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평생 ‘떼깔이꾼’으로 살아오고 있는 임황동씨 이야기

기사입력 2009.07.1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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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토막의 나무를 물에 띄워 이용했던 것을 배의 시초로 본다면 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떼깔이’는 구조선(構造船-얽어서 만든 배) 이전의 원시적인 뗏목배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한선(韓船) 발달사를 연구하는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배의 발달사를 ‘부목(浮木-목재를 물 위에 띄우는 것)’ - ‘벌주(筏舟-나무나 풀을 엮어 만든 배)’ - ‘통나무배’-‘가죽배’ - ‘꿰어맞춘배(나무판을 서로 붙여서 만든 배)’ - ‘쪽매배(목재를 나란히 옆으로 맞추어 제작한 배)’ -‘구조선’의 순으로 추정하는 것을 볼 때, 소형으로 평수용(平水用) 배인 ‘떼깔이’가 명확하게 벌주에 속하는 것인지, 꿰어 맞춘 배에 속하는 것인지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니면 ‘떼깔이’의 형태는 통나무배와 구조선(構造船)의 중간 단계인 ‘반구조선(半構造船)’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흔히 ‘떼깔이’를 ‘떼배’라고 부르지만 ‘떼배’라는 용어는 강원도와 경상남도에서 사용하는 ‘뗏목’의 방언일 뿐이다.  

 

‘떼깔이’를 엄밀하게 얘기하면 ‘뗏목’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독자적인 형태를 지닌 배의 한 종류이므로, 이 글에서는 울진읍 온양리 지역에서 사용되는 배를 ‘떼깔이’로 부른다. 

 

마치 표준어인양 ‘떼배’라고 부르는 형태의 배를 울진 지역에서는 ‘띠배’, ‘띠깔이’, ‘떼깔이’로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울진 지역에서조차 ‘떼깔이’를 떼배, 띠배, 뗏목으로 부른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타지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방언을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울진 지역에 여과 없이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은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끝내 지역의 독창적인 문화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다름 아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지닌 배인 ‘떼깔이’는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국의 각 해안 지역에서 미역과 톳 등의 각종 해조류 채취에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떼깔이’는 길이 3~4미터, 직경 50~80센티미터 크기의 통나무 8~10개의 중앙에 구멍을 뚫어서 철근으로 꿰고 철사로 한데 묶으면 완성되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울진 지역에는 울진읍 온양리에 5~6척의 ‘떼깔이’가 남아있고, 북면 나곡리, 근남면 산포리, 원남면 등 대부분의 해안 마을에 소수지만 ‘떼깔이’가 남아 있다.

 

‘떼깔이’는 통나무를 꿰어서 맞춘 평평한 형태의 구조를 지니고 있어 뱃전에서 무게 중심을 잡기가 수월하고, 가장자리에 튀어 올라온 부분이 전혀 없어서 미역 등의 해조류를 채취해서 배의 밑판으로 끌어올리기가 쉽다. 

 

또 배의 밑바닥이 평평한 구조는 수면 위나 아랫부분의 요철이 심한 짬과 짬을 이동할 때 바위에 걸려서 좌초될 수 있는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고, 배위로 건져 올린 각종 해조류에 스며있는 불필요한 바닷물이 밑판으로 쉽게 빠져나가는 매우 편리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동해안에서 바다를 업으로 해서 살아가야만 했던 해안 지역 주민들은 ‘떼깔이’를 끌고 가까운 근해를 옮겨 다니면서 해초를 채취하거나 고기를 잡았다. 

 

생긴 모양은 가장 원시적인 배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이지만, 당당하게 바다에 맞서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떼깔이꾼’들.

 

생활의 편리함에 밀려 이제는 점점 ‘떼깔이’를 만드는 사람도, ‘떼깔이’를 젓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떼깔이’가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이나 아닐는지...

 

 

온양1리 양정마을에서 외아들로 태어나·····어릴 적부터 미역을 뜯는 아버지의 ‘떼깔이’를 타고 놀아

봄이면 어김없이 양정 동네 앞의 짬을 옮겨 다니며 미역을 채취하던 아버지의 떼깔이를 타고 놀면서 성장한 임황동(74세)씨는 아버지의 능숙한 떼깔이 기술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평생 미역을 채취해오고 있다. 

 

울진읍 온양1리 양정마을에서 태어난 임황동씨는 70평생을 타지로 나가지 않고 양정마을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다.
“원래 지금 살고 있는 이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집모양이야 세월 따라 바뀌어 온 거지만 이집에서 태어났고, 70평생을 이집에서 살고 있는 거지요. 젊은 시절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빼고는 단 한번도 온양리 양정마을을 떠나서 산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울진 임씨 성에 명자, 화자를 썼고요, 어머니는 박씨 성에 내자 출자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86세를 끝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셨고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년이 지나서 87세까지 사시다가 세상을 떠셨지요. 모든 자식들에게 부모님이야 천수를 누린들 왜 아쉬움이 없겠습니까만, 그래도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하신 편이지요.” 

 

임씨의 부모님은 바닷가에서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가까운 짬에서 미역이나 톳 같은 해조류도 채취하고 농사도 지으며 그렇게 빡빡한 살림을 꾸려 갔었다.
“아버지는 농사도 지으면서 봄철이면 떼깔이를 저어 미역 같은 해조류도 뜯어서 내다 팔고 그렇게 가정을 일구어 나갔어요.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봄 미역 철에 아버지가 떼깔이를 저어 나가 가까운 짬에서 미역을 뜯을 때면 그 떼깔이에 앉아서 놀고는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떼깔이와 친하게 된 거지요. 그때는 미역도 참 많이 났었는데, 바닷물이 흐려서 물 아래가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상어기름을 물위에 둘러치면 금세 물이 맑아져서 아래가 훤하게 보이고는 했어요. 상어기름을 둘러치고 기다리다가 물밑이 맑아지면 긴 낫대를 이용해서 미역을 뜯고는 했지요. 그래도 미역채취는 봄 한철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일년 동안 삼시세끼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그래서 미역을 뜯는 일은 부업인 셈이고, 농사가 본업이었지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떼깔이에 올라 앉아 놀면서 자연스럽게 떼깔이와 친해진 임황동씨는 외아들로 태어났다.
“저는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어요. 위로 누님이 한분 계시고 아래로 여동생이 한명 있습니다. 매호라는 누님은 84살인데, 저기 바로 아랫집에 살고 있지요. 지금은 돌아가신 자형이 예전에 우리 집에 일꾼으로 들어왔었는데, 주인집 딸인 제 누님과 눈이 맞아서 결혼까지 했으니 한마디로 누님을 뺏긴 거지요, 뭐. 자형은 누님과 결혼한 다음에 우리 집에서 데릴사위 노릇도 했고요. 아래로 만리라는 여동생이 있어요. 만리라는 이름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인데 호적상에는 어떤 이름으로 올라 있는지 기억이 없네요. 저하고는 6년 차이니까 올해 68살이지요, 아마.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서 살고 있어요. 한국에서 계속 살았는데, 여동생의 딸이 결혼해서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여동생은 그 딸을 따라서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매제가 어느 날 바람이 와서 한쪽 수족을 못 쓰게 되었는데, 아마 그래서 딸을 따라 캐나다로 건너간 모양입니다. 한국에서 살다가 캐나다로 건너간 지 한 5년 됐어요.”
 
먹고 사는 일이 그럭저럭했던 어린 시절·····울진국민학교 거쳐 울진고등공민학교 1년 중퇴·····18살에 4살 연상의 장필연씨를 아내로 맞이해

임황동씨의 젊은 어느 때
임씨는 어릴 적에 집안이 먹고사는 일은 그렇게 큰 걱정은 없었다고 전해준다.
“어릴 때 먹고 사는 일은 그럭저럭했습니다. 누님을 뺏어가면서 저에게는 자형이 됐지만, 일꾼도 한명 두고 있으면서 농사를 지을 정도였으니까 가정 형편이 그렇게 곤란한 편은 아니었지요. 뒤에 자형이 된 일꾼에게는 일년에 쌀 다섯 가마니를 수고비로 주고는 했는데, 쌀 다섯 가마니를 주고 나면 집안에 그렇게 남는 것도 없었다고 해요. 나이가 들면서 돌이켜보면, 우리 집이 농사가 엄청나게 많고 잘 살아서 일꾼을 둔 것이 아니라, 외동아들로 태어난 제가 일 고생 할까봐 일꾼을 두었던 모양이라는 생각도 들고는 하지요.” 

 

임씨는 울진국민학교를 38회로 졸업하고 중학교격인 당시의 울진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여 1년 정도 학교를 다니다가 스스로 그만두게 된다.
“그때는 왜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울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울진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서 한 일년 다니다가 학교를 다니기 싫어서 안 갔습니다. 학교에 안 간다고 하니까 담임선생님도 집으로 찾아오고는 했는데, 도저히 다니기가 싫어서 학교를 때려치우고 농사일이며, 바닷가의 해산물 뜯는 일이며 그런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가 어릴 때는 몸이 참 약했는데, 국민학교를 중간에 한참씩 쉬고는 했지요. 그러다가 아픈 몸이 덜해지면 다시 학교를 다니고, 그러기를 반복했어요. 울진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녔다면 38회가 아니라 35회로 졸업했어야 하는데, 제 또래들보다는 늦게 학교를 졸업한 것입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난 다음에는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면서 떼깔이를 부리는 기술도 배우고, 봄이면 미역도 뜯고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연지리와 명도리까지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농사를 지었지요.” 

 

울진고등공민학교를 일년쯤 다니다가 그만둔 임씨는 집에서 부모님을 거들어 농사도 짓고, 바다일도 배우고 하다가 18살에 이웃집 아가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18살에 4살 위의 집사람과 결혼했어요. 제가 18살, 집사람은 22살이었지요. 장필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집사람과 저는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도, 연애결혼이 아니라 이웃에 살던 박씨 아저씨라는 분이 중신을 했습니다. 지금은 박씨 아저씨도 돌아가셨지요. 그때 집사람의 친정집은 바로 저기 보이는 슬라브집인데, 그때는 당연히 초가집이었습니다. 처갓집은 몇십년 전에 모두 다 대구로 이사를 갔어요. 그 당시에도 우리 집은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지만, 집사람의 친정집은 참 어렵게 살았었지요. 그래도 둘째 처남은 일정시대에 일본 해군에 근무하다가 나왔는데, 해방이 되고 영주시 서장, 태백 장성 서장, 동대구 경찰서장등을 거치고 만기 퇴직했습니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서는 얼마 못살고 암으로 돌아갔어요. 그래도 둘째 처남은 순경부터 출발해서 경찰서장까지 지냈으니 머리도 뛰어났고, 그 당시로서도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지요.” 

 

임황동씨는 장필연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밑으로 아들 둘을 두었지요. 48살 된 첫째 선종이는 현재 울진산림조합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시종이라고 42살 먹었는데 서울서 장사를 하고 있어요. 원래 첫째아들과 둘째 아들 사이에 아들 하나가 더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보다 앞서서 세상을 떴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울진 시내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냥 감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울진병원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병원도 없어졌고 의사도 죽고 없지요. 울진병원 의사가 감기라고 하는데도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포항 성모병원을 찾아 갔더니, 머리가 어떻게 잘못됐는데 이미 늦었다고 하더라고요. 울진병원 의사가 단순하게 감기라고 하는 바람에 도시의 큰 병원에 너무 늦게 간 거지요. 운짐이 달아서 큰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늦은 다음이었으니 울진병원 의사가 잘못 진찰한 거지요. 먼저 떠난 자식이 제일 아쉬운 법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었지만요.”

 

14살 무렵에 겪었던 6.25전쟁·····결혼 후 군에 가서 강원도 금화 3사단 18연대 백골부대에서 근무·····잊히지 않는 군번 10319621

18살에 4살 연상의 장필연씨와 결혼한 임씨는 한두 해가 지난 다음에 군에 입대한다. 

 

임씨가 군에 가 있을 동안 부인 장필연씨는 시댁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그렇게 살았다. 
“결혼하고 군대를 갔지요. 최전방인 3사단 18연대 백골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연대장이 얼마나 무섭고 군기가 엄했던지 죽을 고생을 다 했습니다. 아이고, 말도 하지 마소. 저는 기억력이 참 없는 편인데 군 생활할 때 군번이 10319621번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히는데 어떻게 그 군번은 세월이 흘러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네요. 별다른 특기 없이 보병으로 근무했고, 그때도 36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어요. 강원도에서도 최전방인 화천, 금화 지역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화천은 그나마 후방인 셈이고 부대가 있던 금화 사창리라는 곳은 전방 가운데서도 최전방이었지요. 6.25 전쟁 당시에도 강원도 화천, 금화, 양구, 철원 지역은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잖아요? 백골부대는 6.25전쟁 때는 물론이고 월남전에서도 엄청난 전과를 올리면서 용맹을 떨쳤고, 또 그런 만큼 군기가 셌습니다. 지금과는 또 달라서 그때만 해도 3년 동안 군 생활하면서 고생 참 많이 했지요. 저는 외동아들이면서도 3대 독자가 아니다 보니까 군 생활이 단축되는 그런 혜택도 없었습니다. 군에 가 있는 동안 집사람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도 짓고 그렇게 살았지요. 저는 강원도 금화 사창리라는 곳에서 근무했는데, 휴가를 10일정도 주더라도 집에 와서 쉴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교통편이 무지 나쁠 때라서 강원도 금화에서 울진 집까지 오려면 금화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 청량리역까지 와서 기차를 타고 안동까지 오고, 안동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영덕까지, 또 영덕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울진까지 와야 했어요. 어디 길이나 좋았습니까? 비포장 길에 버스를 타고 오면 차체가 요동을 치면서 이리저리 몸이 흔들리고,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오면 차안에 앉아 있어도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쓰기가 일쑤였지요. 휴가를 받으면 그렇게 금화 사창리 부대에서 울진까지 오고 가는데 삼사일을 소비했으니, 막상 집에서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정말 형편없었던 길 위에서 휴가를 다 까먹은 거지요. 또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군인은 기차에서 절대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지요. 군인은 기차 칸에서 무조건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담배를 원래 피우지 않았는데, 한번은 군대에서 지급하던 화랑담배를 모두 모아서 집으로 가지고 오는 도중에 원주에서 헌병대에게 다 빼앗겼던 기억도 나네요. 술은 한때 참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자주 안마십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까 도저히 술을 이길 수가 없어요.” 

 

임씨는 14살 무렵에 6.25전쟁을 겪었다고 기억한다.
“14살에 가까운 야산으로 소를 먹이러 갔는데, 후퇴하는 인민군을 뒤쫓아서 아군들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알다시피 6.25전쟁 초기에는 울진 지역이 거침없이 밀고 내려온 인민군들에게 점령당해 있었지요. 그 당시에 우리 아버지는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명도리까지 가서 인민군들에게 길도 가르쳐 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전쟁 초기에는 우리 가족들뿐만 아니라, 양정마을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간단한 짐을 싸서 명도리까지 피난을 떠났다가 이틀 동안을 머무르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어요. 명도리로 피난을 떠나서는 풀숲에 숨어 있기도 하고, 근처 인가에 가서 잠시 동안이라도 눈을 붙이고 그러면서 꼬박 이틀을 지냈지요. 그러다가 결국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며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다들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러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지금이야 전쟁이 터지면 어디 피난갈 곳이라도 있겠어요? 죽어도 집에서 죽고, 살아도 집에서 사는 거지. 그때는 집사람과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당시에 처갓집은 큰 고초를 겪기도 했지요. 앞서 얘기했던 둘째 처남이 경찰을 지냈다고 인민군과 지역 빨갱이들에게 처갓집에 남아 있던 식구들은 꽤나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양정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6.25 전쟁 동안에도 그저 평소에 하던 대로 농사도 짓고, 바다일도 하고 그렇게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의용군에 끌려간 사람도 있었고, 아군들이 울진을 수복한 이후에는 사상을 문제 삼아서 국군에 끌려가서 총살을 당한 사람도 있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났는데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참 몹쓸 세상이었지요.” 

임씨는 아들 둘을 두었다. 큰아들 선종씨는 울진산림조합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 아들 시종씨는 서울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악구산까지 네다섯시간 걸려 가면서 지게지고 나무 하러 다녀·····‘떼깔이’는 4월 한철, 농사는 일년·····지금도 밭 열마지기, 논 세마지기 부쳐

1960~80년대만 해도 모두들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밥도 하고 방구들도 덥혀야 했다. 

 

임씨 또한 멀리 악구산까지 나무를 수도 없이 하러 다녔었다고 전해준다.
“나무를 하기 위해 지게를 지고 네다섯시간 걸려 가면서 신림을 지나서 악구산 성재봉까지 나무를 하러 다녔어요. 이곳 양정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곳까지 나무를 하러 다녔지요. 새벽 4~5시쯤에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지게를 지고 악구산까지 가는데, 어떤 때는 도착해서도 한참이 지나야 해가 뜨는 일이 잦았습니다. 악구산에서 지게 가득 나무를 해서 신림을 지나서 호월리까지 도착하면 아버지가 마중을 나와 있었어요. 그곳에서부터는 아버지가 나뭇짐이 실린 지게를 양정 집까지 져다 주고는 했지요. 어릴 적부터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특히 6.25 사변 이후에는 양정마을 인근 산에서는 나무를 구경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나무가 벌채되기도 했고, 다들 나무가 있어야 밥도 지어먹고 방안도 따뜻하게 덥힐 수가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나중에 나무를 구할 수가 없을 때는 나무를 베고 난 다음에 땅속에 박혀있는 나무뿌리까지도 남김없이 캐다가 불을 때고는 했어요. 온산을 헤매 다니면서 검불이나 깔비도 져 나르고... 아이고, 정말 생각해보면 몸서리 나니더. 지금이야 그때에 비하면 아무 고생 없이 세상을 그저 사는 거지요.” 

 

평생 떼깔이꾼으로 살아온 임씨지만, 떼깔이는 봄 한철 미역을 채취할 때 이용하는 것이니만큼 생계는 농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임씨는 지금까지도 꽤 많은 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에도 밭은 이 뒤쪽 양정재 너머와 연지리에 있었고, 논은 명도리에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논밭으로 나가면 하루 종일 그 논밭에 엎어져서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어요. 참 먹고 살기가 힘들고 고단했던 시절이었지요. 또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기도 했고요. 지금은 이 아랫집에 살고 있는 누님 밭이 꽤 있는데, 자형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는 밭을 부칠 사람도 없고 해서 제가 그 밭을 몇마지기 얻어서 부치고 있습니다. 원래 부치던 우리 밭이 이 뒤 양정목재 넘어가면 한 2백여평 있고요. 지금 부치고 있는 밭은 한 열마지기 되는데, 그 밭에 고추, 감자, 마늘, 보리를 갈아 먹습니다. 지금 집사람은 그 밭에서 일하고 있을 거시더. 집사람도 젊었을 적에는 얼굴이 고왔는데, 평생 동안 하도 일을 많이 해서 지금은 꼬부랑 할마이가 다 됐지요. 논은 명도리에 세마지기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기계를 빌려서 모심기도 하고, 벼 베기도 하고요. 저야 그저 때맞춰서 비료나 치고 그러지요. 그나마도 내년부터는 논 부칠 사람이 나타나면 남을 주어야겠다, 그러고 있는 중이지요.”
 
군을 제대하고 20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떼깔이’꾼으로·····‘떼깔이’의 밑판은 오동나무로, 노는 가죽나무로 만들어

‘떼깔이’의 밑판은 오동나무 8~10개를 잘라 이물과 고물 부분에 각각 한군데씩 구멍을 파고 철근으로 관통시켜 연결한다 

‘떼깔이’의 이물 쪽에는 ‘Y’자 형태의 나뭇가지로 만든 ‘낫대 걸쇠’를 밑판에 구멍을 뚫어서 고정시킨다

‘노지게’ 중간에 놀을 꽂는 ‘놀좆’을 박는다. 예전에는 나무를 깎아 ‘놀좆’을 만들었는데 요즘은 쇠로 된 ‘놀좆’을 사용한다

오랜 세월 바다를 접하며 살아오고 있는 떼깔이꾼 임황동씨는 군에 갔다 와서 본격적으로 떼깔이를 노로 젓고 다니며 미역 등의 해조류를 채취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군에 갔다 와서 20대 초반부터 정식으로 떼깔이를 타기 시작했지요. 떼깔이는 봄철 한달 정도만 이용하는데, 한때는 가정을 살린다고 오징어 배를 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뱃멀미가 얼마나 심한지 얼마 안가서 그만두었지요. 밤새 남들은 오징어를 잡는데, 저는 뱃전을 잡고 수도 없이 토하고... 그 후부터는 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가서 고기 잡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떼깔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하게 보여도 만드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도 많이 들고, 특히 노 젓는 기술을 익히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 노를 저어보면 자꾸 한쪽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자꾸 젓다보면 금방 또 요령이 생기지요. 노를 하나만 사용해서 젓는데도 빙글거리며 돌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데는 당연히 기술과 요령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요. 한쪽에서만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노를 만든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한 겁니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저는 수영도 잘해요. 젊을 때는 석발 깊이까지 잠수를 해서 미역을 따고는 했었지요.” 

 

떼깔이의 밑판은 오동나무로 만들고 노(놀)는 보통 가죽나무(가장나무)를 쓴다고 임황동씨는 전해준다.
“떼깔이의 밑판을 만드는 데는 오동나무를 사용하고, 놀은 가장나무를 사용하지요. 가장나무를 구하기 힘들 때는 나왕을 쓰기도 하고요. 떼깔이의 밑판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야 물에 잘 뜨거든요. 잘 썩지도 않고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안 되지요. 오동나무는 아직도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가 있어요. 오동나무는 일정 때에 ‘게다’를 만드는 나무이기도 했는데, 저도 어렸을 적 일정 때에 오동나무로 만든 ‘게다’를 신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훤합니다. 떼깔이를 만들 일이 있으면 오동나무를 직접 베거나 주변에서 얻기도 해서 길이 3미터나 3미터 조금 넘게 자릅니다. 떼깔이에 쓰이는 오동나무는 보통 굵기가 작은 것은 50센티미터, 굵은 것은 80센티미터 되는 것도 있고요. 그렇게 오동나무를 대충 길이에 맞추어 8개나 10개 정도 자르고 난 다음에는 이물(배의 앞부분)과 고물(배의 뒷부분)이 되는 쪽 부분에 통나무마다 두군데씩 끌과 망치를 이용해서 구멍을 팝니다. 각각의 나무 양쪽에 구멍을 뚫어서 철근 같은 것으로 두군데를 관통시켜서 통나무 8개나 10개 정도를 죽 연결하게 되지요. 철근을 손쉽게 구하기가 힘들었던 예전에는 구멍을 꿰는데 철근 대신 참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요즘이야 철근 구하기가 쉬우니까요. 그 다음에 어떤 때는 다시 한번 철사로 통나무를 죽 둘러 꿰서 완전하게 고정을 시키게 되지요. 그렇게 길이 3미터 정도에 넓이 1미터 60센티미터 정도의 밑판이 완성되고 나면 떼깔이의 고물 쪽에 ‘ㄷ'자 형태의 '노지게(놀지게)’를 만듭니다. 이 ‘노지게’ 중간 부분에 흔히들 속되게 ‘놀좆(노좆, 놋좆)’이라고 하는 끝부분이 원형으로 둥글고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상대적으로 가늘게 되어있는 쇠를 박습니다. 이 ‘놀좆’에 노를 끼워 중심을 잡고 떼깔이를 저어가게 되는 거지요. ‘놀좆’도 예전에는 나무를 깎아서 사용했는데, 이제는 쇠로 된 ‘놀좆’을 사용합니다. ‘노지게’는 떼깔이를 저어서 갈 때 항상 지게위에 짐이 얹히듯이 노가 얹혀 있어야 하니까 ‘노지게’라고 부르게 된 거 같습니다. 그리고 떼깔이의 이물 쪽에는 보통 ‘Y’자 형태의 나뭇가지로 만든 ‘낫대 걸쇠’를 밑판에 구멍을 뚫어서 고정시킵니다. 낫대 걸쇠는 떼깔이가 움직일 때는 낫대를 걸치고, 떼깔이를 바다위에 띄워놓고 낫대로 미역을 뜯을 때는 놀을 그 위에 걸쳐두는 역할을 하지요. 그래야 좁은 떼깔이 위에서 거치적거리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간단하지만 정교한 떼깔이를 만드는 과정이 다 끝나고 나면 완성된 떼깔이를 마을 한쪽 공터에 세워서 자연스럽게 건조시킨다.
“떼깔이를 다 만들고 나면 그대로 바닷가 아무데나 세워 두고 1~2년 건조시킵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저절로 건조되는데, 제대로 말랐다 싶으면 바다로 나가게 되지요. 바닷가에서 염분을 먹으면서 바짝 건조된 떼깔이가 바다로 나가서 다시 짠 바닷물을 먹고 그러면 십수년간 썩지를 않습니다. 봄 미역철인 4월 한달 동안 떼깔이를 사용하고 나면 또 그렇게 마을 한쪽 공터에 세워두지요. 가끔 여름철 휴가를 받아온 자식들이 가까운 물에 나가서 낚시를 하거나 할 때 이용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떼깔이가 바다로 나갈 때는 예전에는 몇 사람이서 힘을 합쳐서 끌고 옮겼지만, 지금은 떼깔이에 밧줄을 걸고 경운기로 끌어서 옮기지요.”
 

‘놀(노)’은 보통 가장나무(가죽나무)를 사용하고, ‘떼깔이’의 밑판은 오동나무로 만든다


4월 미역철, 날을 정해 온양어촌계원들이 공동으로 미역 채취·····올해는 미역 흉년으로 집집마다 30단씩 배분·····철저하게 남성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온양어촌계

온양리 어촌계원들은 해마다 봄철 4월 한달간 미역을 채취해서 짧은 기간치고는 꽤 큰 수익을 올린다. 

 

그리고 어촌계는 철저하게 여성들을 배제하고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양정마을이 속한 온양리 어촌계의 계원은 모두 23명입니다. 계원 중에 한명이 투표를 통해 어촌계장으로 선출되고요. 그 어촌계장이 수협을 오가면서 어촌계원들의 주장도 전해주고 그러지요. 온양리어촌계의 바다 경계는 예전 온양초등학교 앞쪽에서부터 저 아래 대나리 마을 인근까지입니다. 양력으로 4월 달이면 모두들 날을 잡아서 미역을 뜯기 시작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어느 날부터 미역을 채취하게 되지요. 날씨가 좋으면 열흘 안에 미역 채취가 끝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좀 더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공동으로 미역을 뜯고 나면 어촌계원 23명이 똑같이 미역을 나누게 됩니다. 각자의 몫이야 집에 가서 말려서 팔든지,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에게 보내 주든지, 그냥 집에서 먹든지 그건 자유고요. 올해는 미역을 많이 못했어요. 미역이 많이 붙은 바위도 있고, 덜 붙은 바위도 있고 들쭉날쭉해서요. 올해는 스물세명 어촌계원들 집집마다 30단씩밖에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한단이 20올이니까 얼마 못한 거지요. 한단에 8만원도 받고 10만원도 받고 가격도 대중없어요. 올해는 미역이 흉년이었습니다. 또 떼깔이를 타고 낫대로 미역을 채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보니까, 해녀들에게 깊은 물밑의 미역채취를 가끔 부탁하게 되는데, 작업이 끝나면 해녀들도 자기 일당으로 미역을 가지고 가니까 실제 어촌계원들 몫은 얼마 되지 않는 거지요. 어촌계원 가운데 남자들이 몸이 아파서 공동 작업 날에 못나오면 여자들이 대신 나오기도 합니다. 또 어촌계원 가운데 남자 계원이 죽으면 여자에게는 승계가 되지 않고 자동으로 탈퇴처리가 이뤄집니다. 어촌계원은 남자만 될 수 있지, 여자는 될 수 없습니다. 어촌계는 철저하게 남자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체제지요. 아마 지금 살아있는 대부분의 나이든 남자 어촌계원들이 다 죽고 나면 죽변수협에서 관리하든지, 인근 어촌계와 통합되든지 하겠지요.” 

 

현재 죽변수협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임황동씨는 젊은 시절 한때 새마을 지도자로 활발하게 봉사했던 적도 있다.
“산림조합에 다니는 큰 아들이 십수년 전에 모터보트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50마력짜리인데 저런 모터가 달린 배가 있어야 수협 조합원이 될 자격이 주어지지요. 휴가철이 되면 가족들이 저 모터보트를 타고 가까운 곳으로 가자미 낚시도 다니고 그럽니다. 제가 지금 죽변수협 대의원입니다. 대의원이라고 해봐야 일년에 두번 예산총회와 결산총회 참석하는 것 밖에 없지만요. 대의원 30명중에 제가 나이도 제일 많아요. 젊었던 40대 후반까지는 새마을지도자로 열심히 쫓아다닌 적도 있어요. 한 8년 정도 활동했던 거 같네요. 그때 새마을 사업이 시행되면서 양정 동네에서는 우리 집이 제일 먼저 스레트 지붕으로 개량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양정마을에 100여 가구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60가구나 될지 모르겠네요.”
 

 

현재 죽변수협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임황동씨는 젊은 시절 한때, 새마을 지도자로 활발하게 봉사했다

 

지금 온양리 양정마을에는 5~6척의 떼깔이가 남아 있다.
임황동씨는 “떼깔이를 부리다가 나이가 들어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사람들이 많고, 이제는 해마다 미역 철이 돌아와도 보통 3척의 떼깔이를 쓰고, 어쩌다가 4척의 떼깔이를 사용한다”고 전한다. 

 

양정마을에는 5~6척의 ‘떼깔이’가 남아 있다. 이제는 미역 철이 돌아와도 3척 또는 4척의 ‘떼깔이’만 사용할 뿐이다
이제는 떼깔이를 만들고 노를 저어 부릴 수 있는 사람도 겨우 3~4명만 남아 있을 뿐이고, 이를 나타내듯 양정마을 동네 앞 도로변에는 손본 지가 오래된 듯 오동나무 밑판이 뒤틀리고 갈라진 채 방치되어 있는 떼깔이도 눈에 띈다. 

 

푸른 바다위의 바위짬들을 가르며 떼깔이가 떠다니는 광경은 미역을 채취하는 시기인 4월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렵다. 

 

임황동씨의 떼깔이도 이제는 주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70평생 긴긴 세월동안 임황동씨는 떼깔이와 함께 하면서 낫대를 휘둘러 물 아래에서 너울거리는 검푸른 미역을 뜯었고, 그때마다 희망도 함께 건져 올리고는 했다. 

 

평생 떼깔이에 기대어 살아온 그는 오늘, 또 다시 익숙한 항해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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