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거수(老巨樹)의 기품을 닮은 이태호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0.12.3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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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향기를 발산하는 사람이 있다.
그 향기가 몇 그램인지, 몇 미터인지 무게와 길이로 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위를 편안하게 하는 향기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꽃의 향기는 금방 피어서 싱싱할 때 강하고 멀리 퍼져나가다가, 시들면 향기도 사라지게 되지만 사람의 향기는 그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향기는 마음에서 생겨나서 언어로 풍기기 때문에,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되고 세월의 무게로 얼굴 가득 주름이 있더라도, 연륜의 깊이를 가진 노인을 만나게 되면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로운 노인의 향기는 참으로 은은해서 오래도록 시들지 않고, 잊히지 않는다.  

 

퇴임 후에 자원봉사자들을 이끌고 전 세계의 무주택자들을 위해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칠순에 바버라 월트스 쇼에 출연했을 당시, 삶 가운데 최고였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인 것 같군요”

 

전의이씨 평해 입향조인 이명유(李命裕) 공의 고손자로써 사계당파의 파시조(派始祖)인 이영발(李英發) 할아버지의 12세손입니다. 나는 사계당의 주손(胄孫)이지요.···이영발 할아버지는 영서의 향외에 가서 장원을 했지만, 과거의 뜻을 버리고 기성면 사동리에 집을 지어서 사계정사라는 현판을 걸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양간공계(襄簡公季) 사계당파의 파시조인 이영발(李英發) 공의 묘소. 삼산리 아랫 골마에 위치한다. 이태호씨는 사계당의 12세 주손이다
이태호(李太浩. 78세)씨는 기성면 삼산1리(三山一里) 골마(麻山)에서 태어났다.
“계유생(癸酉生)이니까 올해 칠십여덟이지. 원래 요 위 골마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이 소재지가 되고 여기는 변두리인 택이지요. 웃동네 골마에서 살다가 다섯 살 때 이리로 이사를 내려왔다고 전해 들었어요. 할아버지는 희(喜)자 세(世)자를 쓰셨고, 할머니는 온정면의 평해 황씨 집안에서 시집을 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종(鍾)자 원(元)자를 쓰셨고, 어머니는 원남면 금매리의 강릉최씨 집안에서 시집을 왔는데 노(魯)자 미(味)자를 사용했지요. 골마 웃동네에 살다가 할아버지가 이곳에 터를 잡아서 이사를 내려왔지. 대가족이 한집에서 살았어.”  

 

이태호씨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양간공계(襄簡公季) 사계당파(沙溪堂派)의 주손이다.
“우리 집안은 전의이씨 전서공파입니다. 전서공파라고 말하면 사실 그 웃대를 얘기하는 거고, 밑으로 내려오면 양간공파(襄簡公派)지요. 나는 전의이씨 평해 입향조인 이명유(李命裕) 공의 고손자로써 사계당파의 파시조(派始祖)인 이영발(李英發) 할아버지의 12세손입니다. 사계당의 주손(胄孫)이지. 이곳 삼산1리에 평해 입향조인 이명유 어른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어요. 예전에는 뜰기와집이었는데, 낡아서 30~40년 전에 철거하고 정면(正面) 4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을 지었어요. 이명유 할아버지는 홍천군수로 재직하다가 조선조 중종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평해 사동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할아버지의 묘소가 재실 뒤쪽의 재궁곡에 있지요. 그리고 이영발 할아버지는 영서의 향외에 가서 장원을 했지만, 과거의 뜻을 버리고 기성면 사동리에 집을 지어서 사계정사라는 현판을 걸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영발 할아버지의 묘소는 우리 집 옆 아랫 골마에 있어요.”  

 

전의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이도(李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여 도강이 어렵게 되자, 선박 수백 척을 동원하여 무사히 강을 건너게 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 공로로 고려 태조는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贊功臣)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하게 된다.

 

 
전의이씨(全義李氏) 평해 입향조인 이명유(李命裕) 공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현판
전의이씨는 시조 이도의 7세손인 동암수공(東巖叟公) 이천(李仟)에 이르러 이자원(李子蒝), 이혼(李混), 이자화(李子華)라고 하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중시조로서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문장공파(文莊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중시조가 된다.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는 직문한서(直文翰書)를 역임하고 대사성에 증직(贈職)된 이자원을 파조로 하는 백파(伯派)이고, 문장공파(文莊公派)는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이혼을 파조로 하는 중파(仲派)이고, 전서공파(典書公派)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한 이자화를 파조로 하는 계파(季派)이다.

 

기성면 삼산1리 아랫 골마에 위치하고 있는 이태호씨 집 앞 왼쪽에는 보호수 11-33-7-3호로 지정되어 있는 350년 수령의 느티나무 한그루가 힘찬 위용을 자랑하면서 수세를 뽐내고 있다.  

 

수고 18미터, 흉고 둘레 5.4미터, 수관폭 24미터, 점유면적 480평방미터의 거목 노거수이다.  

 

설화에 따르면 이태호씨의 12대조인 사계(沙溪) 이영발 공의 묘(墓) 우측의 백호등(白虎嶝) 끝이 덜 쌓여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의 아들 5형제가 느티나무를 각각 한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에 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는 성황당으로 모시게 됐는데, 다른 나무들은 예전에 인근 주민들이 베를 짤 때 허리에 받치는 뚝불개를 만들기 위해 나무의 껍질을 벗기면서 고사했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호수는 봄에 잎이 필 때 한꺼번에 피면 모 심을 때 물이 흔하고, 가지마다 따로 피면 가뭄이 심하다고 전해진다.   

 

이영발 공의 묘(墓) 우측 백호등(白虎嶝)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느티나무 노거수.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골마에서 기성국민학교로 가려면 냇가를 따라서 쭉 걸어가다가, 곰실을 지나고, 갱골재를 넘고, 용골을 지나서 산 능선을 타고 가다가, 망질봉을 넘어야 돼요.···한번씩은 아버지가 소 지르마에 장작을 싣고 자취방으로 가져다주고는 했었지. 아들 공부한다꼬. 그래야 자취방 아궁이에 불을 땔 수 있으니까.

 

이태호씨는 어린 시절에 먹고살던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먹고사는 형편이야 사실 힘들었다고 봐야지. 예전에야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었고, 농사를 지으려면 토지가 있어야 했지. 그때는 약간 판판한 터만 있으면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어. 어릴 때 먹고 살기가 좋았다면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지도 않았겠지요. 밭을 일굴 수 있는 조건이 됐으니까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터를 잡은 거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예전에는 하천이었어요. 주위로는 미루나무가 쫙 서 있었는데, 그 숲을 개간해서 농토를 만들었어. 내가 지금 칠십여덟이니까 할아버지 대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근 한 백여 년 이곳에 살고 있는 거지. 백여 년 동안 대를 물려가면서 논을 갈고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거두면서 그렇게 먹고 살아왔어. 남들처럼 겨울에 산을 다니면서 약초를 캐서 장에 내다팔거나 하는 그런 일도 안했어.” 

 

이씨는 냇가를 따라서 곰실 마을을 거쳐 갱골재를 넘고 용골을 가로질러, 망질봉을 넘는 십리거리를 한 시간 남짓 걸어서 기성국민학교를 다녔다.
“기성국민학교를 다녔어요. 물론 걸어 다녔지. 그때만 해도 차도 없었고, 도로도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지. 물을 건널 때도 징검다리가 있었고요. 골마에서 기성국민학교로 가려면 냇가를 따라서 쭉 걸어갔지. 냇가를 따라서 쭉 가다보면 곰실이라는 곳이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정명1리라고 하지. 그때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곰실에는 농가수가 꽤 되지. 곰실서 넘어가려면 갱골재라는 재가 또 나타나지. 지금은 방율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가 닦여 있어요. 갱골재를 넘어가면 척산3리 용골이라는 곳이 나오고, 용골을 지나면 신작로가 나타났지. 기성국민학교를 가려면 용골에서 신작로로 바로 내려가지 않고, 산 능선을 타고 학교로 갔어요. 신작로로 가면 빙 돌아서 가야 하니까, 용골을 빠지기 전에 산등성이를 타고 쭉 가다가 망질봉이라는 재를 넘으면 바로 학교로 빠질 수 있었거든. 기성국민학교 바로 뒤에 망질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어. 망질봉은 예전에 어떤 삼촌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떠난 조카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던 봉우리여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어요. 어릴 때 어른들에게 들은 얘기지. 전에는 망질봉의 형체가 있었는데, 지금이야 원체 개발이 많이 되다 보니까 흔적도 잘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하기 싫고 농땡이도 부리고 그럴 때는 망질봉 그 모테(근방)에서 놀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렇게 여기서 기성국민학교로 가려면 킬로로 한 사키로 정도 되는데, 보통 십리 거리라고 했으니까. 한 시간 좀 넘게 걸렸지. 그때야 가깝든지 멀든지 노상 걸어 다니는 게 일이었지. 차나 오토바이 같은 이동수단이 없을 때니 걷지 않고는 다른 곳으로 갈수가 없었어. 요 윗동네에 삼산2리가 있는데 여기서 한 사킬로쯤 되지. 그곳에 사동국민학교 삼산분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교가 되고 없어졌지. 그때는 그기에 사는 학생들도 걸어서 평해중학교를 통학했었는데 뭐. 삼산2리에서 이 마을 앞을 지나서 쭉 걸어가고는 했어. 집에서 농사를 지으니 어릴 때부터 서숙 밭도 매고 그랬지. 그때는 남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만, 언제나 공부보다도 먹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기성국민학교는 건국2회로 졸업했는데, 현재는 20회로 통하고 있어. 동창회에서는 그냥 20회 졸업생이라고 하지. 내가 나이 여덟 살에 입학해서 오학년때 해방이 됐어. 그래서 건국2회 졸업생이라고 했지”  

 

이씨는 기성국민학교를 거쳐 평해중학교를 다니던 도중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기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한 일년 정도 집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쉬었어. 집안의 먹고사는 형편도 좋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중학교를 포기하고 집에 있는데, 일년 정도 지나니까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 주더라고요. 그때 평해중학교는 A, B, C반이 있었는데, C반은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나이든 학생들이 모여 있었지. 처음에는 평해중학교까지 걸어 다녔어. 걸어 다니다가 나중에는 힘이 드니까 월송3리 화구라는 동네에 월세를 주면서 방을 얻어놓고 자취를 했지. 일주일에 집에서 쌀 두되씩을 얻어 가지고 가서 밥을 해먹으면서 학교를 다니고 그랬어. 밥을 할 때는 쌀을 씻어서 솥이나 냄비에 안치고(넣고), 손바닥을 펴서 물이 손등 모테 올라오면 물의 양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도 그때 알았지. 한번씩은 아버지가 소 지르마(지르매, 길마)라고 소 등에 안장을 얹어서 장작을 싣고 자취방으로 가져다주고는 했지. 아들 공부한다꼬. 그래야 자취방 아궁이에 불을 땔 수 있으니까. 쌀이 떨어졌겠다 싶으면 쌀도 한번씩 가져다주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갑갑한 생활을 했었지. 그래도 소 지르마에는 사람이 지게에 지고 나르는 것보다 장작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었어요. 이 동네에서 망질봉을 따라서 가는 길은 기성국민학교로 가는 길이고, 평해중학교로 가려면 냇가를 따라서 쭉 가다가 정명1리로 해서 다녔지. 이 앞쪽 방율천은 처음에는 삼산리에서 출발해서 흘러 가다가 밑에서 방율천하고 합수가 되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면 다천, 이평천하고 합수가 돼서 기성다리 밑으로 빠져서 바다로 흘러가게 되거든. 평해중학교에 다니던 3학년 말에 6.25전쟁이 터졌어. 그때는 7월 말이 학기말이었지. 졸업을 얼마 앞두고 6.25사변이 일어났어요. 전쟁이 터지면서 학교는 자연히 휴교령이 내려졌고. 6.25전쟁 통에는 피난을 떠나지 않고 그냥 집에서 부모님의 농사도 거들고 그랬지. 소 쟁기로 논도 갈고 밭도 갈고 그랬어. 이 동네는 위딸다(외딸다)고 오히려 외지에 있는 사람들이 피난을 들어오고 했어요. 이 앞으로도 인민군이 가끔 지나갔지. 저 넘어 원남 신흥리로 해서 인민군이 남하할 때 이 동네 앞으로 지나갔어요. 6.25사변이 끝나고 평해중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 학교로 돌아가서 중학교를 졸업할 기회도 있었는데, 사실 그때는 형편도 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욕심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어두웠던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런 이유로 평해중학교를 3학년 말까지 다니다가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어.”   

 

이태호씨의 할아버지는 이씨가 다섯 살 때 웃골마에서 아랫골마로 이사를 와서 하천을 개간하여 논밭전지를 일구었다

결혼할 때 중학교 다니면서 쓰던 학생모를 덮어쓰고, 겨울 후루막을 입고 철렁철렁해가면서 걸어갔지. 걸어가는데 산길에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로 눈이 쫙 깔려 있었어요.···애들이 걸을 때가 돼서 아버지라고 다가와도 그저 어른들 눈치가 보여서 툭 쳐서 밀고 그랬지.  

 

6.25 사변 통에 평해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둔 이씨는 잠시 동안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를 거들다가 전쟁이 한창인 무렵에 결혼을 하게 된다.
“6.25 사변중인 18살에 결혼을 했지. 사실 우리가 장가를 갈 때는 위에서 부모가 누구에게 장가를 가라 그러면 신부될 사람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장가를 갔어요. 부모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했지. 행례(行禮)를 할 때도 천 같은 걸로 가리니까 얼굴 보기는 힘들었어. 집안을 왕래하던 어른이 중신을 했는데, 이쪽저쪽 집을 오가다가 한집에 총각이 있고 또 다른 집에 처녀가 있으면 나서서 중매를 하고 그랬지. 중신 잡이의 얘기를 듣고 양쪽 집안에서 괜찮겠다, 안 속겠다 싶으면 양가 어른들이 상의해서 결혼을 시키게 됐지요. 그때만 해도 반상의 구분이 좀 남아 있었지. 지금도 여전히 결혼할 때면 양가의 집안을 따지고, 성씨를 따지고 그러는 게 남아 있잖아요? 우리가 결혼할 때는 하도 어려워서 결혼사진 한 장 못 찍었어. 우리가 결혼하고 몇 년 지나고 나니까 결혼할 때 기념사진도 한 장씩 찍고 그러더라고. 처가는 원남 몽천 동네의 신안 주씨 집안인데, 내자(內子) 이름은 주장수여.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맏이지. 예전에는 원남 몽천에 최촌, 윤촌, 주촌이 있었어요. 집성촌이 이리저리 한곳에 모여 있었지. 결혼하던 날이 음력으로 동짓달 초나흗날이었어. 6.25사변 중이었으니까, 결혼할 때도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5촌집에서 종숙모, 종조모가 힘을 합쳐서 혼수를 장만해서 동짓달 초나흗날에 처가가 될 집으로 갔지요. 그때만 해도 걸어 다닐 때니까, 사동 쪽으로 돌아가는 길보다는 삼산2리로 해서 원남 신흥리 쪽으로 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었어요. 그래서 그 길로 갔지요.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중학교 다닐 때 쓰던 학생모를 덮어쓰고, 겨울 후루막(두루마기)같은 걸 입고 철렁철렁해가면서 걸어갔지. 걸어가는데 산길에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로 눈이 쫙 깔려 있었어요. 나는 그것을 서설(瑞雪)이라고 생각했어. 그 길을 따라서 삼산2리로 해서 재를 넘어서 그렇게 걸어갔지. 아버지가 상객(上客)으로 뒤따라오시고. 구식으로 결혼을 올리고 난 다음에 처갓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삼일 만에 집으로 다시 돌아왔지. 그리고 일년이 거의 지난 다음해 음력 시월 열 사흗날에 신부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어요. 말하자면 묵신행을 한 거지. 신부가 올 때는 처조부가 상객으로 신부를 데리고 왔었어. 가마를 태웠으니 신흥리쪽 험한 길로 오지 않고 사동 쪽으로 빙 돌아서 걸어왔지. 그 사이에 한두 번 처갓집을 다녀오기도 했고. 한번은 처갓집에서 자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고 그렇더라고. 알고 보니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오던 피난민들이 처갓집을 찾아와서 하룻밤 잠을 재워달라고 청을 했던 모양이야. 내가 장가를 들 때 이미 처갓집은 장인장모가 세상을 뜨시고 안계셨어요. 이 사람이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거지. 나도 좀 불행하지. 장가를 갔을 때 장인장모님이 계셨으면 한번씩 놀러가도 좀 더 마음이 편하고 그랬을 텐데. 그래도 처조모, 처조부가 참 잘해주었지요.”  

 

이씨는 부인 주장수씨와의 사이에 5남1녀, 6남매를 두었다.
“6남매를 두었어. 아들 다섯에 딸 하나를 낳았지. 상용(대구시. 58세)이라고 맏아들이고, 그 아래가 딸인데 영주(대구시. 51세)고, 그 밑으로 상구(서울시. 50세), 상학(대구시. 47세), 상봉(대구시. 45세), 수일(경기 과천시. 36세)이지. 수일이는 원래 상기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후에 수일이라고 바꾸었어. 사실 수일이는 우리가 애를 그만 낳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우예다(어쩌다) 보니까 뒤늦게 태어난 자식이지. 그래서 위에 형하고 나이차이가 꽤 나게 되었어요. 막둥이를 임신했을 때는 사실 노산이어서 잘 나을 수 있을지 많이 걱정도 하고 그랬어. 윗대에서 5대독자를 겪은 집안이어서 할아버지가 자식 욕심이 참 많았어요.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소원이 후손이 많이 태어나는 거였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생전에 손자들 다섯 명 이름을 다 지어놓았어요. 자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다 지어 놓았던 거지. 애들에게는 징조(증조) 할아버지가 되고요. 그리고 요즘이야 아덜(애들)을 부부가 합심해서 키우지만, 우리 때만 해도 남자가 아덜을 본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 당시에는 남자들이 자기 자식을 귀여워하는 것도 참 수치스럽게 생각할 때였거든. 아덜을 키울 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눈치가 보여서 어디 자식이 귀엽고 예쁘다는 표현을 못했어요. 애들이 걸을 때가 돼서 아버지라고 다가와도 그저 어른들 눈치가 보여서 툭 쳐서 밀고 그랬지.”  

 

◀ 전의이씨(全義李氏) 평해 입향조인 이명유(李命裕) 공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기성면 삼산1리에 위치한다

 

인민군 치하였을 때 총을 들이대며 조직체를 구성해라, 너는 무슨 감투를 쓰라, 너는 또 무슨 감투를 쓰라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농사짓던 마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감투를 쓰게 되었지.···아군이 수복하고 나니까 인민군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감투를 썼던 사람들이 전부 다 반역자가 되고, 사상범이 돼 버린 거지.  

 

이태호씨는 결혼 얘기 끝에 6.25전쟁 통에 겪었던 집안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11월 21일 날 울진군민체육관에서 열린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나도 다녀왔지만, 우리 집안에도 참 아픈 사연이 있어.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장 윤영재도 따지고 보면 우리와 남남이 아니지. 윤영재 회장의 고모가 우리 종조부의 며느리가 되어서 왔거든. 지난 2008년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울진군의 6.25전쟁 전후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자를 조사할 당시에 나도 참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6.25전쟁 당시에 내가 가장 가까운 세대였으니까 많은 협조를 해줄 수 있었지. 조사 당시에 미처 알려지지 않고 일반인들이 모르던 사실들이 참 많이 드러나고 그랬어. 이화자여사라고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인데, 우리 집에 묵기도 하고 그러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하더라고요. 6.25전쟁이 나고 얼마 안 있어서 인민군이 한동안 울진에 머무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울진군 전체가 인민군 치하였어. 인민군 치하에서는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총살로 즉결처형을 당하고는 했어. 사람 목숨이 사람 목숨이 아니었지. 동물도 힘센 곳으로 쫓아가게 마련인데, 그때 상황이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불리하게 되어 있었어. 그때는 법이 없는 무법천지였거든. 그때 나도 나이가 두 살만 더 많았어도 아마 죽은 목숨이었을 거여. 인민군 치하였을 때 총을 들이대며 조직체를 구성해라, 너는 무슨 감투를 쓰라, 너는 또 무슨 감투를 쓰라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농사짓던 마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감투를 쓰게 되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군이 수복하고 나니까 인민군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감투를 썼던 사람들이 전부 다 반역자가 되고, 사상범이 돼 버린 거지. 그리고는 군인이나 경찰들이 정당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두 손을 묶어서 총살을 시키거나, 생매장을 하든가, 바다에 수장을 시켜버렸지. 그때 꽤 많은 사람들이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당했어요. 우리는 집안도 별로 많지 않거든. 그런데 전쟁 중에 이종대라는 오촌당숙이 그때 희생을 당했어요. 오촌이라고 해도 우리가 집안이 없다보니까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지. 수복 후에 삼산1,2리만 엄처도(합해도) 한 이십 여명이 부역혐의로 군인들과 경찰에게 희생되었어요. 그때가 이승만 정권 일 땐데 군경이 절차도 없이 민간인들을 죽였으니 어찌 보면 지금이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희생자의 유족들에게 보상을 해 주어야지. 살면서 유족들은 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르지. 연좌제에 묶인 후손들은 숨도 못 쉬고 살았고, 사돈의 팔촌까지 제대로 취업도 되지 않고 그랬거든. 그렇게 한 많은 세월이 벌써 60년이 흘렀어. 다행히 6.25때 희생당한 오촌 당숙의 아들은 어떻게 면죄부를 받아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았지. 그런데 윗동네 친척 할머니 한분은 딸 하나 낳고 나서 남편이 무참하게 희생을 당했고, 지금까지 평생 동안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지. 딸 하나 키우면서 평생 청상과부로 힘들게 살아온 거지. 전쟁 당시에 이곳 삼산리 동네의 희생지는 확실한곳이 없어. 어디로 묶여가서 죽었다는 얘기도 들리고, 바다에 나가서 수장을 당했다는 얘기도 들리고 그랬지. 죽여서 묻은 것도 아니고 생사람을 묶어서 그렇게 땅을 파고 흙을 덮어서 죽였으니 참 죄가 많은 거지.” 

 

그기에 더해 이태호씨는 6.25전쟁 중에 부모님이 친척 한명을 집에 숨겨 주었다가 기성지서에 붙들려가서 겪었던 고초를 전해준다.
“내가 장가를 갈 무렵에 아군이 수복을 하고 부역자들을 막 붙들어 들일 때였지. 기성 사동에 살던 이순세라는 사람이 우리 집안에서는 항렬이 좀 높았는데, 어디로 도피를 했다가 우리 집이 위딸다고 찾아왔어요. 우리 집에서 몸을 좀 숨겨야겠다고 하는데 정을 봐서라도 안 된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지. 어떻게 사람이 야박하게 숨겨줄 수 없으니까 나가라고 합니까? 그래서 집에 숨겨주었어요. 며칠 숨어 있다가 딴 데로 떠나지도 않고, 상근(계속) 우리 집에 있었거든.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음력으로 시월 초성 좀 넘어가지고 열흘정도 됐지. 순세 아재가 우리 집에 숨어 있다는 정보가 경찰에 입수됐던 모양이야. 순세 아재가 우리 집에 숨어 있으면서 가만히 있기가 심심해놓으니, 저쪽 사랑방에서 초석(草席-왕골, 부들, 짚 따위를 엮어서 만든 자리)도 짜고 그랬지. 당시에는 목선으로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를 파는 방티(함지박) 아줌마들이 자주 생선을 팔러 다녔다고. 방티 아줌마들이야 우리 집에 자주 오다보니 집안 식구가 몇 명인 지까지 다 알고 있었지. 그러다보니 방티 아줌마들이 사랑방에 집안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알고 지서에 알린 모양이지. 지서에서 낌새를 채고 나니까 어느 날부터는 고기 방티를 인 아줌마들이 유독 더 자주 오더라고. 그런데도 우리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어. 그 날이 음력 시월인데, 지금보다는 조금 더 빨랐을 거야. 그날 우리는 선영(先塋) 산소에 제사를 올리려고 술도 담그고 방아도 찧고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석양이 막 넘어가고 있는데, 기성면 대한청년단원 수십 명이 집 주위를 전부 포위하고 지서 형사 한명이 문을 벌컥 열더니 순세 아재를 딱 잡아내더라고. 그리고 공중에 공포를 두세 발 쏘고는 잡았다 하면서 소리를 쳤어요. 그러니까 와하고 소리를 치면서 대한청년단원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지. 그때 부역혐의자를 은닉했다면서 삼산리 대한청년단장이 대번에 아버지를 마당에 매어치대. 나이 차이도 많은데. 아버지가 연세도 많은데 무슨 힘이나 있나? 순세아재가 잡혀 들어가면서 우리 집에서 숨겨주었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성지서로 함께 잡혀서 압송됐어. 그때 기성지서 앞에 찰흙을 보로꾸(벽돌)로 찍어서 높게 쌓아서 망루도 만들고 앞에는 너른 광장이 있었는데, 부역 혐의자들을 잡아다가 곡괭이 자루로 빳다도 치고 그랬어. 당시에 할아버지가 집에 계셨는데도 별 도리가 없었지. 그 이튿날인가 되니까 이 부락의 청년단원들이 집으로 찾아오더니 방구들만 남겨놓고 벽을 다 짜들고 부수고 난리를 피웠지. 술단지고 장단지고 전부 다 부수고 그랬어. 힘도 없는 흙벽을 다 부셔놓으니 시월이어서 날씨도 추웠는데 당장 어디로 가서 잘 데나 있나? 할아버지는 그때 우에(위) 동네에 황씨 성에 억자 영자 쓰시는 어른 집에서 거처를 했어요. 그때쯤에 내 혼사 얘기가 나와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그러니 결혼할 때 정신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오촌 집에서 혼수를 준비하고 그랬어. 날을 받아놓았으니 어째요? 기성지서에 붙잡혀 들어갔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보름 뒤에 겨우 풀려났지. 그때 어머니는 배호라고 막내 동생을 임신해 있었는데 일곱 달째였어요. 겨우 풀려나왔는데 어머니 궁디이(궁둥이)짝이 몽둥이로 얼마나 맞았는지 멍이 시퍼런 게 영 안 풀리더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배안에 들어있던 동생은 무사하더라고요. 그래도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종대 오촌 당숙과 이순세 아재는 2008년도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이 결정되어 신원을 회복했어요.”

 

사계당(沙溪堂) 이영발 공이 서재로 사용하던 정자. 기성면 사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국민병에 끌려가다가 곰실 앞 갱빈 버드나무 숲에서 막 노 구불면서 꾀병을 피워버렸지. 한참을 그렇게 노 구불자 구장이 아파서 못 가는데 어쩌겠냐고 그러더라고.···밖으로 나다니면서 남들 하는 장사를 해볼까 그런 엄두도 못 냈어. 군에 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달리하고 안계셨으니 그럴 수가 없었지.  

 

이씨는 6.25전쟁 기간 동안에 국민병에 끌려갈 뻔 했던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려주면서 웃는다.
“정식으로 군대에 가기 전에 6.25 전쟁 중에 국민병 소집통지서를 받았는데, 그때는 국민병이라고 있었어요. 방위군이라고도 부르던 국민병은 부자간에 가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는데, 호적을 보고 연령이 되면 동네마다 싹 소집해서 경주나 울산 쪽 방면으로 보냈어요. 그때 이쪽은 장홍구라는 사람이 사령관인가 그랬지. 국민병에 해당이 돼서 가기 전에 처가에 가서 그 사실을 알리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아들을 바래다준다며 니꾸사꾸(배낭) 안에 엿으로 집청(한과에 꿀이나 조청을 바름)을 굽고, 음식 대신에 먹을 수 있는 미숫가루 같은 간식도 넣고 해서 함께 데려다 준다고 집을 떠났지. 전병두라는 동네 구장도 함께 갔는데, 얼마쯤 가다가 곰실 앞 갱빈(강변) 버드나무 숲에서 막 노 구불면서(누워서 뒹굴면서) 꾀병을 피워버렸지. 한참을 그렇게 노 구불자 구장이 아파서 못 가는데 어쩌겠냐고 그러더라고. 그때 나는 국민병으로 끌려가면 영락없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도 아버지는 속으로 걱정이 많았어요. 전에 순세 아재를 집에 숨겨주었다가 큰일을 겪었는데, 니가 국민병에 가지 않으면 이일로 인해 가중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면서요. 그런데 당시에는 병역법이 참 허술했거든. 나처럼 중간에 어떻게 빠진 사람은 살았는데, 할 수 없이 끌려간 사람들은 전쟁 통에 죽기도 하고 그랬지. 나도 참 요령이 없는 사람인데, 그때는 어떻게 그런 꾀가 났든지 몰라.”  

 

전쟁 중에 국민병으로 징집될 뻔 했던 이태호씨는 전쟁이 끝난 다음인 21살에 군대에 입대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21살에 정식으로 군에 갔어. 그전에는 전쟁 중에 영장을 받고 군에 간다 그러면 부락 사람들이 연회를 베풀어 주었어요. 간단하게 국수도 삶고, 죽지 말고 잘 다녀오라면서. 나도 마을사람들이 챙겨주던 연회를 받았지. 그때는 보통 영장을 받고 나면 5일 만에 떠났어. 그런데 떠나려고 하니까 마침 휴전이 되었고, 뒤에 다시 재 소집되었지. 죽변에 일차로 모여서 강릉 묵호까지 올라가서 LST 화물선을 타고 제주도로 건너갔지요. 밑바닥에 가마때기를 깔고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배를 타고 갔어요.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어. 훈련소에서 16주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군에 오기 전에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그런 식으로 거짓말도 좀 하고 그러면서 좀 편하게 훈련을 받았지. 그런데 그때 군대 훈련소라는 것이 다른 것은 다 참아도 항상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들었어. 훈련 도중에 행군을 할 때면 길에 소똥이고 뭐고 보이면 먹을 것으로 보여서 막 주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런 사람들은 병도 걸리고 죽기도 하고 그랬어. 어쨌든 훈련을 끝마치고 부산으로 나오니까, 다들 제주도 마른명태가 나온다고 얘기하더라고. 훈련소에서 못 얻어먹어서 다들 비쩍 말라 있었거든. 그럴 때가 있었네. 그래도 휴전이 된 후였으니까 어느 부대에 자대 배치를 받아도 그렇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일은 크게 걱정할게 없었지. 부산 서면 606수송단 261대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를 했는데, 주로 부두작업을 했어. 부두작업이란 게 다른 곳에서 나오는 군수물자를 병기기지창이나 보급창으로 옮기는 그런 일이었네. 그리고 뒤에는 행정계통에서도 조금 근무했었고. 4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했지.”  

 

전의이씨(全義李氏) 양간공계(襄簡公季) 사계당파의 파시조(派始祖)인 사계당(沙溪堂) 이영발(李英發) 공의 묘소 앞에서

전의이씨(全義李氏) 평해 입향조인 이명유(李命裕) 공의 묘소. 삼산리 재실 영모재(永慕齋) 뒤쪽 재궁곡에 위치한다
이태호씨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기성면 삼산리에서 생활하던 아버지는 세상을 뜬다.
“부산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그런데 당시에 김창룡 육군 소장의 암살사건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전 군에 비상이 걸려 있었고,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도 쉽게 집에 올수 없었어요. 군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그 이듬해에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다시 그 후 삼년 뒤에 돌아가셨지요. 할머니는 일찍이 해방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네. 군 생활을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농사를 지었지. 밖으로 나다니면서 남들 하는 장사를 해볼까 그런 엄두도 못 냈어. 집에 아버지라도 계시면 어디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벌 생각이라도 했겠지만, 군에 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달리하고 안계셨으니 그럴 수가 없었지.”  

 

김창룡 암살사건은 1956년 당시 특무대장(보안사령관)으로 이승만 정권의 오른팔이었던 김창룡 소장이 서울 원효로에서 출근 중에 괴한 2명의 총격을 받아서 암살당한 사건으로 전국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당시 한 달간의 수사 끝에 김창룡에게 총을 쏜 신초식과 송용고라는 괴한 2명을 포함한 가담자들이 체포되었고, 암살 계획을 세웠던 육군 대령 허태영과 주동자였던 강문봉 중장 등은 체포되어 징역형과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태호씨는 박약회(博約會) 울진군지회 부회장과 울진문화원 이사 등을 역임할 만큼 지역 사회와 문화계에서는 변함없이 긍정적인 평가와 대우를 받아왔다.  

“박약회 울진군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요. 박약회는 퇴계 이황선생의 사상과 이념을 연구하고 알리는 모임인데, 전국적으로 많은 본부를 두고 있지. 울진군에서는 전에 이병목 군수가 있을 때 결성됐어. 울진문화원 회원이 된지도 꽤 오래 됐지. 문화원 이사도 했고, 울진 군지를 만들 당시에 군지 편찬위원도 하고 그랬어. 성류문화제를 지낼 때는 집례(執禮)도 해봤지. 집례는 제사를 지낼 때 홀기(笏記)를 읽는 찬자(贊者)를 말하는 거네.”  

 

2003년 11월 울진문화원 임원들의 관동팔경 답사 당시

성류문화제의 성류제향 당시 홀기(笏記)를 읽는 찬자(贊者)로 집례(執禮)하며

 

이태호씨는 지금까지 12대조를 봉사(奉祀)하면서 조상들을 받들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윽하게 향기를 숨기고 있는 어르신들이 있다.  

 

드러내놓고 마음껏 자랑해도 꿀림이 없는 조상들을 얘기하면서도 자만심을 찾아볼 수 없고, 고단하고 아팠던 과거를 진솔하게 전할 때조차 은근한 격조의 향기를 저버리지 않는 어르신들이 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조용하면서도 격조 있는 향기에 더해, 중후하고 기품을 지닌 진정 어른스러운 매력을 발산하는 어르신들을 주변에서 대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이제는 힘이 들어서 농사를 도저히 못해. 밭 삼천 평은 올해부터 남에게 주어서 부치게 했지. 논은 아직 그대로 있는데, 돈을 들이면 모도 심어주고 다 해주지만 앞으로 몇 해를 더할지는 몰라. 나이 육십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그렇지. 예전에 논밭전지에서만 수입을 얻을 때는 대가족이 한집에 모여 살면서 시끌벅적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 이제는 나이가 많으나 젊으나 핵가족이거든.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외로움을 타게 되는 법이지. 그래도 도리가 없지. 자식들이 한창 커 갈 때는 입버릇처럼 ‘너희들은 나처럼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를 짓지 말고 객지에 나가서 벌어먹고 살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세월이 지나보니 예전에 대가족이 모여 살면서 북적거렸던 때가 더 좋았던 것도 같네. 저 앞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한 사백년 가까이 됐는데, 잎이 무성할 때 낙조가 지면 기가 막히게 멋있어. 그때 한번 놀러 오게”

 

부인 주장수씨와 집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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