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육땅으로 건너온 막내 잠녀(潛女) 장애심씨 이야기

기사입력 2009.10.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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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생명줄을 등에 지고 무한한 생명의 영토를 일구어내는 바다의 여자들, 우리를 그들을 잠녀(潛女), 또는 해녀(海女)라 부른다.  

 

삶의 온갖 애환과 덩이로 맺힌 응어리조차 가난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물질을 통해 훌훌 던져 버리고 마는 잠녀는 외형적으로는 언제나 온가족의 든든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희망은 항상 잠녀들의 양어깨를 내리 누르는 버거운 짐이었기에, 그녀들은 수세기에 걸쳐 환상의 섬 이어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속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틈틈이 물위로 고개를 내밀고 호호이~하면서 휘파람으로 내뿜는 숨비소리는 물속과 물 밖을 무시로 넘나드는 잠녀의 소통법이며, 이어도를 찾아 헤매는 신호이기도 하다.  

 

죽변면 죽변4리 후리깨에는 제주도에서 육땅으로 건너와서 터전을 잡고 평생 물질로 살아가는 잠녀 십여명이 오늘도 바다 속을 넘나들며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다.

 

“5살 때, 해녀인 어머니는 물밑에서 작업을 하다가 물숨을 먹어서 돌아가셨지요.”·····“친정 엄마는 저 하나를 남겼는데, 1년 뒤에 들어온 새엄마는 9남매를 낳았어요.”  

더 이상 고달픈 물질을 배우겠다는 젊은 사람들이 없는 지금, 수십 년 전에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건너온 다음에 죽변면에 정착한 잠녀 중 가장 막내인 장애심(57세)씨는 남제주군 안덕면 대평리가 고향이다.  

 

“남제주군 안덕면 대평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장’씨 성에 ‘성’자, ‘찬’자를 썼고요. 어머니는 ‘진’씨 성에 ‘성’자 ‘희’자를 사용했는데, 사실 희자인지 이자인지 잘 모르겠네요. 주변에서 ‘성희’라고 부른 것 같기도 하고, ‘성이’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버지는 6년 전쯤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제가 5살 때 세상을 떴으니 얼굴도 기억이 없지요. 어머니는 사진 한장 남아 있지도 않고요. 우리 엄마 밑으로는 나 혼자밖에 없어요. 위로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를 본 기억도 물론 없지요. 저 혼자 세상에 남아서 이날 이때까지 이 고통을 당하고 살아온 거래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이듬해, 제가 6살 때 아버지가 새엄마를 집안으로 맞아 들였어요. 아버지는 새엄마 밑으로 9남매를 낳았는데, 저까지 합치면 아버지가 10남매를 둔 것이지요. 새엄마 이름은 몰라요.”  

 

장애심씨는 5살이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전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기억하고말고요. 다 기억이 나는데 지금껏 엄마 얼굴만 기억이 안나요. 엄마도 제주 토박이 잠녀였는데, 바다에서 돌아가셨어요. 물밑에서 작업을 하다가 무엇에 걸려서 물 밖으로 못 올라오고 물숨을 먹어서 돌아가신 거지요.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제가 아침부터 울면서 물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매달렸답니다. 그래도 엄마는 물에 가서 맛있는 것 잡아다 줄 테니까 집에서 잘 놀고 있으라고 했고요. 그런데도 저는 맛있는 것 다 필요 없다면서 울고 불며 작업 가지 말라고 매달렸대요. 그러나 엄마는 저를 뿌리치고 바다로 작업하러 갔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성이가 죽었대, 성이가 죽었대’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래요. 엄마가 물질하러 나가서 돌아가셨는데, 밖에서 죽은 사람은 집안에 안 들인다면서 추럭(화물차)에 실어서 집 옆의 밭에다 옮겨놨어요. 그런데 저는 엄마가 죽었는데도 친구들과 그때만 해도 흔하지 않던 그 추럭에 매달려서 놀았어요. 엄마 친구들은 저를 붙들고 막 울었고요. ‘아이고, 이걸 놓아두고 어떻게 죽었냐?’고, ‘이걸 어떻게 하겠냐?’고 막 우는데도, 저는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친구들과 엄마를 싣고 온 그 추럭에 매달려서 놀았어요. 그렇게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냈어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고생길이 시작된 거지요.”

 

 

“엄마가 세상을 뜨고 다음해에 아버지가 새엄마를 들였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새엄마보다 못되게 하더라고요. 새엄마도 못됐지만, 아버지는 계부보다도 더 못됐게 저를 대했어요.”

장애심씨는 어머니를 잃고 1년이 지난 6살 때 새엄마가 집으로 들어왔고, 그 이후부터 집안에는 불화가 거칠 날이 없었다고 말한다.  

특히 아버지는 새엄마보다도 더 혹독하게 자신을 대했었다고 장씨는 기억한다.
  

“가정불화가 만날 생기고는 했지요. 저희 친정도 어렵게 살았으니까요. 제가 아주 어릴 때만 하더라도 친정집은 그렇게 부자였다고 해요. 집에서 키우는 말도 그렇게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제 얼굴 왼쪽 눈 밑에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이 흉터가 어릴 때 말에 차여서 생긴 흉터랍니다. 5살 되던 해에 말이 차버려 가지고 생겼다고 해요. 제주도에 있는 집들은 마당이 엄청 넓잖아요? 제주도는 말이 많은 집이 부자였어요. 우리 집에도 마당에 말이 많이 매여 있었는데, 어릴 때 제가 그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놀다가 그만 말에 차이고 만 거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름이 많이 잡히니까, 그때 말에 차인 흉터도 점점 더 진해지네요. 할아버지 때는 그렇게 부자였는데, 아버지 대에 와서 다 말아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원체 노름을 좋아하다보니까, 결국 다 말아먹어버렸지요. 아버지는 배추, 양배추, 토마토, 참외, 수박 그런 농사만 지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만날 멀리서 물을 길어서 밭으로 물을 져다 날라야 했지요. 토마토 밭이나 수박밭에 내내 물을 주어야 했으니까요. 엄마가 세상을 뜨고 다음해에 아버지가 새엄마를 들였는데, 아버지가 정말 새엄마보다 못되게 하더라고요. 새엄마도 못됐지만, 아버지도 계부보다도 더 못됐게 저를 대했어요. 어떻게, 아버지가 그렇게 저를 괴롭히면서 못된 짓만 하대요. 그 고생은 말도 못하지요.”  

 

장씨는 그런 이유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새엄마가 자꾸 아프기 시작하더니, 세상을 뜬 친엄마의 혼령이 계모 몸에 자주 실리더라는 특이한 경험을 말해준다.
“새엄마가 그렇게 저를 괴롭히더니 언제부턴가 자주 아프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저의 친엄마가 자꾸 귀신으로 새엄마에게 실리더라고요. 제 친정엄마 혼령이 새엄마 몸에 실리니까, 그렇게 저를 괴롭히던 새엄마가 태도를 돌변해서는 우리 아버지에게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은 애심이 하나인데, 당신은 왜 저 애를 그렇게 괴롭히느냐?’고 말해요. 그러면 아버지는 ‘애심이가 맞을 짓을 하니까 맞는 것’이라고 대꾸를 하고요. 새엄마에게 엄마 귀신이 쓰인 것을 없앤다고 굿도 말도 못하게 했어요. 그러다가 새엄마가 또 정신이 돌아오면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나’ 싶게 변함없이 제가 밥도 제대로 못 먹게 하고 그렇게 또 괴롭혔어요. 밥을 먹을 때면 두어 숟가락을 못 먹었는데도 이리저리 트집을 잡아서 괴롭히고... 그런데 새엄마가 아프면서 엄마 귀신이 계속 실리자, 무당을 불러서 굿도 여러번하고 그랬는데도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은 쉰 몇 살인가 됐을 때 죽더라고요. 그토록 모질게 고생한 세월을 지나왔으면, 나중에라도 좋아져야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저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고 있네요.”

 

“7살에 입학한 국민학교를 새엄마 때문에 1년도 못 다니고 그만 두어야했지요”·····“7~8살 때부터 내내 밭 매러 다니고, 소 먹이러 다니고, 나무 하러 다니고...”

5살에 엄마를 떠나보내고 6살 때 집안에 들어온 새엄마와 아버지에게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던 장애심씨는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저는 또래 친구들보다 생일이 빨라서 7살에 국민학교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자 말자 새엄마가 아버지에게 ‘애심이를 학교에 보내면 어떡하냐?’고,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면서 지내야지, 학교 다닐 시간이 어디 있냐?’고 그러더라고요. 7살에 입학한 국민학교를 새엄마 때문에 1년도 못 다니고 그만 두어야했어요. 자꾸 아버지에게 ‘애심이를 학교를 왜 보내느냐?’고 새엄마가 잔소리하니까 아버지도 당할 재간이 없었나 봅니다. 학교를 그만 두고 새엄마 말처럼 집에서 동생들이나 돌보면서 지냈으면 그래도 다행이었게요. 집에서 애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겨우 나이 7~8살 먹었을 때부터 하루 종일 밭 매는 일만 했어요. 7~8살 때부터 고생이 제대로 시작됐는데, 내내 밭 매러 다니고, 소 먹이러 다니고, 나무 하러 다니고... 아이고...”   

 

장애심씨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새엄마는 새엄마대로 그렇게 구박을 하더라고 전해주면서, 그만큼 세월이 흐른 탓인지 이제는 차라리 웃는다.
“제일 고생을 많이 했던 시절이 11살부터 13살 정도까지였어요. 그때는 주로 나 혼자 소를 먹이러 다녔는데, 소가 배라도 홀쭉해서 집으로 들어오면 아버지는 나에게 다시 소를 끌고 나가서 소 배가 부르면 집으로 들어오라고 혼을 내고는 했습니다. 이미 어두운 밤이 됐는데 어디 가서 소에게 풀을 먹여요? 그런 저녁이면 밥도 못 얻어먹고 어두운데 어디 가서 웅크리고 있다가 깜깜한 밤중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요. 소 먹이는 일도 친구들과 함께 가면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요. 풀이 많은 산 입구에 소를 풀어놓고 친구들과 조를 나누어서 고구마나 감자를 캐오고, 나무를 주워오고, 아궁이를 작게 만들고, 불을 때서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고는 했으니까요. 그런데 저 혼자 소 먹이러 가면 그런 재미도 없고, 정말 어린애가 혼자서 할 일이 못되지요. 왜, 봄이면 안개비가 퐁퐁 뿌리고 앞도 잘 안보이고는 하잖아요? 그런 날에도 아버지는 저에게 소를 먹이러 집밖으로 쫓아 보내다시피 내보내고는 했어요. 안개가 자욱한 그런 날은 동네 친구들은 절대 소 먹이러 안가지요. 어떤 부모가 안개비가 내리는데 자식더러 하루 온종일 소를 먹이라고 밖으로 쫓아내요? 그런 날에 소 먹이러 쫓겨나면 겁이 나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풀도 없는 가까운 야산에 소를 풀어서 올려 보내 놓고는 아무 담 위에나 앉아서 펑펑 울었지요. 울다보면 저를 아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놀래서 ‘소는 어디에 두고, 너 혼자 여기에 앉아서 울고 있느냐?’고 묻고는 했어요. 제가 ‘소는 저 산위에 올라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부모가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느냐?’고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위로는 했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어느 누구라도 아무 말도 못했어요. 아버지에게 누가 그런 얘기라도 하면, 당장 해보자고 달려들 만큼 아버지 성질이 대단했으니까요.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소를 끌고 힘없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지요. 미처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들어오면, 소 배를 곯려서 왔다고 또 소와 함께 쫓겨날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렇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새엄마는 또 새엄마대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는 구박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네요. 참 별의별 구박을 다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어요.”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허구한 날 보리쌀을 훔쳐서 팔아먹었다면서 두들겨 패기가 일쑤였어요”·····“15살 되던 해에 서울에 사는 외삼촌네 집으로 갔어요. 그런데 외삼촌 집에서 생활하는데도 왜 그런지 저는 서울 생활에 정이 붙지 않더라고요.”

장씨는 12살까지 아버지와 새엄마로부터 온갖 천대를 받으면서 지내다가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서 서귀포로 옮기게 된다.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서귀포에서 무슨 일을 한다면서 저를 데리고 집을 나왔어요. 아버지 밥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했으니 저 혼자 서귀포로 옮겨간 거지요. 새엄마와 동생들은 안덕면 대평리 집에 남아 있었고요. 아버지 밥을 해주면서 서귀포에서 지내는데,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허구한 날 사람을 두들겨 패서 못살겠더라고요. 그때는 쌀은 구경하기 힘들고 보리쌀을 먹을 때였어요. 아버지가 왜 패는가 하니, 예전에는 보리쌀을 조금씩 집에서 가져다 먹었는데 그 보리쌀을 제가 팔아먹었다는 거지요. 새엄마가 다 시킨 거지요. 그 성질 고약한 아버지도 새엄마 말은 또 그렇게 잘 듣더라고요. 새엄마가 ‘집에서 보리쌀을 가져간 지가 언제인데 벌써 보리쌀이 다 떨어졌냐?’면서, 아버지에게 애심이가 팔아먹는 거라고 한 거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저를 두들겨 패면서 애먼 짓을 하는 거지요. 그때는 육땅 사람들이 서귀포 집 가까운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그곳은 반찬도 잘 차리고 허여허연 쌀밥만 그렇게 먹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짬짬이 그곳에 가서 설거지도 도와주고 심부름도 해주면서 허연 쌀밥을 얻어먹는 작은 호강을 잠깐씩 하기도 했지요.”  

 

장애심씨는 아버지의 밥을 해주면서 지내다가 두들겨 맞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일하던 제주 은행 전무네 집으로 도망을 갔었다고 말한다.  

 

그 인연으로 장씨는 한동안 제주 은행 전무네 자식들 밥도 하고 빨래도 해주면서 식모로 지낸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저한테 보리쌀을 팔아먹었다면서 두들겨 패지, 날이 갈수록 도저히 무서워서 사람이 살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는 견디다 못해서 도망을 쳤어요. 13살 그해에 도망을 쳤는데, 아버지가 과수원을 맡아서 일하던 제주 은행 전무네 자동차 기사 집으로 갔지요. 그 어린 마음에도, 그 기사에게 전무님네 집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 졸랐어요. 그러니까 자동차 기사가 그 야밤에 전무네 집으로 데려다 주더라고요.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그 집으로 가서 ‘아버지가 이래저래 하도 두들겨 패는데, 무서워서 막상 집은 나왔지만 갈 데가 없어서 이리로 왔다’니까 들어오라면서 따뜻한 밥도 주고 잠도 자게 해 주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가 그 전무네 집으로 저를 찾아 왔어요. 그러자 그 집 사모님이 아버지에게 ‘애심이가 이 집에는 오지 않았는데, 만약 애심이를 찾게되면 제주시에 나가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기 집 애들 밥하는 일을 시키면 어떻겠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전무네 집 애들 세명이 제주시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따로 나가 살고 있었는데, 마침 밥해주는 사람을 구하고 있다면서요. 그래서 아버지 허락 하에 제가 그 애들 밥을 해주러 제주시로 가게 됐지요. 그때부터 한 이년동안을 그 학생들 밥도 해먹이고, 도시락도 싸주고 하면서 15살쯤 될 때까지 제주시에서 살았어요.”  

 

장애심씨는 15살에 육땅인 서울에 사는 외삼촌네 집으로 건너와서 한동안 생활하다가 서울이라는 곳에 도저히 정이 붙지를 않아 19살에 다시 제주도로 건너간다. 
“제주시에서 제주 은행 전무네 애들 밥을 해주다가 하나둘 학교를 졸업하면서 15살 되던 해에 안덕면 대평리 집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곳에서 이모를 만났는데, 이모가 하는 말이 ‘이집에서 아버지와 새엄마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지내느니 차라리 서울에 나가 살고 있는 외삼촌 집에 가서 생활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보다는 서울 외삼촌 집에 가서 사는 게 편할 것이다’ 하면서요. 그래서 15살 되던 해에 육땅인 서울에 사는 외삼촌네 집으로 갔어요. 그런데 외삼촌 집에서 생활하는데도 왜 그렇게 저는 서울 생활이 편하지 않은지, 도무지 정이 붙지를 않더라고요. 외삼촌은 저에게 그냥 서울에 눌러 살면서 결혼도 하고 그러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제 발등을 제가 찍으면서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네요. 끝내 서울 외삼촌 집에서 몇 년 살다가 19살 나던 해에 잠깐 제주도를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그냥 제주도로 들어와서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외삼촌도 술 마시면 곤조도 조금 있고, 어쨌든 얹혀사는 것인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더라고요. 그래도 외삼촌은 예전에 저를 데리고 살던 정을 못 잊어서 지금 이집에도 몇 번이나 다녀갔어요. 여기 오면 제가 싱싱한 회도 해주고, 그러면 맛있다고 하면서 잘 드시고는 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외삼촌도 제주로 들어가서 살고 있지요. 19살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돌아가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는데, 여전히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그렇게 저를 괴롭히고 두들겨 패고 그러대요. 그래서 고모네 집에 가서도 며칠 살다가, 이모네 집으로 가서도 며칠 살다가 그러면서 떠돌아 다녔지요.”

 

장애심씨는 20살에 11살 연상의 남편 고정웅씨를 만났다

 

“19살 되던 해 7월 달에 이곳 죽변으로 건너왔지요. 죽변으로 건너와서 큰 잠녀가 되었어요.”·····“죽변 작은 고모네 집에 와서 잠녀로 일하다가 이듬해인 20살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지요. 그 남자가 애기 아빠입니다.”

장씨는 19살에 죽변면 후리깨에 사는 작은 고모네 집으로 건너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잠녀의 길을 걷게 된다.  

 

제주에 있을 때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느라고 잠녀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고 전해주는 장애심씨다.
“19살 때부터는 제가 스스로 일을 다녔지요. 친구들과 어디 공장에도 다니고, 나무를 심는 곳에 가서도 일하고요. 그런데 고모가 시시때때로 ‘다른 친구들은 데리고 갈 머시마가 다 있는데, 너는 왜 데리고 갈 머시마도 없냐?’면서, 이렇게 고생하느니 어디 시집이라도 가서 재미있게 살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그때 이곳 죽변에 잠녀로 나가 살던 작은 고모가 제주도로 들어왔어요. 당시만 해도 제주도 잠녀들이 많이들 육땅으로 나가서 물질을 하면서 살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때 작은 고모를 처음 봤어요. 제주도에 살던 고모는 큰 고모였거든요. 큰 고모가 작은 고모를 붙들고 ‘애심이가 시집갈 나이도 되고 했으니 차라리 육땅인 죽변으로 데리고 나가서 살면서 잠녀 작업도 시키고,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시집도 보내고 하라’고 그런 상의를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작은 고모는 죽변으로 먼저 돌아가고, 저는 19살 가을 들어서 이곳 죽변으로 건너오게 되었지요. 죽변으로 건너와서 본격적으로 잠녀로 물질을 시작했지요. 제주도에 있을 때까지는 해녀 일을 제대로 안했어요. 그저 헤엄만 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렇게 온데로 돌아다니면서 살았으니까 당연했던 거지요. 여기 와서 큰 잠녀가 되었어요.”  

 

19살에 작은 고모를 따라 죽변으로 건너온 장애심씨는 20살에 11년 연상의 남편 고정웅씨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게 된다.
“19살에 이곳 죽변 작은 고모네 집에 와서 잠녀로 일하다가 이듬해인 20살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지요. 그 남자가 애기 아빠입니다. 남편과는 나이 차이가 11년이나 나요. 애기 아빠가 31살, 제가 20살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31살 노총각이 인근에는 없었어요. 31살이면 다들 가정을 꾸리고 했을 나이였지요. 그런데 제주도에서 처녀가 왔다니까 그렇게 나를 쫓아다니고, 고모도 저를 이곳에 자리 잡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고요. 예전에는 여기서 부산까지 가서 3천원이면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기 싫어서 고모에게 제가 그동안 벌어놓은 돈 3천원만 달라고 졸랐어요. 제주도로 다시 건너갈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고모가 돈 3천원을 주지 않아서 오도 가도 못하고... 그래서 애기아빠와 결국 함께 살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약혼만 한 상태에서 살다가 결혼식은 수년 뒤에 올렸고요. 그런데 우리 애기 아빠가 직업도 없이 또 그렇게 매일 술만 퍼먹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고모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제주도로 건너갈 뱃삯 3천원만 줬어도 이 남자와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그런 원망 때문에요.”

 

“큰아들 임신을 해서 3개월쯤 됐을 때 남편이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또 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눈도 밤탱이가 되고, 그래서 고소하기도 했어요.”·····“그런데 막상 남편이 세상을 등지자 남편이 저에게 못한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제가 남편에게 못 해준 것만 생각이 나서 가슴에 응어리가 졌어요.”  

남편 고정웅씨와 여행지에서
장애심씨는 결혼 초기에 남편 고정웅씨의 폭력을 이기다 못해 경찰에 고발까지 한 적이 있다면서 웃는다.  

 

“애기 아빠의 호적이름은 고정웅이고, 부르는 이름은 고정일이고요. 남편도 원래는 제주도 사람인데, 제가 육땅으로 건너오기 전에 엄마와 누나들과 함께 죽변으로 건너온 지 꽤 됐었지요. 그런데 직업도 없이 만날 술만 퍼먹고 사는 사람이니 죽으나 사나 날마다 제가 고생이었지요. 제 손으로 그날그날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 사는 게 오죽했겠어요? 남편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약혼만 한 상태에서 함께 살면서 큰아들 임신을 해서 3개월 정도 된 어느 날,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또 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눈도 밤탱이가 되고 그랬어요. 임신한 상태에서 두들겨 맞고 도망을 쳐서 동네 구장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고, 남편을 고발해버렸지요. 남편이 군인 기피자라는 것도 그때 알았어요. 결국은 늦은 나이에 축항과 파출소에서 방위를 받고 기피자 신분을 벗어났지만요. 고발을 하고 나니까 남편의 형제들까지 찾아와서 제발 고발을 취하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지요. 그때 죽변 파출소에 우리 종씨인 장재관이라는 형사가 근무하고 있었어요. 죽변시장안에 살다가 대구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 이젠 돌아가셨을 거예요. 남편이 파출소로 찾아와서 처음에는 내 여자를 내가 두들겨 팼는데 다들 왜 그러냐고 더 난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결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가 당신 여자냐?’고 따졌지요. 그 와중에 남편과 남편 가족들은 저보고 고소를 취하하라고 종용하는데도 저는 고소를 취하하지 못한다고 계속 버텼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고소를 취하하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임신한 애기도 지워야하고, 또 그동안 당신과 1년 동안 살면서 내 몸 희생한 것까지 보상하라고 요구했지요. 그때 제가 3백만 원인가를 합의금으로 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었겠어요? 당장 그날그날 먹고 살기도 힘들었는데... 끝까지 남편과 남편 가족들이 저를 설득시키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장형사를 시켜서 저를 설득하더군요. 장형사가 하는 말이 ‘나도 이곳에 근무하고 있으니까 한번만 속아봐라. 두번 다시 남편이 손찌검하면 당당 이혼시켜 줄 테니까’하면서 끈질기게 설득하기에, 결국은 못이기는 척 고소도 취하하고 다시 살게 되었지요. 장형사가 하도 사정을 해서 할 수 없이 이집에 또 들어와서 살게 된 거지요.”
  

 

장애심씨는 결혼 초기에 남편의 폭력을 고소했던 일로 인해, 결국 남편의 손찌검을 평생 고칠 수 있었다며 웃는다.  

“결혼 초기에 남편을 고소한 일로, 어쨌거나 남편이 손찌검하는 버릇은 정말 가르쳤어요. 동네 사람들도 저 쪼그만 한 애심이가 저렇게 시물시러운 고씨네 가족을 이겨서 사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어요. 시집 식구들은 어떤 때는 남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할 만큼 동네에서는 시물시럽기로 소문이 났어요.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어디 한두가지 걱정만 있었겠어요? 애기 아바이가 그 다음부터 두들겨 패지는 않는데 그놈의 술을 어떻게나 많이 마시는지, 새벽부터 나가면 하루 종일 술에 취해서 어디 길가에서도 그냥 엎어져 자기가 보통이었지요. 어떤 때는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던 아들들이 술에 취해서 길가에 쓰러져 자는 지 아바이를 리어카에 싣고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술을 지독히도 좋아하던 장씨의 남편 고정웅씨는 결국 당뇨병으로 인해 장씨가 마흔두살일 때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러나 막상 남편이 세상을 등지자 남편이 자신에게 못한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자신이 남편에게 못 해준 것만 생각이 나서 가슴에 응어리가 졌다는 장씨다.
   “남편은 술을 한번 마시면 한짝씩 먹어요. 몸은 꼬쟁이처럼 말라가고요. 그러더니 결국은 당뇨병이 와서 한 7~8년 고생하더니 돌아가셨지요. 어느 날 갑자기 밤새 설사를 하다가 새벽 3시쯤 돼서 잠들었는데, 어느 순간에 너무 조용하더라고요. 남편은 보통 술 마시고 잠든 날 새벽이면 냉장고 문을 몇 번씩 열고 닫고 하면서 물도 찾고 먹을 것도 찾고 하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부엌에서 새벽녘에 냉장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이상하다 생각했지요. 기척이 날 시간에 기척이 없는 느낌이 수상해서 5시쯤에 깜짝 깨어서 남편 자는 방으로 건너가니까 벌써 몸이 이상했어요. 그 시간에 119를 불러도 빨리 오지 않고, 6시쯤에 병원에 싣고 가니까 하마 숨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손으로 그 아바이 초상을 치렀지요. 그때 제 나이가 42살이었어요. 그때 큰아들이 군에 가 있었는데 군부대에서 휴가를 나왔더라고요. 작은 아들은 그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자력발전소에 다니고 있을 때였고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나이는 3살 차이, 학교는 4년차이지요. 작은 아들은 그때 1년 동안 한달에 한번씩 상주노릇을 했어요. 그때는 산다는 게 참 아득했어요. 마침 제가 제주도의 이복 남동생 초상 치른 지도 일주일이 안됐을 때였거든요. 남동생은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서 갑자기 죽었어요. 그런데 부부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남편이 죽고 나니까 아바이가 저한테 못한 건 생각이 안 나고 제가 아바이한테 못한 것만 그렇게 생각이 나면서 가슴에 응어리가 져요. 한 3년 동안은 아바이가 집에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집에 있는 것 같고요. 죽었다는 것이 그렇게 안됐더라고요. 살아오면서 아바이는 만날 술만 펐고, 제가 물질해서 애들 공부시키고 먹고 살고 하면서 순 고생만 했는데도요.”

 

큰아들 고성민씨의 결혼식에서

 

“부모덕을 봐야 남편 덕을 보고, 남편 덕을 봐야 자식 덕까지 본다는데, 저는 부모덕도 못보고, 남편 덕도 못보고, 작은 아들까지 제 뒤통수를 탁 쳐버렸으니 무슨 힘이 나겠어요? 그러니까 큰 아들 하나 있는 것이 항상 불안하지요.”

장애심씨는 남편 고정웅씨를 떠나보내고 5년 만에 작은 아들마저 서울 한강 물속에서 잃게 된다.  

 

“애기 아바이가 죽고 난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들마저 하나 앞서 보냈어요. 그렇게 좋고 착한 아들이었는데... 군대 제대하고 와서 서울로 올려 보냈는데, 한강이 아들을 그냥 데려가더라고요. 남편과의 사이에 성민이와 성영이라는 형제를 낳았어요. 큰아들 성민이는 37살인데 지금 용인에 나가 살고 있고요. 한강물에 잃어버린 아들은 성영이라고, 10년 전에 군을 제대하고 24살 때 서울 고시원에 있던 동료 4명과 한강으로 바람을 쐬러 가서 술 두병을 나누어 마셨대요. 그런데 작은 아들이 우리 엄마가 해녀인데 수심을 얼마 타고, 해산물 채취도 잘하고, 나도 수영을 잘 한다면서 술을 먹고 껍죽거렸나 봅니다. 그러면서 내가 저 한강을 건너갔다가 올수 있다면서 동료들과 내기를 했대요. 그리고는 한강으로 수영을 해서 건너가다가 몇 발도 못가서 심장마비로 죽은 거지요. 물귀신한테 홀린 거지요. 아니면 새벽 2~3시나 된 시간에 한강물에 수영을 하겠다면서 들어갔겠어요? 사람 살려 하는 외침소리를 듣고도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들은 구해낼 엄두를 못 내고, 마침 옆에 있던 누군가 구하러 들어갔는데 이미 물속으로 가라앉은 뒤였답니다. 그리고 30분이나 지나서 한강에 있던 구조선이 물에 뜬 아들을 찾아냈어요. 죽었으니까 물에 뜬것 아니겠어요? 저는 몰랐는데 뒤에 사람들 얘기가 그때 그 사건이 티비에도 나오고 그랬다고 하대요.”  

 

장애심씨는 작은 아들이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에 길도 다 잃어버리고, 정신도 다 잃어 버렸다고 전한다. 
“아이고, 그때 저는 어떻게 됐겠어요? 새벽 5시에 전화가 왔어요. 서울 동부경찰서라면서 전화가 와서는 고성영이가 어디 위급하다느니, 어디를 다쳤다고 하는 게 아니라, 대번에 물에 빠져서 사망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경찰서라고 전화가 와서 ‘우리 아들이 참 착하고 순한데, 무슨 사고를 쳤어요?’ 하고 물었어요. 아이고, 그 전화를 받는 순간에 저는 길도 다 잃어버리고, 정신도 다 잃어버리고... 여기서 아침에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서도 설마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올라갔는데, 정말 성영이더라고요. 그래서 만만한 큰아들에게 ‘너 때문에 성영이를 잃었다’고, ‘성영이를 데리고 오라’고 했으니 큰아들은 마음이 또 오죽했겠어요...? 큰 아들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 큰아들이 서울에 있으면서 남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 갔거든요. 서울로 올라가서는 공부를 한다고 고시원에 있었는데, 고시원을 운영하는 원장도 잘 봤는지 성영이에게 총무를 맡겼더라고요. 매일 고시원에서 공부도 하고 고시원생들 관리도 하고 그랬지요. 그때 주위에서는 다들 아들이 죽은 것이 문제가 있으니 법으로 하라고도 했는데, 어떻게 법으로 하겠어요? 그냥 저 혼자 속고 말자 했지요. 그 자식을 잃고 나니까, 한동안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작은 아들을 한강물에 잃고는 한 5년 동안 물질 작업도 제대로 못했지요. 물속에만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해오고 숨이 턱턱 막히면서 차올라 와서요. 무슨 놈의 팔자가 엄마도 물에 잃고, 자식도 물에 잃고, 아이고 사는 게 뭐 이런지... 어제 그저께가 성영이가 죽은 날이었어요. 그래서 물 한잔 떠 놨지요. 자식이라도 해마다 죽은 날이면 물 한잔이라도 떠 놔야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남편이 세상 떠난 지 5년 만에 작은 아들이 또 그렇게 되었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렇게 힘든 고통을 안고 사는 거지요. 예전에 할머니들 하는 얘기가 있잖아요? 부모덕을 봐야 남편 덕을 보고, 남편 덕을 봐야 자식 덕까지 본다는데, 저는 부모덕도 못보고, 남편 덕도 못보고, 자식까지 제 뒤통수를 탁 쳐버렸으니 무슨 힘이 나겠어요? 그러니까 큰 아들 하나 있는 것이 계속 불안하지요. 결혼하고 직장 다니면서 손주를 하나 봐서 6살인데,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요. 그저 자식보다는 어떻게든 제가 먼저 죽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제주에서 육땅 죽변으로 건너온 잠녀들은 바다 작업 조건이 가장 좋은 죽변4구 후리깨에 모여 살아요. 예전에는 후리깨의 제주 잠녀들이 50여명 됐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죽고 병들어서 이제는 많이 줄어들었지요.”

장애심씨는 제주에서 육땅인 울진으로 건너온 잠녀 가운데 제일 막내이다.
장씨는 더 이상 물질을 배우겠다는 사람도 없고, 아마 이 시대가 가고 나면 울진 땅에서 제주 잠녀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가 없어지면 아마 잠녀 일도 끝이겠지요. 더 이상 배우는 사람들도 없고요. 또 모르지요. 육땅 사람들이 물질을 계속 배우면서 해녀 작업을 이어 나갈지... 죽변에도 봉깨에 가면 육땅 사람들이 물질을 배운 해녀가 대여섯명 있지요. 그래도 나이는 다 많아요. 이곳 죽변 4구에는 물질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제주 잠녀가 지금 13명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못하거나 몸이 안 좋아서 못하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19명이고요. 오늘은 북면 나곡에서 해녀 여섯명이 성게 작업을 했어요. 여섯명 중에 다섯명은 공동 작업을 하고, 여든살 된 할머니 한분은 혼자서 작업을 했지요. 해녀 다섯명은 작업량이 엇비슷하니까 가부시키로 하지만, 연세 많은 할머니는 아무래도 작업량이 우리보다 뒤떨어지니까 혼자서 따로 작업을 하고 계산도 별도로 하는 거지요. 저는 잠녀 가운데 가장 젊은 축에 속하니까 작업량은 남들에게 안 빠져요. 성게 공동 작업을 할 때는 성게 수출업자들이 1킬로에 동네 어촌계에 7백원을 주고, 해녀들에게 8백원을 줍니다. 그러니까 성게 업자는 성게 1킬로에 1500원을 주게 되는 거지요. 성게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알이 꽉 차 있었는데 지금은 알이 없어요. 지금 잡아들이는 성게는 포항 공장으로 옮겨가서 껍데기를 돌려서 속을 파내고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해요. 무엇에, 어떻게 쓰는지는 몰라요. 지금은 알이 없는데도 또 다른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모양이지요. 잠녀들은 주로 봄에 미역을 하고, 여름에는 해삼을 잡고, 성게, 전복도 잡고, 천추도 뜯고 그래요. 그러다가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작업이 자주 없어요.”  

 

제주에서 육땅 죽변으로 건너온 잠녀들은 대부분 죽변 4리 후리깨에 모여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곳에 집단촌을 형성하고 살아간다.  

 

장애심씨는 수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민 친목회를 결성하고 해마다 날을 정해서 큰 잔치를 벌이기도 했었지만, 5년여 전부터는 인구가 점점 줄면서 그나마 친목회도 흐지부지돼 버렸다고 전해준다.  

 

“다들 제주도에서 건너와서 이곳 죽변에 정착하고 오래 살다보니까 우리들끼리의 정도 아주 돈독하지요. 또 지금은 다들 영감들도 없고 하니까 어느 한집에 모여서 맛있는 것도 해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그렇게들 살아가요.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서 죽변면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만든 친목회가 잘 운영됐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어졌어요. 제주도 사람들은 죽변 후리깨에 다들 모여서 살아요. 우선 바다에서 작업하는 조건이 이곳 후리깨가 가장 좋으니까요. 제가 이곳 죽변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만 해도 제주 잠녀들이 50명이 넘었어요. 그런데 세월을 이길 수가 없어 나이 들어 죽기도 하고, 병도 들고, 그러면서 많이 줄어들었지요.”  

 

5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서 죽변면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만든 친목회가 운영됐는데 이제는 없어졌다

 

15살쯤에 물질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장씨는 19살에 죽변으로 건너온 다음부터 직업으로 물질을 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잠녀 물질은 15살쯤에 배웠어요. 그래도 정작 직업으로 물질을 한건 19살 되던 해부터지요. 15살 때 동네 잠녀들을 따라 다니면서 물일을 배웠는데, 처음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두룽박이 어디 저 멀리 떠내려가고 없어서 하마터면 물먹고 죽을 뻔 했어요. 왜, 물위에 띄워놓은 두룽박은 물밑에 들어갔다 나오면 조류를 타고 저 멀리까지 떠내려가 버리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운짐다니까 막 허부치며 발도 움직이게 되고 손도 젖게 되고, 그러면서 헤엄을 치는 방법도 배우게 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잠녀들 복장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지요. 안에는 아래위가 붙은 속곳을 입고, 밖에는 물 적삼을 입고, 직접 손으로 만든 광목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작업을 했어요. 속곳은 팬티와 윗옷이 함께 달린 구조인데, 옆에 옷깃을 채우는 단추가 달려 있었고요. 예전에 잠녀들이 입던 그 옷이 참 이뻐요. 광목수건은 물속에 들어가면 머리카락이 허벌허벌하니까 머리에 썼고요. 요즘이야 스티로폼이 잘 나오니까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두룽박을 만들 때도 고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씨를 빼고, 다시 그 구멍을 틀어막아서 사용했어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바닷물이 들어가니까 가끔씩은 물속에 잠기는 실수도 하고 그랬지요.”  

 

40년여 전, 잠녀들의 잠수 복장과 용구들을 설명해주던 장씨는 추석을 앞두고 시댁의 벌초 때문에 제주도를 다녀와야 해서 바쁘다고 귀띔한다.
“추석을 앞두고 시댁에서 조상들의 벌초를 한다고 해서 내일은 제주도로 건너가요. 해마다 추석을 앞두고 건너가는데 올해는 큰아들이 바빠서 도저히 못 간다고 해서 제가 건너가게 됐지요. 애기 아바이 묘소는 이곳에 있지만, 시댁 묘소는 거의 제주도에 있으니 건너가야지요. 건너가면 교통사고로 죽은 이복 남동생 올케네 집에 가서 묵을 생각입니다. 이복 남동생이 있으면 서먹하겠지만, 그 올케는 신랑이 일찍 죽다 보니까 고생하며 자란 제 사정도 잘 알고, 얘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기도 하지요. 그 올케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잠녀로 물질을 해야지요. 모르긴 해도 일흔 대여섯까지는 물질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신랑 명줄에 자식 명줄까지 있으니 오래 살겠지요.”라며 웃는 장애심씨다.  

 

그녀는 오늘도 일평생 살아오면서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한 많은 기억들을 숨비소리에 실어 호호이~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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