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면 봉평리 장상전(張相典)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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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여 이 시대는 다양한 측면에서 노인들에 대해 큰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짧다고 말들을 하지만 어찌 보면 결코 짧지만도 않은 숱한 풍파를 겪어온 노인들에 대해 당대의 사회가 지금처럼 많은 질문과 관심을 쏟아냈던 적도 드물었을 것이다.
중세 종교사 전문가로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조르주 미누아(Georges Minois)는 그녀만의 뛰어난 시선으로 고대에서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자료를 뒤적인 끝에 ‘노년의 역사’를 썼다.
그녀는 문학, 예술, 의학, 묘비명, 중세의 각종 기록물, 교황과 왕에 대한 자료 등을 통해 서양 역사에서 노인들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탁월한 관점으로 풀이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노년이 지닌 꿈과 형식이 시대를 따라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또 그것이 실제 노년의 삶에 어떤 흔적으로 각인되어 왔는지를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독자들 또한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을 꾀하도록 유도한다.
이 책을 통해 조르주 미누아는 특히 역사상의 모든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원하는 이상적인 노인상을 설정해둔 상태에서, 역시 동일한 사회의 구성원인 노인들을 판단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사회가 이상적인 인간의 유형을 상정해둔 상황에서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노년의 가치를 평가했다고 할지라도, 노인들의 긴 삶을 토대로 하는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은 노인들 특유의 육체적 허약함과 신체적 외양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호의적이다.
설령 조르주 미누아가 각종 자료 분석을 통해 노년의 황금시대는 존재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고 하더라도, 노인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에나 변함없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고향이 온양1리 온곤이여. 아버지는 민족주의 운동을 평생 했던 분이었지. 그런데 온곤이 같은 동네에 살던 일제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백순사가 늘상 아버지 뒤를 쫓아다니고 괴롭히고, 그래서 이곳으로 아예 터전을 옮겨온 거지.
장상전(張相典. 81세. 죽변면 봉평2리)씨는 울진읍 온양1리 온곤동(蘊崑洞)에서 태어났다.
민족주의 운동을 했던 장씨의 아버지 장화영(張華永)씨
그의 아버지는 민족주의 운동을 했던 장화영(張華永)씨다.
“원래 태어난 곳은 울진읍 온양1리 온곤이여. 그쪽에서 윗대로부터 몇 대나 살아왔지. 저 양정목재 위로 올라가면 온곤이라는 데가 있어. 지금 4차선 닦아 놓은 데서 서쪽으로 가면 있지. 온곤이라는 동네는 아주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 그곳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내 나이 열 살 미만 때 그곳에 있는 논밭을 놔두고 이곳 봉평리 골짜기로 이사를 들어왔지. 이사를 오기 전에 하루는 이웃집에 살던 먼 친척뻘 되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사흘도리로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아서 쫓아와보니까, 집안에 사람들이 축 늘어져 있더라는 거야. 그때 나까지 태어났으니까 어무이(어머니)하고 누님하고 형님하고 나하고 네 명이서 방안에 늘어져 있었던 거지. 굶어서 축 늘어진 거지. 우리 집에 논밭도 있었는데, 그 논밭을 놔두고도 굶은 이유가 아버지가 그때 일본 경찰을 피해서 다닐 때였으니까 농사지을 여력이 없었던 거지. 아버지는 민족주의 운동을 평생 했던 분이었어. 그런데 온곤이 같은 동네에 살면서 일제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백순사가 늘상 아버지 뒤를 쫓아다니고 괴롭히고, 그래서 이곳으로 아예 터전을 옮겨온 거지. 처음에는 그 백순사 한명이 쫓아다녔는데 나중에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감시의 눈초리도 심해지고 그래서 그곳을 떠나서 이 외딴 곳으로 완전히 이사를 들어 온 거지.”백순사를 피해 장씨의 아버지 장화영씨는 봉평2리 골짜기 안쪽 갱빈 옆에 터를 닦고 초가집을 지었다.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에는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스레트 지붕을 했다가 함석으로도 바꾸고 그랬어. 그때는 이 앞이 전부 갱빈(강변)이었는데, 뽀뿌라(포플러) 나무가 쫙 심어져 있었지. 냇물도 이리저리 막 돌아서 흘러가고 그랬거든. 취현(聚賢)이라는 호(號)를 사용하신 할아버지는 울진 근동에서 알아주던 학자야. 온곤동에 학당을 차려놓고 훈장으로 학동들을 가르쳤던 분이지. 함자로 인동 장씨(仁同 張氏) 성에 ‘석(錫)’자 ‘무(武)’자를 사용했지. 아버지는 ‘화(華)’자 ‘영(永)’자를 사용했고, 어머니는 김해김씨 성에 ‘음’자 ‘정’자를 썼어. 부모님은 농사를 지어서 식구들을 건사했지. 온곤이에 살 때도 논밭이 있었는데 몇 마지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고, 어릴 때 아버지는 노상 일제 경찰을 피해서 다니기에 바빴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지. 이곳 봉평으로 이사를 와서도 저 앞에 저 밭이 그때는 전부 백모래였는데, 그걸 다 개간을 해서 밭을 만들었어. 남의 논밭전지도 얻어서 부치고, 우리 집에서도 논밭을 개간을 해서 부치고 그렇게 살았지. 저 앞에 논도 계속 부치다가 지금은 묵논이 되었고, 또 더 안에 가면 엿마지기 논도 있고 그래.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바로 우에(위의) 상배 형님은 나보다 네 살 맏이니까 밭일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주로 소를 몰고 풀도 뜯기고 하는 소 담당이었어.”일정 시대에는 배급도 타먹고 그랬지. 당시에는 만주에서 콩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콩을 짜서 기름은 다른데 쓰고 대두박이라고 콩묵찌를 배급으로 주고 그랬어. 그것도 기름을 짠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먹을 만한데,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곰팡이가 피서 못 먹기도 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장상전씨의 집에는 인심이 후덕했던 할머니가 어릴 때 주워다 키운 일꾼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 세경을 안 받는 일꾼이 있었는데, 수성인가 그런 이름이었지. 이름은 확실한데 성씨는 아마 김씬가 그래. 원래 봉화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마음도 아주 착실했고. 내가 어릴 때 그 사람은 벌써 청년이었으니 나이가 많았지. 우리 형제들은 그 수성이라는 일꾼을 형님이라며 잘 따랐었고.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올데갈데없는 그 사람을 주워다가 집에서 키웠다고 그러더라고. 그 사람은 농사도 잘 지었는데, 수성이라는 일꾼 외에 이덕이라는 일꾼이 또 있었지. 덕이는 나보다 한 살 위인데,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주로 그 덕이가 소를 끌고 다니면서 꼴을 믹앴지(먹였지). 나보다 한 살 위였으니 큰 농사는 못 지었고. 덕이는 우리 집에 계속 살다가 6.25사변 중에 오입을 나가버렸어. 온가 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단 말일세. 수성이라는 일꾼은 뒤에 장가를 들어서 집을 나갔고. 우리 나이에 어릴 때 고생을 안 하고 큰 사람이 있는가? 일정 시대에는 배급도 타먹고 그랬지. 당시에는 만주에서 콩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콩을 짜서 기름은 다른데 쓰고 대두박이라고 콩묵찌를 배급으로 주고 그랬어. 그것도 기름을 짠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먹을 만한데,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곰팡이가 피서 못 먹기도 하고. 그러니 봄이면 노상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그랬어. 당장 고픈 배를 채워야 했으니까. 하기사(하기야) 우리 때야 천지를 모르고 살았지만, 어찌 보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고생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장상전씨는 5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그의 형 고(故) 장상배씨는 한때 울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던 향토사학자이다.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5남매지. 제일 위가 누님인데 윤선이라고 올해 나이가 여든여덟이고 서울에 살고 있지. 그 누님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이 주우영씨라고 예전에 울진군청에서 내무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강원도 고성군수도 했고, 다른 여러 고을 군수도 하고 그랬어. 그 다음이 상배라는 형님인데, 몇 해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달리했지. 그 다음으로 내가 태어났고, 밑으로 족보상의 이름이 상일이고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수웅이라는 남동생이 있어. 그 아래로 상량이라는 막내 동생이 있고. 중간에 몇 명이 더 있었다는데 어릴 때 죽어버렸다고 하더라고.”장씨는 특히 아버지 장화영씨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울릉도로 독립자금을 구하러갔던 아버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얘기를 들려준다.
“한번은 아버지가 어떤 분과 함께 울릉도로 독립자금을 모으러 갔었다고 그래. 말하자면 가방모찌나 조수로 따라 간 거지. 울릉도에 도착하니까 항구에서 사람들이 부서진 러시아 배를 해체하고 팔 목도를 해서 메고 가는데 술도 한잔 마신 김에 신명이 난 아버지가 직접 그 목도를 해서 옮겼다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술도 말술을 마실 만큼 좋아하셨고, 원체 타고난 체력이 좋아서 힘도 아주 셌는데 별호가 차력 장사였어. 그렇게 팔 목도를 해서 배가 부서진 목재를 옮기고 났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어떤 사람들이 수상하다며 경찰에 신고를 했지. 그러자 일본 경찰들이 민심을 소란 시킨다며 경찰서로 잡아 들였어. 그리고는 신원 조회를 하고 나서 말하자면 일본에 해가 되는 악질이라며 잡아들인 거지. 울진 인근에서는 민족주의자로 경찰서를 여러 번 들락거렸으니까. 그런데 마침 그때 울릉도 경찰서에 조선 사람인 형사가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윗선의 얘기를 들으니 고문이라도 해서 골골거리게 만든다며 탈출시켜 준거지. 나중에 아버지가 그때 그 형사를 삼척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 그 일로 형사직에서 파면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도 그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그 사람을 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지. 평생 그 사람에게 목숨을 빚졌다면서 고마워했고.”장씨가 입학해서 2학년까지 다녔던 제동학교는 대동아전쟁 이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고 만다.
그 후에 장씨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울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온곤이에 살 때 제동학교에 들어갔어. 그때 제동학교는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다니는 경우도 있고 그랬지. 우리 반에 함께 공부하고 있던 부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월사금을 독촉하자 아들이 갑자기 ‘아부지요, 월사금 주소’ 그러면서 모두들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네. 우리들은 모두 다 그전에는 그 둘이 부자지간인 것을 몰랐거든. 내가 직접 본 얘기라니까. 제동학교를 2년 다녔어. 상배형님이 4학년일 때 내가 1학년이었는데, 2학년이 돼서 대동아전쟁이 터지면서 제동학교는 폐교되고 말았거든. 제동학교에서는 배일사상이 가득한 사상가들만 배출된다면서 일제가 강제로 폐교했어. 대동아전쟁 후에 죽변국민학교가 생겼지. 나는 해방 후까지 학교를 못 다녔는데, 상배형님은 그래도 맏이라고 학교를 다녔어. 상배형님이 일정 때 죽변국민학교 2회생이야. 나는 학교도 못 다니고 집에서 소나 먹이고 꼴도 베고 그렇게 지냈어. 밤에는 아버지가 한문을 가르쳐주었는데, 자꾸 꾼득꾼득 자불고(졸고) 그랬어. 천자문 같은 건 전혀 재미를 못 느꼈고, 기문(奇門-점술가들이 길흉을 점치는 방법의 하나)같이 앞뒤 이치가 와 닿는 건 재미를 느끼고 그랬지. 우리 매형이 일정 때 죽변 금융조합에 다녔는데, 내가 12살 때 22살인가 그랬거든. 그런데 매형이 기문 같은 걸 아주 잘했는데, 자꾸 그쪽에 흥미를 느꼈어. 그런데 매형은 어릴 때 그런 공부를 하면 다른 공부를 못한다면서 잘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죽변항구에 배가 많다보니까 금융조합도 잘됐지. 수협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금융조합 쪽으로 돈이 몰리고는 했어. 그때만 해도 수협에서는 금융취급을 안했던 것 같네. 나는 제동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집에서 소나 먹이면서 쉬다가 해방이 되면서 막바리(곧장) 울진국민학교 6학년으로 들어가서 졸업을 했지. 집에서 쉬다가 울진국민학교에 들어갔으니 밑에 후배들하고 같이 졸업을 한 거지. 그리고 울진중학교에 들어갔어. 그런데 1학년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가는데 그때까지 입학금을 내지 못해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네. 형님은 입학금과 월사금을 주면서 나는 둘째라고 그런지 입학금도 집에서 안 대주더라고. 입학금을 못 내면서 학교를 다니다보니까 훈육주임이라는 선생이 자꾸 누구집 자식인데 입학금도 안내고 학교를 다니느냐고 해서 그만두었지. 그리고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조금 배웠어. 그때는 요 아래 샛들에도 서당이 있었고 박실에도 서당이 있었고 그랬는데, 중학교 입학금을 낼 처지도 못됐는데 당장 서당에 다닐 돈이 어디 있는가? 박실은 꽃방 넘어가기 전에 있는 동네네. 동네가 자그마한 게 참 참하고 예전에는 사람들도 많이 살았어. 지금이야 젊은 사람들 다 떠나고 동네가 아주 작아졌지만. 집에서 꾼득꾼득 자불면서 아버지에게 회초리도 맞아가면서 한문을 배웠어. 한문도 중용 같은 책은 앞뒤가 조리가 있는데 나머지는 무조건 에와야(외워야) 되는 거야. 도저히 나는 에우는 게 싫어서 그런 공부는 죽어도 싫더라고.”
최전방에서의 군 생활 당시노기일씨는 자치위원장을 하다가 뒤에 군수를 맡았는지 어쨌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는데, 아버지는 그때 무경부장을 맡고 있었지. 무경부장이란 관직은 한 말엽에 쓰던 관직명인데, 지금으로 치자면 경찰서장 격이네. 자치위원장은 군수 격이고.
장씨의 아버지 장화영씨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됐던 당시 지금의 경찰서장격인 무경부장을 역임했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실시됐거든. 그때 근남면 노음리 오른갈에 살았던 노기일씨가 자치위원장으로 추대 됐는데 마카(전부) 다 노기일씨가 공산주의자인줄 알아. 노기일씨는 일정 때 아들 이름도 노막스라고 지을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해 있었지. 그런데 아버지를 비롯해서 주변에서 자꾸 이론뿐인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사상을 바꿀 것을 권유도 하고 그래서 결국 해방되기 삼사년 전에 공산주의를 포기하게 됐네. 노기일씨와 우리 아버지는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자주 만나고는 하는 절친한 사이였거든. 미군정 치하였을 때, 울진경찰서장이 이우정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양반이 독실한 공산주의자였어. 그런데 이 양반이 뺄개이(빨갱이)를 잡으라고 하면 거꾸로 뺄개이 아닌 사람을 경찰서에 잡아다가 두들겨 패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그랬지. 노기일씨는 자치위원장을 하다가 뒤에 군수를 맡았는지 어쨌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는데, 아버지는 그때 무경부장을 맡았네. 무경부장이란 관직은 한 말엽에 쓰던 관직명인데, 지금으로 치자면 경찰서장 격이네. 자치위원장은 군수 격이고. 그 당시에 고참 경찰이라고 지역에서 꺼떡거리면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다 아버지 밑에 있던 사람들이지.”미 군정기 당시에 무경부장을 역임했던 장씨의 아버지 장화영씨는 6.25사변이 발발할 당시 서울에 올라갔다가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초를 당했고, 평생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6.25사변이 발발할 당시 김광준씨가 국회의원을 했는데, 2차 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을 저질렀어. 서면에서 투표함이 내려오는 걸 중간에 바꿔치기했던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그래서 상대 후보였던 전영직씨 쪽과 법적인 소송이 붙었지. 그때 전영직씨 쪽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서울로 소송을 하러 올라갔지. 그런데 그때 6.25사변이 터진 거야. 서울에 가서 청량리 쪽의 논밭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민군들에게 붙잡혀서 정치보위부로 끌려갔어. 그곳에서 전에 울진경찰서장을 하던 이우영이라는 사람을 보게 됐지.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서장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있던 이우영씨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잡아들인 거지. 엄청 두들겨 맞은 모양이야.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가 짤막하게 ‘이놈들아, 차라리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으로 나를 쏴 죽여라. 나는 미군정 때 무경부장을 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다치게 한 적이 없고, 일본 놈들이 급하게 두고 나간 재산 하나 건드린 적이 없다. 그렇지만 저기 있는 이우정이는 일정 때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재산도 다 자기 앞으로 했다. 너들이 얘기하는 공산주의가 그런 거냐’, 뭐 그런 얘기를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인민군들이 이우정씨와 무슨 얘기인가를 길게 나누더니 미안하다면서 아버지에게 정중히 사과하더라는 거야. 나중에 이우정씨는 이북으로 넘어간 것으로 전해 들었네. 그때 아버지가 큰 곤욕을 치르면서 어깨뼈를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기 이 년 전쯤에는 한쪽 어깨가 축 쳐져 버렸어. 그 후유증으로 나중에 아버지는 죽변에서 한약방도 몇 년 했었네. 이리저리 한의원을 다녀도 별 차도가 없고 돈은 돈대로 들고 하니 직접 한약방을 하신거지. 자기 병을 자기가 고치겠다고 마음 먹었던 거겠지. 지금 죽변 농협 가는 그쪽에 한약방이 있었는데, 한 십 수 년 했어. 또 아버지는 인근에서 알아주던 역술가였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해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먼저 일러주기도 하고 그랬네. 한학을 깊이 했던 분이니 기문과 육효(六爻-역(易)에서, 점괘(占卦)의 여섯 가지 획수)를 꿰뚫고 있었던 거지.”대구 어느 학교 마당에서 삼사일동안 총 쏘는 법만 겨우 배워서 영천, 안강, 기계 등지의 전쟁터로 투입됐어. 삼사일동안 훈련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겨우 총을 격발하는 것만 배웠는데. 전쟁터에 투입됐지만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민간인 복장 그대로 갔네.
19살에 6.25사변을 겪게 된 장씨는 민족주의자였던 아버지로 인해 반동분자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의용군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장씨는 휴전되기 한 달 여전에 갑종간부 교육을 마치고 전방에 배치됐다
전방 수색중대장 근무 당시
그는 무작정 걷다가 차를 얻어 타다가 하면서 대구로 내려간다.
“열아홉 살 때인지 그때 6.25사변이 터졌어. 그때 집에 있었는데, 반동분자의 자식새끼라고 해서 자꾸 의용군에 끌고 가려는데 도저히 집에서 배길 수가 있어야지. 동네 뺄개이가 자꾸 집으로 찾아와서 의용군에 끌고 가려니까 방법이 있는가? 참말로 동네 뺄개이가 더 무섭다이까네. 마침내 도망가기로 결정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 낮에는 도망을 못가니까 야음을 틈타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지. 나 혼자 내려갔지. 집에는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계셨고. 상배형님은 그때 섭실국민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으니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아도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있었네. 낮이면 어디 숨어서 지내다가, 밤만 되면 바닷가로 차박차박 걸어서 계속 남쪽으로 걸어 내려갔지. 혼자 걸어서 내려가다가 인민군에게 붙들리면 의용군에 끌려 갈 테고, 국군들에게 붙들리면 뺄개이라고 의심을 받을 테니 무지 조심스러웠네. 그렇게 밤에만 움직여서 걸어가는데, 아마 영해 관어대쯤까지 내려간 것 같애. 그런데 벌써 이틀을 굶으면서 걸어갔더니 더찌(덧정)가 없더라꼬. 밤에 이리저리 살피면서 살곰살곰 가는데 어디 저 골짜기에 작고 희미한 등잔 불빛이 보였네. 가만히 불러보니 늙은 영감 할마이가 피난을 떠나지 않고 있더라고. 울진에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니까 빨리 들어오라고 그러더니 보리밥에 감자 으깬 밥을 주었네. 밥을 먹고 노곤해서 그대로 쓰러지다시피 잠들었다가 깨어났지. 일어나서 물어보니 영덕군 영해라고 그래. 다시 길을 재촉해서 또 내려갔지. 다음날 낮에 어느 산에서 엎드려서 보니까 국군 추럭(트럭)이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속도를 늦출 때 무작정 뒷 짐칸으로 훌쩍 올라탔지. 그런데 조수석에 앉아있던 상사 계급장을 단 사람이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더니 결국 태워주었지. 그 다음부터 그 차의 짐칸에 앉아서 타고 가다가 검문소만 만나면 잠시 뛰어내렸다가 다시 앞서가서 올라타고를 반복하면서 대구까지 그 추럭을 얻어 타고 갈수 있었어.”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끌려가는 것을 피해 대구로 내려간 장상전씨는 일반인의 신분이면서도 학병으로 편제되어 포항 안강, 기계 전투 등에 참전하게 된다.
“그 군대 추럭을 타고 갔는데 대구에 도착하니까 어느 군부대에 넣어 주더라고. 우선은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안 굶어 죽으려면 방법이 없잖은가? 군부대에서 훈련이라도 받고 전쟁터에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밥도 얻어먹고 안전하다고 생각했지. 엉성하기는 해도 거기서 학생들과 일반 청년들이 뒤섞여서 새로 군부대가 하나 만들어졌네. 대구 어느 학교 마당에서 민간인들이 삼사일동안 총 쏘는 법만 겨우 배워서 영천, 안강, 기계 등지의 전쟁터로 투입됐어. 삼사일동안 훈련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겨우 총을 격발하는 것만 배웠는데. 총을 들고 전쟁터에 투입됐지만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민간인 복장 그대로 갔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를 먼저 전쟁터에 밀어 넣어 놓고, 인민군이 우리를 겨냥해서 총이나 대포를 쏘면 우리 후방에 있던 군부대에서는 상대방 화기가 불을 뿜는 것을 보면서 대응사격을 하는 거야. 말하자면 우리들이 총알받이가 된 거지. 고지를 점령할 때는 항상 우리를 먼저 투입시켜놓고, 인민군의 화기를 파악해서 국군들이 총을 쏘거나 대포를 쏘는 거야.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숱했고, 더러는 도망을 가기도 하고 그랬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생활이 몇 달이 지났는지도 몰라. 처음에 오륙백 명이던 학병들이 확 줄었고, 나중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 부대를 맡았던 지휘관이 없어졌어. 지휘관도 계급이 높은 장교가 아니었고 하사관이었지.”
전방 수색중대장 시절, 면회자와 기념촬영(앞줄 오른쪽 두번째)보병학교가 처음에는 부산 동래에 있었는데, 20일 동안 훈련을 받게 하고 막 장교를 배출해서 전쟁터로 내보낼 때였거든. 6.25사변 때는 인민군들이 긴 저격용 장총으로 총을 쏘면 딱콩 소리가 났는데, 그럴 때마다 국군 장교가 하나씩 죽어나갔네. 오죽하면 6.25사변 때 전쟁터의 소위를 소모품 소위라고 불렀겠는가?
학병으로 편제되어 포항 안강, 기계 전투 등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던 장씨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갑종 간부 교육생 시험에 합격해서 군에 정식으로 입대하게 된다.
“일반인과 학생들이 뒤섞인 학병으로 조직됐던 부대도 해체가 되고 걸어서 경주를 지나가는데, 어느 벽보에 갑종 간부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됐지. 그 당시가 포항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들락날락거릴 때였어. 그곳에 있다가는 또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이나 국군에게 붙잡혀서 총알받이가 될 것 같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 차라리 갑종 간부 교육 훈련을 받고 정식으로 군인이 되자’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 길로 경주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갔네. 걸어가는데, 집을 떠날 때 입고 있던 옷으로 육개월 가까이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도 하고 그랬으니 몰골이 완전히 거지새끼가 되어 있었지. 그렇게 부산으로 내려가서 부산 병사국 사령부로 갔어. 그곳에서 시험을 보고 신체검사를 하고 구두 면접을 받고 난 다음에 갑종 간부 교육생으로 합격됐지.”갑종 간부 교육생으로 합격한 장씨는 전라도 광주 보병학교와 논산훈련소에서 6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받는다.
“그때 막 보병학교가 전라도 광주로 이사를 했거든. 보병학교가 처음에는 부산 동래에 있었는데, 그곳은 20일 동안 훈련을 받게 하고 장교를 막 배출해서 전쟁터로 내보낼 때였거든. 전쟁터에서 장교들이 적의 총알 타켓이 되다보니 그만큼 장교가 귀했어. 6.25사변 때는 인민군들이 긴 장총으로 총을 쏘면 딱콩 소리가 났는데, 그럴 때마다 국군 장교가 하나씩 죽어나갔네. 인민군들이 사용하던 그 총은 저격용 장총이었거든. 오죽하면 6.25사변 때 전쟁터의 소위를 소모품 소위라고 불렀겠는가? 소위가 물품 취급당할 때였지. 나는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했어. 그곳에서 기초훈련을 3개월 받았지. 훈련복에 한문으로 ‘선비 사자’를 쓰고 일반 사병들과는 달리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어. 그리고 다시 광주 보병학교로 옮겨가서 3개월 훈련을 마저 받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됐지. 결국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그런 기간 덕분에 내가 살았다고도 볼 수 있지. 그런 과정 없이 전쟁터에 곧장 끌려갔더라면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
전방에 근무할 당시의 군 위문공연장교가 모자라다보니까 내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시범 중대장을 했거든. 그곳에서는 위관급과 영관급들이 모두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상사나 중사가 종이로 대장 계급장을 달고 소령이나 중령들 앞에서 훈련 시범을 보이고는 했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도 훈련 시범을 보였는데, 보병, 전차, 포병, 공군이 함께 하는 보전포공 합동훈련이었지.
보병학교 교육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친 장상전씨는 당시 휴전을 앞두고 전쟁이 극에 달했던 강원도 화천의 6사단 청성부대로 배치된다.
“광주에서 보병학교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는 강원도 화천의 6사단 7연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어. 6사단은 청성부대로 불렸네.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38교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춘천댐이 돼 있더라고. 자대 배치를 받고 미군차를 타고 갔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인이 운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제일 앞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차를 세우고 모두들 담배를 피우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았지. 미군에게 담배를 얻어서 피우는데 아무데나 죽 그으면 불이 붙는 딱성냥도 그때 처음 봤네. 스몰라이트를 켜고 6사단 보충대로 들어갔어. 거기서 7연대로 배치를 받고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처음 시작했네. 처음에는 6.25전쟁 통에 이북에 뺏긴 백암산을 되찾는 공격조에 편성이 됐지. 나는 동기생들보다 군번이 빠른데 그래서 공격조로 배치를 받았던 것 같네. 동기생이 몇 명 함께 6사단으로 갔는데 나머지는 2연대나 19연대 쪽으로 갔고. 백석산은 양구 전방이고 백암산은 화천 전방이지. 그때 연대장이 한관헌씨라고 팔로군 출신이었는데, 팔로군은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였잖가? 그 연대장이 혼잣말로 ‘이놈들 잘못 편성됐네’ 그런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만큼 그 당시 전시 상황이 어려웠고, 우리는 보병학교만 졸업했다 뿐이지, 전방에서의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지. 그래도 나는 그때 선임하사를 아주 잘 만났어. 송대화상사라고 아주 용감했어. 나중에 육군화보에도 실리고 그랬지. 군대 짬밥이 많은 상사인데도 신임 소대장인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나도 경험이 많은 선임하사를 매우 존중했던 사이였거든. 그때 선임하사가 나를 살린 거지. 나는 척후소대장을 맡았는데, 담배도 피우지 않고 주변 지형도 잘 아는 척후병을 보냈는데 나대신 선임하사가 그 역할을 하면서 나를 살린 셈일세. 그때 만약 경험도 없고, 지형도 모르는 내가 척후병을 이끌고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 7연대에 있는 동안에 다시 초등 군사반을 갔어. 그런 과정을 거쳐야 승진도 되고 했으니까. 군사교육을 마치고 원대로 북귀하니까 전에 함께 근무하던 대대장이 2연대로 가면서 나를 함께 데리고 갔어. 휴전이 되기 전에 함께 전쟁을 했던 대대장이니까 나와는 각별했지. 내가 학병까지 따지면 전쟁을 겪은 게 2년이 넘지만, 보병학교 훈련 기간 등 10개월 정도를 빼버리면 사실 6.25사변을 겪은 것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거지.”6사단 7연대에서 근무하던 장씨는 초등군사반 교육 훈련과정을 거쳐 6사단 2연대로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다시 전라도 보병학교로 옮겨가서 국내의 보전포공 훈련 시범중대의 중대장을 맡게 된다.
장상전씨는 이 당시가 자신의 군 생활 기간 동안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2연대로 옮겨가서 예비사단이 되면서 시범대대가 훈련을 받고 전라도 보병학교로 가서 내가 시범 중대장을 했지. 장교가 모자라다보니까 내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중대장을 했어. 동기생들은 모두 소대장을 할 때였는데. 그곳에서는 위관급과 영관급들이 모두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상사나 중사가 종이로 대장 계급장을 달고 소령이나 중령들 앞에서 훈련 시범을 보이고는 했네. 휴전이 되고 얼마 안됐을 때니까 자주 훈련 시범을 보였는데, 그때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고, 테커장군이 8군사령관이었을 때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도 훈련 시범을 보였는데, 말하자면 보병, 전차, 포병, 공군이 함께 하는 보전포공 합동훈련이었어. 내가 소위인데도 2년 정도 그 지휘관을 했고. 그때 경험이 내 인생에서는 아주 특별하지. 그렇다보니 결국 소대장을 한 세월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렇게 보병중대장을 하다가 후에 수색중대장을 했어. 그러다가 육사 4기생들이 왔어. 전 노태우대통령 그 패들이 온 거지. 그런데 이 친구들이 군기를 잡는다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 사고도 나고, 그나마 경험이 많은 내가 차출돼서 사건을 무마도 하고 그런 일도 있었네. 그래도 전방 생활은 참 재미가 있었어.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면 노루가 눈 속에 빠져서 뛰지를 못하고 그냥 눈 속에 가만히 서 있어. 노루도 잡고 멧돼지도 많이 잡았고. 당시에 일반 사병들은 주로 엠원총을 가지고 있었고, 장교들은 칼빈총이나 칼빈엠투를 가지고 있었지. 수색중대장은 칼빈 총이 없이 권총을 차고 다녔고. 자기 차도 있고, 부대마다 쓰리쿼터에 닷지차가 있었다니까.”육군사관학교의 작전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지. 그곳에서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공부도 하고 사관생도들을 상대로 교육도 하고 그랬어. 그런데 전방에서 생활하다가 사관학교 안에 있으려니 영 재미가 없어. 전방이야 재미가 있지. 내 전용차도 있고, 이곳저곳 다닐 수도 있으니까. 하다못해 겨울이면 노루나 꿩을 잡으면서 재미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데, 이놈의 곳에서는 항상 단정해야 하고 항상 빗어야 되고, 그런 생활을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보병학교의 시범 중대장 생활을 마치고 전방으로 배속되어 보병 중대장을 하던 장씨는 육군사관학교로 옮겨가서 작전관으로 근무하다가 32살에 10년여 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전방에서 보병 중대장을 하던 도중에 육군사관학교로 전출이 됐어. 중대장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돈이 있거나 빽이 있는 사람들은 진급도 하고 그랬는데, 나는 돈도 없고 별다른 빽도 없었으니 그냥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작전참모, 그러니까 작전관으로 옮겨가게 되었지. 그곳에서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공부도 하고, 사관생도들을 상대로 교육도 하고 그랬어. 그런데 전방에서 생활하다가 사관학교 안에 있으려니 영 재미가 없어. 전방이야 재미가 있었지. 내 전용차도 있고, 이곳저곳 다닐 수도 있고, 하다못해 겨울이면 노루나 꿩을 잡으면서 재미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놈의 곳에서는 항상 단정해야 하고 항상 빗어야 되고 그런 생활을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그때 마침 군인들의 퇴직을 장려하는 법이 있었는데, 군인이 정치에 입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퇴직을 시켜주는 그런 제도였네. 그래서 집에 나이로 32살에 그런 이유를 빌미삼아서 군을 전역했어. 20살에 군에 입대해서 21살에 소위를 달고 32살에 대위로 군 생활을 끝마친 거지.”군을 마친 장상전씨는 몇 년 동안 서울 대경상사의 얼굴 사장으로 근무하다가, 직접 회사를 차려서 자기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강원도 양구 펀치볼 분지의 마을 조성, 마차진 이주 마을 조성사업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한다.
장씨는 정부에서 휴전선과 인접한 마차진이라는 마을을 속초 사진리로 이주시킬 당시, 건설업자로 일했다
“군을 제대하고 나서 서울에 있던 대경상사라는 곳에서 근무했네. 당시는 그나마 군 출신들이 끗발이 있을 때니까 대경상사라는 회사에서 나를 얼굴사장으로 초빙한 거지. 처음에는 그런대로 돈도 벌고 재미를 느꼈는데, 나중에 직원들이 사업을 한답시고 상대방에게 와이로(뇌물)를 주고 그런 꼴을 보기 싫어서 그만두게 되었지. 그 회사에서 방도 얻어주고 먹여주는데도 우선은 성미에 안 맞고, 그저 상대방과 사업을 연결이나 시켜주는 얼굴 사장 격이니 지루해서 견딜 수도 없더라고. 한 5년 정도 근무했지. 그 회사를 관두고 내 사업을 했어. 주로 강원도에서 했는데, 강원도 인제 원통을 지나가면 양구에 펀치볼이라고 분지가 있어. 그곳에는 지뢰가 많이 매설되어 있었는데, 그 분지에 집을 지어 마을을 만들었네. 내가 직접 업체를 만들고 사장이 되어 그곳에서 집짓는 일을 관리 감독했지. 군인 출신이다 보니까 민통선 통과하기도 쉬웠고, 한 3년 뒤쯤에 그곳 펀치볼에 하나의 마을이 생겼네. 그때는 돈도 좀 벌었고,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고 그랬지. 그 다음에는 휴전선 가까이에 마차진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이 이북의 위협을 자꾸 받으니까 정부에서 속초 사진리라는 곳으로 이주를 시켰어. 그 공사를 내가 맡아가지고 사진리 벌판에 마을 하나를 또 세웠어. 기술자를 여러 명 두고 사업을 크게 했지. 그러다가 뒤에는 전방에서 토지 개간도 했고, 울진 사람들도 많이 데리고 갔었어. 또 한 번은 인제군에 리빙스턴교라고 다시 세우게 됐는데, 그 다리 건설 공사를 내가 따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현대건설 소장에게 대가없이 주기도 하고 그런 적도 있었네. 그 당시만 해도 군인 출신이 아니면 그런 공사는 딸 엄두도 못 냈어. 그때는 그런 세월이었네. 그러다가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집에 내려왔더니, 어머니가 ‘내가 죽기 전에는 나와 함께 살다가, 내가 죽고 나서 고향을 떠나면 안되겠나?’ 그러면서 집에 남아 있기를 부탁하더라고. 그래서 사업 벌려 놓은 것을 이것저것 정리해서 집으로 내려왔는데, 사실 그러면서 내가 망쪼가 든거지 뭐. 아버님은 80세에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두 살 아래인데 94세에 돌아가셨어.”어민중대를 만들었던 일이 기억에 남네. 그 당시에는 예비군 훈련을 할 때 어민들 불만이 참 많았어. 오징어가 많이 나서 어민들이 바쁠 때는 어번기를 피해서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전혀 없었지. 농사철에는 농번기를 피해서 훈련을 했는데 말일세.
죽변면 봉평리 집으로 돌아온 장씨는 마흔 살 무렵부터 만 3년 동안 죽변면 예비군중대장을 맡아서 일한다.
“군을 제대하고 수년 동안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곳 봉평리로 돌아와서는 예비군 중대장을 하게 됐네. 당시에 임모씨라는 중대장이 그만두게 되는 일이 있으면서 한동안 예비군 중대장 자리가 공석이었거든. 처음에는 중대장을 안 하려고 박모씨라는 사람을 추천했는데, 어떻게 내가 중대장이 되고 말았어. 어느 날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근남 수산리 솔밭으로 갔는데, 내가 장교 전역자들 중에서는 가장 고참이야. 그러다보니 사단장 앞에서 내가 신고를 하게 됐는데, 그 넒은 솔밭에서 앰프도 없이 구령으로 신고를 하게 됐지. 그때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예비군 중대장으로 추천받아서 하게 됐지. 한 마흔 살 정도 돼서 예비군 중대장을 시작했는데 마흔네 살에 중대장을 그만두었지. 어쨌든 예비군 중대장을 만 삼년 했네.”예비군 중대장을 맡아서 근무하는 동안 장씨는 특히 어업인들을 위한 어민중대 신설과 근남면 간첩 침투 사건 이후에 상부에 직접 건의해서 신설한 면단위 전투 중대와 소대 등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한다.
“예비군 중대장을 하면서 보람 있는 일도 많았지. 특히 어민중대를 만들었던 일이 기억에 남네. 그 당시에는 예비군 훈련을 할 때 어민들 불만이 참 많았어. 오징어가 많이 나서 어민들이 바쁠 때는 어번기를 피해서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전혀 없었지. 농민들을 위한 농번기는 있어서 한참 모심기나 일손이 바쁠 때는 그런 시간을 피해서 훈련을 했는데, 어번기는 없었다 그 말이야. 나흘씩 예비군 훈련을 받는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는 어민 예비군들에게는 무선국에서 무전을 쳐서 소집을 했네. 그러다보니 한창 바쁠 때 어민들을 예비군 훈련에 소집하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러니 울릉도에 나가 있는 어민들을 예비군 훈련에 불러 들였다고 선주들에게 고소도 당하고 그랬네. 그래서 예비군 어민 중대를 새로 만들고 내가 중대장을 겸직했지. 그때 어민중대장직을 놓고 내가 추천하는 사람과 당시에 세를 떨치던 오준석 국회의원 쪽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결국 그런 연유 끝에 내가 겸직을 하게 됐지. 그때 오준석 국회의원이 나에게 땡초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네. 또 내가 예비군 중대장을 할 당시에 근남면으로 간첩이 침투하는 사건이 있었어. 근남에 간첩이 올라왔다는 얘기를 듣고 난 죽변에서 차를 빌려서 1개 중대를 끌고 부대에 도착했는데, 현역은 아직까지 5분 대기조도 나오지 않았더라고. 간첩사건이 끝나고 난 다음에 내가 상부에 건의해서 울진읍에는 전투중대를 만들고, 나머지 면에는 전투소대를 만들었네. 죽변면과 후포면은 그때까지 면단위가 아니었고 출장소였을 때니 별도로 만들지 않았지. 어민중대가 먼저 생기고 각 면소재지에 전투중대와 소대가 생겼네. 또 한 번은 죽변중고등학교를 새로 증축하면서 봉깨쪽에 터를 닦는데, 학부형들이 곡괭이와 리어카를 끌어가면서 그 터를 닦았어. 그러니 어디 작업에 진척이 있는가? 그때 마침 죽변에 국산 해안포를 설치하는데 공사 장비로 불도저가 왔어. 그때 사단장과 2군사령관도 왔는데, 내가 부탁을 해서 그 불도저를 일주일 빌려 학교 운동장을 닦았지. 불도저가 밀어낸 흙은 또 얼마나 많은지, 천오백명이 넘던 예비군들을 비상 소집해서 리어카로 나르고 그랬어. 상부에 정식으로 건의해서 그 작업으로 예비군 훈련을 대체했지.”마흔네 살에 예비군 중대장직을 그만둔 장상전씨는 한동안 군부대에 부식을 납품했다.
“예비군 중대장을 3년 하는 도중에 군부대에 부식을 납품하게 됐네. 그러면서 예비군 중대장은 자연히 그만두게 됐지. 원래 울진 지역을 맡고 있던 연대본부는 봉화에 있었는데, 그때 수산 솔밭으로 넘어왔거든. 그 이전까지만 해도 죽변과 울진읍 신림에만 대대본부가 있었지. 연대본부 군납도 처음에는 연대본부에 근무하던 군수참모가 직접 납품을 했는데, 부도가 나면서 내가 군납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군납을 해서 망한 건 나밖에 없을 거야. 육고기나 생선은 밑지지 않았는데, 주로 채소에서 밑졌어. 울진이나 영덕 영해에서 나는 채소가 모자라서 멀리 부산까지 가서 채소를 사오고는 했는데, 결국 빚도 지고 그러면서 그만두게 되었지. 지방 사람들은 내가 채소를 산다면 또 얼마나 비싸게 받으려고 하는지. 군부대에 납품을 한다니까 그저 떼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때 이집 인근에 있던 땅이란 땅에는 모두 채소를 심고, 집 옆에는 우사를 지어서 소도 한 이삼십 마리 키우고 돼지도 삼사백 마리 키우고 그랬지. 군에 납품을 하면서 혹시 모를 비상용으로 키운 셈이지. 군납을 하면서 돈도 못 벌고 오년정도를 보냈네.”군을 제대한 후 각종 사업을 하다가 고향 봉평리로 돌아온 뒤 예비군 중대장과 군납 등을 하던 장씨는 지난 해 연말까지 4년여 동안 6.25참전유공자회 울진군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1985년 봉평해수욕장 휴게소 기공식장씨는 또 죽변 봉평리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봉평 해수욕장을 개장할 당시의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려준다.
“1985년도인가, 울진군에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만들게 됐지. 남쪽에는 구산해수욕장을 만들고 북쪽에는 봉평해수욕장을 맨 처음 만들었어. 당시에는 군부대에서 철조망을 치고 바다를 통제하고 있었네. 그 문제를 군 출신인 내가 국방부에 청원하는 등으로 풀었지. 그리고 봉평리 주민들이 해수욕장을 만들 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다보니 죽변면번영회에서 돈을 대 준다면서 이름을 죽변해수욕장으로 하자고 그랬어.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내가 따져 물었지. ‘해운대해수욕장이 왜 부산해수욕장이 아니고, 강릉에 있는 해수욕장은 왜 경포해수욕장이라고 하느냐? 그 터전의 이름을 따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왜 봉평 동네 성씨를 바꾸려고 하느냐?”고. 그런 곡절 끝에 봉평2리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대서 어렵게 봉평해수욕장을 개장하게 됐네. 그때부터 지금까지 봉평해수욕장은 우리 마을에서 관리도 하고 운영도 하고 있지.”봉평 샛들을 지나 박실을 가는 도중에 위치한 장상전씨 집을 찾아가는 외진 길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길 양쪽에 무더기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그 길을 지나서 장상전씨의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 쌓인 눈은 비교적 차 한대를 여유 있게 주차할 수 있을 만큼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여든하나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장상전씨는 젊은 시절에 전방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습관대로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인근 산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한다고 전한다.
“이 사람아, 내 집에 손님으로 왔으니 술은 한잔 하고 가야지”라며 팔을 잡아끄는 강건한 얼굴의 장상전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