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9회) 경징이풀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기사입력 2026.04.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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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병자년 12월 14일 저녁 해질 무렵 입성한 남한산성의 남문이다.

 

좌의정 홍서봉과 이조판서 최명길은 다시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두 사람은 행궁으로 들어가 인조 앞에서 청군 진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보고하고 용골대에게서 받아 온 서한과 장계들을 내놓았다.

두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대신들이 일제히 행궁으로 모여들었다. 두 사람이 청군 진영에서 접견한 내용을 하나하나 보고하자, 여기저기에서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대신들은 두 사람이 전하는 강화도 함락의 사실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청군 진영에서 들고 온 문서도 모두 가짜로 꾸며 써서 협박하는 것으로 의심하기도 하였다. 최명길도 봉림대군의 편지와 윤방의 장계가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거들었다.

조정 대신들이 갑론을박하며 다투는 동안 인조는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장계를 꼼꼼히 읽었다. 조정 대신들의 눈은 일순간에 모두 인조에게 향하고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다시 상대방을 비난하며 자기 진영의 의견이 맞는다고 주장하며 시끌벅적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서신과 장계를 한참이나 훑어보던 인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이 일어서자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장내는 일순간에 침묵이 흘렀다.

 

화가 난 인조는 서로 삿대질하며 싸우는 대신들을 향해 그만 싸우라고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경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우고 있을 것이오?”

화가 난 인조는 들고 있던 서신과 장계를 바닥에 내던지고 한참 동안 조정 대신들을 노려보다가 다시 용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대신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뭘 고정하라는 말이오? 그대들은 지금 강도(江都)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리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내동댕이친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을 들고 소리 질렀다.

“이 서신은… 이 서신은 가짜가 아니오. 필체를 보니 봉림대군이 직접 쓴 것이 틀림없소.” 

인조가 다시 용상에 앉자 신료들은 일제히 엎드렸다. 비로소 대신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대신들은 다시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종묘사직이 이미 무너졌건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宗社已陷, 吾無可爲者)”

인조가 탄식하며 소매를 들어 눈물을 훔치자,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며 우는 자도 늘어났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강화도 함락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강화도의 함락으로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모두 빈궁과 대군들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던 자기 집안 식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 버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영의정 김류(부인과 며느리, 손자며느리 자결), 병조판서 이성구(부인 자결), 공조판서 장유(며느리 포로로 잡혀감), 예조판서 김상헌(형 김상용 순절), 참판 김반(부인 자결), 대간 윤황(동생 윤전과 며느리 자결) 등 상당수 대신들의 집안 식구와 친족들이 강화도가 함락되고 나서 변고를 당하고 있었다.

 

분위가 다소 진정되고 평정심을 찾아가자, 영의정 홍서봉을 비롯하여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이 나서서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신하 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김상헌, 정온, 윤황 등 대표적인 척화파 대신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침묵했다.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있던 강화도의 함락으로 더 이상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부르짖을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종묘사직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성리학적 의리 논쟁도 사실상 무의미해진 것이다.


사실 그동안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1만여 명의 군사로 버티면서 농성을 계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포위한 청나라군과 계속 사신을 주고받는 등 계속 화친을 위한 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구출하러 전국에서 달려온 병력(근왕병)이 모조리 패전했고, 식량과 연료도 바닥난 데다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갔다.

게다가 청군과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성안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성안의 민심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었다. 마침내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병사들은 행궁으로 몰려와 청나라와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고 있는 척화파를 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는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인조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월 초순에 들어와 조선 조정 내부적으로는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과 용골대가 사신으로 양 진영을 오가며 계속 항복 조건을 협의해 오고 있었다.

 

항복을 위한 조건을 조율하느라 최명길과 용골대는 지루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척화를 주장하는 강경파 대신들을 청나라에 잡아 보내고, 청나라 수도 선양(瀋陽)에 세자와 왕자를 인질로 보내 세폐(稅弊)를 늘리는 것과, 조선군이 청나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 원병을 보낸다는 등의 조건에는 대체로 합의했다.

 

사실 항복하는 것으로만 보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시점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신하를 칭하며 사과했었다. 거기에 삼궤구고두례 자체도 조선에서 아예 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성안에 제단을 쌓아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예를 시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가 남한산성 바로 앞까지 친히 와있는 시점에서 그런 억지가 먹힐 리는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은 조선 측의 이런 제안을 전부 다 무시하고 “황제 폐하께서 친히 이곳까지 행차하셨는데 너희들이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황제 앞에 와서 직접 예를 올려야 한다.”라며 인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인조가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청군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강의 변’처럼 혹시라도 왕인 자신을 청나라로 잡아끌고 갈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그런 위험이 해소되지 않고서는 성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성을 나가 황제 앞에서 항복 의식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해 놓고도 휴전이 쉽게 이뤄지지 않은 이유였다.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1126년 금나라(여진족)의 침략으로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이 함락되면서 황제 휘종, 흠종과 황후, 모친, 후궁 등이 모두 포로로 끌려간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송(宋)은 강남으로 천도했고, 이후 남송(南宋)으로 불리면서 국력이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인조는 자신도 잘못하다가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처럼 항복하고도 청나라로 끌려갈 수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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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정축년 1월 30일 이른 아침 출성한 남한산성의 서문이다


1637년 정축년(丁丑年) 2월 16일(음력 1월 22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강화도를 함락시켜 비빈과 봉림대군 등을 포로로 잡았다. 청군은 봉림대군에게 인조에게 자신이 포로가 되었음을 알리는 계문(啟文)을 쓰도록 하고, 이 문서를 남한산성에 전달했다.

 

이튿날, 청군은 조선의 항복을 압박하기 위해 홍이포(紅夷砲)를 계속 쏘아 성 일부가 무너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조도 결국 청나라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는 청 태종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던 날, 남한산성 행궁에서는 강화도의 함락 때처럼 줄지은 순절(殉節)의 행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절망과 공포로 출구가 없어 보였던 강화도의 함락 때와는 달리 남한산성은 오히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날, 척화파의 핵심이었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은 행궁을 나와 처소에 이르자 곧장 목을 맸다. 이조참판 정온(鄭蘊)도 처소로 돌아와 준비해 두었던 칼로 배를 갈랐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곧바로 사람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다. 

이날 정온이 배를 가르며 지은 시(詩)가 오늘에 전한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 같으니 (砲聲四起如雷震)

고립된 성이 무너지니 사기가 흉흉하네. (衝破孤城士氣洶)

오로지 늙은 신하만이 담소하며 듣고서 (惟有老臣談笑聽)

초가집에 앉아 조용히 죽기로 했다네. (擬將茅屋號從容)


농성 44일째인 1637년 2월 21일(음력 정축년 1월 27일) 아침. 마침내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성을 나와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리고 협상에 따라 2월 24일(음력 1월 30일),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인조가 빨리 성(城)을 나올 것을 재촉하였다. 인조가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가는데, 왕세자가 뒤를 따랐다.

따라오지 못하는 백관들은 서문 안에 서서 계곡을 내려가는 인조의 행렬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인조 일행은 용골대와 마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청 태종이 기다리고 있던 삼전도(三田渡)로 출발했다.

청군 본진에 다다르니 청 태종 홍타이지는 단(壇)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앉아있고, 청군 장수들은 좌우에 늘어서 있었으며 풍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모두 청나라 음악이었다.

 

인조는 절차에 따라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행한 항복 의례는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으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고 칭한다.

원래 명나라식 예법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로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인데, 청나라는 조금 수정하여 한번 무릎 꿇어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숙이는 것을 모두 세 번 반복하도록 했다.

 

이 예법은 청나라 백성은 물론 외국 사신이나 군주가 청나라의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행하는 일반적인 예법이었다. 즉, 청나라는 모든 나라를 신하국으로 간주했으므로, 누구든지 국적을 불문하고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모두 이렇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형식으로 절해야 했다.

 

절을 마친 인조가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청나라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황제께 나의 말을 상주해 주십시오, 황제께서 저의 만 가지 죄를 용서하시고 죽은 몸의 죄를 면해 주셨습니다. 망한 나라를 다시 어루만지시고 저의 종사를 다시 일으켜주셨습니다. 저는 죄를 받들어 황제를 뵙고 이날부터 다시 몸을 다스려 자손 대대로 무거운 은덕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청나라 대신들이 그 말을 창 태종에게 상주했다. 청 태종이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왕이 자기 잘못을 알고 죄를 청하러 항복해 왔으니 충분하다. 이미 항복하러 온 사람을 지난 잘못을 생각하여 죄 주는 도리가 있겠는가. 지금부터 한마음으로 충심을 굳게 하여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가면 된다. 그 말을 다시 논하지 말라.”

 

인조와 조선의 대신들은 일제히 조아리며 말했다.

“만세 황제의 은덕을 우리 소국은 감격함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삼전도의 치욕을 기록한 청나라 측 기록인 『만문당안(滿文檔案)』에 실린 내용이다. 조선 국왕이 청 태종에게 신하로서 죄를 청하는 ‘칭신칭죄(稱臣稱罪)’의 치욕적인 민낯이 여기에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항복 의례가 끝나자, 연회가 시작되었다. 청 태종은 황제의 예법에 따라 남쪽을 향해 남면(南面)하여 앉고, 인조는 그 왼쪽인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해 섰다.

맞은 편에는 청나라 왕자 4인이 앉았으며, 이어 청 태종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나라 신하와 조선 신하들이 나란히 앉은 후 술잔이 돌리며 연회를 시작했다.

연회를 마치자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청 태종은 인질로 끌고 갈 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 진영에 남겨놓고 인조는 대신들과 함께 한양의 궁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가했다.

 

하지만, 청 태종은 청군들이 잡은 조선 포로들은 석방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조정에 보낸 문서에서 청군 병사들이 잡은 포로는 병사들의 전리품이므로 조선 측에 돌려보낼 수 없으니, 만약 조선 측이 이들을 데리고 가려면 몸값을 내야 한다고 통고했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대신들과 함께 도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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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항복장면을 묘사한, 삼전도비 옆의 부조물.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삼전도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나루터로서 마전도(麻田渡)라고도 불렀다. 도(渡)는 섬이 아니라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북으로 건너갔다.

 

1439년(세종 21)에 설치된 삼전도 나루터는 한양과 경기도의 여주·이천 일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한강 남동쪽의 대표적인 나루터였던 삼전도는 강북 도심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특히, 삼전도는 영남 지방에서 과거 시험을 위해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이 꼭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장소였고, 한양의 궁궐에서도 유사시에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으로 이동하는 가장 빠른 나루터이기도 했다.


인조실록에는 인조가 한양도성으로 이동하기 위해 ‘소파진(所波津)을 거쳐 배를 타고 건넜다 (上由所波津, 乘船而渡).’라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소파진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전도에서 물길을 따라 연결되는 상전도(桑田渡)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오늘날 잠실 운동장에서 청담대교 아래 한강으로 연결되는 물길 경로라고 생각된다.

당시 나루터를 지키던 군졸들은 거의 모두 청군에게 살해되었고 작은 빈 배 두 척만이 남아있었다. 

 

인조가 배에 오르자, 백관들이 다투어 배에 타려고 먼저 탄 인조의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조가 화를 내며 뿌리쳐도 말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조가 탄 배가 건넌 뒤에, 청 태종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백사장 가에 있는 뽕밭(桑田)에 임시로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청군을 이끌고 인조의 행차를 호위하게 했다.

 

인조가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나루터로 가는 길 좌우에는 청군이 사로잡은 수많은 포로가 임시로 쳐놓은 철조망을 부여잡고 왕을 향해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길가 양쪽으로 울며 부르짖는 자가 족히 만여 명을 헤아렸다.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庚午) 2번째 기사


인조는 포로가 된 백성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소매를 들어 귀를 막기도 하고 땅과 하늘을 번갈아 보기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배가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자 힘들게 배를 모는 뱃사공들에게 노를 빨리 저으라고 재촉하며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인조 일행은 한강을 건너 인정(人定, 밤 10시경)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도성에 이르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 왕비가 생활하던 공간)으로 들어갔다. 삼전도를 출발한 지 약 4시간이나 걸린 시각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조공과 책봉 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선양(瀋陽)으로 방물(方物)과 세폐(稅弊)를 조공하고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상국(上國)으로 섬긴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롭게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면서 조선은 청의 연호와 책력을 사용해야 했다.

 

인조가 회궁한 다음 날인 1637년 2월 25일(음력 2월 1일)의 『인조살록』에는 ‘여염(閭閻,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이 대부분 불타고 부서져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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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구고두례. 송파구 소공원에 삼전도비와 함께 전시되었던 삼배구고두례 부조

 

이튿날 2월 26일(음력 2월 2일), 청 태종은 먼저 본국으로 출발하였고, 3월 4일(음력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선양으로 떠났다.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론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른바 삼학사인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청 태종이 애당초 삼학사를 선양으로 데려간 것은 이들을 회유해서 전향시키려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완강한 조선의 척화파가 황제의 은혜에 감화받아 전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세가 청나라에 있다는 것을 조선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 조선에서 높아진 반청(反淸)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순순히 전향을 하지 않는 데다가 조선 원정에서 전사한 청나라의 전몰자 유가족들이 강하게 처형을 주장하며 시위까지 벌이자, 결국 이들을 달래기 위해 처형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삼학사(三學士)로 알려진 이들 세 사람은 선양에서 청 태종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오달제는 처형을 앞두고 노모와 형에게 남기는 시를 써서 인편에 부쳤다.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孤臣義正心無怍),

임금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聖主恩深死亦輕).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最是此生無限慟),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北堂虛負倚門情).


이 글이 조선에 전해지자, 조선의 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잣거리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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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왕실록 태백산 사고본 34책 23장


이들은 죽고 나서 충절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내내 충절의 상징으로 숭앙(崇仰)되었다. 그들의 위패가 여러 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그들의 유족과 후손들도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우대받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냉철한 시각으로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았으므로 냉혹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대 척화파 인물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시국에 대한 현실 인식이었다. 우선 동아시아 정세에 너무 둔감했다. 이들은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이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조선이 종주국으로 받들고 있었던 명나라를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집착하여 조선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국익을 보전하는 일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이조참판 정온 같은 인물 정도를 제외하면 만일의 사태를 예상하여 청군이 침략해 올 때를 대비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여 대청 강경론의 구호만 고집스럽게 외치다가 어이없는 참패를 불러온 무능한 사람들이었다.


삼학사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학문적인 수준이나 역량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지식인 계층에 있는 사람으로서 국제적인 정세를 판단하는 식견이 밝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남한산성 행궁에서 국가의 존망을 놓고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던 형세의 변화를 놓고 그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 그들의 처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당시 청나라와 우선 화친을 도모하여 사직(社稷)을 보전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하던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의 판단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실익이 없는 대의명분보다는 어떻게든 먼저 종묘사직을 보존하여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세운 것이다.

척화파들은 주화파를 역적으로 매도하며 극렬하게 공격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운신의 폭을 확대하려 했다. 그들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오로지 성리학적 명분론에만 집착해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역적이라는 비난도 감수하며 홀로 꿋꿋하게 버티면서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들 삼학사는 다른 척화파 인물들과 비교하면 훗날 좋게 평가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것은 바로 강화도의 함락으로 남한산성에서 더 버티려는 의지를 상실하면서 패전이 확실해지고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자, 비로소 화친을 주장해 온 이조판서 최명길의 판단이 옳았고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청나라로 압송(押送)되는 것을 자처했다는 점은 그들의 인품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물론 이들을 비롯한 척화파의 강경 대응으로 나라가 망할 뻔하고 수많은 백성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므로, 자신들의 목숨으로 그 죄를 청산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는 이 정도 책임이라도 지려는 행동이라도 보이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다. 즉, 척화파 대신의 대부분은 능력이나 책임 의식도 없이 입만 살아서 명분론을 들먹거리던 자들이었다. 그나마 책임 의식만이라도 모범이 될 만한 이들이 바로 삼학사 정도였다.

 

이들 외에도 여러 관리와 대신의 자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청군의 대장 용골대에게 붙잡혀갔는데 기록에 남아있는 수만 해도 무려 197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선양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은 청나라의 포로가 된 자를 제외하고도 그곳에 개설된 노예시장에서 약 60만 명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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