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코르니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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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니게라(Cornigera)’라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개미가 내부에 들어가 사는 묘한 조건을 통해 자라나는 소관목이다. 이 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개미의 보살핌과 보호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나무는 개미를 유인하려고 수년에 걸쳐 자신의 내부를 진짜 개미집으로 바꾸어 간다.
모든 가지는 속이 비어 있고 그 비어 있는 속은 오직 개미들의 편의를 위한 통로와 방으로 갖추어져 있다. 그뿐이 아니다. 각각의 통로에는 일개미와 병정개미에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인 흰 진딧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코르니게라는 자신의 몸 전부를 개미들에게 집과 은신처로 제공하는 셈이다.
그 대신 개미들은 자신들의 삶의 보금자리인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무를 다한다.
개미들은 갖가지 애벌레와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진딧물, 민달팽이, 거미, 그리고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나무좀 등을 퇴치해 준다. 또, 나무에 기생하려는 덩굴식물을 강력한 위턱으로 잘라 내기도 하고 마른 잎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줄기의 이끼를 긁어내가며 소독 작용의 효과가 있는 자신들의 침을 이용하여 나무가 병들지 않도록 보살핀다.
그러면서도 개미들은 흰 진딧물만은 공격하지 않는다. 흰 진딧물은 이 나무에 별로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많은 분비물을 내는데 이 분비물이야말로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훌륭한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개미들과 흰 진딧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에서 공생하며 살아간다. 개미 덕분에 코르니게라는 다른 나무들의 그늘을 빨리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무들을 굽어보면서 직접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식물과 동물의 공생은 이어진다.
희귀하긴 하지만 우리는 식물과 동물 사이에 그렇게 성공적인 공생이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자리에 붙박이로 사는 식물이 어떻게 동적인 동물의 세계와 접목하여 자기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개미를 공생의 파트너로 삼은 코르니게라는 그야말로 흥미로운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프랑스의 천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1961~)의 ‘개미’라는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코르니게라’라는 나무는 이처럼 공생관계의 매우 이상적인 모델로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이런 공생의 개념을 인간 사회에 접목시키고 싶어 애를 태우는 에드몽 웰즈 박사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가 또 한 번 세계적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일련의 우리나라 국회의 난장판 모습을 보고 세계의 유수 언론들은 ‘집단으로 싸우는 한국 정치인들’이니 ‘레슬링 경기장으로 변한 한국 국회’라고 타이틀 기사를 내보내면서 조롱거리로 소개했다.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에서 법안처리를 놓고 난투극을 벌인다면, 그렇게 통과된 법이 과연 국민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입법부는 물론 우리나라 법 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대외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집단은 국회의원들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려는 집행관에게 대포와 새총을 쏴대며 저항하는 무법천지의 노조원들도 있다. 합법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목숨을 담보로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협박이 활개를 치는 한 공생의 원칙이 바탕에 깔린 진정한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갈등의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은 이해관계의 다툼, 즉 밥그릇 싸움이 크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공동체의 다른 시민들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으며 객관적 사실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는 엄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생물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거나 또는 특별한 해(害)를 주고받지 않는 상태에서 접촉하며 같이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공생(共生)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한쪽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다른 한쪽은 피해를 보는 경우를 기생(寄生)이라고 한다.
동식물이 서로 공존하며 사는 방법에도 질서와 약속이 있고 반대로 그 질서와 약속을 파괴하는 방법도 있음을 본다. 사람이 사는 사회야 더 말할 것이 없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생의 방법이 있는가 하면 모든 관계를 해치는 독선과 아집으로 인해 더러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면서 조직에 빌붙어 기생(寄生)하며 사는 방법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거나 상대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공생(共生)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며 기생(寄生)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이긴 하지만 동시에 엄중한 사회적 책임이 수반되는 것이다.
필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란 책에 열광을 했었던 이유는 바로 ‘공생(共生)’이란 개념 때문이었다. 저자는 ‘개미’와 ‘코르니게라’라는 나무의 공생관계를 통해 참다운 인간 공동체의 삶에 대한 본질을 깨우쳐 주고 있다.
적절한 사회적 갈등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극한 대립과 지독한 증오만 넘쳐나고 있다. 국민에게 기생하는 식물국회가 그러하고, 공생은 커녕 서로 항복을 요구하는 노사관계 또한 그러하다. 이러다가 공동체의 틀 자체가 무너지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마저 들 정도이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극한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 공생할 해법은 없는가.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정치권과 노사는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법과 질서, 그리고 절차를 중시하는 자세로 국민 앞에 서라. 공생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