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임진왜란 거북선과 정주영의 현대조선

기사입력 2026.04.0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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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정담장군숭모회

회장 임우규

 

오늘날 ‘MASGA(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라는 거창한 구호를 세계인이 붙여주기 전에 먼저 56년 전, 현대중공업(이하 HD현대중공업)의 조선 사업은 사실상 기획실 직원 12명으로 꾸린 ‘조선사업추진팀’에서 출발했다. 

 

1970년 조선 사업은 정식 부서로 확대되며 총 6,300만 달러의 창업 자금이 필요했지만, 4,300만 달러를 외국에서 조달해야 했다.

 

그러나 “배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한국 경제 규모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외 은행들은 모두 투자와 대출을 거절했다. 투자 유치는 실패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오히려 전략을 바꿨다. “배를 만들어 본 적은 없어도 배를 먼저 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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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삽화. 나무위키

 

그가 첫 고객으로 찾아간 사람은 선박왕 ‘조지 리바노스’였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500환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선박이란 엔진과 철판이면 됩니다. 한국은 이미 16세기에 철갑선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조지 리바노스는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조선소에 초대형 유조선 2척을 주문했다. 이것이 현대조선업의 첫 수주였다.

 

1971년, 차관 도입을 위해 영국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HD중공업 정기선 회장 조부)은 ‘A&P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만났다. 

 

롱바텀 회장은 회의적이었지만 정주영 회장은 다시 500환 지폐(거북선 그림)를 꺼내며 말했다. “영국보다 300년 앞선 16세기 한국은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산업화만 늦었을 뿐 조선의 잠재력은 살아있습니다.” 

 

결국 롱바텀 회장은 울산을 직접 방문했고,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면서 ‘차관 도입’, ‘기술제휴 성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특히 ‘A&P애플도어’와의 기술제휴는 ‘선박 12척 판매 후 분할 상환(국제 관례상 이례적임)’이라는 파격적인 계약이었다.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이 설립되었고 ‘미포만’에서는 ‘독(dock)’ 공사가 진행되는 한편 초대형 유조선이 동시에 만들어지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2월 15일 첫 26만톤급 초대형 유조선(애틀랜틱 배런 호)이 진수되어 인도되었고 그로부터 53년 만에 HD현대(현대중공업 후신)는 세계 최초의 선박 5,000척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럼, 거북선은 무엇인가? ‘과선지제’(창 달린 배. 거북선을 지칭하는 배에 관한 상소문)라는 이름으로 1574년(임진왜란 18년 전) ‘임복’(1521년~1576년, 본관 : 나주, 나주 ‘임’씨 16세 손)이란 인물이 임금께 상소했고 비변사에서 변란에 대비하도록 한 뒤, 이순신 장군이 이를 활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왜군은 비교적 작은 배로 공격해 와서 적함에 오른 뒤 배 위에서 육탄전을 통해 적을 제압하는 전술이었는데, 조선의 거북선은 왜군의 적인 깊숙이 들어가 전열을 교란하고 왜군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한 철갑을 두른 특이한 형식의 배라서 왜군의 전술이 무력화되었고, 따라 들어온 아군의 배들이 우수한 총통(대포)으로 왜선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사용한 ‘선도함’의 성격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임진왜란 3대첩(행주대첩, 진주대첩, 한산도대첩) 중 한산도대첩(임진왜란 초기 1592년 5월 7일~7월 7일)은 거북선 2척과 함선 56척으로 왜군 함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써 왜군 육군이 다시는 호남 지방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대전과를 올렸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원균의 대패로 단 13척(주로 판옥선으로 구성됨. 원균의 칠천량 전투에서 거북선은 2척)만 남은 상태에서 130척의 왜군을 격침시킨 ‘명량해전’에서도 세계의 해군 전쟁사가들은 ‘뛰어난 해군 전술’을 칭찬하면서 조선의 ‘전함(판옥선)’의 우수성을 칭찬해 마지않는다.

 

오늘날 눈부신 한국 조선업의 발전에는 이 모든 한국인의 역량이 녹아들어 간 ‘DNA’가 작동하여 이룩한 것임이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정담 장군


정담 장군은(1548~1592. 7. 8.) 야성 정씨로,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황씨 종택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창국이시다.

 

명종 3년(1548년)에 태어나니 어릴 때부터 영특하게 태어나서 기이한 기상이 있었고, 사람마다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 하였다. 

 

공이 5세 때 어머님을 여의고 10세 때 부친을 잃으니 자부(누이의 남편)인 판결사 황응진이 그를 거두어 키우고 그 비범함을 사랑하여 애써 글을 가르치니 무엇이고 도중에 그만두는 일이 없어 끝내 뜻하는 바를 다 이루고 마는 성품이 있었다.

 

18세에 처음으로 무과에 종사했고, 24세에 예금군이 되어 제주도를 지키는 장교가 되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배가 풍파를 만나 큰 바다에 나가서 행방을 모르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다 공이 죽었다고 상복을 입은 지 수개월이 되었다. 

 

그러나 공을 아는 사람들은 공이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공의 배가 3번이나 엎치락뒤치락하다가 3주야만에 파도가 멈추어 일본 땅까지 갔다가 돌아오니 모두가 감탄하였다.

 

그 뒤 여러 전투에 참여 돌격대장을 역임하면서 경륜을 쌓았고 1592년 4월 13일 청주목사로 부임하자 선조 임금은 조정에서 바다를 지킬 장수와 김제 웅치고개를 지킬 장수를 불차채용(이유불문) 지시하니 40여명의 장수가 추천되었는데 바다는 이순신, 김제군수는 정담으로 결정되어 1592년 4월 19일 말을 달려 김제에 부임하여 즉시 의병 모집과 진안으로 가는 지리산 길목에 나무를 베어 장애물 설치에 주력하였다.

 

이 웅치고개가 무너지면 바로 전주가 무너지는 중요한 요새였다.

음력 7월 초순 왜군이 인근까지 왔다는 첩보는 계속 들려오는데 부하 장수들은 병력, 장비 모두 열세 인지라 작전상 일단 후퇴 재정비를 건의하였으나 장군은 일언지하에 준엄하게 갈 사람은 가라 나는 한 놈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나는 살기 위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하니 장졸들은 장군의 의지에 감복 모두 동의하게 되었다.

이에 장군께서는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올리고 장졸들에게 모두 배불리 먹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7도를 모두 점령 각 도마다 책임자 장군을 지정해 놓은 상태였고, 마지막 곡창지대 전라도를 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물론 전라도 지방마다 의병의 항전은 모두 치열한 상태였으며 장군은 지리산 험준한 곳이 1진, 2진 마지막 3진에 진지를 구축하고 음력 7월 7일과 8일 주야로 1진, 2진 모두 무너지고 순간 장군은 여기가 무너지면 전라도민 20~30만은 죽을 것을 내다보았을 것이고 조선은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을 상상하였을 것이다.

 

정담 장군은 끝까지 죽음으로 웅치고개를 지키다 모두 순절하였다.

만 2일간 병사들 주먹밥, 물 한 모금 제대로 못먹고, 며칠간 밤에 모기는 얼마나 괴롭혔을까. 후원 지원 부대도 없는 산중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보급로를 열어 주고 마지막으로 “나는 살기 위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리라.”라고 외쳤다.

 

오늘 우리는 머리 숙여 다시 한번 조의를 표한다.

일본군도 조선에서 당시 3번 패한 바 있으나 웅치고개에서 인명 피해를 가장 많이 보았고, 전쟁 마당에서도 ‘조 조선국충간의담’이라며 조선군의 충성스러움에 조의를 표하였다.


이순신 장군


임진년 1592년 일본은 안택선이라는 목조배에 100여명의 노 젓는 병사, 소총 포병 등 소총과 칼을 주로 잘 쓰는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다소 둔탁하지만, 안택선이라는 일본배는 순발력이 좋고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며, 배에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기를 실었고 고정 명중률은 좋은 편이었다. 

원균 부대가 일본에 패하면서 거북선 2척과 판옥선 10척 정도 남았는데 조정에서는 바다 실정도 모르면서 거제도에 왜군이 주둔해 있으니 거기 나가 싸우라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큰 바다로 나가면 파도가 치고 수적으로 부족하여 나가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전투에 안 나가니 조정에서는 파직하였다. 

 

그날 밤 이순신이 읊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유명한 시 한 구절이 기록에 남아 있다.

 

며칠 후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재임명하니 명량해전, 울들목해전 모두 좁은 수역임에도 거북선 2척은 적진 중앙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부수고 다른 배들을 학의 날개 펼치듯 일제히 공격해 가는 곳마다 대승을 하였다.

 

이 시절에도 이순신 장군은(뱀띠) 정보에 신경을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기 잡는 어선, 농사짓는 사람, 적이 어디에 있으며 숫자는 얼마인지 등 예리한 판단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명량해전에 적선은 133척으로 기록되어 있고, 13척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치고개 전적비 전면에는 정담어록 ‘나는 살아서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뒷면에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등의 어록이 남겨졌다.


거북선 이야기…설계자 임복


임복(林復, 1521~1576)은 나주 임씨 16세 손으로 자(字)는 희인(希仁), 호(號)는 풍암(楓巖)이며 임진왜란 18년 전에 생을 마쳤다.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46년 증광을과(增廣乙科)에 급제하여 1547년 명종 2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임금 가까이에서 왕명출납업무 등을 수행)에 임명되었을 때 사림(士林)의 화가 있었는데, 공이 권귀(權貴)에 불굴하는 풍절(風節)을 지녔다는 윤결(尹潔)을 옥중에서 죽인 윤원형(尹元衡)의 앞잡이인 간신 진복창(陳復昌)의 트집으로 무신(戊申) 1548년 봄 정자(正字)가 삭탈(削奪)되고 삭주(朔州)로 유배되어 3년을 지냈다. 

 

신해(辛亥) 1551년 명종의 원자 순회(順懷)세자의 탄생으로 을사(乙巳) 1545년 이후 선비들의 죄를 풀어 공(公)도 회진 옛집으로 돌아왔다. 

선조(宣祖) 초에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공은 시문(時文)과 학행(學行)뿐만 아니라 무략(武略)에도 뛰어났다. 1574년에 왜(倭)가 쟁단(爭端)을 만들자, 변경에 관한 일 10여 조목을 써서 받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칭찬했다. 그중 전선(戰船) 철갑선(鐵甲船)의 제도(制度)를 가납(嘉納)하여 비변사령(備邊司令)과 각도(各道)의 수사(水使)로 하여금 그 설계에 따라 장조(裝造)하여 만든 배가 거북선으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을 장려하였다. 

 

과연 10여 년 후 1592년 임진년에 난이 일어나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등이 철갑선을 이용하여 대승(大勝)하였다. 

 

임복은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1553년에 부친 숭지공이 작고하니 3년 시묘(侍墓)를 마치고 선친의 거처인 귀래정(歸來亭) 자리에 새로 정자를 지어 영모정(永慕亭)이라 편액하고 선친을 사모하여 하루에도 여러 번 회정(廻亭)하며 효성(孝誠)이 절절(切切)한 시를 남기었다. 

참고 : 睡隱集 강항 전라남도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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