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면 두천 쟁패마을에서 7대째 살았던 강순도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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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에서 아침 해가 뜨고, 산골짜기 너머로 저녁 해가 꼬리를 감추는 산중마을에서 태어나 옛 시절을 흘려보낸 노인들의 고달팠던 삶은 속 깊은 울림을 준다.
아련하기 만한 추억속의 모퉁이를 한참이나 돌아서 숨차게 걸어 올라가야 만나게 되는 산중 마을.
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가난하게 살아도 넘치는 인정을 서로 주고받으며 도타운 정을 쌓아온 사람들.첩첩산중 산허리에 갓 베어낸 나무를 대충 다듬어 얼기설기 기둥과 벽면을 올리고, 군데군데 물에 갠 황토 흙을 채워서 작은 집 하나를 짓고, 두어 개의 방과 부엌, 툇마루, 통시칸, 마구를 달아낸 그런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살며 자식을 낳아 키우고, 맨몸으로 흙을 일구며 원시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산길을 걷다가 산중에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진 폐가(廢家)를 만나면 불현듯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서너 집이 모여 살던 곳이다 싶은 곳도 그렇지만, 마을에서 뚝 떨어져 있는 독가촌을 만나면 더욱 그러고 싶어진다.이집은 왜 홀로 이곳에 지어져있고, 또 이집에는 누가 어떤 삶을 살다가 떠났을까 궁금해진다.
퇴락해서 무너진 돌담 사이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차분하게 파고들고, 미처 떨어져나가지 못한 문풍지를 비집으며 햇살이 그 집의 안방 속살까지 비쳐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문득 그 집에 살았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세월이 흘러 사람의 여린 체온은 잊혀진지 오래되었고, 찔레넝쿨이 우거지며 그 집에 남아있던 고단한 영혼마저 빼앗아간 듯 느껴지는 그런 집이 있다.
쟁패에 논이 한 천오백평 숫자가 됐지. 밭도 한 천오백평 정도 됐으니, 논밭전지가 그래도 한 삼천평 됐어. 골짜기라도 이골 저 골에 논이 많았어요. 축대를 높게 쌓아서 논을 만들었거든.·····추운 겨울이라도 짚시기에 헝겊쪼가리로 대충 발모양에 맞게 바느질로 꼬매서 양발 비슷하게 만들어서 신고 다니고 그랬지. 말도 못하게 그렇게 살았거든. 그때는 또 그렇게 추웠어.
강순도(姜順道. 81세. 북면 하당리)씨는 북면 두천1리(바깥말래)에서 산길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마을인 장평(長坪. 쟁패, 장패, 쟁팽)에서 태어났다.
강순도씨의 초상화“쟁패에서 태어났지. 아버지는 진주 ‘강’씨 성에 ‘해’자 ‘수’자고, 어머니는 ‘김’씨 성에 ‘옥강’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는 죽변 화성리 용장이라는 곳에서 쟁패로 시집을 왔지. 용장이라는 동네에는 문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우리 어머니는 김씨 성이었어요. 오래전 웃대부터 우리 집은 쟁패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어른들이 얘기하더라꼬. 우리 아덜도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아덜까지 7대째 그곳에서 터전을 일구고 산거지. 말하자면 상토백이인 셈이거든. 토백이다 보니까 동네에서도 괄시를 못했어. 두천리 말래에는 권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들어왔고, 쟁패에는 우리 조상들이 터전을 제일 먼저 잡았지.”
지금 살펴보면 논이 있었을 것 같지 않은 장평에도 한때는 1천5백평의 논이 자리하고 있었다.
“먹고 사는 형편이야 산중에 사니 그저 그랬지. 우리 아바이는 나무 목상 한다고 술을 많아 잡쉈고, 남한테 목상 일을 맡겨 놓다시피 했으니 벌어서 누가 다 써는지 그것도 몰랬지, 뭐. 돈이 생겨서 술집에 가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술만 잡쉈다 하이. 그러니까 목상을 하면서 돈이야 많이 벌었지만 술을 잡순다고 집에는 하나도 안 가져다주고 그랬지. 주머니에 돈이 생겨서 한 장도막에 나서면, 그때는 한 장도막이 7일인데 그저 잘해야 하루나 이틀정도 집에 왔지요. 그래도 쟁패 쪽의 논밭이 다 우리 것이었어. 쟁패에 논이 한 천오백평 숫자가 됐지. 밭도 한 천오백평 정도 됐으니, 논밭전지가 그래도 한 삼천평 됐거든. 그 골짜기라도 이골 저 골에 논이 많았어요. 큰 논도 아니고 그저 축대를 높게 쌓아서 논을 만들었고, 그중에 오백 몇 평 되는 논도 있었으니 적은 건 아니었지.”
강순도씨의 부모님은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다.
“우리 형제는 아들이 오형제래. 딸이 하나 있고. 모두 육남매지. 제일 위에 기인이라는 형님이 있는데 벌써 돌아가고 없지. 고 밑에 내가 태어났고, 아래로 간난이라는 여동생이 한명 있는데 78살이고 봉화 석포에 살고 있지. 고 아래가 순선이라고 75살인데 서울에 살고 있고, 순돌이라고 강원도 정선에 살다가 사망했지. 제일 끝이 석돌이라고 70살인데 영주에 살고 있어요.”강씨가 태어난 1929년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지 19년이 지난해로,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나라 안팎이 지극히 어수선하던 그런 시기에 강씨는 오지인 울진에서도 오지 취급을 받던 북면 두천리 쟁패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났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살아계셨지. 쟁패에 살기는 했어도 우리 집과는 따로 떨어져서 살았어. 돌아가신 건 아이고. 내가 일정시대에 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치왔어. 지금 살고 있는 하당국민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도 이 옆에 학교가 있었거든. 우리 위의 영감들은 저기 갱변에 천막을 쳐놓고 가르치던 학교에 다녔다는데, 우리도 갱변 천막학교서 조금 다니다가 하당국민학교를 지어서 다시 조금 더 다녔지. 그래도 일년도 채 못 다녔어. 쟁패에서 이곳 하당학교를 다니는데 멀기는 얼마나 먼지,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었는데 학교는 무슨 학교여. 국민학교를 일년도 못 다니고 치와뻐랬지. 그때는 국민학교를 한두 해 다니다가 치와도 숭도 안 되던 시절이었고. 학교도 지금과 같이 수업시간을 꼭 지킬 수 있던 것도 아니었거든. 새벽밥을 먹고 걸어서 학교라고 갔다가, 저녁이면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겨울이면 말도 못했지. 개코나 어디 변변한 신발이 있나, 그때 그 집시기 신고 쟁패에서 하당까지 한참을 걸어왔다가 저녁에 돌아갈 때면 해는 짧지, 어른들이 바릿재 아래까지 마중을 나와야 했어. 그때만 해도 지금 말래에서 쟁패로 통하는 임산도로가 아니라, 바릿재로 걸어서 다닐 때였지. 그 추운 겨울이라도 짚시기에 어디 양발이 없으니, 헝겊쪼가리로 대충 발모양에 맞게 바느질로 꼬매서 양발 비슷하게 만들어서 신고 다니고 그랬지요. 겨울에 눈이라도 짚시기를 뚫고 양발 쪼가리 안으로 들어오면 발은 또 얼마나 시럽던지, 말도 못하게 그렇게 살았거든. 그때는 왜 또 그렇게 추웠어. 요새 추우야 추위라고도 할 수 없지. 그래도 맏백씨는 제동학교까지 다녔어. 지금 울진향교 자리가 그때 제동학교가 있던 자리여. 그때 형님은 울진에서 자취를 해가면서 제동학교를 마쳤지. 형님은 제동학교를 마치고 딴 거 한다고 한참동안 그러다가 군대에 갔는데, 강릉 8사단 창설 때 한 7~8년 군대에 있었지. 62살인가 그때 젊을 때 상새가 났네. 그래도 일정시대에 제동학교를 다녔으면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일찍 돌아간 거지.”
쟁패에서 하당국민학교까지 몇 십리 산길을 걸어 다니던 강씨는 일년도 지나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든다.
“그때는 어디 따로 돈벌이할 데도 없으니 농사나 지었지 뭐. 부쳐 먹을 땅이 한 삼천평정도 됐으니 농사지어서 입이나 먹고 산거지. 쟁패에 꽤 여러 집이 살았는데, 거의가 우리 논밭이다 보니 딴 사람들은 산에 불 놔서 산전을 해먹고, 어디 밭이라도 쪼그만 하게 일궈서 씨 뿌리고 거두고 그랬지. 우리 집은 쫍쌀을 먹어도 딴사람들보다는 그런대로 잘 먹고 살았어요. 우리가 낫게 산다고 해도 딴사람들 눈이 있으니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었지. 산에 가서 칠기 캐고 두들겨서 가루를 받아서 대두박에 섞어서 먹기도 하고, 소낭구에 송기도 삐깨 먹고. 대두박이라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릴께여. 콩지름을 짜고 남은 찌꺼라지를 콩묵찌라고 하는데, 그게 대두박이거든. 요새야 사료로나 쓰지만 그때는 그것도 음식에 섞어서 먹고 그랬어. 칠기도 캐면 속에서 갈기가 나오는 게 아니고 쭐띠에서 하얀 갈구가 나왔어. 없는 사람이야 그거라도 먹어야지 어째. 산중에 있는 밭에는 서숙을 많이 갈았는데, 감재에다 서숙 밥을 해먹어도 굶지는 안했지. 입쌀을 못 먹었다 뿐이지. 농약이 없을 때니 어디 입쌀이 돼요, 안되지. 산에 가서 풀을 뜯어다가 생풀을 말려서 사월 소만 때가 되면 말린 풀을 쪼들어서 논에다 넣어. 마구간에 깔아서 만든 소똥 거름은 밭에 가니라고 논에 갈 새도 없었어. 쟁패마을이 산꼭땍에 있는 거 같지만 물은 좋았어요. 우물도 두군데나 있었어. 한곳은 암석이 있는데 그곳에서 물이 치솟깼어. 또 하나는 후에 도로 닦는다고 미께서 없어졌는데, 겨울에는 뜻뜻하고 여름에는 손이 시러웠어. 냉장고가 필요 없었지. 그렇게 농사를 거들면서 열아홉 살 정도까지 집에 있었네.”
쟁패 주막에도 선질꾼들이 많이 잤지. 그전에 밥 한상에 십오전 했네. 주막에서는 밥만 돈 받고 팔고, 잠은 따로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재워주었어. 6.25전쟁 후에는 선질꾼들이 혹간 어쩌다 다녔지. 6.25전쟁 후에는 아주먼네들이 한명씩 도부를 다녔어.·····원래 쟁패 서낭당은 기와로 지어놨었는데 6.25때 우째 불에 타버렸어요. 타가지고 기와고 모고 하나도 없어졌어. 그렇게 엉크렇게 있을 때는 제사 때면 그 옆에 소냉기에다가 종이를 꽃은 금구 줄을 쳐놓고 그랬어. 그러다가 씨씨골 산판할 때 서낭을 새로 맹글었지.
울진군과 봉화군을 잇는 십이령 길목 마을인 쟁패에서 태어나서 자란 강씨는 선질꾼들에 대한 기억도 여럿 가지고 있다.
“쟁패에도 주막이 두 군데나 있었거든. 박봉한씨가 하던 주막집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강석이라는 영감이가 하던 집은 큰방이 있어서 한 서무남명 잘 수 있었지. 선질꾼들이 바릿재를 올라와서 주막에 묵기도 하고,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떠나기도 했어. 부구 흥부장에서 미역장 같은걸 본 선질꾼들이 해가 있을 때 말래 주막거리에 도착하게 되면 거기서 안자. 한걸음이라도 더 땡개 가서 춘양장이나 내성장에 먼저 도착해야 하니까. 쟁패 주막에도 선질꾼들이 많이 잤지. 주막마다 방이 가득 찰 때가 많았으니까. 그러니 날이 아즉 밝을 때는 말래를 지나서 부지런히 쟁패 주막까지 올라오는 거지. 밥은 씨씨골 개울가에서 해먹기도 했고, 저기 빛내 가는데 샛골 거기 도랑가 그늘 좋은 곳에서 해먹기도 했지. 적게는 두어 명도 다니고, 대여섯 명씩 다니기도 했고. 매일 선질꾼을 봤어. 저녁에는 남의 집에 자야 하니까 밥을 사먹었고, 아침에는 일찍 출발해서 가다가 그랑 가에서 밥을 해먹었고. 그전에 밥 한상에 십오전 했네. 이런 사기그릇에 수북이 담아주었고, 씨래기국하고 콩가루 끓이고, 김치 주고 그랬지. 주막에서는 밥만 돈 받고 팔고, 잠은 따로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재워주었지. 6.25전쟁 후에는 선질꾼들이 혹간 어쩌다 다녔지, 없어졌어요. 다들 나이가 많아서 죽어버렸겠지, 뭐. 6.25전쟁 후에는 아주먼네들이 한명씩 도부를 다녔거든. 아주먼네들이 생선이나 그런 걸 방티에 이고 와서 팔고 쌀이나 서숙 같은걸 받아갔어. 돈도 받아갔고.”
장평에는 아주 오래된 서낭당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서낭당 옆에 서있는 엄나무는 까마득한 높이로 오랜 수령을 자랑하며 가지를 길게 뻗고 있어 신령스러운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
“삼십년 전에 쟁패 옆 씨씨골에서 산판할찍에 내 산의 나무를 비서 목상이던 장덕열씨 목재소에 가서 나무를 켰네. 울진에서 올라올 때는 제무시가 빈차로 올라오니까, 그 차로 이다를 싣고 왔지. 그 운임으로 제무시 운전사에게 내 산의 소낭기를 몇 그루 베서 주었어. 팔아서 술 한 잔씩들 하라고. 그 이다로 쟁패 서낭당을 새로 지었지. 원래 쟁패 서낭당은 기와로 지어놨었는데 6.25때 우째 불에 타버렸어요. 타 가지고 기와고 모고 하나도 없어졌어. 그렇게 엉크렇게 있을 때는 제사 때면 그 옆에 소냉기에다가 종이를 꽃은 금구 줄을 쳐놓고 그랬어. 그러다가 씨씨골 산판할 때 서낭당을 다시 맹글었지. 당을 새로 맨들때 쟁패에 다섯 집이 있었는데, 어떤 집에서도 우시 막걸리 한잔 받아주는 집이 없더라꼬. 그래도 자기들이 그 서낭에 잔을 한잔 부우면서 위하고 그러면서도. 자기들도 각각이 정월 보름이 되면 성의대로 간단하게 음석 장만하고 해서 서낭을 위하면서도 말이여. 쟁패서낭은 원래 선대서부터 우리 집이 위하던 곳이여. 십이령질을 통해서 흥부장과 봉화장을 오가던 선질꾼들도 마커 다 그 서낭에 빌고 가고 그랬었거든. 서낭당 제사를 안 지낸지가 한 이년 됐네. 해마다 정월 열나흘날 밤에 제사를 올렸지. 정월 열나흘 날에 서낭 제사를 지낼 때는 할마이도 안 데리고 가고 나 혼가 가지. 포하고 삼색 실과하고, 핀떡 조금 하고, 소주도 한병 사고 그렇게 가서 제사를 지내. 소지도 올리지. 산신령에게 먼저 소지를 올리고, 서낭 수부 올리고, 내 소지하고 가족 소지하고 그렇게 올리지. 저기 샛재 우에 있는 샛재 서낭이 남서낭이고, 쟁패에 있는 서낭이 여서낭이라. 원래 그게 한 배우래. 그러니 샛재서낭은 꼭 남자가 가서 제를 올래야 하지만 쟁패서낭은 여자가 가서 제를 올래도 되지. 그래도 해마다 내 혼자 갔어. 이년 전에 나이도 먹고 힘드니까 매년 삼월 삼짇날 오겠다고 서낭에게 빌면서 알가 났어. 여기 와서도 한참 다녔는데 한 이년 못 갔네. 딴 데 일도 바쁘고 그렇더라꼬. 서낭당 옆에 풀도 내가 치고. 예전에 쟁패 서낭당 앞으로 질 닦을 때 서낭당을 없애려고 해서 내가 못 없애게 했거든. 선대서부터 성심으로 위하던 서낭당을 내 대에서 없애서야 되는가. 지금 보면 아주 큰 엄나무가 하나 서 있는데, 그 옆에 죽은 나무가 있어요. 그게 팽구낭구라꼬 새파랗게 열매가 요런 게 달려. 그것도 한 아름 넘었지. 예전에 질 닦을 때 나무뿌리를 너무 끊어서 죽어버렸어. 엄나무 앞에 돌 축도 엄나무 때문에 돌 축이 있어야 된다고 내가 우겨서 쌓은 거여. 그 질 닦은 것도 전부 내 땅이거든. 그때는 남의 땅으로 질을 닦으면서도 지멋대로였어. 그 옆에 물 빠지게 흄관을 묻어달라고 영림소에 가서 얘기해놨는데, 정 안 묻어주면 길을 확 막아버릴 참이여. 남의 땅에 질 닦아 잘 다니면서 흄관도 안 묻어주고 있어. 질 닦으면서 옆에 생긴 산비알에서 계속 흙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내가 피해를 보고 있지.”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강순도씨 집 앞의 논둑 옆 바위에 색깔이 고운 우렁이 알이 빼곡히 붙어 있다영주나 대구 같은데 가서 군복 같은 물건을 떼다가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팔았어. 광목보따리에 덩치가 이만하게 쌓아서 걸빵을 메고 석포, 철암, 장성도 가고 그러면서 피복을 팔았지. 열차를 타고 다녔어.·····훈련소에서는 군복도 무르팍이 다 떨어진 거를 배급받아서 입다보니 저녁에 막사로 돌아가면 바느질하는 게 일이여. 음력으로 시월 달에 훈련소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추운지 말도 못했지요. 전방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입다가 다 떨어지고 실밥이 풀린게가 훈련소로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옷이라는 게 냄새가 나서 형편없고 그랬어.
열아홉 살까지 집에서 농사를 거들던 강순도씨는 2년여 동안 피복장사와 수박, 참외 장사를 하기도 했다.
“열아홉 될 때까지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그래도 주머니에 돈이라도 몇 십원 있으니 피복장사를 한다고 돌아 댕갰지. 영주나 대구 같은데 가서 군복 같은 물건을 떼다가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팔았어. 광목보따리에 덩치가 이만하게 쌓아서 걸빵을 메고 석포, 철암, 장성도 가고 그러면서 피복을 팔았지. 열차를 타고 다녔어. 대구 양키시장 가면 군복 같은 물건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떼서 파는데, 물건을 싣고 나설 때 헌병대에 안 걸려야 돼. 그때가 6.25 전쟁 전이지. 그때도 대구에 미군부대가 있었어. 군복 밤색 한 벌에 아루매기 한 삼백원, 사백원 했었지. 울진 쪽은 거의 안다녔는데, 촌에 어디 돈이 있어야 군복을 사 입을 거 아인가. 한 이년정도 쫓아다녀도 별로 돈이 남는 것도 없고, 그래서 수박이나 위 같은걸 봉화 쪽에 가서 사다가 열차에 싣고 철암, 장성 탄광 쪽으로 가서 팔았는데, 그래도 탄광에서 돈벌이를 하는 곳이라야 그런 걸 사먹었거든. 그때는 봉화 쪽이 수박, 위가 나는 곳이었고. 그게 생물이다 보니 또 금방 팔아야 되거든. 그래도 생물장사는 괜찮애. 먹고 없어지는 물건이니까 돈도 조금 벌렸지. 짚으로 만든 가마니에 수박과 위를 잔뜩 싣고 가서 장바닥에 전을 펴놓고 파는 거지. 기차로 수박과 위 가마니를 옮겨가야 했으니 열차를 모는 기관사하고도 친해야 했어. 안 깨지고 가려면 기관실 옆에 실어야 하는데, 한 열가마니 정도씩 싣고 옮겨가요. 가마니 운임은 또 따로 집어줘야지. 철암이나 장성에 도착하면 기관사가 역전에 세우지 않고 역전 개까이 갔을 때 잠깐 열차를 세워주고는 수박 가마니 내리는데도 함께 거들어주고는 했지. 수박과 위 가마니 옮기는 운임은 자기 혼자 다 딲아 먹는 거니까 그랬지. 철암 장성서 수박과 위를 다 팔고 돌아올 때는 돌멩이 같은 탄이 있어. 개탄이라고, 검은 게 반들반들하고 꼭 소금덩어리 같지. 개탄을 사기전에 먼저 영주 같은데서 개탄을 살 곳을 맞차놔야 돼. 영주에서 철암 장성으로 갈 때는 수박이나 위를 사가서 팔고, 돌아올 때는 다시 개탄을 가마니 가득 사가지고 와서 영주에 와서 팔아먹고 그랬지. 그래야 돈이 되니까. 탄광에 가면 석탄을 캐는 곳 주변에 좋은 개탄이 나온다꼬. 그런데는 개탄을 주워서 파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거든. 그 사람들은 개탄 3가마니만 줏으면 하루 품값을 벌었지. 가마니에 개탄 10관씩을 넣어가지고 영주에 가서 잘 팔아먹었어.”
열아홉 살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영주, 봉화와 철암, 장성을 오가면서 피복장사와 수박, 참외장사를 하던 강씨는 22살에 군에 입대한다.
“이곳저곳을 쏘댕기면서 장사를 하다가 보이 시물두살에 군대에 가라고 영장이 나왔더라꼬. 그때는 제주도로 훈련을 받으러 갔어요. 그때는 다들 그리 갔거든. 부산으로 간 게 아니고 포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갔지. 한배에 사천명이 타고 들어갔어. 전국에서 군에 징집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도 훈련소로 몰려들었고, 16주 동안 훈련을 받았지. 배가 고파서 말도 못하지. 진저리 뻐쩍 말린 거로 소죽 가매 같은 큰솥에다 장을 요만큼 넣고 물은 댓동이 부어서 소금도 넣고 해서 주는데 못 먹어. 먹으면 고대 설사도 하고 난리였지. 밥도 보리밥을 요만큼 주는데, 요새 아덜도 그보다는 더 먹을 거여. 또 자다가 보면 기간병들이 훈련병들 숟가락을 훔쳐다 가주가고 그랬거든. 숟가락을 도둑질해가서 다른 훈련병들에게 팔아먹는 거지. 숟가락이 없어 놓으이 밥 먹을 때면 이 사람이 퍼먹다가 똑같은 숟가락으로 저 사람이 퍼먹다가 그랬지. 요즘 아덜 같으면 더럽다고 절대 그렇게 안 먹을 거여. 그렇게 훈련소생활을 했지. 군복도 무르팍이 다 떨어진 거를 배급받아서 입다보니 저녁에 막사로 돌아가면 바느질하는 게 일이여. 음력으로 시월 달에 훈련소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추운지 말도 못했지. 전방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입다가 다 떨어지고 실밥이 풀린 게가 훈련소로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옷이라는 게 냄새가 나서 형편없고 그랬어. 그때는 제주도에 눈도 참 많이 왔어. 좀 그칠만하면 다시 눈이 오고, 그래도 눈이 와서 물이 지지한데도 철조망 밑을 엎어져서 빠져 다니고 그렇게 훈련을 받았어요. 요새 아덜 같으면 다들 자살하고 말거여. 돌담을 쌓아올려서 만든 훈련소 막사 안에서 잘 때도 깔때꼴을 이러 저리 드문드문 엮어서 멍석을 만들어서 자고 그랬거든. 자는데 모포라고 서너 사람에 하나씩 주는데 자다가 추워서 서로 땡기다 보면 제대로 잠도 못자고 그랬어. 신발도 농구화를 주었는데, 전방에서 신다가 한쪽이 떨어지면 다시 빨아서 훈련소로 주고 그랬는데, 요새 거지들이 그때 우리들보다 차라리 낫지. 요새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천지를 모르는 거여. 다들 그때 그렇게 힘들게 훈련받고 6.25전쟁에 참여해서 죽고 고생했는데, 요새 보면 이북 아새끼들한테 매달리고, 정신없이 돌대가리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훈련을 받고는 서부 판문점 밑에 장단읍이라는 곳으로 갔니더. 이북 땅이지. 장단읍에 있던 미군 25사단으로 갔어. 거기서 한 일년 있다가 한국군 1사단으로 다시 왔지. 군에 가서 한 오륙개월 있다가 보이 6.25전쟁이 터지더라꼬.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우리 부대는 아마 이북으로 붙들려 올라갔을 거여. 판문점으로 계속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 안에 갇혀 있었거든. 그 속에 갇혀서 싸우다가 죽고 다치고, 인천상륙하면서 국군과 미군이 이북으로 밀고 올라올 때 우리는 좀 더 후방으로 내려올 수 있었지. 아니면 아매 이북귀신 됐겠지 뭐. 지금이야 그 시절을 모르고 미군들이 나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군들 아니었으면 남한도 이북 땅이 됐을 거여. 자기 나라도 아니고 남의 나라 땅에서 총에 맞아서 막 쓰러져 송장이 되는데, 그걸 봤더라면 미군이 나쁘다는 그런 미친 소리는 안할 것이여. 미군들이야 백제 남의 나라에서 수도 없이 총에 맞아 죽어갔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의정부 쪽으로 내려와서 한 일년 정도 있었나. 거기 있다가 다시 수원 비행장 옆으로 부대가 옮겨왔지. 거기서 한 일년 더 있다가 제대를 했어. 전방에 있다가 후방으로 오니까 거기도 돈이 있어야 좋지, 내사 돈이 없으니 재미도 없었어. 봉급 몇 푼 받았으니 쓸 돈이 어디 있어. 전쟁 때는 떼가리가 한꺼번에 나왔지. 엠완을 들고 싸왔는데, 내총에 아매 인민군도 많이 맞아 죽었을 거여. 정신없이 싸우는데 내총에 누가 몇 명이나 맞아 죽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에레무지라고 부르던 기관단총도 있었는데, 고지 위에 설치해놓고 있다가 저 아래쪽으로 인민군들이 새카맣게 몰려서 올라오면 기관단총을 갈겼지. 그러면 그게 걸리는 놈은 다 죽었어. 전쟁 때는 눈 똑바로 뜨고 있어야 살지, 안 그러면 그냥 자빠지고 마는 거여. 67개월 동안 군대생활을 하고 제대했지. 요새 군대생활 배도 더했어. 이등상사로 제대했거든. 밑에 꼬부랭이 세나 있고, 우에가 짝때기 두낱이여. 시낱으는 일등상사고, 그 위에 별 하나 붙으면 특무상사여. 그때는 진급도 많이 안 시켰어. 진급을 시키면 말을 잘 안 듣는다꼬.”
쟁패에서 새벽 일찍 처갓집으로 가마를 타고 가서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에 새색시를 가마에 태우고 나는 걸어서 다시 쟁패로 되돌아왔지. 묵신행이 아이고 도신행을 한 거지.····6.25전쟁 후다 보니 부구에도 처자들이 매끈하고 좋은 게 많이 있었어. 저기 이북에서 부모 잃어뻐리고 남쪽으로 내려온 처자들이 많았거든. 남쪽 처자들맨치 머리도 짤막한 게 아니고 찌드마하게 땋아서 지들끼리 모여서 돌아 댕갰지.
67개월 동안 6.25전쟁을 겪으면서 군 생활을 마친 강씨는 고향 쟁패로 다시 돌아온다.
“그전에는 여개가 강원도였을 때, 춘천 보충대 병사부 거쳐 가지고 제대증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왔지. 그때도 보충대 가니까 국수 값이라도 집어주면서 와이로 조금 쓴 놈은 먼저 제대증을 주고, 와이로를 안 쓰니까 제대증도 빨리 안주고 그러더라꼬. 그래서 군대에서 그렇게 죽을 고생을 했는데, 국수 한 그릇 값이라도 그냥 주는 사람이 없다, 너 같은 놈들은 이따위로 군 생활하면 전방에서는 총살이여,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제대증을 찾았지.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고 난 다음에 시물일곱살에 제대를 하고 쟁패로 돌아왔네.”
22살에 군에 입대해서 5년이 넘는 시간을 전쟁을 겪으면서 군에서 보낸 강씨는 27살에 고향땅 두천리 쟁패로 돌아와서 결혼을 하게 된다.
중매는 강씨가 수양어머니로 정해두었던 김씨 부인이 했는데, 김씨 부인은 제6대 울진군수를 지냈던 이태영 군수의 부인이다.
이태영 군수는 북면 출신으로, 1950년 9월 30일에 울진군수로 부임하여 1951년 5월 30일까지 8개월 동안 재직했다.
“제대하고 집에 와서 조금 있다가 결혼하게 됐거든. 음력 십일월 십일 날에 결혼했는데, 내가 전부 날받이했으니 잘 기억하지. 할마이는 지금 부구중학교 있는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랐어요. 부구 3리 중리라는 동네지. 그때 내 수양어마이가 중매를 한택이지. 그전에 장사할 때 대접도 좀 하고 그랬는데, 그 할마이가 성질이 참 좋았어. 수양어마이가 처갓집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 지금 이름은 잊어뻐랬고 김씨 할마이였어. 김씨 수양할마이 남편이 울진군수도 하다가 강원도 홍천인가 거기서도 군수를 하다가 퇴직했지. 이 군수도 북면 사람이었어요. 붓글씨도 잘 써서 울진군에서도 일등하고 글도 아주 좋았거든. 수양어마이는 군수 부인인데도 그런 티가 나지 않고 수더분하게 촌사람같이 생갰어. 요새야 군수 부인이면 옆에서 떠받들고 얼마나 귀한 체를 하요.”
강순도씨는 양쪽 집안에서 혼담이 오간 후에 부구까지 직접 가서 새색시될 사람을 먼저 구경했다고 말한다.
“양 집안에서 말을 띤 후에 어느 날 부구까지 찾아갔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각시될 사람이 빙신인지 아닌지는 알아야 했으이까. 가기 전에 연락을 해서 어디어디로 나온나 해놓고요. 여름이었는데 그때는 조밭을 많이 매고 그랬는데, 땡볕아래서 조밭을 매고 나면 저녁에 부구천으로 목욕을 하러 많이 나왔거든. 그때 색시될 사람 혼자 나오면은 싱거워서 안 되니까 친구들하고 함께 나온나, 얼굴 좀 보자 그랬어. 그런 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두어 번 얼굴을 봤을 게야. 만나보고 나서 내가 마음이 있다고 부모들에게 말하고 결혼하게 됐지. 그리고 몇 달 뒤에 날을 잡았어요. 부구에서 덕구로 올라가는데 수리조합 있잖니껴. 고게 시치골 있는 데로 가마를 타고 처갓집으로 넘어갔지. 시치골 입구에서 올라오는데 아매도 한 백오십 미터는 넘을 거여. 그 고개를 넘으면 상당 마을회관 앞에 슬라브집 하나 있는 곳으로 나와. 거기서 한 일킬로 넘어가서 재를 넘어야지. 재라도 아주 높은 재야. 그때 가매 종군이 시패가 갔는데, 니명씩 한패니까 열두명이 가마를 번갈아 매면서 따라간 거지. 쟁패에서 새벽에 일찍 처갓집으로 가마를 타고 가서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에 새색시를 가마에 태워서 데리고 나는 걸어서 다시 쟁패로 되돌아왔네. 묵신행이 아이고 도신행을 한 거지. 그때가 동짓달이었는데, 색시를 데리고 쟁패로 돌아오니까 소 물 하는데 해가 아주 요만큼 남았었어. 그때 상각으로는 부구에 동서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따라갔지. 그때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계셨으니 동서가 상각으로 따라간 거지. 우리 할마이 각시 대반은 쟁패에서 주막집을 하던 며느리 여씨 할마이가 맡았었네. 대반이는 새각시 옆에 앉아서 머리가 허그러지고 그러면 손에 뭘 묻혀서 다듬어주고 그런 사람을 말하는 거여. 쟁패 집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사람들 불러서 국시 멕이고 그랬지. 그때 6.25전쟁 후다 보니 부구에도 처자들이 미끈하고 좋은 게 많이 있었어. 저기 이북에서 부모 잃어뻐리고 남쪽으로 내려온 처자들이 많았거든. 남쪽 처자들같이 머리도 짤막한 게 아니고 찌드마하게 땋아서 지들끼리 모여서 돌아 댕갰지. 이북 여자가 낮다는 얘기도 있지만 다들 매끈하게 돌아 댕겠지. 올해 할마이가 칠십 서이니까 내가 팔년 맏이래요. 내가 시물일곱에 결혼했으니 그때 할마이는 열아홉 살이었네. 할마이는 처자때 치매저고리를 입고 머리도 뒤로 기다랗게 땋아 있었지. 할마이는 전주 이간데, 이름이 복순이여. 할마이가 열 서넛 먹었을 때는 전주 이씨들 산소에 시제를 지낼라치면 떡도 얻어먹으러 다니고 그랬다고 하대. 신접살림은 집에서 했지. 그때 형님은 이미 장개를 가서 울산으로 떠나고 없었거든. 할마이가 집에서 한 일년 시집살이를 했네.”
굴속에 들어가서 하이바에 달려있는 바뜨레를 옆구리에 차고 전기로 충전해서 테푸 불빛으로 석탄을 캤지. 카바이트는 간드레라고 했는데, 굴속에는 간드레 불꽃에 폭발할 수도 있는 까스가 항상 차 있었으니 위험하다꼬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통낭구를 깎고 구영을 뚫어가지고 흐리를 부쳐서 지둥도 세우고 그렇게 집을 지었네. 방 두개, 정지 하나 달고, 마구는 정지 뒤에 달고 그랬지.
결혼해서 일년여 두천 쟁패 본가에서 살던 강씨는 일년이 지날 무렵에 철암 장성으로 이사를 가서 탄광에서 일하게 된다.
“장개 가서 한 일년 있다가 탄광 생활하러 갔지. 아직 아덜은 없을 때였거든. 처음에는 탄광 큰 구덩이 옆에 쪼맨한 구덩이가 있는데, 그 하청장에서 도달 탄광 일을 배왔지. 일을 배우고 나서는 도계에 있던 대한석탄공사에서 일을 시작했어. 정부에서 운영하던 대한석탄공사였지. 철암, 장성이나 도계나 고개 하나씩 넘으면 있는 개차운 곳이거든. 그 탄광 이름이 도계항이었어. 석탄 공사도 두개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도계항 위에 있던 구덩이는 흥전항이라고 불렀고. 탄광에서 굴속에 들어가서 하이바에 달려있는 바뜨레를 옆구리에 차고 전기로 충전해서 테푸 불빛으로 석탄을 캤지. 카바이트는 간드레라고 했는데, 굴속에는 간드레 불꽃에 폭발할 수도 있는 까스가 항상 차 있었으니 위험하다꼬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 나쁜 공기가 가득 차 있어서 항상 환기를 시키는 후항을 돌렸는데, 전기로 충전하는 작은 다마가 딸린 테푸라고 그걸 사용했어. 굴속에 들어갈 때는 도끼 지고, 톱 지고, 그렇게 들어갔지. 도끼는 굴을 계속 뚫어서 탄을 캐고 나면 동발이 나무를 받쳐야 했으니 필요했던 거지. 노상 나무를 가지고 동발이를 했는데, 그건 목수가 하는 일이여. 그럴 때면 우리는 데모도를 했지. 능숙한 동발이 목수에게는 데모도가 두명 딸렸고, 좀 서툰 목수한테는 데모도도 한명 붙으면 됐고. 노미로 구멍을 뚫어서 도화선을 깔고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서 굴을 뚫어야 했는데, 발파하는 구멍을 뚫는 일도 전부 다 석탄 캐던 우리가 했네. 그걸 합바한다고 하는데, 노미가 찐 게 있어요. 한 열두자씩 됐지. 탄을 캐려면 열두자 노미가 다 들어가야 하는데, 착암기로 그 구멍을 뚫었어. 그때 탄 한 구루마에 삼백원씩 했어, 일톤차 한 구루마면 쌀 열가마니 정도 들어갔어. 그걸 전차를 이용해서 레일로 끌고 다녔지. 탄광에서 한 오년정도 일했지. 아니면 좀 더 있었을 낀데, 내가 탄광에서 좀 위험한 장난도 많이 했고. 어느 날 아침에 밥을 싸서 탄광 굴속에 들어가려는데, 막 싫은 생각이 들더라꼬. 고구재 드가는데 딱 싫더라고. 그전에는 탄광 일이 싫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마 그 구영 속에 들어가기가 싫더라꼬. 그래서 사무실로 항장을 찾아가서 오늘부터 광산을 치우겠다고 했지. 그런데 항장과 사무실 사람들이 집에서 한달 놀다가 다시 일하라고 하더라꼬. 한달 놀아도 월급을 준다면서. 그래도 집에 왔다가 한 일주일 뒤에 갔는데 아직까지 퇴직 처리가 안 돼 있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일하기 싫은데 어쩌겠는가. 퇴직금으로 여비를 해서 집으로 돌아왔지. 탄광에서 일할 때 한달에 십만원정도씩 받았으니 아주 많이 받은 거지. 그때 딸 둘이 났는데, 맏이가 세 살 먹었고, 둘째가 첫돌 지냈고 그랬어. 삼척 도계로 열차 타고 내려와서, 도경 와가지고 다시 삼척읍꺼지 버스타고 와서, 삼척에서 울진까지 버스를 타고 와버렸지. 작은 아는 업고, 큰 아는 걸래가 오기도 하고 옆구리에 찌기도 하고 그렇게 왔지. 울진 와서는 부구학교 있는 동네에 수양 어마이도 있고, 처가도 있고 하니, 저 할마이가 자꾸 부구3리 중리에서 살자고 쪼리더라꼬. 아덜이 커면 공부시키기에도 부구가 좋다면서. 그래도 나는 두천 쟁패, 내가 태어난 곳으로 들어오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고향을 떠난 지 오년 만에 다시 쟁패로 들어가게 된 거지. 도계항에서 석탄을 캘 때는 사택에 산 게 아니라 내가 돈 주고 산 집이 쪼맨한게 있었어. 그때 내 동생이 그 광산 개까운 곳에서 셋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도계를 떠나오면서 내가 샀던 값에 그 집을 넘기고 왔지.”
결혼하고 일년 만에 고향인 쟁패를 떠나 삼척 도계로 가서 탄광에서 5년 동안 일하던 강씨는 다시 어머니의 품인 고향땅으로 들어와서 흙을 일구게 된다.
“쟁패로 돌아와서는 본집이 옆에 있는데, 저 골짜기 안쪽에 들어갔어요. 우리 어마이가 원체 성격도 급하고 무서워서 그곳으로 들어간 거지. 어마이는 달부 남자래. 잘못하면 나이 들어도 뚜들겨 맞았을 거여. 이런 통낭구를 깎고 구영을 뚫어가지고 흐리를 부쳐서 지둥도 세우고 그렇게 집을 지었네. 방 두개, 정지 하나 달고, 마구는 정지 뒤에 달고 그랬지. 나무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고, 찌다란 낭구는 두칸을 붙여서 걸챘고. 나무를 붙일 때는 도끼로 파서 그렇게 지어야 나무가 안 군부거든. 낭기로 뼈대를 만들고는 짚을 쪼들어서 흙과 섞어서 나무 틈 사이를 메우고 그랬어요. 짚 섞인 흐리 뭉티이 갖고 그렇게 바르지. 그런 집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그래. 낭구 틈새는 다시 보드라운 흙을 쳐가지고 고 상간에 물매질을 해서 곱게 맨들지. 미장 하듯이 요래 밀면 곱게 되지. 장판은 대나무로 맨들었어. 대나무 자리는 기술자가 짰는데, 그때 덕구에 살던 주병설이라는 영감을 우리 집에서 일주일동안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대나무 자리를 짰네. 그 영감은 자식도 없이 혼자 살면서 온 데로 대나무 자리를 짜러 돌아 댕갰어. 대나무는 쟁패에 시누대가 있었어. 대를 자르고 반 따개서 속에 청을 다 일구고 다듬어서, 또 두들기고 그렇게 짜지. 흙내도 나고 그런 집이 건강에는 참 좋은 거지. 요새 산골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도 나무를 구해서 그런 통나무집을 지으려고 하니,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 옛날에 정말 없이 살 때 지었던 그런 집을 좋아하이 말이여. 지둥 밑에는 주칫돌 같은 그런 돌미를 넣어서 나무를 세워야 썩지 않지. 문을 맹글 때는 이렇게 재서 낭구를 끊어 뻐리고 맨들어. 그때는 낭구를 두 개 놓을 만치 문지방을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구들도 놓는데 좀 깊으단 말이여.”
쟁패로 돌아온 강씨는 산전을 해서 밭도 개간하고 소도 먹이면서 그렇게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본집에서 골짜기 안쪽에 한 칠백평 될라나, 묵은 밭이 있었어. 집은 가을게 만들고 동삼에 불을 놨지요. 묵은 밭 가운데 이만큼만한 소낭구도 있고 그랬지. 불을 쳐댔지. 그리고 봄에 그 밭에다 감재를 심었어. 불을 쳐대고 나도 솔이 이렇게 큰 게 군데군데 있으니 소를 가지고 밭을 못 갈아요. 그러니 일일이 괭이를 가지고 밭골을 만들고 감자를 심은 거지. 그때 비료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에 초산 암모니아라고 미국서 온 좁쌀 알갱이 같은 비료가 있었지. 그 비료를 치면 효과는 좋아. 당장 내가 감자 씨가 없으이까 남의 감자를 두가마니나 샀네. 고놈을 눈을 따가지고 심었지. 그해 가을게 되니까 감자가 얼마나 굵은지 이렇게 굵은 놈이요, 찌래기가 이만큼 해. 참 잘됐어요. 그때 칠백평 되는 밭에서 감자를 한 삼십 가마이 넘게 캤을 거여. 지금도 그 집터에 가면 뽕나무도 심겠고, 축도 쌓아놨으니 축간도 있을게여. 그 집에서 소도 두어바리 미갰꼬. 그래도 그 집에서 육남매가 다 났어. 딸네 둘이는 저 도계에서 낳아가지고 왔으니, 사남매가 그 집에서 태어난 거지. 쟁패 그 집에서 오륙년 정도 살았을 거여. 밭에다 서숙 갈고, 콩도 하고, 감자도 많이 심어먹고 그랬지. 한해에 감자는 삼십 가마이도 넘게 캤어. 죽변 봉깨, 후정 그쪽에서 우리 감자를 많이 사러왔어. 씨 한다꼬. 그때는 감자를 짚 가마니 하나에 쌀 두말씩 주고 바까갔지. 어떤 때는 돈도 가져와서 사가지고 갔고. 그때 쌀 한되에 오십전 했네.”
27살에 8년 연하의 이복순씨를 아내로 맞은 강순도씨는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 둘에 딸 넷을 두었네. 위로부터 쭉 치자면 연옥(여. 49세. 대구시), 영옥(여. 47세. 대구시), 미자(여. 43세. 대구시), 정열(남. 40세. 울진읍), 상열(남. 35세. 울진읍), 경옥(여. 33세. 경기도 평택)이지. 원체 없이 살다보이 학교도 제대로 못시캤어. 아들은 둘 다 고등학교를 시켰고, 제일 밑에 딸은 그래도 고등학교를 시켰는데, 우에 따라들은 국민학교를 겨우 시켰지. 울진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니 울진읍내에서 마커 다 자취를 했지. 아들들은 지 누들이 자취집으로 가서 많이 거들어주었고. 방학 때나 주말이면 한번씩 집으로 올라왔고.”
전기만 들어왔더라도 말래로 이사를 내려오지 않았을 거여. 그때 한 다섯 집만 있었어도 전기가 들어왔을 낀데, 우리 집 혼자 있으니 전기가 들어오기 힘들었지. 물 좋지, 공기 좋지, 산에 가서 약초 캐기도 거기가 이 밑에 보다 낫지.·····씨씨골이라는 곳에서 산판을 많이 했는데 그곳에 봉양이 많았어. 봉양은 소나무가 죽고 난 뒤에 발부리가 썩어서 오륙년 지나야 생기거든. 그런데 요새는 기계톱으로 나무를 베니까 봉양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꼬. 기계톱으로 소나무를 비낼때 지름끼가 나무 발부리 쪽으로 스며드는 모양이여.
삼척 도계탄광을 그만두고 고향 쟁패로 들어가서 살던 강씨는 5~6년 후에 쟁패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마을인 두천1리 바깥말래로 집을 옮기게 된다.
“아덜 학교 때문에 1구 회관 옆에, 말래로 내려왔지. 그때 이미 쟁패에 살던 사람들은 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없었어. 우리 집만 한 삼년 더 있었지. 무서운 것도 없어. 시장 갔다가 밤에 나 혼자 쟁패까지 올라가고는 했는데 모. 전기만 들어왔더라도 말래로 이사를 내려오지 않았을 거여. 그때 한 다섯 집만 있었어도 전기가 들어왔을 낀데, 우리 집 혼자 있으니 전기가 들어오기 힘들었지. 물 좋지, 공기 좋지, 산에 가서 약초 캐기도 거기가 이 밑에 보다 낮지. 지금도 쟁패 땅을 팔라고 하는 사람들이 혹간 있어요. 별장이라도 지으려고 하는 모양이지. 바깥말래로 내려와서 한 십년 있었어. 말래에서 쟁패를 왔다 갔다 하면서 농사를 지었지. 도계에서 처음 들어와서 감자농사를 짓던 칠백평 밭은 내삐리고, 서낭당 앞에 있던 논 엿마지기도 부치고 다른 밭도 부치고 그랬지요. 지금이나 그때나 여자들 없이 남자 혼자서는 밭농사 짓기도 힘들어. 저 할마이가 고생 많이 했니더. 전부 다 손으로 밭도 갈고 그럴 때였으니까. 그러다가 말래로 내려와서 경운기를 샀어. 이 근방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샀는데, 한 몇 십 년 됐지. 울진에 대동경운기 대리점이 생기자 말자 샀으이까. 경운기를 사고부터는 그나마 농사짓기가 훨씬 나아졌어.”
장평에 살면서 강순도씨는 한동안 복령장사를 하기도 했다.
“쟁패 있으면서 봉양장사를 한동안 했지. 그때 바깥말래에 독가촌을 하나 사놓고 거기서 봉양장사를 했어. 그때는 이런 바가지만한 봉양도 있었어. 큰 거는 한 덩어리가 열근짜리도 캐고 했는데, 나도 그 사람들하고 언제 심심하다고 함께 산으로 가서 열근짜리 봉양을 캐기도 했지. 크기가 비개만 하대. 날마다 봉양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게 큰 거는 캐기 힘들다고 했지. 쟁패 옆에 씨씨골이라는 곳에서 예전에 산판을 많이 했는데 그곳에 봉양이 많았어. 봉양은 소나무가 죽고 난 뒤에 발부리가 썩어서 오륙년 지나야 생기거든. 그런데 요새는 기계톱으로 나무를 베니까 봉양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꼬. 기계톱으로 소나무를 비낼때 지름끼가 나무 발부리 쪽으로 스며드는 모양이여. 그러면 봉양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 봉양장사를 한 일년 했지. 봉양을 캔 사람들이 봉양을 가지고 오면 한근에 팔십원에 사서 십원도 붙이고, 이십원 붙여서 백원도 받고 했어. 봉양이 많이 모이면 하꼬가다 차를 빌려서 울진 장까지 나가서 팔지. 하꼬가다 차는 그때 양정인가, 대나린가 그게 사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거든. 산골 마을마다 봉양장사는 있었는데, 내가 제일 봉양을 많이 가지고 갔지. 어떤 때는 하루장에 천근 넘게 싣고 가기도 했어. 그럴 때면 하꼬가다 차에 두 번 정도 실어야 돼. 내가 날마다 그러고 다녔으니 할마이가 쟁패에서 아덜 데리고 살 때가 많았지.”산판을 하면 톱쟁이하고, 산에 나무 꾸불리는 사람하고, 목도하는 사람들하고 한 삼십명 정도 붙거든. 선질꾼들 비석 있는데서 바릿재를 올라서 제무시 차가 산판에서 비낸 나무를 날랐지.·····이 동네 저 동네에서 소를 사서 쟁패 집에 와서 장날을 기다려서 새벽 네시면 소를 끌고 울진 우시장으로 나갔어. 그때는 보통 쇠 한마리에 사만원, 오만원 했는데, 아주 큰 쇠라고 해봐야 6만오천원 했네. 산지는 만오천원, 이만원 했지.
30년 전 당시에 장평마을 옆 씨씨골에는 산판이 크게 벌어졌다. 산판을 할 때 강씨 부부는 산판 인부들 현장 식당인 함바집을 했다. 함바는 일본어 한바(はんば)가 변형된 말로 노무자들의 숙소를 일컫는다.
“씨씨골 입구에서 십리 정도 더 들어가는 곳에 산판을 크게 했어. 한 삼십년 됐지. 그때 울진에서 목재소를 하던 장덕열씨가 산판을 했니더. 장평 뒷산하고, 씨씨골하고 한 이년정도 산판을 했어. 산판을 하면 톱쟁이하고, 산에 나무 꾸불리는 사람하고, 목도하는 사람들하고 한 삼십명 정도 붙거든. 지금 선질꾼들 비석 있는데서 바릿재를 올라서 제무시 차가 산판에서 베어낸 나무를 날랐지. 지금 말래에서 쟁패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길은 그때 없었어. 그때 아덜이 학교 다녔는데 제무시를 보면 환장했어. 막 쫓아다니고, 우리는 위험하니까 못 쫓아다니라고 그러고. 제무시는 나무를 이천사이씩 막 때려 싣고 다녔어. 제무시 운전사도 일류운전사라야 다녔지. 이천사이씩 나무를 때려 실으면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차가 일렁일렁했지. 그때 우리 집에서 산판 가까운 곳에 올라가서 밥을 해줬거든. 인부들 밥 한상에 육백원 했네. 하루에 천팔백원. 처음에는 질을 못 닦아서 내가 지게에다 밥을 지고 그 골짜기 안쪽까지 밥을 날랐지. 그러다가 한 달 뒤에 산판 옆에 한바집을 따로 지어서 밥을 해줬지. 아덜이 초등학교 다니고 있었고, 끄트매기 두명은 할마이가 그 산판까지 데리고 다니고 그랬지. 할마이가 한바집에 가서 아칙해주고, 점심해주고, 집에 내려와서 간장 같은 거 가지고 다시 가서 저녁 해주고 집으로 내려오고 그랬지. 어떤 때는 점심때 내가 간장을 가지고 올라가기도 하고. 그때 할마이가 참 고생 많이 했는데, 그때 골탕을 먹어가지고 할마이가 신경통이 와서 다리가 아프다고 그래. 그때는 그 골짜기 산비알로 길을 닦았는데, 그랑 길로 돌멩이도 깨서 작은 쏘 같은 거 메꾸고, 돌멩이를 났으니 밑으로 물은 잘 빠지지. 그때 소낭구가 참 굵고 좋았네. 속에 내황이 들어서 빨갛지. 그때 그 낭구가 안동민속촌으로 많이 갔어. 참 숱한 고생 했네.”
강씨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는 두천1리 바깥말래에서 한동안 기계 방앗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바깥말래에서 방앗간을 했지. 원래는 심동섭이라고 다른 사람이 한 삼년 방앗간을 했는데, 원동기 기술도 서툴렀고 밑천을 남의 돈을 땡겨서 방앗간을 맹글었는데 뒤에 차압을 시켰어. 그때 돈으로 이백만원이나 됐어. 그래서 내가 어쩌다가 맡게 됐지. 내가 그전에 발동기를 딴 데 가서 해보기도 했고, 그런 기술이 조금 있었어. 발동기를 시동 걸때 스탓찡을 돌려서 피대를 걸고 그랬거든. 이동식 탕탕 방아는 쪼끄만 한 거 오마력반짜리. 쟁패에 있으면서 두천2리도 가고, 보부천 가는데도 가고, 상당까지 다니면서도 찧고. 원동기 자체 밋숑을 바퀴 따로 띠 가지고 두짐, 쌀 나가는 나무로 짠거 한짐, 다섯명은 있어야 옮길 수 있지. 네명이서 목도로 옮겨 가기도 하고. 방아를 찧는 마을에서 지게를 가지고 그 탕탕 방아를 지러 와. 그러면 방아를 옮겨준 집은 삯을 조금 빼 줘야 돼. 힘들게 방아를 메고 가니까. 짚 가마니로 한가마니를 찧으면 쌀 너말이 나오는데, 두가마니를 찧으면 삯으로 서되를 받았지. 서숙같은거는 그 집에서 술이라도 한잔 주면 한가마니 정도 그냥 찧어주기도 하고. 한마을에 가면 열흘정도씩 머물렀네. 이집 저집 다 찧어야 하니까, 가을게는 한달 정도 집을 떠나 있는 거여. 방앗간을 한 오년정도 했지. 보부천도 그전에는 사람이 살았어. 에밀란산성 밑이가 보부천이지. 그 밑에 논도 열 마지기 있었어요. 산성 밑에 하고 여덟집 정도 살았어. 장씨, 홍씨, 전씨, 사씨 등이 살았지. 에밀란 산성에는 그전에 김씨만 살았다고 해. 뽈고롬한 불개미가 김씨가 아닌 딴 성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면 자꾸 쏴서 못살았다고 하더라꼬. 범보다도 그 불개미가 더 무섭다고 했거든.”
총각 시절의 피복장사를 시작으로, 삼척 도계항에서의 광산 인부, 복령장사, 방앗간, 산판 함바집을 거친 강순도씨는 한때 소장사도 했었다.
“살다가 소장사도 해봤네. 촌에 마을마다 다니면서 소를 사서 울진 우시장에 내다 팔았지. 울진 관할 안에서는 다 다녔어. 삼척 원덕면 그리로도 댕기고. 죽변, 북면 일대와 서면까지도 댕갰어. 걸어서 다녔지. 큰 쇠를 몰고 앞서가면 산지는 뒤에 따라오고 그랬지. 한번은 삼척 가서 소를 여섯 바린지, 일곱 바린지 샀는데, 그 동네에서 열대여섯 살 먹은 아를 품을 주고 하나 샀어. 그 아를 데리고 중간에 하룻밤 자고 울진 우시장까지 와서 소를 팔았네. 그때 촌에 아덜이란 게 신발도 다 떨어지고 옷도 다 헤지고 그랬지. 그게 불쌍해서 품값은 따로 주고, 옷도 우와끼 하나 사서 입히고, 검둥고무신도 하나 사서 그렇게 신겨 보냈지. 요새 시장 뒤로 가면 우체국 앞에 주차장 만들어 놓은 곳이 예전에 우시장이여. 그 옆이 늪이고, 음식점도 있었고. 울진장날만 우시장이 섰지. 영주 사람들도 소 사러 오고, 영해, 영덕, 경주에서도 소장수들이 올라와서 소를 사가고 그랬지. 한 장도막에 팔리는 소가 한 사백바리씩 됐어요. 울진 우시장이 그때는 참 컸지.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소를 사서 쟁패 집에 와서 장날을 기다려서 새벽 네시면 소를 끌고 울진 우시장으로 나갔어. 어떤 때는 소를 사서 그 집에 두었다가, 장날에 일찍 여물을 많이 먹여달라고 부탁해서 새벽에 가서 몰고 갔고요. 그때는 보통 쇠 한마리에 사만원, 오만원 했는데, 아주 큰 쇠라고 해봐야 육만오천원 했네. 산지는 만오천원, 이만원 했지. 소장사도 한 사오년 했지. 내 나이 오십 밑일 때. 소장사를 그만 두고는 감자장사도 잠깐 했었어요. 감자를 백 몇 가마이 사서 제무시에다 이빠이 싣고 영덕 감자 공장으로 팔러 갔었지.”
장모님 묘도 쟁패 내 산에 잘 썼지. 따로 고새집도 있고, 행상은 있었지만 쟁패까지 옮겨 다니기 안됐다고 그냥 쟁패에서 낭구를 베서 직접 맨들었어. 고새 집에서 행상을 가지고 오면 사용하고 난 뒤에 도로 고새 집에 가져다 넣어야 했으니 귀찮았지. 장모님이 돌아갔을 때 행상을 사용하고는 깨끄치 불에 태워 버랬어.
강순도씨는 쟁패에서 두천1리 바깥말래로 내려왔다가 10년 뒤에 다시 두천2리 안말래로 들어가서 10년여 살다가 하당리로 이사를 내려온다.
“아덜 학교 때문에 두천1리로 내려왔는데, 계속 남의 집에 살았지.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니까 다시 두천2리로 갔다가, 다시 하당으로 내려왔지. 하당으로 내려올 때는 진짜 맨주먹 쥐고 내려왔어. 집 내삐리고, 땅 내삐리고 그래 왔거든. 삼척 도계에서부터 내가 이사만 한 열번 넘어 다녔을 거여. 살다가 시원찮으면 들내빼뻐리고. 그때는 겁도 없었지. 어데 가서도 밥은 먹고 살 자신이 있었으니까.”
강순도씨는 쟁패에 살 때 3~4년 정도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었다고 말한다.
강순도씨 집 담장에 능소화가 그리움으로 주황색 꽃을 피웠다
“우리 할마이가 외동딸이네. 처갓집 영감 할마이가 하나빼끼 못 낳았어. 아들도 없는 집안에서 우리 할마이가 혼자 났어. 내중에는 장인어른이 돌아가고 장모님이 나이도 많고 하니 우리 집으로 올라왔거든. 한 삼사년 모시고 살았는데 상새가 났어. 환갑 지내고 육십 서인가 그때 돌아갔어요. 장인어른은 장모님보다 십여년 일찍 돌아갔지.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행상을 맸지. 당계가 있었던 건 아닌데 초상이 나니까 동네사람들이 모두 힘을 보탰지. 우리 어른들이는 당계라고 있었는데,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없어도 이웃에 궂은 일이 생기면 서로 힘을 보태고 그랬어.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인심이 좋았지. 두천1리 밑엣 동네 사람들도 다 올라오고, 산에서 나무를 베서 행상도 맹글고, 꽃도 일가서 그렇게 꽃행상이 집에서 나갔지. 장모님 묘도 쟁패 내 산에 잘 썼지. 따로 고새집도 있고, 행상도 있었지만 쟁패까지 옮겨 다니기 안됐다고 그냥 쟁패에서 낭구를 베서 직접 맨들었어. 고새 집에서 행상을 가지고 오면 사용하고 도로 고새 집에 가져다 넣어야 했으니 귀찮았지. 장모님이 돌아갔을 때 행상을 사용하고는 깨끄치 불에 태워 버랬어.”강순도씨는 6.25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용사로, 참전 유공자회 울진군지회 회원이다.
“6.25 참전용사라고 나라에서 한달에 구만원 주고, 군에서 오만원씩 주고 있지. 국가에서 문패도 달아주고. 그런데 나라에서 돈이라고 주는 게 보잘것이 없어. 그전에 울진군에 유공자가 팔백여명 됐는데, 삼년동안에 한 이백명 죽었다꼬. 유공자가 다들 나이가 많아서 약을 사먹을 일도 많은데, 구만원 가지고는 약 하나 제대로 사먹을 수 없지. 그런 게 지금 이 나라 현실이여.”
강순도씨는 8년 전에 북면 하당리로 내려와서 지금도 여덟 마지기 논농사와 밭농사를 조금 짓고 있다.
“매상도 조금 하고, 우리 영감 할마이도 먹고, 아덜 집에 식량도 돼주고 그러지”라고 말하는 강씨의 얼굴이 담장위에서 주황색 꽃을 피운 능소화를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