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있던 아들마저 짚불 사라지듯 하디더” 울진읍 신림리 김채연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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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변에서 연세든 노인들을 쉽게 본다.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퍽 자주 “내가 까막눈이라서 그렇지, 살아왔던 세월을 글로 옮겨서 책을 만들었다면 지게로 두 짐은 됐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노인들이 지닌 가슴 뭉클한 인생과 그 속에서 간간이 묻어나는 지혜,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는 지난 시절의 생활 습속, 주변부에 대한 이런저런 세세한 기억의 편린들, 어느 누구든지 평범한 인생사는 없다.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울진군 또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지 오래고, 그 중 홀로 사는 독거노인의 비율 또한 30%가 넘어선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시골 작은 동리에서는 젊은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만큼 노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것처럼 느껴지는 소외감과 그에 따른 우울로 인해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노인들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활동량이 적고 얼마씩은 다들 소극적인 생활을 하는 만큼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건강 상태도 양호하지 못해서 시력과 청력 감퇴, 관절염 등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다행히 자식들이라도 가까운 곳에 있는 노인들은 그나마 몸 상태에 관심을 갖고 정기적인 건강 검진과 함께 부정기적으로 병원 등을 오가면서 의료 혜택을 보지만, 홀로 사는 노인들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노인들에게도 한때는 유아기,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가 있었다.
또 그런 만큼 지금 젊음을 자랑하는 우리들 또한 머잖아서 노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사회적 무관심에 따른 소외감에 더해 건강 상태마저도 좋지 않은 노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 안되니 아부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고향 영천으로 되돌아갔어요. 그 질로 아부지 어무이하고는 소식이 끊어 졌니더. 마 우예 갔는지도 모르고, 나도 먹고 사는 게 힘드니 찾아볼 생각도 못해보고 그랬니더.
시집을 와서 3년이 지나 24살이던 6.25전쟁 당시에 남편을 잃고, 50살에 하나밖에 없던 외동아들마저 멀리 앞세우고, 34년 동안 홀로 외롭게 살아오고 있는 김채연(84세. 울진읍 신림리)씨는 영천이 안태 고향이다.
“영천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님 살아생전에 영천 오데(어디)라고 하던데 나는 몰래(몰라). 하도 어릴 때 울진으로 와 버랬으이까네. 얼라(어린아이)때 왔겠지만, 그래도 내가 몇 살은 먹었을 때니까 차도 한참씩 타다가, 걸어도 오고, 업혀서도 오고, 그랬다고 해. 울진으로 와서는 근남 행곡 내앞이라는 동네에서 컸지.”
김씨의 아버지는 영천에서 울진으로 옮겨와서 옹기굴에서 옹기를 빚는 단순 노동자로 일했다.
“먹고 살겠다고 울진으로 이사를 왔지만은 어머이(어머니) 아부지(아버지)가 별다른 기술도 없는데 옛날에 할 질(할 일)이 있니껴? 아부지 형제가 4형제인데 어릴 때는 잘 살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고마(고만) 묘를 잘못 옮겨서 집안이 쫄딱 망해버린 거지요. 외할아버지 산소를 썼는데, 어떤 풍수가 묘자리가 안 좋다고 파내라고 하더랍니다. 외할아버지 산소는 여개(여기)가 강이 끼앴고(끼였고) 저 건네(건너) 묘가 있었는데, 풍수 말을 듣고 파냈더니 누런 황금 같은 짐(김)이 올라 오더라니더. 그러자 옆에 있던 노인네들이 당장 묘를 다시 되묻으라고 했다는데, 어디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사람들이 노인네들 말을 듣니껴? 그 후부터 외할아버지 빈소에도 불이 나고, 집에도 불이 나고 그러면서 갑자기 쫄딱 망했다니더. 그러니 할 수 없이 먹고 살 곳을 찾아서 울진 땅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아부지는 행곡 내앞에 터를 잡고 옹기 만드는 일을 따라다니면서 배왔지. 그때는 내앞 고 우(위)에 올라가면 옹기굴이 있었거든. 아부지는 몇 년을 그곳에서 옹기를 맨들었어요.”옹기를 굽던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시집을 오고 난 얼마 뒤에 다시 먹고 살 길을 찾아서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영천으로 되돌아갔다.
“옹기를 구워서 번 돈으로 온 식구가 입에 풀칠이나 제대로 했겠니껴? 그러다가 정 안되니 아부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고향 영천으로 되돌아갔어요. 그 질(길)로 아부지 어무이하고는 소식이 끊어 졌니더. 마 우예(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나도 먹고 사는 게 힘드니 찾아볼 생각도 못해보고 그랬니더. 내사(나야) 그때 이미 시집이라고 이곳 신림으로 와 버렸으니 같이 따라갈 수도 없는 처지였고요.”
김씨 집 주변에는 정부 보조금의 대부분을 써가며 구입한다는 장작이 쌓여 있다시집을 오니까 집안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고, 도토리가 한가마니 있어. 씻지도 않고 껍질까지 붙어 있는 도토리가. 참 남사시럽니더만은 도토리 껍질을 벗겨서 먹으려니까 참 안 멕히디더. 죽어도 못 먹어.
영천에서 태어나 어릴 때 근남면 행곡리 내앞으로 이사를 왔던 김씨는 일년 남짓 일본 소학교를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나는 어머이 아부지 이름도 몰래요. 위로 오빠가 둘이 있고, 언니도 둘이 있고, 내가 제일 막내이래. 그러니 노상 응디(응석받이)로 컸지. 어릴 때는 일본인들이 만든 학교에도 한 일년 안 되게 다니고 그랬니더. 그러다가 먹고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다보니 일년도 못 다니고 때려 치왔 뻐랬지(치워 버렸지). 학교는 오른갈(근남면 오로동)에 있었는데, 수산다리 밑의 물을 건서서 학교를 댕갰지(다녔지). 개코도 모를 때니까 한 일년 다녔지요. 그래도 그때는 학교라고 다니면서 한문도 한 오십자 정도 알았는데, 이제는 다 잊어뿌리고 내 이름 석자도 옳게 못 쓰니더. 글자라는 게 참 매정시럽디더. 그러고 나서는 한동안 집안에서 일을 거들었지요.”일정시대에 일년 남짓 소학교를 다니던 김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수년 동안 집안일을 거들다가 중매를 통해 결혼한다.
“21살인가 되던 해에 신림에 살던 어떤 사람의 중매로 신랑이라고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됐어요. 신랑 이름은 최희석이라고, 최씨 성에 석자 돌림이시더.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았으니까, 지금 살아있으면 구십이 다 됐지. 정월 초열히(초열흘)에 시집이라고 왔는데, 이 집에는 아무것도 없더라꼬. 그런데도 시어마이, 시아바이, 시동생, 시누(시누이)가 줄줄이 많더라고. 아들 넷에 딸 둘이 육남매고, 내 신랑이 맏이니까 오죽했겠니껴? 시집을 오니까 집안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고, 도토리가 한가마니 있어. 씻지도 않고 껍질까지 붙어 있는 도토리가. 참 남사시럽니더만은 도토리 껍질을 벗겨서 먹으려니까 참 안 멕히디더. 죽어도 못 먹어. 그러니 시집을 오자말자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한 열흘 굶었어요. 그래도 안 죽대. 그렇게 굶고 있는데, 서숙밭 매러 가라고 하디더. 그런데 밭을 매봤어야 매지요. 열흘 굶고 일어나서 서숙 밭을 매다가 저녁을 하러 집으로 돌아오는데, 땅도 발갛고 하늘도 발갛고 이래. 쌀 한 주발에 나물을 넣고 한솥 끓여놓으니, 식구는 많고 먹을게 있니껴? 옹가지(옹자배기) 솥에 끓여 놓으면 시어마이가 와서 껀디기(건더기)는 다 껀져서(건져서) 시아바이와 아들네 주고, 우리는 노상 국물만 떠먹었지요. 사는 형편이 그러니까 신랑은 결혼하고 그 이듬해부터 이웃집으로 머슴을 살러 갔지. 여 마실(마을)에 갔니더. 낮에는 그 집에 가서 농사를 지어주다가 밤에는 집에 와서 자고 그랬어.”김씨가 신림으로 시집을 오고 나서도 시어머니는 아기를 한명 더 낳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시어마이가 알라(어린아이)를 또 하나 낳았잖니껴? 죽은 자식을 낳았어. 시어마이가 알라를 배서 저기 비랜가 하는 웃동네 여동상(여동생)인지 이모넨지 그 집에 갔다 오다가 눈길에 미끄러졌는데, 그때 알라가 배안에서 죽은 모양이더라꼬. 죽은 아(아기)를 낳는 바람에 시어마이는 몸이 아프면서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았고, 그러니 우째요? 그때는 무당도 얼매(얼마)나 많고 해 고칠 것도 많든지 저녁마다 뚜들기니까 그거를 또 밥 해댄다꼬 애먹었지. 그래도 어떻게 시어마이는 살았어요. 시집을 올 때 이집에서 부치는 문중 논 두마지기가 저 우에 쉰배미 넘어가는 개골에 있디더. 그때야 모 비료가 있니껴? 농약이 있니껴? 그러니 농사는 안 돼도 시사(시제)를 지낸다고 쌀 닷말을 매겨 놨디더. 그런데 딸린 입이 많으니 나락을 추수도 하기 전에 풋바심해서 다 먹고 없어요. 그러니 시사를 채려주고 나면 남는 쌀이 없어요. 참말로 내가 밍(명)이 길어, 너무 길어. 그래도 안 죽고 산거 보면. 어른들이 좀 살아야 자식도 살지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고, 지팽이(지팡이)를 짚어야 일어서지요.”나는 신랑 뒷꼭지도 못 봤어. 비중삼을 입고 논을 매다가 인민군들에게 붙들린 거겠지. 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바래도 신랑이라는 사람이 집에 안 들어와. 저녁으로도 안 들어오고, 이튿날 바래도 안 들어오고 그러더라고. 왜 이렇나 싶었지.
김채연씨가 3년여 결혼 생활을 했을 무렵에 6.25전쟁이 터졌고, 전쟁 통에 김씨의 남편은 어디론가 끌려가서 행방불명되었다.
6.25전쟁 통에 행방불명된 김씨의 남편 최희석씨
“그럭저럭 사는데 어느 연분(어떤 때)에 6.25사변이 났나? 신랑이 머슴살이 하면서 남의 집에 논매주러 갔다가 어디로 붙들려 간 모양이디더. 나는 신랑 뒷꼭지도 못 봤어. 비중삼(베적삼)을 입고 논을 매다가 붙들린 거겠지. 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바래도 신랑이라는 사람이 집에 안 들어와. 저녁으로도 안 들어오고, 이튿날 바래도 안 들어오고 그러더라고. 왜 이렇나 싶었지. 나중에 남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어디로 붙들려 갔다는데, 나는 확인도 못해봤지. 신랑인지 남방(남방셔츠)인지 그때사(그때야) 아는 낳았어도 모 아요? 신랑 앞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랬는데 모. 갔으면 갔는겠다, 이웃 영감 보내드끼(보내듯이) 그랬지. 그런데 이날까지 소식이 없잖가? 아(아들)를 놓고 여섯 달 만에 갔어. 끌려갔는지 어쨌는지 알 수도 없었어요. 나중에 소문 들으니 동네 다른 청년들도 몇 명 끌려가서 소식이 끊겼다는데, 그때 같이 끌려간 모양이지. 신랑이라고 만나서 같이 살았던 시간이 삼년도 안 돼. 시집을 와서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봤던 시절이었으니, 어디 살았다고 할 수 있니껴?”6.25전쟁 발발 초기에 울진 지역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을 때, 신림리에서는 인민군 부대가 신림국민학교와 월래방산 꼭대기에 주둔하고 있었다.
“친정도 오데(어디) 갔는지 간곳이 없고, 6.25사변 때 신림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니껴? 6.25전쟁 중에는 피난을 갔니더. 우리 아는 작다고 시어마이가 업고, 나는 시누를 업고 그렇게 피난을 댕갰니더. 우리 시누는 내가 시집올 때 두 살인가 시살(세살)인가 그랬어요. 저 뽁두기(복두산)로, 삼거리로 아는 집을 찾아서 잠깐씩 댕갰지요. 낮이면 집에 있다가, 밤이면 함포 사격을 한다고 얼매나 지랄을 해대는지 피난을 안갈 재주가 없잖니껴? 연중에(그런데다가) 인민군들이 요 옆 신림국민학교에 떼거리로 모여서 살았니더. 또 한패는 월래방 꼭대기라고, 저 우에 산에 천막을 치고 있었고요. 할루(하루)는 국민학교에 살던 인민군들이 찾아와서 마실 부녀회장을 맡아 달라고 하디더. 그래서 ‘글씨도 모리고(모르고) 아무것도 모리는 까막눈인 내가 우예 부녀회장을 하니껴?’ 하고 대답하니까, 그러면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겠냐고 하디더.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이건 열두시에도 쌀을 들고 밥해 달라고 찾아오고, 새벽에도 감자 쪄 달라고 찾아오고, 콩 볶아 달라고 들고 오고 그러디더. 그래저래 세월을 젼디다(견디다) 보니까 추석날쯤에 다 어디로 내빼고 없디더. 인민군들이가 열사흘 날도 떠나고, 열 나흗날도 떠나고, 추석날에도 떠나고 그랬거든. 추석날 아침에 제삿밥 짓는다고 정지에 앉아 있는데, 누가 아줌마 아줌마 하고 뒤쪽 풀숲에서 불러요. 깜짝 놀라서 보니까 군인들 두어 명이 숨어서 국민학교에 진을 치고 있던 인민군들이 언제 다 도망갔는지 묻더라고요. 그러더니, 아지매요 놀래지 마소.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고 남선 아군이라고 하디더. 총을 메고 풀숲 속에 숨어서 앉아 있는데, 정말 씨껍했니더. 그러더니 전투가 붙어가지고 남선 아군하고 인민군이 싸우는데, 난 폭탄 폭탄해도 그때 처음 봤니더. 비행기에서 신림국민학교에 인민군이 숨어 있을까봐 폭탄을 쏟아 붙는데 참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침에 나가보면 국민학교 운동장 한가운데가 푹푹 뚤버져(뚫어져) 있고, 우리 집 마당에도 포탄 껍데기가 쌔고 쌨어. 안 터진 쌩 폭탄도 있고. 아이고, 일정시대에도 그렇더니 6.25전쟁도 겪고,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큰 전쟁을 두 번이나 젺노(겪노) 싶디더.”뽁두기재에 가서 솔가지 쳐낸 거로 둥치를 맹글어서 머리에 이고 오다가 비탈에서 군부러 가지고 집으로 어떻게 겨우 돌아왔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허리가 아파서 젼딜 수가 있니껴? 그래서 지황을 찧어 허리에 부치고 선인장도 두들개서 부치고 했는데도 헛거디더.
김채연씨는 21살 어린 나이에 신림의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고부터 평생 나무를 이고 울진장에 내다 팔고, 남의 집에 모심어주고, 밭을 매주러 다니면서 먹고 살았다.김씨 집 앞 수돗가에서 장독 대여섯 개가 넘어가는 겨울햇살을 받고 있다
한때 김씨가 사용했던 나무 보탕“깔비(솔가리)를 끌어서 재(쌓아) 놨다가 겨울이면 울진장에 나가서 팔아먹고. 또 시아재비(시아주버니, 여기서는 시동생)들이 저 아꾸산(악구산)에 있는 산판에서 벌어먹었는데, 산판에서 나오는 소낭구(소나무) 굵은 가지들을 제무시에 싣고 오다가 우리 집에 떨차(떨어뜨리어) 놓으면 일일이 도끼로 쪼들어서 장에 내다 팔고 그랬니더. 산에 낭구를 하러 가면 큰 거는 그 자리에서 톱으로 잘라서 요만큼 맨들어가지고 머리에 이고 집까지 왔어요. 그리고 보탕(모탕)에 낭구를 놓고 도끼로 쪼개요. 내가 낭구도 잘 쪼갰니더. 낭구를 하러 다니다가 굴러서 등때기 뼈도 뿌러지고(부러지고) 그랬어요. 한번은 저 뽁두기재에 가서 솔가지 쳐낸 거로 둥치를 맹글어서(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오다가 비탈에서 군부러(굴러) 가지고 집으로 어떻게 겨우 돌아왔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허리가 아파서 젼딜 수가(견딜 수가) 있니껴? 그래서 지황을 찧어 허리에 부치고 선인장도 두들개서 부치고 했는데도 헛거디더. 그래도 우째요? 당장 입은 꺼실가야(먹고 살아야) 되니까, 또 다시 아픈 허리를 안고 낭구를 해서 장에 내다 팔고 그렇게 살았지. 깔비 뭉치나 장작단을 머리에 이고 울진장에 갈 때는 두꺼우 바우(두꺼비 바위) 있는 데로 해서 가마이로 넘어가요. 신작로로 가면 돌아서 가고, 가마이로 가면 질러가거든. 가마이 앞에 있는 물은 돌다리가 없을 때니까 여름이나 겨울이나 고무신을 벗고 건너갔고요. 물이 많으면 비래질(비래길)로, 토끼질 같은 데로 돌아서 가고. 할루는 그 질(길)로 돌아가다가 신발도 잃어버리고 그랬어요.”
예전에는 울진읍내와 바닷가에 살던 집들은 모두들 산골 사람들이 이고 지고 온 나무를 사서 불을 땠고, 그런 만큼 촌에서는 너도나도 나무장사를 했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낭구를 이고 울진장에 가면 하루 종일 장바닥에 앉아서 살 사람을 기다리니더. 요새 고기 방티(함지박)같이 낭구단을 죽 늘어놓고 사갈 사람을 기다리는 거지요. 신림사람은 신림사람대로 쭉 모여 있고, 쉰배미, 대항리(대흥리) 미파골, 깨밭골에서도 울진장에 낭구를 팔러 넘어 왔니더. 깨밭골 사람들은 이곳 신림으로 오지 않고, 저기 오데노? 가진재로 빠져서 울진장엘 왔지요. 그때는 촌에서는 낭구 장사를 안 한 사람이 없었니더. 그러다가 울진시장 안에 전깃불이 들어올 때까지도 낭구를 못 팔면 아는 사람 집에 맽개(맡겨) 놓고, 한숨을 쉬면서 다시 집으로 걸어서 돌아 왔니더. 아는 사람 집에 낭구단을 맽길 때도 안 된다는 거로 통사정을 해서 맽기고는 했는데, 어떤 때는 그 집에서 한두 가지씩 빼 씨고(쓰고) 그러디더. 한두 가지씩 빼 써도 할 수 없잖애요? 울진장에 갔다가 안 팔린다고 이곳 신림까지 다시 이고 오지는 못하니까. 나무둥치 한단에 많이 받으면 백원, 못 받을 때는 팔십원도 받고 그랬니더. 시장에서 손님이 나무를 사서 집까지 여다(이고 가져다) 달라면 또 여다 주어야지. 공석도 여다 주고, 선내도 여다 주고, 말루도 여다 주고, 대나리도 여다 주고 그랬니더. 멀개나(멀거나) 말개나(안 멀거나) 사주기만 사주면 여다 줬지요, 팔아줘서 좋다꼬. 하루에 낭구를 이고 울진까지 두 행비(왕복)를 했던 적도 있니더. 집에 된장이 다 떨어져서 새벽같이 낭구를 이고 가마이까지 가서 된장과 바꿔서 집에 여다 놓고, 다시 낭구를 묶어서 울진까지 가서 팔고 그랬지. 그때만 해도 나라에서는 산에서 낭구를 하는 것을 금지 했니더. 가마이 같은 곳에서는 순경이 낭구를 단속한다고 기다리고 있다가 뺐기도 하고 그랬어요. 하루는 순경한테 안 걸릴라고 새벽 일찍 대나리까지 가서 낭구를 팔고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소죽을 끓이고 있디더.”
김씨는 겨울이면 나무장사, 봄부터 가을까지는 이웃집의 농사를 거들어주면서 끼니를 이어갔다.
김씨는 오후 서너시면 항상 좁고 어두컴컴한 정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군불을 지핀다
“정말 죽지 못해서 억지로 살았니더. 겨울이면 낭구 장사를 하고 여름이면 온 집으로 모심어 주러 다니고, 밭 매주러 다니고 그렇게 입을 꺼실구고 살았어요. 모심기할 때 두벌 점심으로 새참을 주면 내 혼자 우예 먹니껴?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시어마이는 우예고요? 한 점심은 집에 갖고 와서 두 고부가 먹고 그랬어. 그때는 모심기를 하러 가면 두벌 점심으로 아칙(아침)에는 주로 술을 주고, 오후에는 저녁삼아 밥을 주고 그랬니더. 그러면 내 먹을 밥을 가지고 와사(와서) 시어마이하고 저녁이라고 나눠 먹었지. 시어마이를 굶길 수는 없으니까. 새벽으로 모심기를 갈 때도 시어마이는 밥이나 죽이라도 차려주고 나는 굶고 가요. 일하러 가면 나는 새참으로 밥이나 막걸리 한잔이라도 얻어 먹는다꼬. 아이고 참말로.”나물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배가 고마 장두가 끊어지네. 한가득 나물을 해서 백프로 보재기에 싸고, 싸리 껍데기를 삐깨 묶어서 이고 높은 재를 올라오면 못 올라와요. 배는 고파서 등허리에 달라붙는데, 저 뽁두기재를 올라올 때면 죽을 것 같았니더.
김씨는 예전에 살기 어려울 때는 나물을 주식삼아 먹고 살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항상 모자라기만 했었다고 말한다.
“젊을 때는 몇 십리 산길을 걸어서 저 멀리까지 나물하러도 많이 다녔니더. 날마다 다녔지 모. 보부천과 옥생이가 어디라고 그기까지 참나물도 하러 다니고, 아꾸산도 다니고, 에밀란 산성도 다니고, 장구령도 다니고 그랬니더. 나물하러 갈 때 감자를 찧어서 넣고 절범벅(보리겨 범벅)을 요만큼 싸가요. 나물을 하다가 점심때가 돼서 먹고 나면 금방 또 배가 고파져요. 나물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배가 고마(고만) 장두(창자)가 끊어지네. 한가득 나물을 해서 백프로(나일론) 보재기(보자기)에 싸고, 싸리 껍데기(껍질)를 삐깨(벗겨) 묶어서 이고 높은 재를 올라오면 못 올라와요. 배는 고파서 등허리에 달라붙는데, 저 뽁두기재를 올라올 때면 죽을 것 같았니더. 다른 집은 식구들이 도중에 마중이라도 나오디더만은, 이 집은 마중도 안 나왔어요. 봄에는 눈만 뜨면 나물을 하러 다녔니더. 쌀 한 주발에 나물은 대여섯 주발씩 섞어서 끓이니 나물이 얼마나 헤프요? 나물을 두 동이씩 담가놔도 하루에 없어져요. 아침에 끓이지, 점심때 끓이지, 저녁에 또 끓이지, 날마다 나물로 살았니더. 나는 또 밥을 빨리 못 먹어서 식구들이 한군데 모여 먹으면 항상 못 얻어먹어요. 급히 먹으면 얹히니까(체하니까) 굶기도 자주 했고요. 그러니 시어마이가 ‘니는 모가지도 안 생겼나?’ 그러면서, 요런 작은 탕 그릇에 죽을 조금씩 따로 떠주고는 했니더.”신림국민학교 바로 옆에 사는 김채연씨는 교사들 하숙을 치고 공사판 인부들 밥을 해주면서 먹고 살았던 때가 그나마 자기 평생 가장 풍족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우리 아(아들)가 철이 들면서부터 내가 선생들 하숙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바로 옆에 신림국민학교가 크고 학생 숫자도 많았니더. 선생들이 하숙비로 한달에 8천원씩 주디더. 교감도 이집에 와서 밥을 먹고 학교 사택으로 자러 가고, 교무선생은 이집에 와서 먹고 잤고요. 핑교사(평교사)도 이집에서 먹고 자고. 이 집이 작은 방이 시낱(세개)이시더. 그리고 그때 신림에 사방(사태막이) 공사가 많았는데, 내가 사방 일꾼들 밥을 해주었어요. 사방 일꾼들은 밥값으로 돈이 아니라 밀갈기(밀가루)하고 보리쌀을 주었니더. 사방 일꾼들은 일당으로 돈 대신에 밀갈기 같은걸 받더라고요. 그렇게 고부하고 아하고 세 식구가 살면서 하숙을 친 거지요. 어떤 때는 하숙을 하는데 지붕에서 비가 새서 마루를 지나다닐 수가 없어요. 그때는 이집이 짚으로 지은 초집이었는데, 짚이 썩으면서 비가 새면 뻘건 피 같은 물이 흘러요. 닦고 또 닦아도 어데 없어지니껴? 그러다가 몇 년 뒤에 지붕 개량 한다꼬 남의 돈 삼십만원 빚을 내서 지붕을 고쳤니더. 돈은 뒤에 하숙을 해서 갚고요. 전기도 몇 년 뒤에 겨우 남의 돈을 빌려서 넣고, 또 동네 송이산에서 송이를 따서 갚고 그랬니더. 내가 사방 일꾼들 밥을 16년 했고, 선생 하숙을 20년 쳤니더. 정말 손끝에 물 마를 새 없이 했니더. 그런데도 무슨 팔자가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리껴?”김씨가 살고 있는 집의 목재는 자귀로 쪼아서 다듬은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당가 늙은 감나무 옆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화장실아가 처음에는 전축, 라지오 그걸 넉달 동안 배우대요. 그 다음 세달은 텔레비 이걸 배우고요. 그렇게 꼬박 칠개월을 배웠단 말이시더. 아가 그걸 배울 때 저 앞에 논 두마지기 겨우 사 두었던 걸 팔았니더. 도저히 안 되잖니껴?
김씨는 지금까지도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돈이 없어서 못 보낸 것을 가슴 아파하며, 그래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되뇐다.
“아는 신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간다고 또 얼매나 울고불고 하는지. 아 이름은 최원주시더. 그런데 우예 중학교를 보냈니껴? 아가 쪼꼬만할 때부터 시어마이와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낭구를 머리에 이카(올려) 달라고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 겨우 세사람 목숨이 살았는데. 산에서 낭구를 해오거나 이웃에 살던 시동생들이 낭구를 해다 주면 내가 낭구를 깨사(쪼개서), 그렇게 이고 울진장까지 가서 팔아서 목숨 부지했는데. 그렇게 사다보이(살다 보니) 아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겠다고 하는데 우예 보냈니껴? 당장 입도 못 꺼실구는데. 그러다보이 아가 검정고시를 치겠다면서 서울로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신림국민학교 교장 아들이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리로 올려 보냈니더. 한달에 하숙비를 8천원씩 부쳐주었지요.”
김채연씨의 외동아들 최원주씨는 대구에서 전자제품 기술학원을 다녔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지만 대학교 보낼 돈이 어디 있니껴? 돈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학원을 가겠다고 하디더. 그래도 내가 하숙을 하고 있고, 시어마이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학원을 보내주자고 해서 대구에 있는 학원에 보냈지요. 처음에는 전축, 라지오(라디오) 그걸 넉달 동안 배우대요. 그리고 그 다음 세달은 텔레비 이걸 배우고요. 그렇게 꼬박 칠개월을 배웠단 말이시더. 아가 그걸 배울 때 사방 일꾼들 밥해주고, 저 앞에 논 두마지기 겨우 사 두었던 걸 팔았니더. 아가 대구에서 자취방도 얻어야 하고 밥도 해먹어야 했으니, 그 논 두마지기를 안 팔수가 없었지요. 도저히 안 되잖니껴? 그러니 두 고부야 우예 되든 말든 하나밖에 없는 아는 학원을 시키자 그래가지고. 그래도 힘들게 학원을 다녀서 한푼이라도 번다꼬 직장에 들어갔어요. 그때 아가 한달에 이만 오천 원 받았는데 많이 번다고 했네. 그때는 아덜 군대도 다 방위를 받을 땐데, 아가 또 방위한다꼬 스물세 살인가 그때 갔어요. 이곳 신림에 그때 너이가 나왔는데, 그때도 다 빽이 있으니 좋은 대로 떨어지고 그랬는데, 우리 아는 개코도 없는 집에서 태어났으니 방위도 힘들게 받았지. 안동 36사단에 가서 훈련을 받고 와서 대구 어느 동사무소에서 방위를 받았는개라. 세상천지에 외동이고 어마이와 할마이를 모시고 산다면 6개월이면 방위를 제대한다는데, 돈도 없고 빽도 없으니 그것도 안 되디더. 대구에서 방위를 받으니 더 힘들고 돈도 더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 무진 애를 먹었어요.”나중에는 골에 바람이 들어가서 하나밖에 없는 아가 짚불 사라지듯 하디더. 나중에 보니까 홍단이라고 하던도, 얼굴이 점점 벌게지더니 가뻐래. 홍단이라고 그럴 때는 자꾸 정낙을 찔러서 피를 뽑아야 된다는데 내가 그걸 알았니껴? 참말 짚불 사라지듯 하디더.
김씨의 아들 최원주씨는 어릴 때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얻은 병인 귀젖으로 평생을 고생하다가, 스물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꽃도 채 피워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뒤로 하고 앞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아가 어릴 때 여름에 목욕한다고 물에 들어갔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서 귀젖(귀에 물이 들어가서 고름이 나오는 귓병)을 앓았니더. 그런데도 약도 제대로 못쓰고 장추(긴 세월) 있었더니,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귀젖이 나오더라고요. 아는 귀젖이 나올 때마다 병원에 한번 가보자고 졸랐지만 오데 돈이 있어야지요? 그러다가 결국은 갔지 모니껴. 내가 식모라도 해서 병원비를 벌었어야 했는데. 아가 돈 번다고 혼자 대구에 보내놨더니, 음석(음식)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그러면서 귀젖이 크게 도졌어, 고마. 그게 숱한 약을 해도 안 고쳐지고. 그때는 집에 전화기가 없고 동네 이장 집에 전화가 있었는데, 그 집에 하루에 서너번씩 대구 병원에서 전화가 와요. 아가 위중하니까 빨리 오라꼬.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마실에 살던 시동생하고 대구에 올라 갔니더. 어느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올라갔더니, 아를 이쪽 머리를 다 깎아놨대. 내가 아 엄마라고 하니까 수술하기 전에 어떤 서류를 주더니 지장을 놓으라고 하대요. 만에 하나 수술하다가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적힌 서류라면서. 그러니 우째요? 우선 아가 아파서 죽는다고 울고불고하니 수술을 받아야지. 그래 수술실로 들어가는걸 보고는 삼촌을 병원에 놔두고 나는 아가 자취하는 방으로 돌아와서 기다렸지. 그런데 여섯 시간이 지나도 전화가 없어요. 아이고, 이게 아무래도 죽은 모양이다 그러면서 나는 간장이 타는 게라.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있다 보니까 전화가 왔어요. 그 질로 대구 지리를 모르니 택시를 타고 그 병원으로 찾아갔지. 병원에 도착해서 수술이 끝난 아들 얼굴을 보니, 귀를 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째 놨는데, 귀가 따로 떨어져서 얼굴 앞쪽으로 오디더. 골 안이 훤하게 다 들여다보이는 게 정말 머릿속이 허광이래. 구미가(구멍이) 이만큼 뚤버졌지, 골이 꽉 안 차디더. 아이고, 그걸 보고 있자니 가슴은 또 운매나(얼마나) 아프니껴? 그리고 아들 머리에 붕대는 얼마나 칭칭 감아놨는지 밤에 잠 한숨 못자고 울고불고 난리지. 하루에도 몇 번씩 굵은 솜 심지를 그 구미(구멍) 안에 넣어서 수술 자리의 고름을 닦아내지. 나는 병원에 남아서 아들 자리를 지키고, 아 삼촌은 수술비를 마련한다고 신림으로 먼저 내려가고 그랬니더.”
겨우 입만 먹고 사는 형편이던 김씨는 아들의 병원비를 댈 재간이 없어서 보름 만에 귀젖 수술을 받은 아들 최원주씨를 데리고 울진으로 내려온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한 보름정도 있다가 집으로 데리고 내려 왔니더. 돈이 없다고 하니 병원에서 아를 퇴원시키라는데 어떡하니껴? 그 무렵이 새마을운동으로 다들 전기 넣고 집 개량을 할 때였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전기도 못 넣고 집개량도 못 했니더. 안 그래도 아한테 병원비가 들어가 놓으니 빚은 태산 같은데, 집개량이 문제니껴? 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여름이었는데 더워서 방안에 있을 수가 있니껴? 더군다나 그때는 초집이었는데 운매나 덥니껴? 그래 아를 마당에 비닐을 깔아서 눕혀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후라시(손전등)로 불빛을 비춰가면서 고름을 닦아냈지요. 처음에는 솜 심지가 일곱 개 들어가던 상처자리가 점점 새살이 돋아나면서 세 개씩 들어가더라고요. 한여름에 아를 마당 응달에 눕혀놓고 밭 매러 나갔다가 오면, 그곳이 자글자글 끓는 양달이 되어 있니더. 따가운 햇살이 비쳐서 난닝구(속셔츠)를 입혀둔 곳을 빼고는 살이 햇볕에 타고 허물이 다 벗겨지고는 했어요. 어깨도 다 타고 얼굴 뽈때기(볼)도 다 타고 그랬지. 그때는 아가 수술 후유증으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집에 할매가 있어도 무거워서 들어 옮기지도 못했거든. 햇빛에 다 타서 허물이 홀딱 벗겨진 아픈 아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또 어떻겠니껴? 그러면 일하다가 집으로 잠깐씩 와서 겨우 응달로 다시 옮겨놓고, 밥이라고 보리밥 엉커런걸 주면 겨우 입을 달싹거리면서 조금씩 받아먹고 그랬니더. 그러면 나는 다시 밭 매러 나가고. 참말로 그렇게 살았니더. 그런데 나중에는 히깨(헛일)래. 덥다고 노상 밖에다 눕혀놓고 수술 자리를 들추어가면서 솜 심지로 닦아내고 그랬더니, 나중에는 골에 바람이 들어가서 하나밖에 없는 아가 짚불 사라지듯 하디더. 나중에 보니까 홍단이라고 하던도, 얼굴이 점점 벌게지더니 가뻐래. 홍단이라고 그럴 때는 자꾸 정낙(침-鍼)을 찔러서 피를 뽑아야 된다는데 내가 그걸 알았니껴? 참말 짚불 사라지듯 하디더. 아들 나이 스물여섯 살에 그래 보내 삐랬는데, 시어마이까지 그해 상새(상사)가 났니더. 우리 아가 정월달 지 생일 달에 갔고, 시어마이는 음력 시월 스무 낫날이 제사니까 스무 삿날에 세상을 떴니더. 칠십 둘에 상새가 났어.”
김씨는 지금에서야 아들이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며 연신 울먹인다.
“원주 사진도 여러 장 있었는데, 아들이 어마이 내삐리고 갔을 때 나도 다 갔다가 내삐랬니더. 아이고 무세라, 지금 생각하면 사진이나 한 장 놔둘걸 싶지요. 그랬으면 정 못 참도록 보고 싶을 때 한번씩 꺼내 봤을 텐데요. 콧대가 쭉 빠진 게 아도 참 잘 생겼니더. 얼라 때는 어디 엎고 나가면 서로 이쁘다고 손을 안 놓고는 했으이까네. 옛말에 아덜(아이들)이 남의 입 타고 손 타면 안 좋다더니, 어마이를 내삐리고 그렇게 일찍 가잖니껴? 벽에 걸린 저 아바이 사진도 없었는데, 요 아랫집 시동생 딸아(여자 아이)를 내가 키웠니더. 자식이 없으니 내 자식같이 키웠는데, 그 딸아가 저 아바이 주민등록 사진을 갔고 가더니 저렇게 확대를 해서 걸어놨어요.”어른들이 결혼 말을 띠면 살아도 그 집 구신이 되고, 죽어도 그 집 구신이 되라고 했잖니껴? ‘재가하면 모하노? 내 한몸 희생하면 죽고 없는 어무이, 아부지 뼈골이라도 편안하게 앉히잖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신랑인지 남방인지 없다고 새로 시집을 가면 어무이 아부지 뼈골인들 편하겠나?’ 하고 생각했니더.
김씨는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난 다음에 왜 재가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간혹 있다면서, ‘여자는 죽어도 시집 구신이 되어야 한다는 어무이 아부지 말씀을 어기면 어무이 아부지 뼈골이 편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고 말한다.“한해에 아들과 시어마이도 가고 없고, 그렇게 몇 십 년 혼자 살다 보이까네 늙어 빠지고 몸은 빙신이 다 됐니더. 정말 이제는 아무 노릇도 못하지. 그나마 국가에서 돈을 안주면 나는 벌써 굶어죽었거나 얼어 죽었겠다 싶어요. 아무리 동구간(동기간)이 있다고 해도 한두 번이지요. 며칠만 둘라 노도(드러누워도) 싫다고 할 거고, ‘왜 젊은 날에 새 시집을 안 갔노?’ 그런 얘기도 나올 테고. 주변에서 ‘왜 재가를 안 했노?’하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니더. 옛날에는 어른들이 결혼 말을 띠면 살아도 그 집 구신이 되고, 죽어도 그 집 구신이 되라고 했잖니껴? 어무이 아부지가 했던 그 얘기가 머릿속에 박혀서, ‘재가하면 모하노? 내 한몸 희생하면 죽고 없는 어무이, 아부지 뼈골이라도 편안하게 앉히잖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림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는데, 신랑인지 남방인지 없다고 새로 시집을 가면 어무이 아부지 뼈골인들 편하겠나?’ 하고 생각 했니더. 부모가 주낀(말을 한) 한마디에 새 시집을 못가고 살았니더. 그리고 설마 내 혼자 이렇게 살다보면 이웃에 작은집 조카들이 있는 게, 내 일신 하나 가축해주리라 믿고 살기도 했지요. 그렇게 내가 시월(세월)을 보내코(보내고) 살았니더. 그런데 조카들도 시시마끔(제각각) 먹고 살기가 힘든데 우예니껴? 지금도 밤에 자다가 곽중에(갑자기) 다리가 땡개(땅겨) 올라가면 퍼떡 일어나서 침을 놔서 피를 조금 빼야 한참이라도 누워 있지, 못 눕니더. 살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차라리 쌍둥이를 낳았더라면 하나라도 남았을 테고, 그거라도 의지하고 살았으면 덜 외로웠을 텐데 그렇니더. 첫 아 낳고 신랑인지 서방인지는 어디로 갔는지 뒤통수도 못보고 행방불명 돼 삐리고(돼 버리고), 스물여섯 살 먹은 하나밖에 없던 아들도 어마이 내삐리고 가 버랬지. 참말 이런 팔자가 다 있니껴?”
김씨는 아들을 저 세상으로 앞세우고 난 다음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만 질긴 것이 목숨이더라며 말을 잇는다.
“아들 보내고 내가 죽을라꼬 열히(열흘)를 굶었니더. 굶어도 안 죽디더. 그 전에 사방 일꾼들 밥해줄 때 시어마이가 속을 자꾸 앓으니까 어디서 야핀(아편)을 조금 구해놨었니더. 속 아플 때는 야핀을 조금 물에 타서 마시면 잘 듣잖니껴? 그래서 이번에는 그걸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시어마이가 놀래서 밑엣 집 조카들한테 얘기해서 다 뺐갰잖니껴? 얼마 있다가 수면제를 사다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또 뺐갰니더. 그래서 그 질로 다시 죽으려고 열히를 굶었니더. 그래도 안 죽디더. 남자는 일주일을 굶으면 죽고 여자는 열히를 굶으면 죽는다는 얘기도 다 헛개디더. 그렇게 굶으니 몸에 병만 들고, 자식은 자식대로 잃고. 그때는 참말 그랬니더. 살기가 그래 싫디더.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면 속이 편하겠지 싶더라고요. 시동생들은 다 신림에 사니더. 요 앞집이 바로 밑에 시동생집인데, 그 시동생은 바람을 맞아서 벌써 세상을 떠났어요. 지금은 시동생 한명이 신림에 살고 있는데, 아들집에 갔는지 딸네 집에 갔는지 없니더. 시동생이 가까이 살아도 먹고 살기가 힘든데, 큰집 돌아보고 형수 돌아볼 여유가 있니껴? 시누이 한명은 부산 있다가 김해로 이사를 갔지요. 셋째 시동생은 젊을 때 제주도 훈련소로 갔는데, 그기 물이 나쁘니까 병이 들어와서 집에서 죽었고요. 훈련소에서 죽었으면 나라 돈이라도 타 먹을 낀데 집에 와서 죽었으니 돈도 못 타 먹잖니껴? 그러니까 신랑 형제는 네명이지만 한명은 6.25때 행방불명됐고, 또 한명은 제주도 훈련소에 갔다가 죽었으니 단 둘이 이곳 신림에 살고 있었지요.”정지 아궁이에 때는 장작을 산다고 먹고 싶은 고기 한 마리 제대로 못 사 먹니더. 늙어 빠지니까 온 뼈마디가 쑤시고 절리는데 먹는 거야 우예 되든지 말든지 우선 방이 뜨세야 살지요. 방이 추우면 못 사니더.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낭구시더. 항상 낭구가 제일 걱정이래요.
김씨는 나이가 들어 거동도 불편해지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면서부터 힘에 버거워서 조상들의 제사를 시동생네와 나누어서 모신다고 말한다.
“집안에서 물려오는 제사가 여섯 자리래. 그러나 혼자 사니 우째요? 시어마이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내가 제사를 다 모셨니더. 제사 여섯 자리에 추석날, 설날이 있으니 한해에 여덟 번 제사를 지냈지. 그때는 시아재비들도 제사를 보러 오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신랑이 행방불명되고, 아들 잃고, 시어마이도 세상을 떠나고, 나도 늙어빠지니 조상들 제사 모시기가 점점 힘들어 지디더. 그래서 시동생네와 제사를 분가 했니더. 우선은 내 입이라도 꺼실가야 제사를 모시잖니껴? 내가 우에(위에) 시할바이, 시할마이를 모시고, 시어마이 시아바이는 셋째 시동생이 모셔가고, 그렇게 분가를 했니더. 내 아들 원주만 살았어도 시동생들이 제사를 달라고 해도 안주지요.”김채연씨는 국가에서 보조하는 최저 생계비로 생활해온지가 벌써 여러 해 째다.
특히 김씨는 아궁이에 장작을 때고 구들장을 덥혀서 방을 난방하고 있는데, 쌀값보다도 장작 값이 더 많이 든다면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나무’라고 말한다.“나라 돈을 한달에 이십만원 조금 더 타서 정지 아궁이에 때는 장작을 산다고 먹고 싶은 고기 한 마리 제대로 못 사 먹니더. 늙어 빠지니까 온 뼈마디가 쑤시고 절리는데(결리는데) 먹는 거야 우예 되든지 말든지 우선 방이 뜨세야(따뜻해야) 살지요. 방이 추우면 못 사니더.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낭구시더. 항상 낭구가 제일 걱정이래요. 누가 왜 보일러를 안 넣느냐고 묻는데 참 딱하기도 하지요. 보일러를 공짜로 넣어주어도,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보일러 기름을 넣니껴? 가스렌지도 얼마 전에 겨우 하나 장만해서 밥과 반찬은 거기다가 해먹어요. 밥반찬을 하면서 장작을 때니까 낭구가 얼마나 헤픈지 무섭고, 차라리 가스렌지가 싸게 먹히디더. 먹는 쌀도 민에사(울진읍에서) 이십킬로짜리 한포에 이만원씩 돈을 주고 사지요. 그러면 영세민 돈 탈 때 거기서 이만원 떼고 주거든. 혼자 먹으니 쌀 한포면 두달을 먹어요. 돈도 어떨 때는 조금 더 나오고, 어떨 때는 적게 나오고 그래요. 국민연금이라도 넣었으면 좀 더 타 먹을 텐데, 돈이 없어서 국민연금도 못 넣었니더.”
김씨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목재는 자귀로 쪼아서 다듬은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울진 근동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옛집이다.
“이집은 내가 시집올 때부터 이대로 였니더. 방이 시나(세개) 쫄로리(쪼르르) 붙어 있고, 앞으로 나무 마루가 있고요. 그전에는 정지 옆쪽에 소 마구(마구간)가 붙어 있었는데, 소를 안 키우면서 마구를 없애고 정지를 좀 넓혔니더. 저 지둥(기둥) 좀 보소. 전부 다 짜구(자귀)로 다듬어서 꺼칠꺼칠하잖니껴? 예전에는 이 마실에 변변한 목수도 없고 하니까, 산에서 베어온 낭구를 급하게 짜구질로 저렇게 맨든 거 같네요. 아이고, 그런데 이런 집이 우풍(외풍)이 세서 겨울이면 얼마나 추운지 모르니더. 여름이면 또 덥고요. 저 옆에 밴소(변소)도 대충 뒤와 옆을 가리고 앞은 저렇게 툭 트여 있는데, 밑에 큰 단지만 하나 묻어 놨니더. 비가 많이 올 때는 저 우에 도로에서 빗물이 흘러서 단지로 자꾸 드가니더. 그러면 맨날 물 퍼낸다고 정신이 없어요. 이집도 옛날에는 잘 살았다고 하디더. 농사를 크게 지어서 나락을 불영사로 옮겨다가 불영사를 짓는데도 크게 보탰다고 해요. 우리 시할바이 시할마이가 원래 딸 둘밖에 없었는데, 불영사를 짓고 나서 우리 시아바이를 낳았다니더. 그때 불영사 주지가 설원(설운)이 스님이라디더. 그러다가 이 우에 용천사 절이 생기고부터 나는 용천사에 다니지요. 용천사를 지을 때 스님이 한동안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다녔고, 뒤에는 그 절에 가서 공양주 노릇도 하고 그랬지요. 절을 다 짓고 나니까, 밥해줘서 고맙다면서 스님이 돈을 삼십만 원인가 주디더. 그중에 십만 원을 되돌려 주었니더. 그 돈으로 부처님 전에 양초라도 사서 불을 붙이라고요. 공양주도 하고 그러다보이 용천사가 편하고 내 절이나 한가지래요. 스님들이 절을 비울 때는 부처님 전에 청수도 떠 놔야 되고 촛불도 켜야 하니까 거기서 묵기도 하고요. 지금이야 용천사에 공양주도 있고, 나이가 드니까 초하룻날하고 보름날만 절에 가니더. 용천사 지을 때도 다리가 아파서 고상고상(고생)했니더. 무세라.”사진을 찍는다니까 “머리도 만지고 좀 이쁘게 해 있어야 될 시더”하며 차라리 활짝 웃는 김채연씨다.
지금도 오후 서너시면 좁고 어두컴컴한 정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쌀보다 더 무섭다는 장작을 아껴가며 군불을 지피는 김채연씨다.
돌아 나오는 길, 함석을 둥그렇게 말아 만든 굴뚝에서는 회색 연기가 허공으로 가느다랗게 김씨의 한숨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