다.

 

위의 책 3.1독립만세편에는 당시 비품을 만들던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거사 이틀전인 9일 윤병관, 전병겸, 최효대, 남재량, 윤정규, 최중모, 윤상홍, 금매사람 윤학규, 남광호, 근남 수곡사람 장형관 등 10인이 매화리 최현욱(최효대)의 집 대밭 속 오두막에 모여 매화 독립만세의 진행 부서를 정하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만들었다. 한편 전병겸이 다닌 지장 감리교회에서는 전 교인이 모여 독립만세에 쓸 손에 드는 작은 태극기를 만들고 이를 지게에 감추어 짊어지고, 50리 길인 매화 만흥학교(당시 폐교된 건물)로 가져와 몰래 숨겨 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만세 운동 계획은 치밀하게 준비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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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관 지사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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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시  매일신보 기사 중 울진 독립운동사

 

매화 만세운동 발발

매화 만세 운동은 본래 계획했던 것보다 하루 전날 시작되었다. 매화리 청년 6명이 당초 계획보다 하루 빠른 1919년 4월 10일 오전 매화리의 진산인 남수산 중턱에 올라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남수산 아래 매화 마을에는  주재소가 있어 일본 순사들이 항상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들의 만세 시위 사건은 곧바로 순사들의 제재를 받았다. 

결국 만세를 불렀던 청년들은 일본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만세 운동을 기획한 청년들은 다음 날의 거사에 대해 많은 걱정들을 했지만 그들은 계획대로 추진하여 다음날인 4월 11일 만세 운동은 예정대로 거행되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제5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최효대가 당시 면사무소 정문 앞에서 각목으로 길을 막고, 현수막을 가로친 후 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선창하였다. 윤병관, 전병겸, 남재량, 윤정규, 최중모 등 주동자들이 ‘대한독립’ 이라고 쓴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연창하니 장꾼들도 가세하여 온 장터가 독립만세 함성의 표효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날 매화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가담한 인파는 장꾼들과 합하여 약 100여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헌병들은 아침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장꾼들을 해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군중들은 오히려 급속히 불어나 일경들 5명으로서는 통제 불능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세 군중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여 일경들의 강경 진압에도 그 숫자가 점점 더 불어났다고 하였다. 일경들은 동분서주하면서 진압하려 했으나 도저히 수그러들지 않자,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에 만세 인파들은 일경들의 마구잡이식 체포를 피하여 숲속이나 골목길로 몸을 숨기면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윤병관 등 주동자들이 체포되다

이 매화 만세 운동으로 만세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 11명이 당일 일경들에게 체포되었다.

울진군지) 3.1 만세 운동편에는 상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1919년 4월 11일 장이 열리는 매화장에 일본 헌병이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오후 3시 무렵 최효대가 무명으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다른 주도자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쓰인 소형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합세하면서, 만세시위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가운데 11명이 출동한 일제 헌병경찰에 체포되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2011) 윤병관 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19년 4월 11일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매화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중략) 그는 매화·금매·고목리 청년들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4월 11일 매화 장날에 맞추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중략) 4월11일 매화장날 오후 3시경 윤병관과 동지들은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로 나가 군중을 이끌며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윤병관은 이로 인해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징역 4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라고 하였다.  


재판받고 복역하다

체포된 이들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병겸(田炳謙, 농업, 26)·최효대(崔孝大, 농업, 21) 각 징역 5개월, 남재량(南載亮, 농업, 22)·윤정규(尹定奎, 농업, 24)·윤병관(尹炳寬, 농업, 28)·최중모(崔重模, 농업, 22)·윤학규(尹學逵, 농업, 34), 남광호(南光鎬, 20) 각 징역 4개월, 장형관(張炯觀, 농업, 29) 징역 6개월, 윤상흥(尹相興, 27) 태 90매의 형을 받았다,

 

윤병관 지사는 만세 운동을 주도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체포된 청년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국하기도 했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육신이 성한 데가 없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울진군지 인물 편에는 윤병관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윤병관(尹炳寬)[1892. 1. 19~1977. 12. 10]은 1892년 1월 19일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680번지에서 태어났다. 윤병관은 1919년 3월 11일 친구 장식(張植)으로부터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내용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윤병관과 전병겸은 동갑계원으로 윤병관은 주로 매화, 전병겸은 지장 감리 교인들과 매화만흥학교 동창을 만나 울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방법을 찾았다. 1919년 4월 5일 윤병관은 윤학규(尹學逵)·남광호(南光鎬)·윤정규(尹定奎)·최중모(崔重模)·최효대(崔孝大)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논의했다. 그다음 날 고성리 주진휴와 고목리 전병겸과도 만세운동의 구체적 날짜를 정했다. 그래서 4월 11일 매화, 12일 울진, 13일 흥부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1919년 4월 11일 오후 3시경 매화장이 섰던 매화면사무소 앞에서 최효대가 태극기와 대형 깃발을 들고, 윤병관·전병겸·남재량·윤정규·최중모·윤학규·남광호·장형관 등은 ‘대한독립기’라고 쓴 소형 깃발을 흔들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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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관 지사 주손 윤용씨, 서울 거주

 

윤병관 지사의 주손인 윤용씨는 어릴때 조부님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저희 조부님은 덩치도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지요. 만세 운동 당시 28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만세 사건 전부터 지역에서 많은 청년들과 교류하시면서 항상 독립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셨다고 들었고요. 만세 운동 당시에도 앞장서서 거사를 주도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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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1일 울진교육구교육감 표창011.jpg

대통령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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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1일 윤재선 울진군수 표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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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유공자 증서

 

왜 매화리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났는가? 


매화리에서 만세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배경에 대하여 매화리 주민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항일 정신이 투철한 곳이라 간파하였다. 독립선언서가 가정 먼저 전달된 곳도 매화리이며, 만세 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도 매화리임을 감안하면 평소 신학문 보급을 통해 개화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진군지) 3.1 민세 운동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매화리는 계몽운동과 의병 항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던 곳이었다. 매화리에는 신민회에서 활동했던 주진수(朱鎭洙) 등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 세웠던 만흥학교가 있었다. 이 근대학교를 통해 양성된 지방 청년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또한, 매화리는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었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매화리 북쪽 약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선유굴(仙遊屈)이 있다. 여기는 한말 의병을 일본군이 생매장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매화리의 역사적 경험이 3·1운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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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 부부합장묘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다

윤병관 지사는 매화 만세 운동으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대구 지방 법원 울진 지청에서 4개월 징역 언도를 받고 부산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출옥 후에도 일제의 많은 감시를 받아오다 광복을 맞았다. 그 후 후진 애국 교육에 전념하다가 1977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 지사는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으며, 묘소는 부인 주분출씨와 함께 대전 국립현충원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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