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들의 항일투쟁, 그 길을 걷다

기사입력 2026.02.1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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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10월 25일, 토) 인천공항(12:15) 출발→ 하얼빈 태평국제공항 도착(13:30)→ 하얼빈 정율성기념관, 조린공원(안중근의사 유묵비)→ 하얼빈 금곡호텔

제2일 : 2025년 10월 26일 오전(일),

하얼빈역 안중근기념관安重根义士纪念馆)→ 고속열차이동(오후)→ 이도백하역(19:40) 도착→ 이도왕조 온천호텔


글·사진 / 김진문(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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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가 활동하던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안응칠 역사, 안중근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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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던 당시의 부산항 (안응칠 역사, 안중근 기념관)

 

안중근, 그는 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나?


안중근 의사가 무장 항일투쟁에 나서게 된 배경은 개인의 불우나 계급 박탈이 아니라, 국권 상실이라는 시대 현실에 대한 도덕·실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비교적 살림살이가 안정된 양반·중인 계층 가문에서 성장했으며, 근대 교육과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개화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때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안중근은 무력 투쟁에 앞서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1906년경 황해도 해주 진남포로 이주해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같은 해 돈의학교를 인수해 운영, 청소년들에게 근대 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두 학교는 일본의 통제 강화와 재정 부담, 그리고 의병 탄압이 격화되면서 정상 운영이 어려워졌다. 특히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이후, 전국에서 의병 전쟁이 본격화되고 일본의 무력 지배가 노골화되자, 안중근은 교육만으로는 주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그는 결국 학교 운영을 그만두고 재산을 정리해 의병 활동에 투신하고, 1907년 이후 연해주로 이동해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선택은 개인 출세를 포기한 결단이었으며, 교육·계몽에서 무장 투쟁으로 나아간 그의 실천은 하얼빈 의거로 이어지는 역사 과정이었다. 다음은 그가 여순 감옥에서 쓴 안응칠 소회)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름과 선진사회의 이름과 선진국 인물들은 생각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랴.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정상의 일들이 발생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의 이치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어려움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 세계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총 한 방으로 늙은 도적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분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한다.


이 글에서 보듯이, 『안응칠 소회』는 한 개인의 분노나 복수의 기록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윤리 판단을 담고 있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건설을 명분 삼아 타국의 주권을 유린하고, 그 국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일본 제국주의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으며, 안중근 의사는 이를 냉철하게 직시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개인적 원한이 아닌 동양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결단으로 밝히며, “늙은 도적 이토”를 처단한 까닭을 역사 앞에 분명히 남겼다.


우리는 이 자서전을 통해, 총성과 피의 장면보다 더 깊은 사유를 마주하게 된다. 폭력의 시대 속에서도 인간 존엄과 공존 가치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의 목소리다. 그 치열한 성찰과 용기 덕분에 우리는 식민과 지배가 아닌 평화와 연대의 길을 다시 묻게 된다.


따라서 그의 글은 과거의 투쟁을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도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과 책임을 일깨운다. 『안응칠 소회』를 읽는 일은 역사를 배우는 것을 넘어, 인간과 나라, 그리고 평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귀중한 만남이다. 그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이어가는 것, 그것이 남은 우리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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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해주를 떠나 연해주로 이동한 경로 (김훈 소설, 하얼빈, 문학동네, 2022)

 

을사늑약 이후, 무장 투쟁의 길을 걸었다.


1907년, 조선 군대가 해산되고 황제가 물러난 뒤 조선의 하늘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총을 빼앗긴 군인들이 거리에 흩어졌고, 법과 질서는 무너진 채 일본 군홧발이 골목과 들판을 짓밟던 해였다. 그해 안중근은 조국 안에 더 머물 수 없음을 깨닫고 국경을 넘기로 했다. 그가 향한 곳은 러시아 연해주, 아직 총을 들 수 있는 마지막 땅, 이미 의병들이 모여들고 있던 곳이었다.


안중근은 그해 겨울옷 한 벌과 천주교 기도서, 몇 권의 책만을 보따리에 싸서 새벽길에 나섰다. 목적지는 분명 연해주였으나, 그의 발걸음은 곧장 북쪽으로 가지 않았다. 황해도 해주를 떠나 서울로 온 그는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함경도 두만강 일대는 일제의 감시망이 처진 지역이었다. 국경으로 가는 길은 가장 빠르지만 어쩌면 가장 먼저 붙잡힐 길이도 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듯 멀리 가는 길을 택했다. 부산항은 조선의 끝이었고, 동시에 감시의 눈이 가장 흩어지는 곳이었다. 상인과 노동자, 선원들이 뒤섞인 항구에서 그는 의병도, 망명자도 아닌 그저 떠나는 조선인 한 사람으로 섞일 수 있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간 것은 육로의 감시망을 피해 바다로 가는 것이 더욱 안전했기 때문이리라. 땅 위의 길은 막혀 있었지만, 바다는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탈출로였다.

그 길 위에서 안중근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결심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원산항에 와서 그는 다시 배를 갈아타고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연추)로 갔다. 연추에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내렸다. 국경을 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던 것은 하나였다. 이 길은 도망의 길이 아니라, 싸움을 이어가기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었다. 

연해주는 이미 의병과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공간이었고, 국외에서 무장을 갖추고 다시 국경을 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이처럼 안중근의 이동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다.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가장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경로를 선택한 전략적 판단이었고, 동시에 조선 안에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냉정한 인식의 결과였다. 해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시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이어진 길은 그의 결심만큼이나 길고 조용했다. 그 끝에서 그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항일 무장 투쟁이라는 역사의 현실에 자리매김하는 인생 항로였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풀어주다.


연해주에서 안중근은 전제덕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그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작전을 논하고 부대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으며, 대한의군 참모 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라는 직함으로 국내 진공 작전에 참여했다. 그에게 일제와 싸움은 단순한 분노의 발로가 아니라, 되찾아야 할 대한이요, 역사에서 마땅히 해야 할 당위이자 정의였다.


그곳에서 1908년 7월, 안중근과 의병들은 두만강을 건넜다. 칠흑 같은 어둠에 강물은 숨을 죽이고 흘렀고, 총을 든 사람들의 그림자는 물 위에서 흔들렸다. 그들은 함경북도 경흥 일대에서 일본군 초소를 기습했을 때, 전투는 짧고 격렬했다. 홍의동과 신아산 부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전과를 올렸고, 의병들은 잠깐이나마 승리를 실감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같이 두만강 근처 전투에서 일본군과 일본인 장사치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그는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를 살려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이 같은 결정에 대해 안중근 부대 대다수 의병은 포로 석방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포로는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들어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풀어주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안응칠 역사에 나오는 일본 포로, 안중근과 그 부대원들의 말을 들어보자.

안중근이 포로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들이다. 왜 천황의 뜻을 받들지 않고,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동양 평화와 대한독립을 보장한다 해놓고는 오늘에 와서 이렇게 침략을 하니 이것이 역적 강도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했더니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우리들의 본심이 아니요, 부득이 한데서 나온 것뿐이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정리인데 우리들이 만 리 바깥 싸움터에서 주인이 없는 원혼이 되게 되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입니다.(이하생략) 하면서 통곡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이하 생략)


『내가 그대들의 말을 들으니 과연 충의로운 사람들이다 하겠다. 그대들은 놓아줄 것이니 그 같은 나쁜 우두머리는 쓸어 버려라. (이하생략) 그들을 쓸어버리면 10명이 넘기 전에 동양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자 그들은 기뻐 날뛰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므로 곧 풀어주었더니(이하 생략) 그 사람들은 천번 만번 감사하면서 돌아갔다.』


『그때 우리 군사들이 불평하면서 내게 말하기를, 어째서 사로잡은 적을 놓아주는 것이오.』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다.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안 풀어 주고 어찌하겠는가』 (이하 생략)


『적들은 우리 의병을 사로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 죽이요. 또, 우리들도 적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와서 풍찬노숙해 가면서 애써 사로잡은 놈들을 몽땅 놓아 보낸다면 우리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싸우는 것이요.』 (이하생략)


안중근은 만국공법 즉 국제법에 따라 포로를 죽이지 않고 석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전쟁 속에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의병 투쟁을 단순한 보복이나 폭력이 아니라, 정당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침략자와 싸우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과 국제적 기준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대 안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터져 나왔다. 풀어 준 포로가 다시 총을 들고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이미 수없이 짓밟힌 현실 앞에서 부대원들의 분노가 안중근을 향했다.

의병들의 포로 석방 반대는 현실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은 다시 무기를 들고 돌아올 가능성이 컸고, 일본인 상인 역시 군과 정보를 공유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생존이 걸린 전쟁에서 자비는 곧 동료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리라. 부대원들의 예측은 정확했다.


포로 석방 결과는 가혹했다. 석방된 일본군은 곧 안중근 의병부대의 위치를 알렸고,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의병부대는 궤멸 수준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대원들은 각자도생으로 흩어졌으며, 의병부대는 해산의 길로 들어섰다.


이 선택은 실패였을까, 아니면 의병 투쟁이 끝내 지키려 했던 마지막 원칙이었을까.

당신이 안중근이었다면 포로를 풀어주었을까.

당신이 그와 함께 싸우던 의병이었다면,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은 단지 과거 선택을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시 동서 제국주의 침략 국가들은 만국공법을 준수하였을까? 전쟁에서 인류애란 어떤 도덕 윤리기준이 통할까? 그리고 정의로운 싸움이란 무엇인가를 오늘 우리에게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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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을 바탕으로 괘 부분에 한자로 대한독립을 쓴 안중근과 동지들의 혈서 (안중근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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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州) 지역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KBS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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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 역사(안중근 자서전 첫째장)

 

피로 맹세한 同義斷指會


해가 저문 어느 날, 두만강 일대의 산야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한 젊은 독립전사의 마음이 타올랐다. 이미 많은 동지들과 함께 의병으로서 길을 걸어갔지만, 전우들은 하나둘 떠나갔고, 전력이 약해진 부대는 결국,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서 문득 되물었다. 이 몸의 피와 땀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깨달았다. 단지 일제와 무차별 충돌만으로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두만강 너머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현장을 떠나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말이 아닌 실천, 개인의 분노가 아닌 조직된 결의만이 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안중근은 다시 생각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 그리고 핵심을 찌르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1909년 1월, 안중근은 뜻을 같이하는 열한 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스럽게 모였다. 그 자리의 분위기는 긴장감과 엄숙함으로 아주 무거웠다. 조선의 운명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절망감으로 그렇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들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이름 붙인 비밀결사체를 결성했다. 이름 속에는 같은 뜻으로 모여 피를 바치겠다는 결연한 서약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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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 역사(안중근 자서전, 안중근기념관)

 

결성 의식은 곧 단지동맹(斷指同盟)으로 이어졌다. 하나둘씩 왼손의 넷째 손가락 첫 마디를 스스로 잘라, 피로 태극기에 ‘大韓獨立’을 썼다. 열두 사람의 손끝에서 떨어진 붉은 피는 태극선과 어우러져 마치 나라의 운명을 그 위에 새기는 듯했다. 붉은 얼룩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모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공동의 운명을 함께할 결의였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험로를 함께 걷겠다는 맹세였다. 단지동맹을 결의한 곳은 우수리스크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집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하여 1909년 1월 노령(露領) 카리에서 동지 12명이 한자리에 모여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 자를 쓰시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다. 

단지혈맹 12명, 안응칠 31세, 김기룡 30세, 강기순 40세, 정원주 30세, 박봉석 32세, 유치홍 40세, 조순응 25세, 황길병 25세, 백남규 27세, 김백춘 25세, 김천화 26세, 강계찬 27세 ) 


그렇게 결성된 동의단지회는 조국의 독립 의지를 불살랐지만, 곧바로 전투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조국을 옥죄는 핵심 세력을 겨냥하기로 했다. 무차별 충돌이 아닌, 침략의 근원을 찌르는 의미 있는 행위가 필요했다. 결국, 안중근은 한 사람의 이름을 겨누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 그는 단지 한 인물 이상의 상징이었다. 나라를 빼앗고 민족을 억압한 침략의 결정체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플랫폼 위에서 조용히 울리는 한 총성이 동양의 새벽을 깨웠다. 안중근의 결단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로 이루지 못한 독립을 향한 마지막 시도이자, 의병 투쟁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그의 몸에 남은 작은 손가락의 흉터는, 그날의 단지동맹 결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안중근의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의 뒤편에는, 연해주에 뿌리처럼 깊게 서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최재형. 겉으로 드러나기보다 그늘에서 독립운동을 떠받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안중근의 뜻을 믿었고, 그 길을 물심양면으로 지켜주었다고 한다.


2016년 여름, 필자는 울진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항일 무장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한 적이 있다. 교과서에서 몇 줄로만 알고 있던 이름들, 그중에서도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탐방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그의 이름은 차츰 한 사람의 삶으로, 숨결로 다가왔다.


아이들과 함께 찾은 최재형의 고택은 세월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낡은 집, 무너진 담장, 잡초가 무성한 마당. 누군가 돌보지 않은 채 오래 비워둔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벽에 붙은 ‘최재형 고택’이라는 작은 표지판 하나만이, 이곳이 역사의 자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택 바로 옆 숲에는 안중근 의사가 사격 연습을 했다고도 한다. 우리가 탐방 갔을 때 최재형 고택 근처는 마을의 공원으로 되어 있었다.


이 일대는 한때 발해의 영토였던 곳이라, 고택 근처에는 돌 거북이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마침 놀러 나온 동네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추억 한 장이 남았다. 러시아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 바람의 냄새, 그리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고택의 쓸쓸함까지도.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언론을 통해 말끔히 단장된 최재형 고택의 모습을 보았다.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때 아이들과 마주했던 허물어진 담장과 잡초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래서 이 글의 서문에서, 다시 최재형이라는 이름을 불러본다. 이제는 문헌을 통해 그의 삶을 간략히나마 정리하며, 그날 연해주에서 느꼈던 숙연함을 다시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최재형(1860~1920)은 조선 말기 가장 낮은 신분에서 출발해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의 대부로 우뚝 선 인물이다. 그는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였던 최흥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흥백은 전주 최씨로 알려져 있다. 최재형은 아홉 살 되던 해 흉년과 기근으로 가족과 함께 연해주 포시에트 인근 지신허로 이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연해주에서 그는 러시아 정교회가 설립한 학교에 입학한 첫 조선인 학생으로, 러시아어와 문학을 익히며 국제적 감각을 키웠다.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그는 상선의 어린 선원이 되어 7년간 바다를 누볐고, 이후 러시아군과 관청의 통역으로 활동하며 신망을 얻었다. 1880년대 연해주 군용도로 건설 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 갈등을 해결했고, 그 공로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895년에는 얀치혜 한인촌의 자치 책임자인 도헌으로 임명되어 13년간 한인 사회를 이끌며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경제 자립을 도왔다.

1890년대 후반부터는 포시에트 항구를 기반으로 물류·건설업과 군수 물자 납품에 뛰어들어 의화단 사건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거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부는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조국독립 투쟁을 위한 자산이었다. 국권이 위기에 처하자 이범윤·이범진과 연대해 의병 무장과 군자금 지원에 나섰고,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해 13,000루블을 기부했다.


특히 그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가능케 한 핵심 후원자였다. 안중근은 동의회 회원으로서 최재형의 재정적·조직적 지원을 받았다. 의거 성공 후 최재형은 대동공보사 에 금 400루블을 보내 안 의사의 뜻을 널리 알렸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지난 2011년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평했다.


“안중근 의거 뒤에 어마어마한 인물이 있었다”며 “진짜 카네기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함경남도 노비 집안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공교롭게도 8월 15일. 대기근을 피해 어릴 적 두만강을 건넜다. 연해주 정착 뒤 가출, 장삿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았다. 이때 배운 러시아어로 연해주 한인 노동자들을 돕다가 러시아 군납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엄청난 부(富)를 모았다. 거느린 기업만 4개였다. 업종은 농업ㆍ축산ㆍ건축 등 다양했다.

재산이 얼마였을까. 정확한 집계는 어렵다. 최재형 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라 사업소득과 개인소득과 독립 후원금을 합쳐봤다.

113만 5,000루블. 러시아 각지에 있던 그의 저택들 값은 뺀 돈이다. 지금 가치로 1년에 136억여 원.

최재형은 이 돈을 모두 바쳐 연해주 한인을 지원했고, 독립운동에 썼다.

한인 학교 32개를 세웠다. 월급으론 유학생을 도왔다. 망해가는 조선을 떠나 연해주에 온 항일 인사들은 최재형 집에서 같이 살았다. 안중근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이같이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몸과 마음과 전 재산을 다 바쳐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1902년 일제가 벌인 4월 참변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그를 포함하여 친인척 7명이 연해주에서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비의 아들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생을 마친 최재형은, 이름보다 헌신으로 기억되어야 할 진정한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지금 국립현충원에 그의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와 함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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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과 그의 부인 (KBS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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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시내 안중근 의사 기념비를 둘러보는 울진초 아이들(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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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에서 필자와 답사단 동료교사(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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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 동네 공원의 대형 돌거북 유적 곁에 있는 러시아 아이들(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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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 뒤뜰에 우거진 잡초(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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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장된 독립운동가 최재형 고택 (러시아 우스리스크, 중앙선데이 20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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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임시정부에서 최재형의 위상(초대 재무총장, 현 경제부총리급, KBS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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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의 건국공로 훈장증(KBS 다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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