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기공사를 운영하는 용접장이 김정강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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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사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어느 작업 현장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이곳저곳에서 쇳조각이 발에 채이고, 쇠를 두드려 말거나 펴는 소리, 용접봉이 타는 메케하면서도 비릿한 냄새, 그라인더나 용접봉을 이용하여 철을 깎고 철을 잘라내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어떤 장소보다 뜨겁다.역사가 오랜 재래산업의 대표 격인 철공 노동이 한때 위험한 노동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철공산업은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을 이루며 경제 성장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철공소, 기계공업사, 공업사는 실상 한가지 이름으로 통용되어도 무방할 만큼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곳으로써 쇠를 재질로 하여 갖가지 기계, 기구, 구조물을 제작하거나 보수하는 곳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예전의 대장간이 이름을 바꾼 곳이 철공소라고 부를만하다.
풀무로 숯불을 달구어 쇠를 녹이고 망치로 두드리며 온갖 연장을 만들고 수리하던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모루, 메, 망치, 집게 등의 각종 연장이 용접기, 그라인더, 바이스 등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을까?동네마다 철로 된 제품을 제작하고 접합하는 철공소가 자리해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갖가지 용품을 이어주고, 갈아내서 짜 맞추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금속의 용접, 연마를 비롯해서 각종 기계부품을 가공하는 일을 하는 철공소 또는 공업사.
공업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살아오면서 갈고 닦아온 실력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철이라는 재료를 깎고 붙이고, 갈고 다듬어 처음에 구상했던 이미지대로 3차원화 시키는 일을 주로 하는 공업사.
수십 년 동안 공업사를 운영하면서 착실하게 노하우를 쌓은 노동자는 단순한 철공 노동자를 넘어 이미 장인정신을 갖춘 장이로 변모해 있다.
자신이 속한 분야의 일 이외에는 융통성을 발휘하기 힘든 어설픈 실력을 갖춘 단순 기능공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소비자가 주문한 제품을 기대한 만큼 적당한 가격에 만들어내는 공업사의 장이를 만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또 얼마나 귀하고 반가운 것인지.
김정강씨가 제작한 경운기 적재함“어릴 적 집에 딸려있던 것은 논 세마지기, 밭 세마지기가 전부였지요.”·····“차라리 보리등겨를‘사까리’에다 축여서 내놓으면 다는 맛에라도 먹을 텐데...”
24살에 서울로 올라가서 처음으로 용접을 배운 이후 한평생 지역에서 용접사로 살아오고 있는 김정강(66세. 근남면 수산리)씨는 현재 동해기공사가 위치하고 있는 근남면 수산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근남면 수산리 동네가 태어난 곳이지요. 아버지는 김씨 성에 ‘화’자 ‘출’자를 사용했고, 어머니는 김씨 성에 ‘섭’자 ‘이’자를 썼어요. 부모님은 그 시절에 다들 그랬듯이 농사를 지었고요. 어릴 때 먹고 사는 거야 말할게 뭐 있어요, 다들 그렇게 힘들게 먹고 살았던 건데요. 집에 딸려있는 논밭전지라고 해봐야 논 세마지기, 밭 세마지기가 전부였지요. 보고 듣지 않아도 뻔하잖아요, 그 당시에 촌살림이라는 것이. 그래도 어쨌든 밥은 굶지 않고 살았는데, 제일 먹기 싫었던 것이 보리등겨를 섞어 넣은 밥이었지요. 목구멍에 걸리고 막히고, 천하에 안 넘어가는 음식이 보리등겨를 섞은 밥이지요. 차라리 보리등겨를 사까리(사카린)에다 축여서 내놓으면 다는 맛(단맛)에라도 먹을 텐데... 중학교 때는 학교로 도시락을 싸 가고는 했는데, 어떤 때는 같은 반 친구들의 도시락과 비교가 되어서 차마 풀어헤치기가 힘들 때도 많았지요. 날마다 보리밥만 싸갈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형제자매는 1남2녀지요. 위로 김순희(73세)라는 누님 한분이 근남면 산포2리에 살고 있고, 아래로 김영자(64세)라는 여동생은 서울에서 살고 있어요. 산포리에 사는 누님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은 김경호씨라고 육군중위로 6.25 참전용사인데 작년에 세상을 떠나서 영천 국군묘지에 묻혔어요. 매형은 근남면에서 예비군 중대장도 오래 했었지요.”
“나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무를 때는 아궁이를 그냥 두고 나무 원수를 갚고 있는 중이시더.”
썩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강씨는 노음국민학교를 거쳐 울진중학교를 졸업했다.
“제가 노음국민학교 17회, 울진중학교 9회 졸업생이시더. 1959년도에 사라호 태풍이 덮쳤잖아요? 그때 제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인데, 보통 울진중학교는 3학년 졸업반 때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그런데 사라호 태풍이 나서 불국사는 못가고 불영사 절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사라호 태풍으로 집들도 다 날아가고, 지금 시멘트로 튼튼하게 해놓은 수산보도 그때는 나무로 해 놨었는데 전부 다 터져 자빠져서 하나도 없었고, 정말 매란 없었지요. 얘기하나 마나지요. 그러다보니 수학여행이라고 불영사로 저마다 귀한 쌀을 한되씩 들고 갔지요.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집으로 돌아왔니더.”
김씨는 근남면 수산리에서 불영사 앞산까지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면서, 나무 원수를 갚으려고 지금도 틈나는 대로 나무를 해서 아궁이에 땐다고 말하며 웃는다.
“아이고, 중학교 때는 또 얼마나 먼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는지 모르니더. 지게를 지고 걸어서 불영사 앞산까지 나무를 하러 다녔어요. 이곳 수산리에서 같은 마을 사람들이나 친구 두어명과 어울려 나무를 하러 가면, 수곡 막금을 거쳐 한티재를 넘고, 찬물내기 앞산인 광자매기를 넘어서 불영사 밑에 있는 서면 하원까지 걸어갔지요. 안 그러면 막금을 거치고 한티재를 넘어 사기점 골짜기로 들어가면 늘어매기 목재, 칠구지, 어두운골을 넘어서 나무를 하러 다녔고요. 그때는 산에서 산판을 많이 할 때라서 그곳까지 먼 길을 걸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산판을 했거나 나무 관을 할 때 널을 캐고 남은 꽤 굵은 나뭇가지나 물거피가 많이 있었어요. 나무를 하고 난 다음에 남아 있는 두꺼운 나무껍질을 물거피라고 합니다. 그 먼 곳까지 가서 나무를 해서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수곡 한티재 밑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먼 깊은 산중에서 나무를 해서 수산리 집까지 혼자 지게에 지고 돌아오면 너무 지치게 되니까, 중간에 한사람이 한티재 밑까지 나와 있다가 나뭇짐을 받아서 지고 집으로 마저 돌아오는 거지요. 그런 곳까지 가서 해온 나무는 절대 집에서 아궁이에 때는 게 아니지요. 집에서는 어디 가까운 야산에서 오리나무나 아카시아 같은 잡목을 해서 땠고요. 한티재를 넘어서 해온 나무는 내다 팔았습니다. 저는 주로 울진읍 공석으로 나무를 팔러 다녔어요. 그 당시에 나무 한단 값으로 돈 50원을 받았지요. 그렇게 고생해가며 팔러 다녔던 나무인데 어떻게 나무 값을 잊어버리겠어요? 수산리에서 한티재를 넘어서 불영사 앞산까지 나무를 하러 다니면 왕복 60리 산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말이 60리지, 무거운 나무를 지게에 지고 오가는 길이 얼마나 고달팠겠어요? 그때는 농구화를 한 켤레 사 신으면 일주일이면 다 떨어졌어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면 빨리 도착하려고 대충 질러서 산골짜기를 내빼는데, 물도 막 삼고 자갈밭도 걷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아야 했으니까요. 그때는 신발도 요즘만큼 질이 좋지 않았고요. 아이고 정말, 나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무를 때는 아궁이를 그냥 두고 나무 원수를 갚고 있는 중이시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돈을 만들려고 먼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것이 하도 몸서리가 나서 고등학교 통신강의록도 보고는 했는데, 그것도 영 쉽지는 않아서 중간에 관두게 되더라고요.”
김정강씨는 먼 곳까지 나무를 하러 다니던 얘기를 하는 도중에 나무로 만든 탁구대에 얽힌 기억을 끄집어낸다.
“예전 울진영림서에는 ‘탁구다이’ 하나가 있었는데, 수산 동네에 살던 어른이나 애들은 그곳으로 탁구를 치러 다녔어요.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게 탁구다이지만 그때만 해도 변변한 놀이시설이 없었으니 탁구를 치는 일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겠어요? 그런데 영림서 직원들을 위한 탁구다이다 보니까 언제든지 치고 싶을 때 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지요. 그래서 동네에서 일하던 아는 목수에게 탁구다이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당시는 집을 지을 때 짚을 사용해서 영개(이엉)로 엮어서 지붕을 만들 때인데, 우리들 대여섯명이 영개를 이어줄 테니까 그 대신에 나무로 탁구다이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 목수 혼자 영개를 엮어봐야 우리들 대여섯명이 한꺼번에 하는 것 보다는 속도가 안 날게 뻔하니까,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탁구다이를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동네에 새로 생긴 탁구다이는 이집 저집으로 한번씩 옮겨 다녔고, 그 당시에는 노음국민학교에도 탁구다이가 없을 때다 보니까 노음국민학교 선생들도 수산리까지 탁구를 치러 오고는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그 탁구다이가 동네에서 참 인기를 많이 끌었었는데.”
“그때 군대 월급이 300원이었는데, 막걸리가 20원할 때였으니 많지도 않았지만 그리 적은 돈도 아니었지요.”
16살에 되던 해에 울진중학교를 9회로 졸업하고 난 김정강씨는 한동안 집안에서 농사도 거들고 먼 산에서 해온 나무를 팔아 번 돈을 집안 살림에 보태기도 하다가, 22살이 된 1965년도에 군대에 입대한다.
김정강씨가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할 당시“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집안일을 돕다가 22살에 군대에 갔니더. 전라도 광주의 상무대 육군포병학교 통신병으로 가서 12주 동안 무전병으로 통신교육을 받았지요. 육군포병학교가 포병, 기갑, 육군 소위와 대위 진급 시험차 입소한 사람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다 보니까 훈련소 군기라는 것이 또 엄청났어요. 육군포병학교의 훈련을 끝마치고, 강원도 화천에 있는 15사단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월남전 파병이다 뭐다 해서 한창 나라 안이 뒤숭숭할 초기였지요. 15사단 38연대 1대대 통신대에서 각종 통신 장비를 관리하는 통신 기지계와 문서 연락병을 겸해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곳이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였어요. 근남면 마현리는 사라호 태풍 때 큰 피해를 당하고 난 다음에 그곳으로 이주해간 울진 근남 사람들 53가구가 새로운 터전을 일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한마을이 온통 사돈지간이었어요. 어디 다른 데로 따로 결혼해서 나갈 때가 없으니 그저 한마을에서 사돈을 맺고는 했던 거지요. 근남에서 태어난 제가 근남 사람들이 이주해간 그곳에서 군 생활을 했으니 인연이 각별했던 셈이지요. 시간이 된다면 다시 한번 그 마을을 꼭 가보고 싶네요.”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서 군 생활을 하던 김정강씨는 일년 후에 민정경찰로 비무장지대 안에서 근무하게 된다.“일년이 지났을 때 부대가 30리 후방으로 이동을 했고, 어느 날 우연히 전우신문을 봤는데 비무장지대 안에서 근무하는 민정경찰을 모집하고 있더라고요. 전우신문을 보고 곧장 민정경찰에 지원을 했지요. 그날 부대에서는 민정경찰에 지원했다고 엄청 혼이 나기도 했지만요. 군 생활도 일년차로 접어들면서 이제 어느 정도 써먹을 만큼 훈련도 시키고 교육도 시켜놨는데, 딴 부대로 지원해서 간다고요. 민정경찰은 무엇보다 신원이 확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원자들은 일주일동안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민정경찰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비무장지역에서 민정경찰로 근무하면 외박이나 외출도 일체 없었고, 휴가도 거의 나오기가 힘들었어요. 비무장지대 안에서 근무하는데 외박이나 외출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받는 생명수당은 군대 월급치고는 꽤 많았지요. 그때 군대 월급이 300원이었는데, 막걸리가 20원할 때였으니 많지도 않았지만 그리 적은 돈도 아니었지요. 저는 비무장지대안의 민정경찰 통신병으로서 전화기, 무전기, ‘후라시’, ‘후라시 약’ 그런 것을 관리하고, 여름철에 풀이 우거지면 다른 곳에서 인원을 지원받아서 전화기 선로 깔고 그런 일을 했지요. 흔히 삐삐선이라고 부르는 선도 당시 군에서는 삐삐선이라고 하지 않고 ‘따불유완티치’라고 불렀는데, 그건 동선 세개하고 각 선이 일곱개 들어 있어요. 참, 그런 것은 살아오면서 잊어버리지도 안하더라고요. 요즘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비무장지대 안에 근무하면 외박 외출은 당연히 없는 거고, 술도 절대 구할 수 없었지요. 항상 총과 실탄을 가지고 다녔으니까요. 실탄은 민정경찰 모두 다 신원이 확실하니까 무제한으로 얼마든지 지급되었고요. 부대 막사안의 ‘관물다이’도 다른 부대에서는 깨끗하게 유지하고 가끔 검사도 실시하고는 했지만, 비무장지대안의 부대 막사는 검사를 하지 않았어요. 항상 철모나 군화, 여벌의 군복도 깨끗하게 빨아서 관물대 위에 정리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요. 비상시에 깨끗한 군복과 철모를 입고 작전 현장에 투입되면 적군의 눈에 그만큼 띄기가 쉬우니까요.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민정경찰은 군기는 엄청 쌨지만, 그만큼 부대원들 간의 의리나 분위기 또한 좋았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 군대생활 하는 거야 장난이지요. 실컷 먹지도 못하고 눈구덩이를 헤매 다니면서도 얼어 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고 군 생활을 했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입고 잘 먹고 편하게 생활하는데도 그까짓 걸 못 참아내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갈수록 인내심이 줄어드는걸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화기를 베개 삼아 자면서, 온갖 잔심부름도 다하고 그랬지요. 참 어렵게 용접기술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맨날 울다가 세월만 다 보냈니더.”
김씨는 1968년도 25살의 나이에 군을 제대하고 한동안 원남면 기양리의 기양저수지 축조 공사현장에서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1968년도 4월 6일에 군을 제대했니더. 원래는 2월 달에 제대를 했어야 하는데, 연기가 됐지요. 1968년 1월 21일에 북한에서 무장 게릴라 김신조가 넘어왔잖아요? 그래서 군 제대가 두달 동안 연기된 겁니다. 김신조가 넘어오고 난 다음에 예비군이 창설됐는데, 우리가 예비군 창설 멤버지요. 군대를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서너달 쉬고 난후에 한동안 원남면 기양리의 기양저수지 공사 현장에서 노가다(막노동)를 했어요. 그 당시가 기양리 저수지를 처음 만들 때였는데, 수산리 사람들이 공사 현장에서 많이 일했습니다.”
군을 제대하고 저수지 축조 공사현장에서 한동안 막노동을 하던 김정강씨는 이종사촌형이 있는 서울로 올라간다.
“그때 이종형님이 서울에 살고 있었어요. 저기 망양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가 나타나는 초산마을에 살았는데, 지금 나이가 일흔일곱 살인가 그렇지요. 이종형은 그 당시에 한양대학교 공대를 나왔는데, 을지로 5가에 있는 한 기계 공장의 공장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공장에서는 자동차 크랭크, ‘캄 샤우도’, 실린더 헤드 같은 기계 부품 종류를 주로 용접하는 일을 했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자동차의 정밀한 부품들을 때울 수 있는 용접 시설과 기술을 보유한 공장이 전국적으로도 서울의 그 공장과 부산의 어느 공장, 딱 두군데밖에 없었어요. 공장에는 30여명이 넘는 숙련된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김씨는 용접기술을 배우기 위해 무던히도 고생을 했다고 전해준다.
“울진에서 살다가 군대에 갔다 와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기는 했지만, 용접기술은 정말 생소했지요. 공장에서 생활하면서 용접기술을 하루라도 빨리 배우려고, 동료들이 퇴근한 밤에도 용접기 스위치를 넣고 기술을 익혔니더. 처음에는 공장장이던 이종사촌 형님이 배려해서 공장 한쪽에 마련된 방에서 전화기를 베개 삼아서 자면서, 온갖 잔심부름도 다하고 그랬지요. 참 어렵게 용접기술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용접기술을 배우면서도 ‘이걸 내가 왜 하나?’ 싶어 갈등을 하며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용접이 생각만큼 빨리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맨날 울다가 세월만 다 보냈니더. 용접을 배우던 초보 시절에는 눈과 몸을 생각해서 면을 덮어쓰고 몸에 보호대를 아무리 둘러도, 눈은 툭하면 ‘아다리’가 되어 쓰리고 빠질 듯 하지, 용접하는 틈틈이 연기는 다 들어 마셔야 되지, 툭하면 불똥이 살갗에 튀어서 살타는 냄새가 나지. 아이고 참말로, 죽을 맛도 그런 죽을 맛이 없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까 이제는 용접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제대로 붙었나, 안 붙었나를 알 수 있을 지경이 되었지만요. 옆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하지만, 기술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서 손에 붙고 감이 익혀지면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엔진 기름때에 절은 옷은 세탁도 안 되니 빨아서 다시 입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입을 만큼 입다가 버릴 때가 되면 동대문 시장까지 가서 작업복 한 벌 사 입고 말았니더.”남몰래 숨어 울면서도 용접기술을 제대로 익힌 김정강씨는 30여명이 넘는 동료들이 함께 일하는 서울 공장에서 자리를 잡아간다.
“어떤 종류든지 기술이라는 것은 자꾸 하다가 보면 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천성적으로 손재주도 조금은 타고난 것인지, 남들이 잠자는 밤에도 연습을 하고 그러다보니까 실력도 빠르게 쌓여갔어요. 서울 공장은 일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당시는 국산 자동차는 없고 도요다, 제무시 같은 외국에서 수입된 차량들이 전부였지요. 그때는 자동차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부동액도 따로 없을 때였는데, 그러다보니 추운 한겨울에도 일반 맹물을 부동액으로 넣고는 했어요. 부동액으로 맹물을 넣으니 당연히 겨울이면 다 얼어 터질 수밖에 없잖아요? 저와 동료 용접공들은 그렇게 공장으로 들어오는 차량의 라지에다나 크랭크, 캄 샤우도, 실린다 헤드 같은 것을 용접으로 때워서 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특히 겨울철이면 얼어터진 라지에다를 수리하러 들어오는 차량들로 날마다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그러니 날마다 고달팠지요. 추운 겨울에 라지에다에 물을 들이붓다가 쏟으면 손은 얼어서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엔진 기름때에 절어서 바지의 무르팍은 닳아서 반질반질하지, 온 몸은 얼굴까지 새카맸지요. 기름때에 절은 옷은 세탁도 안 되니 빨아서 다시 입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입을 만큼 입다가 버릴 때가 되면 동대문 시장까지 가서 작업복 한 벌 사 입고 말았니더. 당시에는 그라인더도 없던 시절이어서 용접을 끝마치고 난 다음에 제품의 배부른 면을 선반으로 깎던 때였습니다. 선반에서 깎고 나면 다시 겐마기에 얹어서 깎은 자리를 거울처럼 매끄럽게 다듬는 공정을 거쳐야 했어요. 겐마기에 용접한 부품을 얹어놓으면 비누거품 같은 물이 흐르면서 선반으로 깎아낸 부위를 ‘맨도롬’하게 유리알처럼 갈아 냈어요. 작업 여건이 빡세지만 정밀한 그런 곳이니까 진짜배기 용접이 배워지는 거지요. 용접이 끝난 울퉁불퉁한 부위를 선반으로 정밀하게 깎아서 다듬던 때였으니 정밀한 용접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작업에서는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용접사와 선반 작업자가 마음이 잘 맞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접사가 대충 때우게 되잖아요? 그러면 선반하는 사람은 그 부위를 일일이 다 갈아내야 하니 무지하게 애를 먹었지요. 공장의 직원들 중에는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들이 있어서 용접에 쓰이는 산소통을 대여섯개씩 안장에 싣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저는 한두개 싣고 다니기도 힘들었는데, 그것을 참 재미있고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가 예비군이 창설될 때였는데 공장 직원이 30명이니 자연스럽게 예비군 1소대가 되고는 했지요. 서울의 그 공장에서 한 7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평생 용접을 해온 김정강씨는 금속 가운데에서는 주철이 가장 용접이 어려운 금속이라고 말해준다.
“자동차 실린더의 재질은 우리말로는 주철이라고 하고 일본말로는 ‘이모노’라고 하는데, 깨진 곳이나 금간 곳을 용접으로 때우기가 가장 힘듭니다. 20년 전만 해도 주철 재질인 정미소의 발동기가 한겨울에 동파로 얼어 터지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꼭 저를 불러 가고는 했어요. 그때만 해도 울진에서는 주철을 때울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으니 호응이 참 좋았지요. 왜, 예전에 5일장에 시장에 나가면 솥도 때우고 냄비도 때우고 하던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무쇠 솥이나 냄비는 사실 용접으로 때우는 게 아닙니다. 무쇠 솥, 양은냄비, 주철로 만들어진 절구통 같은 것은 정상적인 용접으로는 때울 수 없어요. 그냥 아래쪽에 은박지 비슷한걸 덧대서 때운 것처럼 붙여 두는 거지요. 울진에서는 주철을 제대로 때우는 사람이 흔하지 않아요. 저는 처음부터 그런 것을 배웠으니 자신이 있지요.”
예전 한때 주철로 만들어진 정미소의 동파된 발동기를 용접할 수 있는 사람은 인근에 자신밖에 없었다고 얘기하는 김정강씨는 주철을 용접할 때는 보다 세심한 주의와 실력이 요구된다고 전한다.
“주철을 때울 때는 1500도에서 1800도 정도의 예열이 먼저 가야 됩니다. 용접 시공 작업 전에 먼저 뜨거운 열이 때울 곳에 전달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달아야 되는 거지요. 다른 쇠는 산소 절단기로 막 끊어낼 수 있지만 주철은 산소로 불어도 원체 단단하고 두꺼워서 안 나갑니다. 그래서 전기의 온도를 높여서 용접기로 불어서 파내고 용접을 하는 거지요. 불어서 팔 때도 용접기의 온도를 잘 맞추어야 됩니다. 아니면 너무 많이 파내서 제품만 못쓰게 되니, 많은 신경을 써야 되는 까다로운 금속이지요.”
“제무시가 하도 오래된 트럭이다 보니까 ‘삑따구’가 삭아서 구멍 나고 뒤틀리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곳을 끊어서 내버리고 다른 철판을 덧대서 용접을 하고 계속 사용하게 되는 거지요.”
김정강씨는 서울 공장에서 7년을 근무하고 추석을 쇠려고 근남면 수산리로 내려왔다가 월변에서 산판용 제무시 트럭업을 하던 임자중씨 회사에 취직하여 고향에 정착한다.
흔히 제무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미국 제너널모터사의 GMC트럭은 일제강점기 해방무렵부터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고, 6.25전쟁 시에는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서울에서 7년을 근무하던 해 가을에 추석을 쉰다고 울진 집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마침 울진 월변에서 산판용 제무시 트럭업을 하고 있던 임자중씨라는 분의 회사에서 용접하는 사람을 구하는데 그 집에 붙들리고 말았지요. 당시에 임자중씨는 제무시 트럭 5대로 산판에서 나무를 날라주고 있었는데, 근무하던 용접사가 급하게 회사를 관둔 직후였습니다. 제무시라는 트럭은 당시만 하더라도 이미 연식도 오래되고 해서 군데군데 개조를 많이 했어요. 제무시가 하도 오래된 트럭이다 보니까 ‘삑따구(차체)’가 삭아서 구멍 나고 뒤틀리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곳을 끊어서 내버리고 다른 철판을 덧대서 용접을 하고 계속 사용하게 되는 거지요. 철판은 부산 같은 곳에서 구해 와서 사용하는데, 하도 이곳저곳을 때워서 쓰다 보니까 거의 원래 차체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엔진만은 차대 번호가 찍혀 있으니까 손을 못됐지요. 엔진만 빼고는 프레임이나 적재함도 완전히 다른 철판으로 바꾸고, 서로 용접해서 연결했으니, 사실 엔진만 빼면 겉모양은 같아도 완전히 다른 차가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그때는 ‘빵꾸’도 때우고 용접을 해서 차체 철판도 교체하고 그랬으니까 일반 버스들도 임자중씨네 회사로 많이들 수리를 왔습니다. 아성, 한일 같은 버스가 주로 왔는데 당시에는 모두 다 비포장 길이었으니까 금세 이곳저곳의 철판이 삭아서 구멍도 나고 떨어져 나갔고, 빵꾸는 또 얼마나 자주 낫겠어요? 쇼바는 또 얼마나 자주 내려앉는지, 쇼바다이도 많이 만들었지요. 지금이야 누가 쇼바를 때워서 쓰겠습니까만, 그 당시만 해도 뒷다이에 쇼바를 8개씩, 16개씩 달아서 운행할 때였습니다. 버스가 굳이 울진에서 그런 것을 교체하고 수리하는 이유가 대부분 울진이 종착지였으니 그나마 시간이 넉넉히 남았기 때문이었지요. 그 당시만 해도 버스 한 대에 운전수, 남자 조수, 차장까지 세명이 붙어서 운행할 때였으니 시간이 많이 지난 얘기네요. 정비공장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사실상 임자중씨 공장이 정비공장을 겸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제무시도 산판의 험한 길을 다니다가 액셀 샤도우 같은 부품이 고장 나고 부러지면 공장으로 내려왔고, 그때 그런 부품을 때울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저밖에 없었지요. 아이고, 생각해보니 참말로 역사가 깊니더. 임자중씨네 집에서 한 8년 있다가 관두었지요.”
“집사람은 경남 진주 사람인데, 제가 어떤 잡지의 펜팔란에 실려 있는 한 여성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먼저 편지를 보내게 되었지요. 아마 군 생활동안 줄잡아 5~6백통의 편지가 오고 갔지 싶습니다.”
김정강씨는 울진 월변 임자중씨의 제무시 수리 공장에서 일할 당시에 5살 연하의 김영숙씨를 만나서 결혼했다. 김씨의 결혼 과정은 사뭇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김정강씨는 28살에 군 생활 당시에 펜팔로 만나 사귀던 5살 연하의 김영숙씨와 결혼했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 군대 생활을 할 때는 펜팔을 많이 했어요. 특히 최전방인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펜팔을 통해 아가씨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낙보다 나은 게 없었지요. 무료한 시간도 때울 수 있고, 젊은 나이에 누구나 겪는 이런저런 고민이나 사적인 얘기도 부족하나마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집사람은 김영숙이라고 경남 진주 사람인데, 제가 어떤 잡지의 펜팔란에 실려 있는 한 여성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먼저 편지를 보내게 되었지요. 그 편지는 군대 생활 내내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어졌고요.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편지를 보낼 때도 우표가 필요 없었어요. 아마 군 생활동안 줄잡아 5~6백통의 편지가 오고 갔지 싶습니다. 얼굴도 한번 못보고 그렇게 편지가 장시간동안 연결되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제가 진주까지 내려갔지요. 군 생활 내내 저에게 편지 답장을 해서 힘도 주고 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게 도리겠다 싶어서요. 집사람의 부모님도 그렇게 수년간 편지가 계속 오갔으니 제 이름 석자 정도는 알고 있었고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서, 서울 공장에서 근무할 때도 계속 편지가 이어졌어요. 젊은 처녀총각이 펜팔로 만나 그토록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자연스럽게 속 깊은 친밀감도 쌓여갔고, 그러다보니 울진에 내려와서 임자중씨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동안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피차가 번거로운 것을 피하자 싶어 저와 예비군중대장을 했던 매형과 누나, 그렇게 세명이 진주로 내려가서 진주성당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때 제 나이가 28살이었고, 집사람은 23살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집사람도 올해로 예순하나가 되었네요.”
28살에 5살 연하의 김영숙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김정강씨는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첫째가 진주(36세)라고 대구에서 농협중앙회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가 동호(34세)라고 아들인데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셋째가 윤주(33세)인데 대구에서 국민은행에 다니고 있고요. 막내가 효정이라고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세든 집을 비워달라고 해서 이사만 13번을 다녔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집을 옮겨 다녀도 이사 13번이면 13년 걸리는 거 아닙니까?”
이종형이 공장장으로 근무하는 서울 공장에서 처음 용접기술을 접한 이후에 7년을 근무하고, 울진 월변 제무시 트럭 공장에서 다시 8년을 보낸 김정강씨는 독립하여 근남면 수산리에서 공업사를 시작하게 된다.
“월변의 임자중씨 제무시 공장을 관두고 한동안 고향을 떠날까 말까 고민도 했었지요. 그래도 고향땅이 정붙이고 살기가 좋겠다 싶어서 예전 수산리 정미소 옆에 있던 돌로 쌓아서 만든 창고를 조금 손봐서 공업사를 시작했습니다. 정미소집에 세를 얻은 거지요. 산소 용접기 하나, 산소통 하나, 몽키 하나, 망치 하나, 드라이버 몇 개를 장만해서 공업사라고 일을 시작한 거지요. 당시만 해도 인근에 용접을 제대로 하는 용접사가 없을 때였습니다. 근남에 있던 자전차방에서 산소용접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자전차방은 자전거가 주업이다 보니까 저하고는 용접하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났지요. 금세 일거리가 확 밀려들지는 않았지만, 이미 월변 임자중씨 집에서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안면을 익힌 사람들도 많다 보니까 일거리가 그럭저럭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얼마 있다가 아무래도 면소재지가 더 낫겠다 싶어서 수산다리 건너편으로 옮겨갔지요. 그런데 공업사라는 것이 각종 철제품을 이곳저곳에 늘어놔야 하고, 용접도 하고, 망치질도 해야 하니까 일단 옆에 사는 사람들은 시끄럽잖아요? 그러다보니 집주인들이 집을 비워달라고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세든 집을 비워달라고 해서 쫓겨 다니다시피 이사만 13번을 다녔습니다. 아이고 참말로, 일년에 한번씩 집을 옮겨 다녀도 이사 13번이면 13년 걸리는 거 아닙니까? 남의 집에 세 들어 살 때는 용접기를 놓을 자리가 없어서 수돗가나 화장실 안에다 놓고 사용하기도 했는데, 누가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거시더. 수년전까지는 요 앞쪽에서 공업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엑스포를 하면서 길을 놔야하니까 공업사를 옮겨 달라고 해서 또 뜯겼고요. 그래서 결국은 지금 공업사가 앉아 있는 이 땅과 뒷집을 사서 옮겨 왔지요. 말도 마소. 이곳에 공업사 건물을 지을 때는 바로 뒤쪽에 있는 굴참나무가 천연기념물이어서 이곳에 구조물을 지을 수 없다고 해서 또 얼마나 싸웠는지 모릅니다. 천연기념물 근방에 구조물을 지을 수 없다고 해서, ‘법은 공평한 것인데, 저 앞에 보이는 수산다리는 잘만 세우면서 껍데기밖에 없는 공업사 구조물은 왜 못 짓노?’ 하면서 따지고 싸우고 해서 결국 공업사를 지었어요.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요. 제가 91년도부터 94년까지 이곳 수산리 이장을 했는데, 그때 그런 이력이 조금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 같고요. 이사를 13번 다니다보니 중간 중간에 연장도 많이 잃어버렸고, 나름대로 손해도 많이 봤지요. 저 앞에 보이는 간판도 이름이 잘못 됐니더. 원래 상호가 ‘동해기계사’인데 간판하는 사람이 ‘동해기공사’라고 잘못 써 왔길래, 얼마나 더 하겠나 싶어서 그냥 놔두라고 했지요. 이름이 모 그렇게 중요한가 싶어서요.”
김정강씨가 근무하는 동해기공사를 찾았을 때 김씨는 철판에 용접을 해서 경운기의 적재함을 완성해놓고 있었다.
부식으로 인해 밑바닥이 훤히 드러나는 기존 경운기의 적재함과 너무도 똑같이 만들었다는 말에 “남들은 비행기도 만드는데, 물건을 보고도 똑같이 못 만들면 어쩌노?”하며 웃는 김정강씨다.
이제는 소리만 듣고도 용접이 제대로 되었는지 아닌지를 단번에 알아보지만, 용접기술을 배울 초창기에는 ‘이걸 내가 왜 하나?’ 싶어 맨날 울다가 세월만 다 보냈다고 말하는 김씨다.
기능공에 대한 이 사회의 일부 비뚤어진 편견과 용접기술을 배울 당시의 체력적인 한계조차 타고난 성실함과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헤쳐 나온 김정강씨는 이 시대의 진정한 프로이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그 사람은 자기가 수고한 만큼만 받는다’는 주위의 한결같은 평가에서 나타나듯이, 김씨는 이미 자신의 일에 대해 진실한 보람과 아름다운 근성을 가지고 있는 당대 최고의 용접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