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6화(8회) 경징이풀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기사입력 2026.04.0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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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강화도는 사면이 바다인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침략자들이 수군 없이 지상군만으로는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1232년, 고려 조정이 몽골의 대규모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39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어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아래 내용은 1232년 고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직후, 문신 이규보(李奎報)가 말한 ‘강도 함락불가론’이다.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虜種雖云頑),

어떻게 이 물을 날아 건널 수 있으랴(安能飛渡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彼亦知未能)

와서는 진을 치고 시위만 한다오(內以耀兵耳).

누가 능히 물에 들어가라 말하겠는가(誰能諭到水).

들어가면 곧 다 죽고 말 텐데(到水則皆死).

어리석은 백성들이여 놀라지 말고(愚民且莫驚),

안심하고 단잠이나 주무시구려(高枕甘爾寐).

저들은 마땅히 스스로 물러갈 것이니(行當自退歸),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질 수 있으리오(國業寧遽已).


강화도에 대한 이규보의 이런 생각은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까지 백성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있었던 상식이었다. 이런 인식은 군사, 지리적으로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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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지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지리적으로 보면, 강화도는 북으로는 조강(祖江), 동으로는 물살이 빠른 염하(鹽河)가 흐르고 있었다. 

 

섬 안으로는 넓은 땅을 갖고 있고, 섬 밖으로는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천연 해자(垓子)와 같은 좁은 해협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강화도는 천험(天險)의 요새였다. 

임진왜란 때에도 강화도는 왜군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왜(倭)는 원래 막강한 수군을 앞세워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으로 올라와 해상을 통해 육지에서 북상하는 지상군의 보급로를 측면에서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왜 수군은 그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남해안 일대에서 명장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에 막혀 서해안으로 북상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육지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지상군의 보급로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왜군은 애초 한반도를 거쳐 명나라로 향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가 있었으므로 백성들 사이에서 강화도는 국난을 당했을 때 언제나 안전한 피난처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유력한 섬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역대 조정에서도 유사시에 언제든지 가까운 강화도로 피신하여 사직을 보존하고 항전을 이어가겠다는 복안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은 이런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청군의 막강한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무사안일에 젖어있던 조선 조정과 저잣거리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청군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6일째인 1637년(정축년) 1월 9일(음력 1636년(병자년) 12월 14일). 

개성을 통과한 청군 선발대가 무악재를 넘어 홍제천에 진(陳)을 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양 저잣거리는 단숨에 공포에 빠지고 말았다. 

백성들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 충격은 실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민심이 술렁이자 뒤늦게 조선 조정은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황급히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해 피난 행렬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전쟁 준비 때부터 조선 조정의 예상 움직임을 예상했던 청군은 이미 한양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한 다음이었다. 

다행히 왕자와 빈궁 등 일부 왕실 인물들과 고위 관료 가족들은 간발의 차로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었을 뿐, 정작 국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새도 없었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간다는 소식이 저잣거리에 퍼지자 수많은 백성이 앞다투어 강화도로 들어가는 해변 포구로 모여들었다.

 

왕실 가족 보호를 책임진 강도검찰사 김경징과 조선군 지휘 책임을 맡은 주사대장 장신 등 지휘부의 무능은 모든 비극의 출발이었다. 이들은 위기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의지도 없었다. 

 

청군이 강화도로 들어가는 포구 일대의 점령지를 돌며 민가를 부숴 배 만드는 재목을 쓸어모아 선박을 만든다는 첩보가 계속 올라오는 데도, 조선군 지휘부는 저들이 불가한 일을 한다고 코웃음 치며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청군이 급조한 배를 나누어 타고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상륙을 감행하자, 그제야 놀라 군사들을 이끌고 포구로 달려갔지만, 그나마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조선군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으므로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난공불락의 안전지대라고 믿었던 강화도는 남한산성보다 먼저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무사안일에 젖어있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황망한 일이었다.

 

왕실 인물들과 고위 관료들의 가족이 무더기로 청군의 포로가 돼 버리자, 남한산성에서 결사 항전을 외치던 주전파와 화친을 주장하던 주화파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던 국왕 인조도 결국 항복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전을 외치다 자진해서 항복한 남한산성과 달리 무력으로 점령당한 강화도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수많은 사람이 청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도 청군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병자호란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의 무대는 남한산성이 아니라 강화도였다. 병자호란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들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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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아래 갑곶나루.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이 도하작전을 위해 정박한 곳이다


1637년 정축년(丁丑年) 2월 16일(음력 1월 22일).

강화도를 점령한 도르곤의 청군은 일부 잔류부대를 강화도 남겨놓고 세자빈과 두 대군을 앞세워 200여 명의 포로를 앞세워 송파 벌판으로 출발했다. 

 

강화도에 남은 청군의 잔류부대는 강화도 전역을 이 잡듯이 뒤지면서 무자비하게 포로사냥을 즐겼다. 청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고 장정들은 포로로 잡혔다. 조선 백성에게 강화도는 문자 그대로 지옥이었다.

 

송파에 이른 도르곤은 청 태종에게 강화도 함락 사실을 보고하자, 청 태종은 기뻤다. 

강화도가 어떤 곳이던가. 여태껏 조선을 침략한 수많은 북방 민족이 단 한 번도 함락시켜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도 벌벌 떨게 했던 칭기즈칸의 몽골군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이제 청군이 해낸 것이었다.

 

청 태종은 강화도에서 인질로 잡혀 온 봉림대군에게 남한산성에서 버티고 있는 인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그리고 함께 잡혀 온 윤방(尹昉)과 한흥일(韓興一) 등에게도 인조에게 올리는 장계를 작성하게 했다.

 

윤방은 영의정에 올랐던 윤두수(尹斗壽)의 아들로 빈궁(嬪宮)과 봉림대군(鳳林大君) 등 왕실 일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신할 때 묘사제조(廟社提調)에 임명되어 동부승지 한흥일과 함께 종묘의 40여 신주(神主)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부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급히 신주를 땅에 묻었으나, 청군에게 들켜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 일로 그는 청군이 항복을 받고 물러간 후에,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마침내 1637년 2월 20일(음력 1월 26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 지 4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에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뒤이어 강화도에 피신했던 빈궁과 대군들 그리고 조정 신료를 포함하여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송파로 끌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너무 낙담하여 용상에 앉은 채로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용상에서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내관들은 물론, 소식을 전한 신료들까지도 할 말을 잃었다. 남한산성 행궁에는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사실 얼마 전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으나 강화도가 그리 쉽게 함락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천혜의 요새를 갖춘 강화도가 그것도 한겨울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남한산성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어서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청군이 포위하여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삼남 지방에서는 왕실을 구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인조도 파발을 각지로 보내 종묘사직의 위급함을 알리고 남한산성으로 구원군을 보내라고 독려했다. 

 

그러자 여러 도(道)의 감사(監事)와 병사(兵使) 등 직책을 가진 관리들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조정을 구원하겠다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이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청군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1637년 1월 27일(음력 1월 2일)의 일이었다.

이 당시 동원된 조선군의 숫자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략 2천여 명 정도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쌍령에 도달한 조선군은 각각 고개 양쪽에 진을 쳐 목책을 세우고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당시 병사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조총을 다루는 데는 매우 서툴렀다.

조선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청군은 이들을 막기 위해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6천여 명의 청군을 보냈다. 

청군은 재빨리 지금의 곤지암 현산 일대를 점령하고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쌍령으로 30여 명의 기마병들로 구성된 척후를 보냈다. 

 

청군 척후병들이 목책에 다다르자 이를 발견한 조선군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조선 병사들은 지휘관의 신호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발포했다. 

그 바람에 소지하고 있던 탄환들을 거의 다 소진해 버리고 말았다. 얼마 되지도 않은 탄환이 떨어지자 조선군 진영은 탄환을 빨리 달라고 우왕좌왕하며 혼란스러워졌다.

 

조총 사격에 잠시 놀라 후퇴하던 청군이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머리를 돌려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하였다. 이에 놀란 조선군은 조총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내빼기 바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가 넘어져 자기들끼리 밟고 밟혀 죽는 참극이 벌어지면서 참패하고 말았다.

 

지휘관 허완(許完)은 도망가는 병사들을 불러세우며 분전하였으나, 사태를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인조실록』 36권, 16년(1638년 무인(戊寅) 3월 28일(신묘(辛卯)) 2번째 기사)

 

한편, 반대쪽 고개에 진을 치고 있었던 민영의 조선군은 청군의 공격에 그런대로 잘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총 사용에 익숙하지 못한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고 탄환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너무 적은 양의 탄환을 분배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소량의 탄환을 가지고 있던 병사들은 청군이 가까이 오자 가지고 있던 탄환은 순식간에 소진되었다. 

 

급하게 탄환과 화약을 재분배하려고 했으나 병사들의 실수로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화승 불꽃에 닿아 대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란 조선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혼란에 빠진 조선군에게 청군의 팔 기병대가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공격하자, 순식간에 조선군 선두 진영이 궤멸하고 말았다. 

 

선두 대열이 무너지자 조선군의 대오는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병사 대부분이 겁을 집어먹고 도주하다가 서로 밟혀 죽거나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지휘관 민영(閔)은 군관과 군졸들이 그를 부축하여 말을 태워 달아나라고 했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한 상주영장(尙州營將) 윤여임(尹汝任),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 등도 민영과 함께 마지막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인조실록』 34권, 15년(1637년 정축(丁丑) 2월 26일(병신(丙申)) 2번째 기사)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조선군은 청군에 힘도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배는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에게 엄청난 충격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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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전투(영화 '남한산성' 중에서)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쌍령전투의 패배는 임진왜란 때 용인전투와 칠천량해전, 그리고 6·25전쟁에서의 현리전투와 함께 4대 패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어쩌면 병자호란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던 쌍령전투는 허완과 민영의 조선군이 청군의 기습공격에 허무하게 궤멸하는 바람에, 더 이상 삼남 지방에서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올라오는 군대는 없어지고 말았다. 

 

당시 청군의 일부 부대는 이미 경기도를 넘어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을 비롯하여 목천(木川),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노략질을 자행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청주까지 올라왔다가 청군의 습격을 받아 간신히 옥천으로 피신해야 할 정도였다. 

 

이런 소식들이 저잣거리를 통해 퍼지면서 전국은 갈수록 공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했던 까닭에, 지방에서 관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인 국왕을 구출하려는 움직임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에 이르기까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올 것으로 애타게 기다렸던 구원군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간간이 인조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자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곧바로 청 태종이 보낸 사신이 강화도 함락 사실을 알리고 재차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가지고 오자, 그동안 애써서 헛소문일 것이라고 반신반의하던 것이 모두 사실임이 명백해졌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더 이상 행궁의 분위기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럴 때는 누군가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비록 치욕적이기는 하지만 청군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고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장차 국운의 반전을 꾀할 유일한 방도라는 것을 주장한 입장에서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방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최명길은 곧장 인조에게 나아가 자신이 직접 청군 진영에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오겠다고 청했다. 인조는 즉시 좌의정 홍서봉에게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청군 진영에 가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고 명했다. 

 

좌의정 홍서봉은 최명길 등과 함께 청군이 보내온 사신을 따라 청군 진영으로 향했다. 우수(雨水)가 막 지났지만, 남한산성에서 송파로 이르는 길에는 아직도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이들은 매서운 강바람을 맞으며 골짜기를 내려가 청군 진영에 들어섰다. 

청군 진영에 이르니 완전무장한 군졸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위암감을 느꼈지만 애써서 태연한 척 앞으로 나아갔다. 


청군 진영에서는 용골대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맞았다. 용골대는 두 사람을 자기 막사로 안내했다. 구면인 사이인 최명길이 웃으며 용골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어느 정도 있는 사이였다. 용골대는 무표정하게 최명길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을 막사 안으로 안내한 용골대는 자리에 앉아 차(茶)를 내오게 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홍서봉에게 항복문서를 가지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좌의정 홍서봉이 당황하여 우물쭈물하자 이조판서 최명길이 앞으로 나섰다. 

최명길은 청군 진영에서 보내온 강화도 함락이 사실인가를 확인하려고 온 것이라고 말하고, 조선의 조정은 그 내용의 진위를 확인한 후에 항복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용골대는 최명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부관에게 눈짓했다. 미리 지시받은 듯 부관은 막사 밖에 나갔다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홍서봉과 최명길은 깜짝 놀랐다. 왕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던 종실 진원군(珍原君)과 내관 나업(羅業)이었다.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은 강화도로 들어갈 때 윤방과 함께 왕실의 신위(神位)를 모시는 책임을 졌었다. 

 

그는 강화부성에서 봉림대군과 같은 방에 기거하면서 그와 시국을 논하면서 현 상황을 진단하고 장차 청에 대한 조선의 대응 등에 대하여 여러 대책을 건의했다. 

그는 평소 의지가 강하고 정의심이 넘쳐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끝까지 화친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봉림대군은 그의 안목을 존중했고 그에 대한 신뢰도 깊었다.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면서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함락된 과정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왕실의 세자빈과 두 대군, 대신들까지 모두 포로가 되어 이곳 송파까지 압송됐다고 말했다.

용골대는 두 사람이 들고 온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재신 윤방(尹昉)과 동부승지 한흥길이 쓴 장계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두 사람은 탁자 위에 놓인 봉림대군의 친서와 장계를 차례로 읽어봤다. 

 

최명길은 진원군에게 봉림대군의 친서라고 하는 문서를 들고 봉림대군이 직접 쓴 것이냐고 물었다. 진원군은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이들이 문서를 들고 문답하는 것을 지켜보며 용골대는 찻잔을 들고 후후 불며 한 모금을 마셨다. 찻잔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홍서봉과 최명길은 비로소 전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동안 외부와의 연락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외부 사정에 어두웠던 그간의 사정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용골대 두 사람에게 청 태종의 최후통첩을 전하며,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성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최명길은 용골대에게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장계(狀啓)를 받아서 남한산성으로 올라왔다. 이제 남은 것은 항전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화친할 것이냐의 선택만 남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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