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 사업가의 아내로, 70~90년대 여성 단체의 리더로 살아온 김영순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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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특히 보수적인 전통에 젖어 살아야만 했던 근대기에 여성으로 태어나서 살아온다는 것은 처절한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처럼 여성이라는 멍에와 굴레에 갇혀 살아오면서도 변함없이 생동하는 꿈을 꾸고, 또한 그것을 현실로 이루어낸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근대기에서 지금까지 세월의 흐름에 따르는 너무도 당연한 많은 변화가 있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반듯하게 키워내는 과정에서 항상 양보하고 살아오면서도,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한 지역 사회 봉사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또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를 짐작해 보는 것도 역시 어렵지 않다.
그렇듯 남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고정관념이 팽배한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최선의 꿈을 꾸면서 살아온 여성은 사회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건강한 여성으로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1977년 7월 5일, 구국여성봉사단은 후포영신모자원을 방문하여 떡 2상자와 러닝 40매를 전달했다온정면 금천 양지마에서 8남매 중 큰딸로 태어나·····“조부님이 온정면 소재지에서는 제일가는 일등부자였는데, 사람들은 다들 온정면 백부자라고 불렀어요. 백부자는 그 당시에 동네의 최고 부자를 일컫던 말입니다.”
8.15해방을 10여년 앞두고 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해방과 6.25전쟁에 이어 밀려든 정치, 사회, 문화적 격동기의 숱한 우여곡절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감내해온 김영순(金榮順. 74세. 울진읍 읍내리)씨는 온정면 금천리 양지마에서 태어났다.
“평해를 거쳐 백암온천 방면으로 가는 도중에 나타나는 금천이라는 동네의 양지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형’자에 ‘식’자를 사용했고요, 어머니는 ‘황’씨 성에 ‘옥’자와 ‘순’자를 썼지요. 아버지는 제가 65세쯤 되던 해에 향년 85세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오래됐어요. 제가 38살에 6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에 시골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살았듯이 부모님 또한 농사를 지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은 온정면 인근에서는 다들 알아주던 부자였습니다. 조부님이 온정면 소재지에서는 제일가는 일등부자였는데, 사람들은 다들 온정면 백부자라고 불렀어요. 백부자는 그 당시에 동네의 최고 부자를 일컫던 말입니다. 조부님이 일등부자다보니 아버지는 당시에도 춘천중학교를 졸업했고, 하나뿐인 고모는 울진중학교를 나왔었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원래는 자식을 많이 낳았는데 어릴 때 여럿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우리 징조(증조) 할아버지가 아주 잘 살았었다고 하는데, 우리 조부님은 지차(차남)였는데도 농사를 지어 큰 부를 쌓은 거지요. 들은 얘기로는 징조부님 형제는 아주 의리가 있었는데, 우리 징조부의 형님이 골패 노름판에 끼어서 노름을 하고 있으면 동생인 징조부님이 꽤 자주 바소쿠리에 돈을 짊어지고 형님 골패 판에 노름 밑천을 져다 나르고는 했었답니다. 나름대로는 아주 의리가 강했던 셈이지요. 징조부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부모님 농사가 많다 보니 다들 먹고 살기 힘들던 어릴 때도 별로 힘들어 해본적은 없습니다. 다른 집들보다는 훨씬 더 넉넉하게 입고 또 먹고 자랐지요.”
온정면 금천에서도 농사를 많이 지어 넉넉한 가계를 꾸릴 수 있었던 김영순씨의 부모님은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우리 형제자매가 8남매입니다. 위로 인규(대구시)와 신규(대구시)라는 오빠가 두명 있고, 제 아래로 종규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살다가 갑자기 혈압으로 쓰러져서 20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떴어요. 형제자매들 중에서는 가장 잘나고 똑똑했는데, 하늘은 항상 그런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정자(서울시)라는 여동생과 대규(서울시)라는 남동생, 선희(영천시)라는 여동생과 석규(서울시)라는 남동생이 있어요.”
“할머니는 시집을 오면서 남자와 여자 몸종을 두명 데리고 들어왔어요. 나중에 그 몸종 부부가 자식을 4남매 낳았는데, 남자애들은 일꾼으로 부리고 딸애들은 식모를 하고 그렇게 우리 집에서 일하면서 다 함께 살았습니다..”·····“당시에는 온정면 일대에서 우리 할머니가 온갖 사돈지(査頓紙)와 계약서를 다 써주고는 했어요.”
온정면에서도 알아주던 부농의 딸로 태어난 김영순씨는 가족 가운데 특히 조모님이 훌륭한 분이었다고 전한다.“조모님이 참 훌륭하고 뛰어난 분이어서 많이 따르고 많이 배웠습니다. 항상 조모님이 자랑스러웠지요. 어릴 적에 조모님께 배웠던 것들이 제가 한평생 사회 활동을 통해 이웃들에게 봉사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 집에 딸린 논이 150마지기나 됐는데 100마지기는 주변에 소작을 주고, 나머지 50마지기는 집에서 일꾼을 데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거두어 들였지요. 그러다가 왜정 때 토지혁명이 났는데, 소작을 주고 있던 논은 그대로 소작농들에게 다 분배되고 집에서 직접 부치던 50마지기만 남았다고 합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지요. 조모님은 정승집 딸인가 그랬다고 하는데, 원래는 고향이 평해 남산이라고 얘기들 하던데 남산이 어딘지는 저도 정확이 모르겠어요. 동네마다 남산이라고 부르는 데야 군데군데 있지만, 그때 지명이 지금과는 다른 것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요. 조모님 성씨는 재령 이씨라고 전해 들었어요. 하도 어릴 때 어른들 말씀을 전해들은 것이어서 정승집 딸이었는지, 어디 과거 급제를 했거나 벼슬을 하다가 낙향한 어른의 딸인지 그것은 정확하게 모릅니다.”
김씨는 할머니가 결혼해서 시댁으로 들어올 당시에 몸종 둘을 데리고 왔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시집을 오면서 남자와 여자 몸종을 두명 데리고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우리 집 한쪽에 작은 집을 한 채 지어서 그 몸종 둘을 살게 해서 자식을 4남매 낳았는데, 남자애들은 일꾼으로 부리고 딸애들은 식모를 하고 그렇게 우리 집에서 일하면서 다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실 때까지 일부는 결혼을 시켜서 살림을 내주고 또 일부는 결혼을 시켜서도 우리 집에 데리고 있고 그랬어요. 그러던 것이 제가 14살 때 6.25전쟁이 터졌는데, 6.25전쟁이 끝나고는 다 없어졌지요. 일부는 전쟁 통에 죽기도 하고 남자종의 부인인 여자 몸종은 나가버리고 그러면서요.”김씨는 평해 남산에서 시집을 온 할머니는 특히 글재주가 뛰어나서 온정 일원의 사돈지와 각종 계약서는 도맡아서 써주고는 했었다고 기억한다.
“우리 할머니는 성품이 참 올곧고 좋았어요.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할머니의 성품이나 마음 씀씀이가 가족에게나 남들에게나 한쪽으로 쏠리거나 모자람이 없이 참 컸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돼요. 할머니는 글이 참 좋았습니다. 한문이나 한글이나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글 실력을 갖추었던 분이었지요. 예전에는 결혼할 당시에 신부집에서 신랑집으로 예단이나 음식을 보내면서 사돈지(査頓紙-내간 편지)라는 것을 썼잖아요? 또 논을 사고 밭을 살 때 요즘이야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써주면서 마무리를 지어 주지만, 당시에는 온정면 일대에서 우리 할머니가 온갖 사돈지와 계약서를 다 써주고는 했습니다.”
김영순씨는 글을 쓰고 읽기를 좋아했던 할머니가 무료할 때면 곁에서 대신 글을 읽어주고는 했던 애틋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78년 8월 15일, 울진포교당에서의 고(故) 육영수여사 추모회
“제가 클 때 보면 할머니가 담배를 떡하니 피우면서 자신이 짓고 쓴 글을 두루마리를 해서 방 한구석에 죽 놓아두고는 했어요.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을 때면 항상 저를 부르고는 했지요. ‘영순아, 저기 두루마리에서 무슨 가사, 무슨 가사를 좀 내려서 읽어라보자, 내가 들어보자’ 하고는 했어요. 또 명절 때만 되면 할머니보다 젊은 여자 분들이 이웃마을에서 할머니를 찾아와서 모여들고는 했는데, 다들 글을 하는 여자들이었습니다. 방안에 모여서는 사돈지를 이렇게 써야 한다느니, 저렇게 써야 한다느니, 아니면 가사를 이렇게 짓고 저렇게 지어야 좋다느니 하면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논쟁을 벌이고는 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런 모습들이 참 보기가 좋더라고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의 집으로 놀러가서 한자리에 모이면 입으로 수다나 떨고 윷이나 치면서 놀거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는데, 할머니와 할머니를 찾아서 모여드는 여자 분들은 달랐어요. 함께 모여서 글을 짓고 읽으며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내고 그랬습니다.”그 당시 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인근에서는 크게 존경받는 분들로 타향에 살던 이웃 주민들은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후에 자신들의 집으로 갔었다고 한다.
“객지에 나가 살던 이웃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오게 되면 자기 집으로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와서 인사를 먼저 드리고 자기들 집으로 가고는 하던 것이 지금까지도 참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주변에 베푼 것도 많았고 인정도 많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보니까 어머니는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한다고 집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고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고부간의 갈등이나 그런 일로 할머니를 찾아오면 양쪽 얘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따로 따로 불러서는 이런 저런 조언을 해서 무난하게 일처리를 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을 어릴 때 퍽 자주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릴 때는 우리 마을에서 할머니를 다들 존경 하고 우러러 보기도 하고 그랬지요. 이제는 그런 어른들이 다 돌아가셨지요.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참말로 예전 일이 생생하게 다시 기억이 나네요.”
“어릴 때 우리들은 집안에 가둬놓고 숨겨놓은 여자들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가끔씩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영화관이었던 활동사진을 본다고 젊은 여자애들도 우르르 몰려다니고는 했는데, 우리 집안의 여자들은 엄격하고 호랑이처럼 무서운 할아버지 때문에 꼼짝달싹 못했어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자란 김영순씨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이태 전이던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저는 8살이 되던 해에 온정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 때이고, 또 이곳저곳 산골짜기에 흩어져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애들을 좀 나이가 들면 국민학교에 입학시키고는 할 때였어요. 집과 학교가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까 8살 어린 나이에 학교에 입학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누나나 오빠가 나이가 들어 10살이 넘어서 국민학교에 입학하면 동생들도 함께 딸려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온정국민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도 동창생 중에는 8살 먹은 애들이 한두 명밖에 안되었고 보통 10살이나 12살 정도 됐어요. 한반의 학생은 70명이나 75명 정도 됐고요. 지금 같으면 두반으로 나누어서 공부를 했을 텐데, 그때는 반을 나누는 것도 없이 그렇게 한 교실에 다들 소복이 모여서 공부를 했어요.”
온정국민학교를 졸업한 김영순씨는 월송중학교에 입학을 하고서도 엄격하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막상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고 전해준다.
“온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어른들의 반대로 결국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온정면에 중학교가 없었고, 평해에 월송중학교가 있었는데 막상 입학을 해 놓고서도 학교를 다니지는 못했어요. 입학해놓고 집에서 며칠 쉬는 기간이 있었는데, 집안의 할아버지가 극구 반대를 한 거지요. 저에게는 뭐라고 안하면서 아버지에게 막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는 금천 집에서 평해 월송까지 차 없이 걸어 다녀야 했는데, 여자애가 먼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바람도 날수 있고 남에게 해코지도 당할 수 있다면서요. 또 그때는 평해 깡패가 말도 못하게 유명했어요. 그러다보니 어린 여자애가 먼 길을 걸어서 중학교를 다니는 게 겁도 나고 하니까 반대를 하신 거지요. 어디 평해에 절친한 친척이라도 있었으면 그 집에 맡겨서 하숙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형편도 아니었고요. 할아버지가 여자애 혼자 중학교에 보낼 수는 없다고 야단이 나니까 아버지가 저를 부르더니 ‘영순아, 도저히 안 되겠으니 부엌대학교나 해라’면서 설득하더군요. 그래서 결국은 중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책도 읽고 그렇게 지내게 되었지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겁도 많아서 할아버지 영이 무서워서 감히 중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쓸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함께 국민학교에 다니던 여자 친구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같이 다닐 수 있었다면 중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당시에도 오빠들은 중학교부터 대구로 나가서 공부를 했었는데요.”김영순씨는 어린 시절 자기 집안의 여자들은 전부 가둬놓은 여자들이었다며 웃는다.
“어릴 때 우리들은 집안에 가둬놓고 숨겨놓은 여자들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가끔씩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영화관이었던 활동사진을 본다고 젊은 여자애들도 우르르 몰려다니고는 했는데, 우리 집안의 여자들은 엄격하고 호랑이처럼 무서운 할아버지 때문에 꼼짝달싹 못했어요. 학교에 운동회가 열려서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어도 함부로 구경 다니지 못했고요. 겨우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것은 명절 때 친척어른들께 인사드리러 다닌 것이 전부였지요.”김영순씨의 부모님은 딸자식들이 여러 가지 일을 배우면 나중에 고생하는 집으로 시집을 간다고 염려해서 당시만 해도 여자애들에게 당연히 가르치던 길쌈조차 가르치지 않았다.
“이상하게 우리 집안에서는 남들이 다 가르치는 길쌈도 안 가르쳤어요. 다른 집은 여자애들이 어릴 때부터 길쌈을 배우고는 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딸자식들에게 길쌈도 가르치지 않았고, 저도 굳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길쌈을 하는 시골 집안으로는 딸자식들을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저는 어찌됐든 옆 마을인 시골로 시집을 가게 되었지만요. 할아버지가 무섭고 어려워서 아주 어릴 때 봄이면 친구들과 가까운 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가끔씩 다니고는 했었지만, 그것도 열대여섯살 이후부터는 전혀 다니지 못했어요. 하다못해 친구들과도 마음 편하게 어울리지 못했을 정도니까요.”
1991년 10월 25일, 새마을운동 울진군지회가 주관한 ‘하반기 새마을지도자 자녀 장학금 전달식’에 참석하여“우리 집은 규모가 커서 12칸 기와집이었는데, 인민군들이 온정면으로 들어왔을 때는 우리 집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어요. 곳간과 도장을 빼고는 인민군들이 방마다 전부 들어가서 쉬었고, 동마루가 길게 기역자로 꺾여 있었는데 잠자리가 부족하니까 동마루에도 죽 늘어서서 누워있고, 다락으로도 올라가서 잠을 자고는 했습니다.”
온정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일을 거드는 틈틈이 책도 읽으면서 소일하던 김영순씨는 14살에 6.25전쟁을 겪게 된다.
김씨는 전쟁 중 비행기 공습이 극심하던 때 잠시 후포로 피난을 떠나는 도중에 먹었던 개밥으로 삶은 보리밥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이 나고도 어디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는데, 비행기 공습에 빨갱이가 많이 설쳐서 제일 험할 때 한번은 갔다가 돌아왔어요. 그렇다고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산길을 걸어서 온 가족이 후포 쪽으로 갔지요. 저도 14살이었지만 어렸고, 위의 오빠들은 대구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대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에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으니까 잡히면 죽는다면서 온정 어느 산골 뜰 기와집의 다락위에 올라앉아서 피난을 하고 있었어요. 작은 구멍으로 음식을 넣어주고 요강을 들고 올라가서 볼일도 보고 하면서요. 금천에서 후포로 피난을 떠나면서 식모 할머니가 개밥으로 준다고 보리쌀을 삶아서 가지고 갔는데, 도중에 하도 배가 고파서 개죽이라고 들고 간 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서 그걸 맛있게 남김없이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아주 큰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피난을 떠날 때도 데리고 갔지요. 후포에는 친척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참 인정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모두 빨리 피난을 오라고 하고, 죽어도 다 같이 죽는다고 말하고 그럴 때였으니까요. 요즘 인정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후포 친척집에서 한 열흘정도 묵다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어요.”
6.25전쟁 당시에 산악 지형으로 골짜기가 깊고 외졌던 온정면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자주 벌어졌다.
김영순씨는 전쟁 당시에 보고 들은 구체적인 상황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우리 동네에서는 비행기 공습에 빨갱이들 때문에 양지마, 음지마 마을 사람들 모두 다 외진 골짜기 한곳에 모여서 공습을 피하고는 했었어요. 우리 집은 규모가 커서 12칸 기와집이었는데, 인민군들이 온정면으로 들어왔을 때는 우리 집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습니다. 곳간과 도장 같은 곳을 빼고는 인민군들이 방마다 전부 들어가서 쉬었고, 동마루가 길게 기역자로 꺾여 있었는데 잠자리가 부족하니까 동마루에도 죽 늘어서서 누워있고, 다락으로도 올라가서 잠을 자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는 인근 동네의 뜰 기와집 다락에 숨어서 두달 정도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와서도 혹시 또 나타날지 모를 인민군이나 빨갱이를 피해서 집에 있던 창고 같은 곳에 은신해서 몸을 숨기고 있었지요. 우리 집은 규모가 커서 곳곳에 창고나 헛간 같은 비밀스런 장소가 많이 있었어요. 처음 전쟁이 붙었던 애초에는 군인들이 온정국민학교에서 묵다가 뒤에 금천국민학교로 옮겨와서 머물렀습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만 해도 금천국민학교가 없었는데 뒤에 제 동생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는 금천국민학교가 생겼지요. 국군들이 금천국민학교로 옮겨와서는 마을 집집마다 주먹밥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당연히 농사가 많던 우리 집에서는 다른 집들보다 주먹밥을 많이 만들어서 제공하기도 했고요. 어느 날 새벽부터 온정 골짜기에서 밀고 내려온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 금천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지는데, 따다다다 하는 총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 얼마나 시끄럽고 겁이 나든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집집마다 미리 마련해두었던 방공호에 들어가서 숨기도 했습니다. 인민군들은 아마도 울진 방면에서 산길을 타고 외선미 쪽으로 넘어왔던 것 같아요. 그때 집에는 다 큰 처자였던 고모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고모가 혹시 군인들이나 인민군들에게 어찌 잘못 될까봐 직접 고모를 데리고 피신을 떠나기도 했었고요.”
“결혼할 당시 제가 20살이었고 신랑될 사람이 30살이었어요. 저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았으니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신랑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서글퍼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예전에는 부모의 영이란 것이 법이었지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정국민학교를 졸업한 이듬해부터 지루한 6.25전쟁을 겪고, 수년 동안 어머니를 도와서 집안일 거들면서 지내던 김영순씨는 1957년 20살이 되던 해에 중매를 통해 결혼한다.김영순씨는 1957년 20살이 되던 해에 중매를 통해 10살 연상의
이만기씨와 결혼했다
“시외삼촌 되던 분이 중매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시외삼촌이 소개를 하기는 했지만 좁은 온정면에서 집안끼리는 서로가 뻔히 알던 사이였지요. 친정아버지가 온정면 면의원을 하실 때고 시아버지가 온정면 면장을 하실 때였으니까, 어른들끼리는 다들 알고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어요. 굳이 따지면 아주 멀기는 했지만 이종 쪽으로 먼 친척뻘이 되기도 했고요. 시댁은 온정 하암리인데 지금의 소태3리를 그렇게 불렀어요. 결혼할 당시 제가 20살이었고 신랑될 사람이 30살이었어요. 저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았으니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신랑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서글퍼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예전에는 부모의 영이란 것이 법이었지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6.25사변 겪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만 해도 군 생활을 길게 할 때였으니 차라리 군 생활도 마치고 학교도 마친 사람이 훨씬 안정적이라면서 설득하더라고요. 또 오빠들이 대학에 다닐 때 결혼을 했는데, 신랑들은 학교에 다니는데 며느리들만 따로 떨어져서 온정 금천 시집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니 그런 고생을 딸이 하는 것도 싫었나 봅니다. 20살 되던 해 1957년 음력 11월 30일에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사진으로만 신랑될 사람 얼굴을 익혔지요. 친정집과 시댁은 산길 10리길인데, 신랑이 가마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3일 밤을 묵고 저를 데리고 시댁으로 들어갔어요.”
김씨의 남편 이만기씨는 삼척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어렵던 가정형편으로 인해 힘들게 홍익대학교 법대를 졸업했다.
“남편은 지금의 중·고등학교격인 삼척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어렵던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기성면에서 4~5년 정도 국민학교 교사를 지냈어요. 그러면서도 대학교를 가고 싶어서 몸부림을 친 거지요. 기성면에서 학교 교사를 하면서 받은 봉급을 모으고 난 다음에 겨우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서울로 올라가서 홍익대학교 법과에 입학했습니다. 생전에 남편말로는 원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허락이 늦게 떨어져서 서울로 올라갔더니 이미 서울대학교는 입학 정원이 꽉 찼더랍니다. 그래서 2차로 시험을 쳐서 입학할 수 있던 홍익대학교를 선택한 겁니다. 그러다가 3학년을 마치고 사는 것도 힘들고 하니 학교를 휴학하고 군대를 지원해서 가게 된 거지요. 당시만 해도 대학교를 다니던 사람이 귀할 때니까 군에서 좋은 보직을 받았고 월급도 조금 많이 받았었나 봅니다. 처음에는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좀 모아서 서울로 휴가를 나올 때마다, 대학교 다닐 때 두부 비지를 먹여주면서 자신을 도와주던 사람이 그릇 장사를 했는데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해요. 나중에 군대를 제대해서 학교에 복학하게 되면 밥이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해서요. 일종의 투자를 한 셈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휴가를 나왔더니 그릇장수가 부도가 나서 없어졌더랍니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군생활로 모은 돈을 집으로 보냈다고 해요. 남편이 생전에 해주었던 얘기지요.”김씨의 남편 이만기씨의 집에서는 아들이 군 생활을 하면서 보내온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키웠고, 이씨는 제대 후에 그 소를 팔아서 홍익대학교 4학년을 모두 마치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릇장수가 부도가 나자 남편은 월급을 모으는 대로 집으로 보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다 큰 중소가 한 마리 기다리고 있더랍니다. 집에서는 아들이 군 생활을 하면서 부쳐온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키워온 거지요. 결국은 부모님이 그 중소를 팔아주어서 홍익대학교의 남은 1년을 마저 공부하고 졸업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남편은 홍익대학교 졸업장은 있는데 졸업앨범이 없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장은 받았는데, 돈이 없어서 그 당시에 졸업 앨범을 살수가 없었다고 뒤에 전해 들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지차로 태어났으니 그만큼 힘들게 공부했던 거지요. 시댁은 위로부터 아들 셋, 딸 셋 6남매인데, 남편은 셋째아들입니다. 맏시숙은 삼척공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초등학교 교장까지 지냈어요.”
젊은 시절, 온가족이 함께 모여서“남편은 울진교육청에 6년 정도 근무하는 동안에 계장으로 승진했는데, 과장으로 승진되어 영월 정선으로 발령이 나자 교육청을 그만두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직장을 관두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냐고 묻자, 교육청에 평생 근무해봤자 과장밖에 하지 못하고 그 수입도 뻔하니 이참에 교육청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영순씨의 남편 이만기씨는 결혼 후 하루 이틀 지낸 다음에 혼자 서울로 올라간다.“시집을 가서 하루 이틀 지내고 난 뒤 남편은 혼자 서울로 올라갔어요. 서울로 올라가서 후생사업을 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사업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밑천이 없으니까 독립적으로 사업을 하지 못하고 남들하고 동업을 했던 사업이었던 모양입니다. 다음해가 되니까 남편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울진으로 내려왔더군요.”
김씨의 남편 이만기씨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울진으로 내려와서 울진군 교육청에서 건설기사로 근무하게 된다.
“남편은 결혼한 이듬해에 서울에서 내려와서 31살 되던 해에 울진군 교육청에 건설기사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울진교육청에서 시행하는 건축과 관련된 일을 맡아보던 영선계에서 근무하게 된 거지요. 온정 시댁을 떠나 울진으로 올라와서 본격적으로 신혼살림이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월변 변두리의 초가집에 셋방 한칸을 얻어서 살았어요. 영선계와 관련이 있던 어느 청부업자가 셋방을 소개했지요. 그곳에서 한달 정도 살았는데, 그 집 주인이 마작을 좋아해서 매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 남편의 새 신발이 없어지고 나서 기분이 나쁘다면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장기식씨라는 분의 집에 셋방을 얻어서 한 이년 살았습니다. 그때 제가 첫아기를 뱄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내가 아직 애기를 낳지 못했으니 다른 집에 나가서 애기를 낳으면 어떻겠느냐?’며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예전 사람들은 그런 것을 따지고 믿고 했는데, 저는 당연하다 싶어서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울진향교 인근에 방을 구해서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이사를 했어요. 교육청에서 일하던 기사 집에 셋방 하나를 얻었는데, 그 집으로 이사를 들어가는 날에 첫아기를 낳았습니다.”울진교육청에 6년 근무하는 동안에 영선계장으로 승진한 이만기씨는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영월 정선으로 발령이 나자 울진교육청을 그만두게 된다.
“남편은 교육청에 근무하는 동안에 계장으로 승진했는데, 6년 후에 과장으로 승진되어 영월 정선으로 발령이 나자 교육청을 그만두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장을 관두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고 묻자, 교육청에 평생 근무해봤자 과장밖에 하지 못하고 그 수입도 뻔해서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겠으니 이참에 교육청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교육청에서 건설계통 쪽으로 근무를 했으니까 건축, 건설 계통 일을 해야겠다고 하면서요. 당장 어떻게 먹고 살까 걱정은 되었지만 한사코 반대도 하지 못했지요. 남편과는 10년 차이가 나다보니까 항상 높아 보이고 어렵기도 했지요. 남편은 교육청을 관두고 곧장 대구로 올라가더니 건축 기술자 자격증을 따서 내려왔어요. 그 다음부터는 남편이 각종 건설 입찰을 봐가면서 공사 청부업자를 시작하더라고요. 한 3년 정도 건설 청부업자 일을 했어요. 울진교육청에 근무할 때도 온갖 공사 입찰에 관여했으니 그쪽 경험은 이미 풍부했던 거지요.”
남편 이만기씨의 묘소가 위치한 근남면 노음리 야산에서 자녀들과 함께 한 김영순씨“저는 죽어도 남편 옆에 묻히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애들 내손으로 다 치웠고, 죽어서 남편을 떳떳하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제 나이 마흔셋에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이 10살이었으니, 세상에 남아 있는 저는 또 오죽했겠어요? 평생 살아오면서 재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어린 애들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남편 이름 석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싶어서요.”
울진교육청에 사표를 제출하고 1963년에 건축 기술자 자격 면허를 취득한 김씨의 남편 이만기씨는 3년여 동안 건설 청부업자를 하다가 대성상사를 차리게 된다.
“한 3년 정도 건설업자를 하던 남편은 종합 건축 자재점인 대성상사를 차렸는데, 공사 청부업자일은 계속했지요. 그러면서 삼척 동양시멘트 대리점, 합판, 스레트, 함석 대리점 같은 건축과 관련된 각종 건자재 대리점을 겸하게 되었어요. 대리점 일이 점점 바빠지면서부터는 공사 청부업자 일은 한손 놓게 되었고요. 대성상사 자리가 지금 유성장여관이 있는 이 건물 바로 앞쪽의 도로에 물려 있는 건물입니다. 지금 이 여관 자리는 그 당시에 건설 자재를 쌓아놓던 창고를 겸해서 보로꾸(블록)도 찍고 하던 공터였고요. 처음에는 대성상사를 해서 어느 정도 돈을 벌게 되면 애들 교육문제도 있고 하니, 조카에게 대성상사 운영을 맡기고 서울로 함께 올라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결국 서울로 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남편이 돌아가시고 처음에는 묘를 매화에 썼다가 3개월 뒤에 땅을 마련해서 현재 위치인 근남면 노음리 야산으로 이장을 했지요. 저는 죽어도 남편 옆에 묻히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애들 내손으로 다 치웠고, 죽어서 남편을 떳떳하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말까지 울진읍 월변에서 대성상사를 운영하면서 대성장학회를 설립하여 지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육 발전에 헌신하기도 했던 김씨의 남편 이만기씨는 1979년에 별세했다.
“남편은 화투 같은 노름은 전혀 몰랐고, 오로지 다방에 가서 가까운 지인들과 바둑 두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술도 처음에는 조금 했었는데 위장이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거의 안 마시다시피 했었고요. 그래도 담배는 돌아가실 때까지 피웠어요. 담배 끝나고 사람도 끝난 거지요. 그런데 둘째 시숙은 노름을 참 즐겼어요. 시아버지가 물려준 온정의 논밭전지도 전부 다 노름으로 날릴 정도였으니까요. 남편은 그런 시숙에게 돈도 자주 빌려주고는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냥 빌려주지 않고 그나마 얼마 남아있는 둘째 시숙의 논밭을 저당으로 잡고 돈을 빌려주고는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야 나중에 부모님이 물려준 땅이라도 남아 있을 테니까요. 남편은 가족들에게 자근자근한 맛은 없었지만 성격은 상당히 쾌활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사람이 죽고 나면 적어도 그놈이 나쁜 놈이라는 얘기는 듣지 말아야 한다’고요. 그러더니 장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성상사를 시작하고부터 한 3년 동안은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남몰래 도움을 주고는 하더니, 3년이 지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대성장학회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돕기 시작한 거지요. 남편은 ‘남들이 내 물건 팔아주는데, 나도 남들을 도와주어야지’라고 자주 얘기했습니다. 저 또한 친정집에서 클 때부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을 많이 봐서 남편의 장학 사업에 반대를 하지 않았고요. 남편은 장학사업 이외에도 그 당시에 울진군내의 각종 단체에 많이 소속되어 있었고, 울진라이온스도 남편이 주도적으로 창립했지요. 나중에는 오준석 국회의원과의 불화로 라이온스도 그만두었지만요. 그러다가 제가 마흔셋 되던 해에 쉰셋이라는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지요. 사업을 하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그 당시 오준석 국회의원과의 불화로 인해 스트레스도 엄청 받고 있을 때였지요.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쌓여도 위장이 좋지 않아 술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고 계속 담배만 피면서 속으로 삭혀야 했으니 오죽 했겠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이 10살이었으니, 세상에 남아 있는 저는 또 오죽했겠어요? 평생 살아오면서 재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어린 애들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남편 이름 석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싶어서요.”
김영순씨는 남편 이만기씨와의 사이에 1남5녀를 두었다.
“남편과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위로 딸을 다섯이나 낳았는데, 마지막에는 ‘이번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여자를 하나 들여서라도 아들을 보게 해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어요. 위로부터 난숙(여. 51. 성남시 분당), 미순(여. 50. 대구시), 옥순(여. 48. 창원시), 호숙(여. 45. 성남시 분당), 득영(여. 43. 성남시 분당), 무호(남. 41. 서울시) 라는 자식을 두었어요. 큰사위는 분당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고, 둘째 사위는 주호영 특임장관의 친형인데 대구교대 교수를 하고 있어요. 셋째 사위는 창원의 무슨 중공업인가 하는 회사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고요, 넷째 딸과 사위는 성남 분당에서 함께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지요. 다섯째 딸은 초등학교 성악 교사로 일하고 사위는 토지개발공사에 근무하고 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서울 지하철공사에 근무하고 있어요. 창원과 대구에 사는 딸은 자주 못 보지만, 서울 아들집에 올라가면 분당에 사는 딸들도 다들 모이고 하니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막내아들이 10살이었고, 위로 딸 두명이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아들과 제일 작은 딸을 서울로 올려 보냈지요. 아무래도 울진에서 생활하는 것보다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편이 장래를 생각할 때 더 낫겠다는 생각에서요. 지금도 위의 두 딸에게 너무 고맙고 아들에게는 누나들이 그때 엄마 역할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위의 딸들은 모두 중매를 통해서 결혼을 했는데, 넷째 딸은 어떻게 중매를 하지 않고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아들도 대학교에 다닐 때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는데, 처음에는 취직도 안한 상태에서 결혼은 못한다고 반대했는데, 다행히 지하철공사에 취직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요. 며느리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칠곡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돈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 아들 밥 먹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득해서 교사를 관두고 결혼했지요. 시간을 두고 겪다 보니까 며느리가 예절도 바르고 마음 씀씀이도 너무 좋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남편이 생전에 벌어놓은 돈은 업자들에게 건축자재를 외상으로 준 것이 전부였는데, 물건을 대준 사람이 죽고 없는 마당에 어느 누가 외상값을 갚겠어요? 하도 답답해서 포항에 있는 어느 철학관을 찾아갔더니 쇳소리가 나는 장사는 일절 하지 말고 물장사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다방과 술장사는 죽어도 못하겠다 싶어서 여관을 시작했지요. 여관도 욕실에서 씻을 수 있으니 일종의 물장사겠다 싶어서요.”
김영순씨는 남편 이만기씨가 세상을 뜨고 난 2년 후에 울진에서는 처음으로 장여관을 신축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김영순씨는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난 2년 후인 1981년 10월에 울진에서는 처음으로 장여관을 신축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유성장여관 개업 테이프 커팅 장면
1981년 10월 개업할 당시의 유성장여관. 울진 지역의 여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지하 1층 지상 3층의 대형 건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울진 지역의 숙박업소는 여인숙이 대부분이었고, 여관이 있어도 다들 단층집에 시설도 열악한 형편이었다.“남편이 세상을 뜨고 난 뒤 밤낮으로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까만 고민했어요. 주위에서는 차라리 울진 생활을 정리하고 애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서 생활하라고 했는데, 남편이 가고 나니까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남편이 세상을 뜨고도 한 1년 동안은 건재상을 주위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운영했는데 시원치 않았어요. 남편이 돌아가시던 1979년도에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전국적으로 모든 공사가 중단되다시피 했거든요. 남편이 생전에 벌어놓은 돈은 업자들에게 건축 자재를 외상으로 준 것이 전부였는데, 물건을 대준 사람이 죽고 없는 마당에 어느 누가 외상값을 갚겠어요? 하도 답답해서 포항에 있는 어느 철학관을 찾아갔더니 쇳소리가 나는 장사는 일절 하지 말고, 물장사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세상을 뜬 남편의 사주를 들이밀었더니 용하게도 ‘이미 죽은 사람의 사주를 왜 건네느냐?’고 되묻더군요. 그러니 그 철학관의 말을 신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도 다방과 술장사는 죽어도 못하겠다 싶어서 여관을 시작했지요. 남편이 살아생전에 시내의 한 여관에 가서 숙박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기억이 떠올라서 ‘아, 울진에는 단층 여관밖에 없는데, 그런 여관을 지으면 장사가 되겠구나’ 싶었고요. 당시의 일반 여관과는 달리 큰 도시의 장여관들은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어서 편하게 씻을 수 있었고, 철학관에서 물장사를 하라고 했는데 여관도 욕실에서 씻을 수 있으니 일종의 물장사겠다 싶어서요.”
울진에서는 처음으로 3층짜리 장여관을 지어서 운영하게 된 김영순씨는 장사는 잘되었지만, 남편이 남긴 재산을 팔아서 장여관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심적 부담도 그만큼 컸었다고 전해준다.
“장여관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다음에는 철물점 물건들도 정리하고, 요 옆에 딸려있던 주택도 팔고, 서울에 애들 공부시킨다고 마련해두었던 집도 팔고, 대리점 보증금도 다 빼고, 건재상에 딸려 있던 차도 팔고 해서 울진에서는 최초로 방마다 욕실이 딸린 지하 1층, 지상 3층의 유성장여관을 지어서 개업하게 된 거지요. 그때가 1981년 10월 달이었어요. 개업하던 날은 울진의 유지들이 잔뜩 모여서 개업을 축하해주면서 테이프 커팅도 하고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여관은 아주 잘 됐어요. 개업하던 날에는 미처 방문을 달지 못한 곳도 있었는데 그래도 손님이 밀려들기 시작했어요. 그때 울진에는 단층짜리 여관밖에 없을 때였습니다. 여관을 지으면서 이것저것 다 팔고도 은행 빚을 꽤 많이 질수밖에 없었는데 열심히 살다보니 그 빚도 다 정리했습니다. 당시에 여관 신축 공사는 대구에서 청부업자를 하던 큰오빠가 맡아서 아주 단단하게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사업이라고 운영하면서 참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빚을 얻어서 시작하다보니 중간 중간에 이자도 내야지, 원금도 갚아야지, 또 돈이 어느 정도 모였다 싶으면 집에 하자가 생겨서 보수를 해야 했고요. 남편이 얼마 남긴 재산을 팔아서 지은 이 여관을 운영하면서 항상 마음의 부담이 있었지요. 최소한 남편이 남긴 재산을 팔아서 장여관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니 그 부분은 채워놔야 한다는 부담감이었지요. 나중에는 결국 요 앞의 상가를 내손으로 돈을 벌어서 살 수 있었지요.”
구국여성봉사단 을지훈련 방문(1977년 7월 12일-박카스 150, 달걀 200)“남편이 사업에 한창이던 서른 한두살 때부터 울진 지역의 여성 사회단체 활동에 몸을 담았는데, 처음에는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여성 단체 활동을 쉰아홉살까지 했으니 꽤 오랜 기간 동안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셈이네요. 새마을부녀회장을 오랜 기간 재임하다보니 울진어린이집 원장직도 자동으로 겸하게 되었어요.”
김영순씨는 30대 초반부터 울진 지역에서의 여성 사회단체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김씨가 처음 사회단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봉사단의 전신으로 1975년 4월에 창설된 단체이며, 고(故) 최태민 목사가 총재로 취임하여 단체를 운영했고 박정희대통령의 큰딸인 박근혜씨가 명예총재로 활동했었다.
십 수 년 전까지 김영순씨의 다양한 사회 활동상을 기억하는 많은 여성들은 울진 지역에서 김영순이라는 이름을 빼면 여성 사회단체 쪽은 얘기가 되지 않는다며 입을 모은다.
“남편이 사업에 한창이던 서른 한두살 때부터 울진 지역의 여성 사회단체 활동에 몸을 담았는데, 처음에는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울진 지역에서는 여성 단체라는 것이 처음 생기다보니까 다들 체계도 뚜렷하지 못했고, 단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예산도 거의 없었습니다. 단체의 회원들도 울진읍내 지역에 한정되어 참여했고요. 구국여성봉사단이 활동할 당시만 해도 단체라기보다는 거의 계모임 수준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 후에 구국여성봉사단이 새마음봉사단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회원 참여의 폭도 8개면으로 확대되었어요. 그때는 울진군이 8개면밖에 없을 때였지요. 그 당시에 제가 8개 면을 통틀어 울진군 회장을 맡게 되었지요.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단체복도 맞추고 각종 기금도 조달하고 울진군청 복지계에서 단체를 운영하면서 작은 사무실도 마련해주고 그랬지요. 그리고 상부에서 교육도 실시하고, 경북도의 회장이 내려와서 이런저런 주문도 하고, 각종 사회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또한 박정희대통령의 큰딸 박근혜씨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 보니까 육영수여사의 산소에도 참배하러 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새마음봉사단은 다시 새마을부녀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면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산하로 흡수되지요. 그때 다시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어요.”구국여성봉사단이 새마음봉사단으로, 다시 새마을부녀회로 명칭을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여성 단체에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영순씨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여성 단체에 참여하여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일일찻집 운영, 군부대 방문, 후포 영신모자원과 탁아소 방문 등 참 많은 활동을 해왔는데, 특히 울진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았던 1993년 당시에 휴전선 민통선 안에 있던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마을 주민들을 고향 울진으로 초청했던 ‘실향민 고향 방문 사업’은 지금까지도 큰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철원군 근남면 마을은 지난 59년도에 사라호 태풍으로 고향을 잃은 근남면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간 곳이지요.”
십 수 년 동안 울진 지역에서 여성 사회단체 활동을 한 공로와 경력을 인정받은 김씨는 60살까지 10년여간 울진어린이집 원장으로도 근무했다.1994년, 김영순씨가 울진어린이집 원장으로 재직할 당시의‘제3회 울진어린이집 수료식’
“서른 한두살 때부터 시작한 여성 사회단체 활동을 59살까지 했으니, 꽤 오랜 기간 동안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셈이네요. 새마을부녀회장을 오랜 기간 맡다보니 나중에는 울진어린이집 원장직도 자동으로 겸하게 되었어요. 처음 3년 동안은 보수 없이 명예직으로 어린이집 원장으로 근무하다가, 그 후에 제도가 바뀌면서 서울로 올라가서 교육을 받고 내려와서 한 10년간 더 근무하면서 월급을 조금 받기도 했습니다. 울진어린이집 원장은 60살까지 하고 난 뒤 정규 교육도 받고 경험도 쌓이게 된 후배들에게 물려주게 되었지요.”
지난 20~30년간 우리 사회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왔고, 경제여건의 변화와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적, 문화적 규범 또한 급속하게 변화했다.
60~70년대의 개발독재와 이에 반하는 자생적인 동력도 함께 성장했고, 이런 분위기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속에서 울진 지역에서 여성 사회단체의 든든한 큰 축을 오롯이 감당하면서 앞서갔던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의 사회 참여와 복지를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조차 변변하지 않았던 시절, 전통적인 성 역할 분담과 전통적인 가족주의에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묵묵하게 지역의 여성 사회단체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온 김영순씨는 언제까지나 울진 지역에서 가장 앞서간 여성중의 한명으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