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바위에 붙은 게 김인지 풀인지 구분이 안 됐어요' 후포 삼율리 김은자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1.03.0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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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여성들에게 각자의 인생을 한권의 책으로 생각하고 각 시기별로 제목을 붙여보라고 했더니 ‘고난의 시대’, ‘중압감의 시대’, ‘만족의 시대’로 묘사하거나, 또는 ‘곤궁기’, ‘황금기’로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얘기가 아니라 호주의 매콰리대학과 시드니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들이 공동으로 40대 이상 된 여성들의 인생 역정에 대한 시대별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이다.

이 조사에 응답한 여성들은 고달팠던 일터와 결혼 생활, 스트레스, 불안 등으로 이어지던 청장년 시절에 비할 때, 60대 이상이 되면 그동안의 거친 항해를 무사히 끝마치고 파도가 잔잔한 항구로 진입하는 시기로 받아들인다는 분석이다.

호주에서 실시된 이 연구는 노년층이 젊은 층에 비할 때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진다는 기존의 연구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목적으로 실시됐다고 한다.

자신 앞에 닥쳐드는 세파를 고스란히 맞으며 보낼 수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보다도 커다란 변화와 상실감 없이 잔잔한 행복을 구가하는 나이든 시기는 척박한 이 땅에 태어나서 모진 세월을 견뎌온 60대 이상의 여성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외삼촌이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선생님과 친구세요. 그 외삼촌이 영화감독을 한다고 다니면서 친정 집안을 말아먹은 거지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집에서 지내다가 처음에는 송월타올에서 얼마동안 근무했고, 나중에는 미원상사에서 일했어요.

김씨(우)의 10대 시절, 여동생과 함께
후포면 삼율리에 살고 있는 김은자(63세)씨는 부산이 고향이다.
“경남 양산군 장안면 좌천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부산 기장군이 되었지요. 그곳에서 아홉 살까지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왔어요. 좌천국민학교에 입학해서, 부산 수정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다시 동래 온천장으로 이사를 와서 금정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5회로 졸업했지요. 중학교는 진학을 못했고요.”

김씨가 국민학교를 자주 전학 다닌 이유는 아버지가 세무 공무원으로, 어머니가 교사로 근무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무서에 근무를 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셨으니 자식들도 덩달아서 자주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경주 김씨 성에 복자 종자를 썼고요, 어머니는 윤씨 성에 수자 복자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이십오 년쯤 됐고요,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십년정도 됐네요. 두 분 모두 부산에서 계속 생활하시다가 세상을 뜨셨지요.”

김씨는 아들 하나, 딸 다섯의 육남매 가운데 넷째인데, 특히 김씨의 오빠 창욱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아폴로 우주선 제작에 참여했던 공학박사라고 소개한다.
“전부 6남매지요. 위로 양순(70세. 부산 기장)과 옥순(67세. 부산)이라는 언니가 둘 있고, 그 다음에 저고요. 밑으로 인자(61세. 부산)와 경자(58세. 부산)라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위로 창욱(75세)이라는 오빠가 한분 계신데, 미국에서 살고 있어요. 국내에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50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더 했지요. 예전에 미국에서 띄워 올린 우주선 있잖아요? 아폴로인가, 그 우주선 만드는데 공학박사로 참여했어요. 세계 최연소 우주 박사로 참여했는데, 지금은 정년을 마치고 집에서 생활하고 있고요. 조카들은 다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케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근무했고요. 뉴욕에 살다가 퇴직하고 LA로 옮겨서 노후를 보내고 있어요. 자주 연락하지는 못하지만, 큰 경조사가 있거나 하면 한 번씩 국내로 들어오고 그랬지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오빠가 못 나왔어요. 마침 그때 미국에서 9.11테러가 있었잖아요? 2001년인가 그때 9.11테러가 났는데, 그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저는 공부를 많이 못했지만, 오빠는 공부를 많이 했어요. 사실 오빠가 공부를 하는데 집에서 많이 보태주지는 못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넉넉하게 살 때가 아니었고, 우리 친정집도 윗대는 잘 살았었다고 하는데 크게 넉넉하지는 못했거든요.”

김씨는 한때 경남 양산군 장안면에서 알부자 소리를 들었던 친정집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려준다.
“친정집이 원래는 양산군 일원에서 굉장히 잘 살았던 집이었다고 해요. 우리 어머니 밑의 남동생인 외삼촌이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선생님과 친구세요. 그러다보니 김구선생과 외삼촌이 함께 찍은 아주 큰 사진도 친정집에 걸려 있고 그랬지요. 외삼촌은 김구선생과 친분을 과시할 만큼, 그 당시에 인맥의 폭이 아주 넓었던 분이었지요. 그런데 그 외삼촌이 영화감독을 한다고 다니면서 친정 집안을 말아먹은 거지요. 그 어렵던 시절에 영화가 어디 돈이나 됐겠어요? 큰 밑천을 들여서 영화를 찍어도 돈을 제대로 못 버니 집에서 계속 돈을 끌어다 댄 거지요.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안 가세도 덩달아서 기울게 된 거고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또 김두한씨와 절친한 친구세요. 커 오면서 항상 듣던 얘기니까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거고, 그 정도밖에 몰라요.”

부산 동래에서 금정국민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집에서 지내다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송월타올에서 경리로 얼마동안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미원상사에서 일했지요. 왜, 음식 만들 때 사용하는 미원 있잖아요? 부산 거제리에 미원공장이 있었거든요. 결혼하기 전까지 죽 미원공장에서 일했어요.”

김은자씨는 1968년 8월 27일 두 살 연상의 서상복씨와 결혼했다

결혼식 후에 우인들과 함께

남편이 된 사람이 자기 차례가 되자,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더니 아주 쓸쓸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표정까지 하도 슬프게 불기에‘아, 저 사람은 항상 고민이 많은 사람 같구나’싶으면서도, 제 눈에는 그저 멋있게 보이기만 하더라고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미원상사에 근무하던 김은자씨는 21살 되던 해에 결혼한다.
“21살 때 결혼했어요. 나중에 사촌 동서가 된 분이 결혼을 해서 친정집 옆에 살고 있었어요. 언니, 동생하면서 참 친하게 지냈지요. 그 집이 우리 친정집 도움도 참 많이 받았고요. 후포 시골에서 큰 도시 부산에 내려와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 친정아버지 어머니가 많이 보살펴 주었지요. 그런 인연으로 어느 날 그 사촌동서 되는 언니가 후포로 내려갈 일이 있는데 함께 놀러가자고 하더라고요. 마침 그때 저는 회사에서 휴가를 맡아서 집에 쉬고 있을 때였어요. 그 언니 말이 ‘후포가 반촌이기는 하지만 참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라면서요. 그래서 안 된다고 하는 친정 엄마를 삼일동안 졸라서 후포로 놀러 내려온 거지요. 후포로 내려와서 거일2리에 있던 그 언니 집에서 먹고 자면서 두 달 정도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남편 될 사람도 만났고요. 후포에는 나중에 동서가 된 분들이 여러 명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마땅하게 놀만한 곳이 없으니, 여럿이 모이면 그저 밖으로 놀러 다녔어요. 젊은 남녀 여러 명이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휘파람도 불면서 자기가 가진 장기를 자랑하고는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남편이 된 사람이 자기 차례가 되자,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더니 아주 쓸쓸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표정까지 하도 슬프게 불기에 ‘아, 저 사람은 항상 고민이 많은 사람 같구나’ 싶으면서도, 제 눈에는 그저 멋있게 보이기만 하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여러 동서들이 자꾸 저 사람이 괜찮다는 소리를 하면서 또 꼬시고요. 그 사람이 가끔씩 쪽지도 전해주고, 당시에 후포에 있던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는데, 남의 눈도 있으니 단 둘이 다닌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동서들이 함께 가거나 그랬지요.”

김씨는 결혼할 당시에 친정집에서 엄청 반대가 심했었다고 말한다.
“후포로 놀러왔다가 두 달쯤 머무르고 난 뒤에 저는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남편 될 사람과 친해지면서 결혼을 하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린 뒤였어요. 친정 부모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남편 될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동서들에게까지 덜컥 결혼 허락을 하고 만 거지요. 그때 친정에서는 반대가 너무 심했습니다. 먼 곳에 시집을 가서 평생 고생할거라면서 엄청 반대를 했었지요. 아버지는 딸자식을 버리면 버렸지, 연애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화를 냈고요. 요즘 같으면 부모가 저렇게 반대를 해서 결혼하기 힘들겠으니 그만 두자고 얘기라도 했겠지만, 그때 저는 너무 어렸어요. 이미 결혼하겠다고 약속도 했지, 나이도 어렸지, 그러니까 안 된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결국 시댁에서 일방적으로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남편 될 사람하고 시누(시누이)가 친정 부모님께 허락을 받으러 부산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친정아버지와 엄마가 너무 반대를 해서 허락도 못 받고 다시 후포로 올라갔지요. 그런데 시댁이 될 집에서는 신랑 될 사람이 군에 입대할 날을 받아놓고 있었으니, 군에 가기 전에 결혼은 하고 가야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하자’ 그렇게 결정이 됐어요. 막상 결혼식 날이 되니까 부산에서 친정 엄마와 이모가 후포로 올라왔더라고요. 그러더니 ‘결혼을 허락한 적은 없지만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결혼식은 올려라’ 그러더라고요. 시댁 마당에서 일가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 날이 1968년 8월 27일입니다. 제 나이 스물한 살 때였지요. 그런데 남편이 결혼하고 보름 만에 군대를 가야 되니까, 신혼여행을 겸해서 부산 친정집으로 내려갔어요. 친정집 식구들에게 남편 얼굴은 똑바로 보여 드려야 했으니까요. 친정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고 후포로 올라와서 남편은 곧장 군에 입대했지요. 우리 아저씨는 달성 서씨 판서공파로 이름이 상복입니다. 저보다 두 살이 위니까 결혼할 때 스물세 살이었고요. 남편은 성격은 온순했지만 잔정을 밖으로 쉽게 표현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경상도에서도 아마 울진 남자들이 감정 표현에 가장 무뚝뚝하다고 생각돼요. 좋아한다, 싫어한다 그런 감정 표현에는 아주 인색한 사람이었지요. 그래도 손재주 하나는 참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기계든지 한번 뜯는걸 보면 따라서 고칠 줄 알았고, 집을 지으라고 해도 집 한 채를 다 지을만한 사람이었어요.”

김은자씨의 친정아버지 김복종씨의 회갑잔치

시집을 오니까 논이 네 마지기에 밭은 꽤 많았어요. 그래도 식구들이 많으니까 식량이 될 정도지, 남아돌아서 팔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고요.·····항구사진관 모델과 송월타올 홍보 모델을 했어요. 결혼해서는 아모레 화장품 메이크업 모델을 했는데, 화장품 세트를 받고는 했지요.

21살에 김은자씨가 두 살 연상의 서상복씨를 만나서 결혼을 했을 당시 시댁에는 꽤 많은 식구들이 한데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시집을 오니까 위로 시할머니와 시부모님이 계시고, 시동생 둘에 시누가 한명 있더라고요. 시숙 한명과 시누 한명은 이미 결혼을 하고 난 다음이었고요. 맏시숙은 제가 결혼을 해서 오니까 이미 분가를 해서 나가 살더라고요. 우리 시댁이 맏종가는 아니고 맏동서집이 따로 있었어요. 우리 아저씨 형제자매는 모두 6남매래요. 4남 2녀지요. 시댁은 주로 어업을 해서 먹고 살았고, 농사도 조금 짓고 그랬어요. 거일 2리 동네에는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없는데, 뒷산을 넘어가면 땅이 꽤 있습니다. 지금 한진회사 있는 산 쪽에 밭이 조금 있었고, 직산 쪽으로 가면 논농사를 지을 땅이 있었어요. 시집을 오니까 논이 네 마지기에 밭은 꽤 많았어요. 시아버님이 가산을 개간해서 군데군데 밭이 넓더라고요. 지금도 한진회사 뒤쪽에 있는 밭을 그냥 묵혀 놨어요. 그래도 식구들이 많으니까 식량이 될 정도지, 남아돌아서 팔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고요. 뒤에 한진회사가 들어오면서 산을 깎고 개발을 해서 그렇지, 후포에서 거일리로 넘어가는 곳의 경치가 참 보기 좋았어요. 시집을 오니까 시아버지는 이미 연세가 많아서 배를 타다가 집에서 쉬고 있었고, 시동생이 배를 타고 있더라고요. 또 다른 시동생 한명은 그때 국민학교 5학년인가 그랬어요. 우리 시댁도 거일리에서는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시아버님이 빚봉수(빚보증)를 잘못 서서 논이고 밭이고 거의 다 팔았다고 하더라고요. 사정이 그랬으니, 우리가 결혼할 때도 남의 빚을 내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김은자씨의 결혼식 당시 사진을 보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빼어났던 미모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이는 김씨 뿐만 아니라 집안 모든 여성들의 공통된 점이기도 했다.
“우리 큰언니가 경남 미스에 출전할 만큼 아름다웠어요. 또 막내 여동생은 부산에서 섬유회사에 근무했는데, 일본 수출용 홍보책자의 표지 모델을 할 만큼 예뻤고요. 저도 결혼 전에 회사 생활을 하면서 홍보 모델을 쓸 일이 있으면 항상 선착순으로 뽑혀 다니고는 했습니다. 결혼 전에 후포로 내려와서 두 달 정도 머무르는 동안에는 사진관의 모델 노릇을 잠시 하기도 했고요. 그때는 후포에 항구사진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사진관 아저씨가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바다와 항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홍보용으로 사진관에 걸어두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항구사진관도 없어지고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는 와중에 그때 찍었던 사진들도 다 없어지고 그랬네요. 크기가 다른 사진 여러 장을 뽑아서 저에게 주었었는데요. 항구사진관의 모델을 해주면서도 따로 돈을 받은 건 아니었고요. 저도 젊을 때는 예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어요. 결혼 전 미원상사에 다니기 전에 송월타올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홍보활동을 하면서 모델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부산진역 앞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세계 여러 나라의 타월 만드는 회사들이 모여서 우량상품 전시회를 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박람회지요. 그때 제가 1기생으로 뽑혀서 홍보활동을 했거든요.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 아모레 화장품 메이크업 모델을 했습니다. 지금은 티브이에서 화장품 광고를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화장품 회사 본사에서 사람이 직접 내려와서 극장 같은 곳에 온 동네 여자들을 다 모아놓고, 모델 얼굴에 여러 종류의 화장품을 바르면서 화장법도 소개하고 회사 제품도 선전하고 그랬거든요. 당시에 울진읍내의 군민회관인지 극장인지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화장품 메이크업 모델을 했어요. 꽤 오랜 시간동안 고정 자세로 앉아서 모델을 하고 나면 저한테 떨어지는 건 화장품 세트였어요. 그런데 그 화장품 모델 일이 항상 오후에 있다 보니까, 끝마치고 거일 집으로 돌아오면 식구들 밥해줄 시간을 놓치기가 일쑤였어요. 그래서 그만 두게 되었지요.”

갯바위에 붙은 김을 봐도 그게 김인지 바다풀인지 구분이 안됐고, 밭에 풀을 매러 가면 잡초와 보리 싹을 구별하지 못해서 보리 싹을 다 매고 그랬어요.·····후포 어판장에서 오징어를 사올 때는 다라이에 가득 담아서 머리에 이고 불가를 따라서 거일까지 걸어왔지요.

1968년 8월에 결혼식을 올린 김씨의 남편은 신혼의 단꿈조차 꾸어볼 시간이 없이 보름 만에 군에 입대해서 34개월 보름 만에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은 결혼하고 난 다음인 구월 십오일 날에 훈련소에 갔어요. 논산 훈련소 36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강원도 원주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이 군에 가 있는데도 저는 시집을 산다고 면회 한번 못 갔어요. 가끔 남편이 휴가를 받아서 집에 내려왔고요. 남편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조금은 운이 없었지요. 우리가 결혼하기 전이던 그해 1월에 청와대를 습격하겠다면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가 내려왔잖아요? 그래서 다른 때보다 군인들 제대가 조금씩 늦어진 거지요. 김신조가 내려오지 않았으면 삼십이개월 만에 제대를 했을 낀데, 두 달 넘게 제대가 연기된 겁니다. 남편이 군에 가 있는 동안에 첫애를 낳았어요. 우리 아저씨는 군에 가서 운전을 했어요. 연예인들이 전국의 군부대를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하는데, 그 사람들 차를 몰았거든요. 군을 제대한 남편은 일 년 동안 부산으로 내려가서 회사도 다니고, 부산대학교 안에서 관리 일도 하다가 다시 후포로 되돌아왔어요. 직장생활이 도저히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서요. 그 후부터는 쭉 배만 탔지요. 처음에는 거일리에서 배를 탔어요.”

김은자씨는 남편 서상복씨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낳았어요. 맏아들이 영욱(43세)이라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요. 그 다음이 딸인데 희정(41세)이라고 죽변으로 시집을 갔어요. 그 밑이 영민(39)인데 지금 저와 함께 살고 있고, 제일 막내가 영균(35세)이라고 경주에서 파스타 같은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양식점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바다 일을 접해볼 일이 없었던 김씨는 궁벽한 갯마을 거일리로 시집을 와서도 한동안은 일손이 잡히지 않더라고 말한다.
“시집을 올 때까지 물일을 전혀 해보지 않았으니 바다에 나가서 갯바위에 붙은 김을 봐도 그게 김인지 바다풀인지 구분이 안됐어요. 농사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밭에 풀을 매러 가면 어느 것이 풀인지 곡식인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풀을 매러 가면 어떤 때는 잡초와 보리 싹을 구별하지 못해서 보리 싹을 다 매고 그랬어요. 농사일도 많이 했어요. 주로 한진회사 뒤쪽의 밭농사를 많이 했지요. 바다일도 손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직접 미역을 뜯고 김을 뜯고 그러지는 못했어요. 동네 해녀들이 미역을 뜯어오면 햇볕 좋은 곳을 골라서 발에다 널어서 말리고 그랬지요. 당시만 해도 동네에 뗏마(작은 목선)가 많았어요. 미역을 할 때면 주로 뗏마를 이용했거든요. 그래도 세월이 흐르다보니 점차 바다일도 손에 익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징어 건조를 시작했어요. 논농사 조금, 밭농사 조금 하는 틈틈이 오징어 건조를 했는데, 후포 항구에서 오징어를 사서 거일리로 옮겨와서 말렸어요. 어떤 때는 거일 앞바다를 지나가는 배까지 시아버님이 뗏마를 저어가서 오징어를 받아와서 건조를 하기도 했고요. 후포 어판장에서 오징어를 사올 때는 다라이(대야)에 가득 담아서 머리에 이고 불가(백사장)를 따라서 거일까지 걸어왔지요. 오징어를 사면 판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배를 다 딴 다음에 이고 왔습니다. 할복을 해야 이고 오는데 무게가 덜 나가니까요. 그러면서 조금씩 시아버님이 빚봉수로 진 빚을 갚아 나갔지요. 거일리는 또 물이 귀한 동네여서 우물이 마을 뒤 산에 있었어요. 집집마다 필요한 물을 그곳까지 올라가서 이고 날라야 했지요. 겨울이면 우물까지 산길을 올라가기가 힘드니까, 논 한쪽에 웅덩이를 파놓고 동네 사람들이 그 물을 퍼다가 먹었습니다. 겨울에 웅덩이가 얼면 새벽 일찍 동네 어른들이 웅덩이 한쪽을 깨서 뚫어 놓았고요.”

김씨의 남편 서상복씨는 막내아들이 세 살일 때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떠나 10년 동안 원양어선 선원생활로 돈을 벌었다

막내아들이 세 살일 때 남편은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서 생활했어요. 그때 후포에서는 남자들이 큰 수입이 없으면 원양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갈 때였어요.·····활어배를 하면서 새벽 두시면 출항을 하는데, 그때 제가 같이 따라서 후포 판장으로 나갑니다. 배가 입항해서 활어 고기를 위판하고 나면 하루 종일 판장에서 그물 일을 하고요.

김씨의 남편 서상복씨는 막내아들이 세 살일 때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벌었다.
“남편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배를 탔다고 해요. 예전에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다 그랬겠지만, 남편도 열일곱 살 때부터 배를 탔다고 합니다. 우리 막내아들이 세 살일 때 남편은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서 생활했어요. 그때 후포에서는 남자들이 큰 수입이 없으면 원양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갈 때였어요. 많이들 갔어요. 군을 제대하고 한동안은 지방 배를 타다가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지방에서는 주로 꽁치나 오징어배를 탔어요. 그러다가 우리 막내가 서른네 살이니까 한 삼십년 전에 나갔었나 보네요. 외국으로 나가서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일했지요. 라스팔마스는 스페인에서도 따로 떨어진 큰 섬 같은 곳인가 보더라고요. 그곳에서 우리 아저씨가 근 십년동안 원양선을 탔지요. 아이비그룹의 권영호 회장도 그때 원양선을 탔는데, 남편과 함께 탄 건 아니라고 합니다. 권회장도 어릴 때 자란 곳이 거일리잖아요? 지금도 거일리에는 권회장의 형님이 생활하고 계시거든요. 전에 애들 키울 때는 권회장 부인과도 참 친하게 지냈어요. 지금도 거일2리에는 권회장이 지어놓은 이층짜리 집이 있고, 꽤 자주 왔다 갔다 하거든요. 권회장도 어릴 때는 참 가난하게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후포 동림회사 배를 타면서 뱃일을 배웠고, 그 후에는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처음에는 철공소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철공소를 하니까, 원양선을 하는 한국 선주들은 배를 고칠 일이 있으면 권회장이 경영하던 철공소를 모두 밀어주고 그랬다지요. 또 일본에서 폐선을 버리면 되가져와서 철공소에서 수리를 해서 바다로 내보내고 또 내보내고 하면서 돈을 모았다고 해요. 지금은 큰 배만 마흔 척이 넘는다고 그러지요, 아마. 권회장은 그러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결국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자수성가를 한 거지요. 권회장이 젊은 시절에 배를 탔던 동림이라는 회사는 지금도 후포에 있습니다. 삼율에서 후포로 들어가다가 일방통행 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데, 지금은 통조림 공장이 돼 있지만, 그 당시에는 어선을 많이 보유하고 배 사업을 했던 회사였어요. 우리 남편은 부산의 어느 수산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원양선을 탔어요. 당시에도 권회장은 원양선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그 회사의 배를 타지 않고 다른 회사에 소속돼 있던 배를 탔거든요. 남편이 원양선을 탈 때는 외국에서 지내다가 삼년에 한 번씩 집에 들어오고는 했어요. 서른 살부터 마흔 살 정도까지 십년정도 스페인 라스팔마스에 머물면서 원양선을 탔습니다. 그러고 보면 막상 우리가 함께 산 세월도 얼마 안 되는 거지요. 그래도 편지를 자주 보내주고 해서 덜 외로웠는데, 지금은 그 편지가 어디 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네요. 남편은 연애를 할 때부터 시작해서 군에 있을 때나 원양선을 타면서도 편지를 자주 보내주었어요. 지금은 그런 편지가 하나도 없어요. 이사도 다니고 집도 몇 번 새로 고쳐 지으면서 다 없어졌어요.”

김씨는 남편이 원양선을 타면서 매달 7만원씩 보내주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해 틈틈이 노가리도 따고 꽁치 그물도 털면서 악착같이 살았다고 말한다.
“남편이 원양선을 탈 때는 외국에서 한 달에 7만 원 정도의 돈이 은행으로 송금이 돼 왔어요. 당시만 해도 작은 돈이 아니었지요. 돈이 달마다 입금이 돼도 그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잖아요?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고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애들을 키우는 저는 그 돈을 안 쓰려고 노가리 새끼를 십년쯤 깠어요. 후포 가공업자에게서 노가리를 사킬로나 오킬로 받아서 리어카에 싣고 거일 집에 와서 뼈를 발라내고, 다시 업자에게 넘기고 수공비를 받았지요. 남편이 집을 떠나서 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저는 그런 일을 하면서 4남매를 공부시켰지요. 또 후포에서 꽁치가 많이 났다고 연락이 오면 애들을 재워놓고 후포항까지 나가서 밤새도록 꽁치 그물을 벗겼지요. 밤을 새워서 그물에서 꽁치를 벗겨내다가, 날이 밝으면 집으로 돌아와서 애들 밥을 챙겨 먹여서 학교에 보냈고요. 그때 꽁치 그물을 일킬로 벗기면 오천원을 주었어요. 참말로 그때는 밤낮없이 판장에서 꽁치 그물을 벗겼지요. 지금이야 꽁치가 많이 안 나지만 예전에는 꽁치 작업을 참 많이 했어요. 남편이 외국에 나가서 열심히 돈을 버는데 저만 편하자고 놀고먹을 수는 없잖아요? 고생스러웠지만, 우리 나이에 저만큼 고생안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어요?”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원양 어선을 타던 김씨의 남편 서상복씨는 10년여 만에 고향 거일리로 돌아와서 5톤급 배를 장만하고 직접 고기잡이에 나선다.
“외국에서 원양선을 타던 남편이 십년 만에 거일리 집으로 돌아왔어요. 계속 원양선을 타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제가 원양선 타는 걸 말렸지요. 남편이 외국에서 번 돈도 있으니, 고향에서 작은 배를 사서 직접 고기를 잡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톤급 배를 사서 직접 고기를 잡기 시작했지요. 배 이름은 동변호였고요. 사오년 정도 막내 시동생과 함께 동업을 했어요. 그런데 수입을 둘이 나누니까 변변찮아서 따로 작은 배를 사서 고기를 잡자 그랬지요. 그래서 일톤급 작은 배를 사서 혼자 고기를 잡았습니다. 배 이름은 유성호였어요. 주로 가자미, 도다리, 광어 같은 잡어를 잡았지요. 그 배를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오 년 동안 했습니다. 활어배를 하면서 새벽 두시면 출항을 하는데, 그때 제가 같이 따라서 후포 판장으로 나갑니다. 처음에는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가서 기다렸고, 뒤에 화물차를 사고 난 다음에는 차안에서 바다로 나간 남편을 기다렸고요. 육지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남편이 입항하면 잡아온 활어 고기를 선별해서 수협에 위판을 했지요. 그리고는 하루 종일 판장에서 그물 일을 하고요. 바다에 나가서 쳐 놓은 그물을 걷을 때는 막 땡겨서 오니까, 그물을 일일이 손질해 놔야 바다로 다시 나가서 그물을 치기가 쉽거든요. 그물을 다시 치기 좋게 정리를 하는 거지요. 삼율리로 이사를 나와서 눈 수술도 두 번이나 했어요. 전에 그물 일을 할 때 불가사리 가시 같은 게 눈에 들어가 박히면서 상처를 냈고, 그 독이 계속 남아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검은 눈동자에 하얀 반점이 자꾸 생겨서 수술을 했지요. 서로가 결혼하면서 빈 몸으로 출발했으니 남편이나 저나 고생을 참 많이 한 편이지요. 사실 남편이 속도 많이 썩혔습니다. 술 잡숫는 사람이 속 안 썩이는 경우가 있어요? 결혼 전에는 술을 못 드시던 양반이 원양선을 타고 난 뒤부터는 술을 무척이나 즐겼어요. 후포에서도 마시고 들어오고, 동네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요. 뱃일을 해야 하니까 매일 먹지는 않았지만, 한번 입에 대면 폭주를 할 정도로 많이 마셨어요. 술이 취해서 성질이 나면 서로가 한 대씩 쥐어박기도 하고 그랬지만, 도저히 못살겠다 싶을 만큼 그렇게 과격하지는 않았고요.”

거일2리 소형선박 부부모임의 관광지 기념사진

평해 월송 신혼예식장 앞에서 남편 서상복씨와 함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 년쯤 전에 치매가 와서 앞뒤 분간을 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대소변을 못 가려서 기저귀를 갈아 채워야 할 형편이었으니 다시 시댁으로 들어갔지요·····남편이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는 화장을 해서 바다를 보면서 편히 쉬라고 한진회사 뒤쪽의 밭에다 뿌려주었습니다.

김씨의 시아버지 고(故) 서재석씨

김씨의 시어머니 고(故) 오인악씨
서씨 집안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을 온 김은자씨는 지금까지 조상들의 제사를 직접 모신다고 전해준다.
“우리 아저씨가 맏이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외국에 나가서 원양선을 탈 때 시아버님과 맏시숙이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들이 제사를 안가지고 가서 제가 한 십년쯤 증조부모님과 시부모님 제사를 모셨지요. 그러다가 십년정도 지나니 맏종가집에서 제사를 모셔갔고, 아직까지도 시부모님 제사는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윗동서가 제사를 안가지고 가니 어떻게 해요? 우리 아저씨가 맏이는 아니지만 자식 된 도리로 제가 모시는 거지요.”

김씨는 지금까지 육십 년여 살아오면서 거일리 서씨 집안에서 실제로 맏며느리 역할을 해왔다고 덧붙인다.
“맏이는 아니지만 맏이 역할을 해야 했던 우리가 시부모님을 십년 정도 모시고 살다가 그 후에 시부모님댁 인근으로 분가를 했어요. 우리 아저씨가 원양선을 타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분가를 했지요. 애들을 셋 낳고 분가한 집에서 넷째를 낳았으니까요. 지금부터 한 삼십오 년 전이네요. 남편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후포에 나와서 살고 있던 아주버님도 돌아가시고 그랬는데, 그때 남편은 외국 땅에 있었으니 못 왔습니다. 그 후로 분가는 했지만 시어머님이 시댁에 혼자 살고 계셨으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어요. 이것저것 살림살이도 거들고 농사일도 거들고 그랬지요. 분가를 한 집도 시댁에서 오백미터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시댁 본가로 들어갔어요. 분가해서 살던 집은 비워두고요.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일 년쯤 전에 치매가 와서 앞뒤 분간을 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대소변을 못 가려서 기저귀를 갈아 채워야 할 형편이었으니 곁에서 보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일 년 뒤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시어머니는 오씨 성에 인자 악자를 썼고, 시아버님은 재자 석자를 사용했습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분가해서 살던 집을 팔고 본댁에 들어가서 살다가 사 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김씨는 지금 둘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삼율리 아파트로 이사를 온지가 이년반 정도 됐다고 전한다.
“남편은 건강이 좋았는데, 소화도 잘 안되고 해서 어느 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까 위암 4기라고 하더라고요. 이미 말기여서 치료도 불가능하고, 오래 살면 육개월 정도 산다고 했어요. 그래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싶어서 경북대병원에 올라가서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담당 의사 선생님들이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영덕 아산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돌아가셨지요. 다행히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렇게 큰 고통은 겪지 않았어요. 병원에서 진통제를 주니까 큰 고통은 없었는데,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정도는 그래도 꽤 큰 고통을 받았지요.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 묘는 따로 쓰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보면서 편히 쉬라고 화장을 해서 한진회사 뒤쪽의 밭에다 뿌려주었지요. 그런데 우연찮게도 음력 시월 이십일 날이 남편 생일날인데, 그날이 또 남편 제사 드는 날이 돼 버렸습니다. 기일이 되면 생일상은 따로 차려주지 않고 제사만 지냅니다. 우리 아저씨가 세상을 뜨고 나니까 한동안은 얼마나 우울하고 허전한지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시간이 이년 이상 갔어요. 결코 짧지 않았던 세월을 서로가 의지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그렇게 살던 집에서 더 이상 살기가 싫어져서 거일리의 집을 팔았어요.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요. 남편을 보내고 난 후에는 북면의 어느 절에 영가(靈駕)를 모셔 놓았고, 그 절에 가끔씩 가고는 합니다. 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는데, 남편을 만나고 결혼해서 살면서 불교 신자가 되었어요.”

외동딸 서희정씨의 결혼식에서

다시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이생에서 40년여를 동고동락하며 살아왔던 남편과는 절대로 부부의 연을 맺지 않을 작정이라며 웃는 김은자씨다.
“너무 많은 고생을 했거든요. 남편 살아생전에 함께 계모임에 나가도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는 했어요. 가족 친지들에게도 그런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고요.”

그러나 남편의 흔적으로 남은 한줌 재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뿌리고 난 후에 이년이 넘도록 가슴앓이를 했다는 김은자씨의 긴 얘기 끝에 나온 단편적인 이 말이, 정작 쓸쓸함으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부의 인연이란 만나기 싫다고 안 만나지는 것도 아니고,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것도 아닌 것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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