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는 게 소원이래요” 울진읍 권영랑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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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부모가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기도 하는 슬픈 일들이 많잖아요?
이런 것은 다 자기 편안함만을 우선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또 은혜를 모르고 사랑이 부족한데서 생기는 일이지요...... 이럴 땐 자꾸 손잡고 얘기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좀 알아다오.”...... 대화가 된다면 더 이상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2000년 울진군 사례 발표에서 권영랑-
우리는 일반적으로 노년기의 가능성은 젊은이들에 비해 훨씬 더 봉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때로는 한발 더 나아가서 소비와 팽창만을 쫓는 풍요 지향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태평스러움을 쫓는 듯이 보이는 노년기의 삶들은 추락하는 계급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수정하고 주변의 시선과 일치를 이루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세상에 태어나서 청소년기를 거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의 길에 접어들어 주름살을 비롯한 신체상의 변화를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무덤덤하게 그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노년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실천으로 옮겨가는 습관을 몸에 옷처럼 걸치고, 어떤 상황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세월 살아온 흔적들을 정리하며 오랜 세월 마음속에 지고 왔던 무거운 짐도 미련 없이 내려놓는 이들이 그들이다.
노년이 되면 차가웠던 사람도 따뜻해지고, 또 어쩌면 육체가 아닌 영혼의 힘으로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흔히들 봉사는 사회적 강자가 약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고, 또 전달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의외로 주변에서는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고 있는 노년인들이 생각, 말, 미소로 나눔을 실천하면서 기쁨, 재능, 지식을 함께 하는 아름다운 정경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타의에 의해 강요되는 활동이 아닌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년의 봉사활동을 통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해결책을 모색하는 노년기의 삶은 노쇠라는 말이 담고 있는 퇴보와 쇠퇴의 개념을 일순간에 무력화시킨다.
결국 이 사회는 오랜 경험과 지혜를 통해 발현되는 노년의 삶과 그들의 미덕을 통해 진정으로 진보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엄마 배위에서 젖을 빨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니 엄마 죽었다’하면서 저를 밀어내던 생각만 쟁쟁합니다.···친정 엄마라도 살아 있었으면 말을 할 텐데,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남몰래 울면서 등허리가 썩어 들어가는 아픔을 참을 수 밖에 없었지요.
울진읍 시장 안에서 40년여 남편과 함께 잡화점을 하고 있는 권영랑(66세)씨는 죽변면 후정2리 매정동(梅亭洞, 매장)에서 태어났다.
“죽변 후정2리에서 태어났어요. 매장을 지나면 수실 동네가 있고, 그 옆에 공군이(孔根)라고 부르는 동네지요. 아버지는 안동 권씨 성에 ‘형’자 ‘석’자고요, 어머니는 임씨 성에 ‘순’자 ‘옥’자를 사용했어요. 친정아버지는 78세에 돌아가셨는데, 벌써 오래 됐지요. 친정어머니는 43세에 세상을 떠났다는데 얼굴도 몰라요. 제가 4살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사진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니는 옛날에 도민증 사진을 찍으러 가던 중에 병이 들어서 돌아가셨다는데, 그렇다보니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지요.”
4살 때 어머니를 잃은 권씨는 큰 올케 손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두 살 아래의 조카가 태어나면서 어린 시절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갔지요. 그때 엄마 배위에서 젖을 빨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니 엄마 죽었다’고 하면서 저를 밀어내던 생각만 쟁쟁합니다. 그리고 상여가 집을 떠나갈 때 꽃을 보면서 좋다고 쫓아갔던 게 생각도 나고요. 엄마는 저를 낳았다 뿐이지, 생전에 ‘엄마’라고 불러보지도 못했어요. 아버지인들 남자니까 어디 애들 키우는걸 알기나 했겠어요? 주로 큰 올케 손에서 컸는데,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요. 저는 4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위로 ‘찬경’이라는 오빠가 있는데 후정리에서 살다가 벌써 43세 때 돌아가셨어요. 그 다음이 ‘정랑’이라는 언니가 76세인데 울진 읍내에 살고 있고요. 또 작은 오빠가 ‘찬웅’이라고 후정4리 화성리 송정에 살다가 56세 때 돌아가셨어요. 그 다음에 저고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큰 오빠는 장가를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올케가 시집을 와서 2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때 저는 4살이었으니 시누이가 아니라 딸 같기도 했겠지요. 그래도 자기 자식을 낳아놓았으니, 나이가 어려도 명색이 시누이인 제가 자식같이 여겨지지는 않았겠지요. 제가 올케가 시집와서 낳은 자식보다 두 살이 맏이였으니까요. 먹고 사는 형편도 말할 수가 없었지요. 친정집은 농사를 지었어요. 어릴 때 큰오빠만 결혼을 했고, 저보다 10년 맏이인 언니와 작은 오빠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지요. 언니가 다 컸으니 저를 많이 돌봤어요.”
권영랑씨는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도 집에서 보내주지를 않아서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고 전해준다.
“학교도 옳케(제대로) 못 다녔어요. 집에서 보내주어야 가지요. 죽변국민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치우게 됐지요. 올케 밑에 자라다가 8살이 돼서 남들은 다 학교에 가는데, 우리 올케는 학교에 보내주지 않더라고요. 그때 집안일은 모두 다 올케가 알아서 할 때였지요.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 학교는 보내주지 않고 입이라도 벌라고 뒷집으로 애기(아기)를 봐 주라면서 보냈어요. 같은 동네에 애기가 많은 집이 있었는데, 올케가 시키니 할 수 없이 그 집으로 갔지요 모. 나이가 어리니 어디 꼼짝할 수나 있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갔지요. 그 집에 가서 3년 동안 애를 봐주면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잤어요. 한동네인데도 집에 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남들은 다 학교에 다니는데 그렇게 살았어요.”
한여름에 등에 업은 애가 싼 오줌독으로 인해 등허리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고 권씨는 말한다.
“친정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애를 봐주면서 농사철이면 밥을 이고 논두렁을 따라서 밥도 배달하고, 띠 하나에 애를 업고 물 이러도(길러도) 다니고, 이런저런 잔심부름도 하고 그랬어요. 갓난애를 등에 업고 있으니 오줌은 또 얼마나 자주 누는지. 그때만 해도 애들이 기저귀를 차고 있지 않을 때였지요. 여름에 오줌을 누면 등허리가 금세 젖고, 제대로 닦지도 못하니 얼마나 고달팠는지 몰라요. 오줌도 한두 번이지, 자꾸 등에 싸니까 나중에는 등허리가 썩더라고요. 제 나이도 여덟아홉 살이었으니 피부도 어른들 피부가 아니고 연한 애들 피부잖아요? 지금도 키가 작지만 그때만 해도 지대로(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했으니 동갑내기들보다 키도 더 작았어요. 오줌독이 올라서 처음에는 등허리 피부가 썩으면서 아프고 냄새가 나더니 나중에는 꼽새(꼽추)가 됐어요. 등허리에 이만한 혹이 쑥 올라오더니 쑤시기 시작하는데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아픈데도 말할 사람이 없었어요. 친정 엄마라도 살아 있었다면 아프다고 말을 할 텐데,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남몰래 울면서 등허리가 썩어 들어가는 아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지요. 집에도 못 왔고요.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집에 오지요. 어린 나이에도 한평생 빙신(병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우물가에 물을 이러 가면 허리를 숙여서 바가지로 물을 퍼야 하잖아요? 그런데 병원에도 못가고 약도 못 바르니, 허리를 숙일 때 옷자락이 누런 진물이 나는 혹에 쓰시대면(스치면) 아파서 깜짝 깜짝 놀라고는 했지요. 그때 그 고통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래요. 그렇게 그 집에서 3년을 살다보니 애도 많이 컸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오줌독이 올라서 헐고 진물이 나던 등허리 혹은 애를 안 업고 다니고, 오줌도 묻지 않으니까 저절로 없어지더라고요. 제가 커왔던 일은 말할 수도 없어요. 그런 소리를 하면 눈물만 나요. 너무너무 허무하게 살아왔어요. 참 말도 못해요. 지금도 예전 일을 생각할 때면 큰 올케가 야속스러울 때가 있지요. 젊은 나이에 혼자가 돼서 지금도 매장 동네에 살고 있는데, 자주 찾아가지도 않아요. 저도 인간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언젠가는 친정 동네에 가서 여러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어린 시절 얘기가 나왔는데, 큰 올케는 제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걸로 알고 있더라고요. 그 어린 시절에 학교를 못가고 애를 봐주다가 등허리가 썩고 혹이 나서 죽을 고생을 했던 기억은 저에게만 남아 있는 거지요. 그런 고생을 누가 알겠어요?”
<예전 어느 때 노인 무료 이발 봉사 당시>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해야 학교에 갈수가 있었어요. 그러니 쪼꼬만게가 아침이면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어요?···물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떠내러 가다가 나무뿌리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같이 소 먹이러 갔던 사람 중에 덩치가 큰 사람이 구해 주었지요
국민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8살에 이웃집으로 애를 봐주기 위해 등을 떠밀러 갔던 권씨는 3년만이던 11살 되던 해에 집으로 돌아온다.
“누구 하나 붙잡고 말도 못하던 고통 속에 남몰래 울면서 3년을 보내고 난 다음에 11살이 돼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저는 그때도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지났지만 사람으로 살려면 글씨는 알아야겠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11살이 되던 해 죽변국민학교 입학식 날에 무작정 동네 애들을 따라서 학교로 갔어요. 애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선생님이 앞에 서서 하나하나 이름을 무르고 일렬로 줄도 세우고 그러더라고요. 다른 애들은 어머니 아버지나 할머니하고라도 함께 입학식에 왔는데, 저야 누가 있어요? 그렇게 혼자 서 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오더니 ‘너는 부모도 없고 닭새끼나?’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아무 말도 못하고 운동장에 혼자 서 있었어요. 그런데 입학을 했는데도 매일 학교에 갈수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일 시킨다고 보내주어야 가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해야 학교에 갈수가 있었어요. 그러니 쪼꼬만게가(조그마한 애가) 아침이면 얼마나 정신없이 바빴겠어요? 날씨가 추울 때는 설거지가 끝나기 무섭게 매장 집에서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죽변국민학교까지 갔는데, 찬바람에 터서 온 손등이 피투성이가 되고 그랬지요. 공부도 옳게 안 되고 말도 못했지요. 어디 변변하게 옷도 제대로 못 입고 학교에 쫓아 다녔고요. 그러다보니 1학년 1학기를 배우고 2학기는 건너뛰었어요. 그리고 2학년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학교를 도저히 다닐 수가 없더라고요. 온 식구가 아침을 먹고 난 후에 설거지를 하다가 미처 끝내지 못하면 학교에 보내주질 않았으니, 학교에 가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어요. 어떤 때는 설거지를 끝마쳤는데도 집에 다른 할 일이 있다고 또 붙들렸고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어도 아버지도 계셨고, 결혼한 오빠와 올케도 있었지만 사친회비도 주지 않았어요. 도저히 공부를 배울 수가 없더라고요. 남들이 공부할 때 저는 날마다 집에서 일을 했고, 결석이 더 많았으니까요. 그러니 어떻게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겠어요? 학교 다닌 날짜가 일년에 한달도 안됐어요. 그래도 어쨌든 3학년까지 올라갔다가 학교를 그만 두었어요. 선생님이 그 당시 통신표에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는 하는데 결석이 너무 많다’고 지적해주었던 말씀이 지금까지도 생각납니다. 그래도 쪼꼼(조금) 학교를 다녔기에 이름 석 자는 쓰고 읽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권영랑씨가 어렸던 시절에는 시골 집집마다 소를 한두 마리씩 키웠고, 애들이 소를 끌고 인근 산으로 꼴을 먹이러 다녔다.
“14살 때 사라호태풍이 왔어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다 바람까지 말도 못했어요. 그때 집에 키우던 소를 먹이러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갑자기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서 떠내려갔던 일이 있지요. 소를 먹이다가 비바람이 원체 심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곡 물을 건너게 되었는데, 저만 못 건너고 물길에 휩쓸렸어요. 소를 먹이러 갔던 일행 중에서 키도 제일 작고 몸집도 제일 작았으니까요. 큰물이 갑자기 확 쏟아져서 한목에(한꺼번에) 내려오니까 그 양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물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떠내러 가다가 나무뿌리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같이 소 먹이러 갔던 사람 중에 덩치가 큰 사람이 구해 주었어요. 그래도 안 죽더라고요. 그때는 어린 나이에도 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지 바다에 가서 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저 물에 뛰어들면 그냥 죽는데 하는 생각을 했고, 산위의 바위에 올라가도 그냥 이 아래로 떨어지면 죽는데... 그러면 이런 고통을 안 당할 텐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지요. 그래도 시퍼런 바닷물이나 높은 바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쉽게 죽어지지가 않더라고요.”
8살이 되던 해부터 이웃집의 애를 봐주는 일을 시작으로 인근 산으로 소 먹이러 다니는 일까지 이것저것 집안일을 거들던 권씨는 15살 되던 해에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래그래 살다가 누가 얘기를 해주어서 15살에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우리 이웃에 살다가 죽변에 내려가서 건어물 가게를 하던 사람이 소개했지요. 집에서는 일을 시키려고 못 내려가게 했는데, 마침 그때는 오빠도 어디 가고 없었고, 올케도 친정에 가고 없었어요. 그런 틈을 타서 내려갔지요. 죽변에서 건어물 가게를 하는 아저씨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부산으로 내려가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른을 따라 부산에 가서 은행이나 우체국 등지를 다니며 온갖 심부름을 다 했어요. 먹고 자는 일은 부산에서 어물 파는 가게를 하던 집에서 했고요. 그렇게 5년 동안 부산에서 살다가 다시 죽변 매장 집으로 돌아왔지요. 집에 돌아와서는 그전에 하던 집안일을 계속 했어요. 날이면 날마다 논밭일도 하고 인근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고요.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두짐씩 집으로 져 날랐습니다. 오전에 한짐, 오후에 한짐씩 계속 져 날랐어요. 산에 가서 이런저런 나무를 모아서 지게로 져 날랐어요. 이렇게 키는 작아도 지게를 잘 졌어요. 나무를 하러 다니면서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산으로 소를 먹이러 다녔고요.”
<권씨의 남편 전태만씨는 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폐지 수집하는 일을 함께 했다>
애를 업고 하당 같은 시골 마을을 다니면서 바늘, 실, 빨래비누, 사카린 같은 걸 팔았지요.···후정리 매장에서 과일을 사서 죽변을 지나고 온양리를 거쳐서 울진까지 이고 왔어요.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으면 목이 뻣뻣해지다가 점점 목에 감각이 없어지고, 나중에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까지 막혀요.
15살 되던 해에 부산으로 내려가서 5년 동안 은행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권영랑씨는 20살에 죽변 후정 매장 집으로 돌아와서 집안일을 거들다가 23살에 결혼한다.
“울진읍 명도리가 친정인 올케의 친척이 중매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중매가 많이 들었어요. 계속 집에서 일만 했지 어디 놀러 가는 것도 몰랐고, 그러다보니 일을 잘한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중매가 많이 들어왔어요. 오죽하면 올케가 중매 들어오는 게 몸서리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집에 있을 때는 여자가 밖으로 돌면 안 된다고 선거가 있을 때도 못 가게 했어요. 행곡3리 함질이라는 동네로 시집을 갔지요. 23살 되던 해 음력 9월 21일에요. 남편은 ‘전’씨 성에 ‘태’자 ‘만’자를 써요. 저하고 6년 차이가 나는데, 호적상의 나이는 5년 줄어 있고요. 결혼할 때 신랑이 매장 집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하룻밤을 묵고 먼저 돌아가고, 저는 일주일후에 시댁으로 들어갔어요. 그날이 9월 27일이었지요. 시댁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다시 잔치를 했고요. 결혼을 해서 시댁으로 들어가니까 식구가 열여섯이나 되더라고요. 기가 맥했지요(막혔지요). 시부모님과 시숙과 동서, 애들 8명, 우리 부부... 우리 아저씨가 막내인데도 한동안 시댁살이를 했어요. 그리고 7개월 후에 울진읍내에 방을 얻어서 살림을 났지요. 시부모님은 인근 마을에 방을 얻어서 농사를 지으라고 했는데, 우리 아저씨가 농사는 짓기 싫다면서 울진읍내로 나왔어요. 울진으로 내려와서 처음에는 공석 넘어가는 곳에서 1년 살다가 다시 남부국민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서 1년 살고 그랬어요.”
결혼 후 7개월여 시집살이를 하던 권영랑씨 부부는 울진읍내로 이사를 내려와서도 한동안 땔나무를 하러 다녔다.
“집집마다 나무를 땔 때니까 울진에 내려와서도 계속 나무를 하러 다녔어요. 우리 아저씨가 나무를 하러 가면 저도 따라 다녔고요. 지게를 지고 행곡으로 올라가서 대흥리까지도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집에서 때기도 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그랬지요. 참 멀리도 다녔어요. 그러다가 일년 정도 지나서 시장 바닥에 나무판자를 펴놓고 난전(亂廛) 장사를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너도나도 울진 시장 안 바닥에 전을 펴고 실, 비누, 바늘 같은걸 팔았어요. 그래도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저는 따로 애를 업고 하당 같은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바늘, 실, 빨래비누, 사카린 같은 걸 팔았지요.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면서 도부장사를 한 거지요. 하당에 언니가 살았는데 그곳에 가면 하룻밤씩 묵어오기도 했고요. 촌사람들에게 물건을 팔면 돈 대신에 쌀 반되씩, 한되씩 받아왔지요. 월변에 살 때는 하당 쪽 동네를 참 많이도 다녔어요. 우리 아저씨는 처음에 난전에서 잡화를 팔다가 뒤에는 풀빵장사를 하기도 했고요. 또 한동안은 죽변 후정 매장 친정동네까지 가서 과일을 사서 죽변을 지나고 온양리를 거쳐서 울진까지 이고 왔어요. 그때 친정동네에는 과수원이 몇 군데 있어서 과일이 흔했거든요. 매장에서 복숭아를 두접 반씩 사서 머리에 이고 오다가 사람을 만나야 겨우 쉬었어요. 사람이 없을 때 과일을 담은 다라이(대야)나 큰 박스를 내리면 다시 머리에 일수가 없으니까요. 적당한때 사람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람을 못 만나면 죽을 고생을 하게 되지요.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목이 뻣뻣해지다가 점점 감각이 없어지고, 나중에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까지 막혀요. 그런 고통은 겪어봐야 알지요. 과일이 두접 반이면 개수로 이백 오십 개잖아요? 여자가 그걸 큰 박스에 가득 담아서 머리에 이고 죽변 후정리에서 울진까지 걸어온다고 생각해 봐요. 아이고, 덧찌(덧정) 없어요. 그때도 죽변으로 버스는 다녔는데, 그나마 차비라도 아껴보겠다고 그렇게 험하게 몸을 굴렸으니 나이 들면서 성한 데가 없지요. 그러다가 울진시장 안에서 본격적으로 잡화 장사를 했지요. 계속 난전 장사를 하다가, 이렇게 가게를 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요. 처음에는 가게 이름도 행곡상회였는데, 병원에 가 있는 아들이 한 이십년 전에 동산상회가 이름이 좋다고 바꾸었지요. 지금도 세무서에는 행곡상회로 되어 있고요.”
23살에 결혼한 권영랑씨는 6살 연상의 남편 전태만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제일 위가 딸인데 은희(43세. 경기도 화성시)라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고, 둘째가 아들인데 대희(41세)라고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어요. 그 다음이 춘화(38세. 경기도 평택)라고 딸이고, 막내가 아들인데 성호(33세. 경기도 평택)지요.”
<23살에 결혼한 권씨는 6살 연상의 남편 전태만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11살이 돼서 울진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6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계속 업고 다녔지요.···축협 공채 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에서 장애인이라고 떨어진 아들이 백일동안 밖에 나가지 않더니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버리더라고요. 할머니가 마비가 돼서 누워 지내고 있는 와중에 아들까지 쓰러지니 정말 기가 맥했지요.
권영랑씨는 선천적으로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난 첫째 아들 대희씨를 11년 동안이나 업고 다니며 키웠다.
“시집을 가 살면서 큰딸을 낳고 둘째로 아들을 낳았는데 뇌성마비였어요. 지금도 병원에 환자로 입원을 해 있는데 제가 눈을 감기 전까지는 항상 가슴속에 멍멍하게 남아 있지요. 벌써 41살이나 됐는데, 포항 노인2병원에 입원을 해 있어요. 처음에 애를 낳았는데 1년이 지났는데도 울 줄만 알았지, 엄마 소리도 못하고, 밥도 자기 손으로 못 먹고, 기어서 다닐 줄도 모르고 그러더라고요. 온 몸에 감각도 없었는데, 처음에는 몰랐어요. 시골에 살다 보니까 병원에도 제대로 못 다녔고요. 그런데 돌을 한달 앞두고 열이 40도 이상 올라가기에 병원에 가서 보름이나 있었는데도 열이 안내리더라고요. 그러니 병원 의사가 빨리 대구 쪽 큰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아보라고 했어요. 대구 병원에 갔더니, 그때 가슴 콜레라가 유행이었어요. 대구 병원에 가서 3일 만에 열이 내리고 토하고 싸는 것도 없어졌어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 온몸에 뼈가 없는 것 같았어요. 자기 힘으로는 아무 일도 못하고 그렇게 11살까지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 있었고, 똥오줌을 다 받아냈지요. 허리가 반으로 접쳐(접혀) 있으니까, 항상 애를 업고 다녀야 했어요. 눈만 뜨면 애를 업고 다녔는데, 밑에 애가 태어나도 그 애는 못 업어 주었어요. 계속 대희만 업고 다니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가게에 와서 ‘왜 계속 다 큰 애를 업고 다니냐’고 묻기도 하고 그랬어요. 노다지(노상) 업고 11살까지 키웠지요.”
권씨는 아들 대희씨가 초등학교에 다닐 동안 계속 업어서 통학을 시켰고, 중학교 3년 동안은 자전거를 태워서 통학 시킨 억척 엄마였다. “그러다가 11살이 되니까 애가 무엇인가 붙잡고 기어 다니고 그러더라고요. 엄마 소리는 그때까지도 옳게 못했고요. 11살이 돼서 울진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6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애를 또 계속 업고 다녔지요. 온몸에 감각이 제대로 없으니까 아침에 학교에 갈 때면 똥도 꼭 집에서 누이고 갔는데, 어떤 때는 학교에서 똥오줌을 바지가득 짊어지고 오기도 했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에 올라갈 때쯤에는 제가 자전거를 배웠어요. 덩치가 커지니까 더 이상 업고 다닐 수도 없고, 자전거에 올라 앉혀서 또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중학교를 데리고 다녔어요. 우리 아저씨와 번갈아 가면서요. 그때 자전거를 배워서 타고 다니기 시작한지가 30년이 넘었는데, 일 년 전부터는 무르팍 연골이 닳아서 자전거도 못 타요.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무르팍이 아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퇴행성관절염이라고 하는데 그냥 걸어 다니기는 해도 앉았다 일어설 때면 힘이 들지요. 대희가 고등학교에 갈 때쯤 되니까 힘이 좀 생기더라고요. 키도 일메다(일미터) 팔십이래요. 오른쪽 수족을 못 쓰도 팔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힘겹게 울진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또 대학을 보내야 되잖아요? 그때 대전대학에 입학원서를 낸다고 해서 학교에 연락을 했지요. 우리 애가 이러저런데 합격하면 받아 줄 수 있냐고요. 그러니까 대학 측에서 합격만 하면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험을 치러 대전으로 올라갔는데, 내일이 시험이라면 그 전날에 시험지 도난사건이 생기면서 시험도 못보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대구에 있는 보건전문대학에 보냈습니다.”
대구보건전문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권씨의 아들 대희씨는 축협 공채시험 합격 이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한 충격으로 쓰러져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보건전문대 행정학과를 2년 만에 졸업했지요. 졸업하고 나서 울진 집으로 돌아와서 백암 온정에 가서 호텔 총무로도 1년 반 정도 있었고, 울진읍 사무소에서 임시직으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노음초등학교 전산 보조원으로 근무도 했고, 장애인 사무실에 한동안 다니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축협에 공채 시험이 있었어요. 축협 직원이 ‘집에 아들 시험을 봐서 축협에 다니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합격을 하면 축협에서 받아줄 수 있는지를 먼저 물었는데,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행정직으로 사무를 보니까 장애가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더니 면접에서 장애인이라고 받아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에 세상을 향해서 얼마나 큰 실망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 고통은 장애인을 둔 부모가 아니면 알지 못해요. 그 심정은 내가 안 겪어보면 절대 몰라요. 울기도 참 많이 울었지요. 부모도 부모지만 아들 심정은 또 어땠겠어요? 그때 집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수족을 못 썼어요. 그러니 집안에 눕혀놓고 밥도 떠먹여주고 매일 몇 번씩 똥오줌도 갈아주고 했지요. 딱 두달 없는 10년을 고생했거든요. 그런 와중에 아들이 축협 면접에서 장애인이라고 떨어져놓으니 집안에 틀어박혀서 백일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더라고요. 축협에 들어가서 근무할 거라고 시험공부도 열심히 해서 합격까지 했는데, 막상 면접에서 장애인이라고 퇴짜를 맞았으니 세상을 향한 원망이 오죽했겠어요? 백일동안 대문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컴퓨터만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아들까지 쓰러져 버리더라고요. 할머니가 마비가 돼서 누워 지내고 있는 와중에 아들까지 쓰러지니 정말 기가 맥혔지요(막혔지요). 시어머니에 아들까지 그래 놓으니 살길이 막막하고 희망이 완전히 없어졌어요. 아들도 마비가 와서 팔다리가 안 오그라지니 정말 나무토막 같았어요. 그때부터 눕혀놓고 밥도 떠먹이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등에 욕창이 생겨 진물도 나고 말도 못했어요. 아이고, 얼마나 기가 맥히요? 쓰러지기 전에는 몸이 불편해도 직접 밥도 해먹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랬던 아들인데.”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권씨의 아들 대희씨는 현재 포항노인2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편하겠다 싶어서 어느 날부터 이것저것 정리를 하기 시작했어요.···그런데 그 티브이 프로를 보고나서 밤새 눈물을 쏟으면서 결심했지요. ‘저런 가정도 사는데, 나는 무조건 감사하고 힘을 내서 다시 살아야겠다.’ 그렇게요.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시어머니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아들 병 수발을 하다가 죽기로 작정했던 권영랑씨는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감사하게 됐다고 전한다.
“더 이상 살아날 의욕이 없어서 제가 죽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죽고 나면 이런 꼴 저런 꼴을 더 이상 안보겠다 싶어서요. 밤이면 잠을 자야 하는데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어요. 이대로는 희망이 하나도 없고, 차라리 내가 죽으면 편하겠다 싶어서 어느 날부터 이것저것 정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잠을 이룰 수 없던 어느 날 새벽 한두 시경에 텔레비를 켰는데, 무슨 프로에서 우리보다 더 힘들고 억울하게 사는 가정이 있었어요. 그 집은 할아버지, 아들, 며느리 모두가 장애인인데, 칠십 살 먹은 할머니가 박스를 모아 팔아서 온 식구를 먹여 살리더라고요. 그 티브이 프로를 보고나서 밤새 눈물을 쏟으면서 결심했지요. ‘저런 가정도 사는데, 나는 무조건 감사하고 힘을 내서 다시 살아야겠다.’ 그렇게요. 그때 그 텔레비 프로를 안 봤더라면 아마 죽었을 겁니다. 그 후에 시어머니와 아들 두명을 계속 수발하다가 어느날 제가 디스크가 왔어요. 그때가 2002년도인가 그랬지요. 디스크가 오니 허리가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을 만질수가 있어야지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 아저씨가 계속 어머니와 아들을 돌봤는데, 결국 우리 아저씨도 심근경색과 디스크가 왔습니다. 우리 아저씨는 지금 몸에 인조뼈도 들어있고 그런 상태지요. 그러니 가게는 가게대로 문을 닫는 일이 계속 늘어갔고요. 도저히 가게를 볼 여가가 없었어요. 삼시세끼 밥을 먹여주고 똥오줌을 받아내는 환자가 집에 두명이나 있는데, 저는 디스크가 와서 꼼짝도 못하지, 그러니 죽으나사나 우리 아저씨가 고생이었지요. 얼마 있다가 도저히 안돼서 제가 먼저 디스크 수술을 했고, 우리 아저씨도 디스크 수술과 심근경색 수술을 했어요. 아들을 목욕시킬때가 되면 한사람은 머리를 들고, 또 한사람은 두쪽 발을 들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기고,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키도 일메다팔십이 넘는 아들이 마비가 돼서 사지가 굳어 있으니 힘이 안들고 어째요?”
오랜 기간 동안 시어머니와 아들의 병 수발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된 권씨 부부는 결국 아들 대희씨를 요양병원으로 보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계속 아들 수발을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안돼서 ‘어디 요양병원이라도 보내야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우리 아저씨와 상의를 했어요. 둘 다 시원찮은 허리로 다 큰 아들을 밥 먹이고 씻기고 하려니까 너무 힘이 들고, 또 가게는 가게대로 엉망이 되고, ‘이러다가는 식구들 밥도 못 먹고 살겠다’ 싶은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그래서 아저씨와 포항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 요양병원을 알아봤어요. 아들을 병원에 보냈을 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알아보러 다닌 거지요. 그런데 막상 집에 와서는 도저히 아들에게 얘기를 꺼낼 수 없었어요. ‘엄마 아빠가 너무 힘이 들고 지쳐서 너를 요양병원에 보내야겠다’는 얘기를 자식에게 어떻게 해요? 그런데 아버지와 엄마가 자기에게만 매달려 있어서는 아무 일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2008년도에 아들이 먼저 요양병원에 보내달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요양병원을 알아보러 이곳저곳 다닌 사실도 그때는 이미 알고 있었고요. 2008년 12월 31일 날 구급차를 불러서 포항 요양병원으로 보냈어요. 마지막으로 우리 아저씨와 함께 애한테 밥을 먹이고, 저거 아버지가 업고 나오는데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든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키는 커도 손끝 하나도 까딱 못하는데, 저걸 요양병원에 보내야 되나 싶은 생각에... 저거 아버지가 업고 나오려고 방안에 들어가니 저도 까꿀로(거꾸로) 엎드려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고 있었고요. 그렇게 아들을 병원에 보냈어요.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은 우리 아저씨와 함께 아들에게 가지요. 병원 반찬이 입에 안 맞는다고 해서 밑반찬도 이것저것 만들어서 그렇게 병원에 갑니다. 몸을 꼼짝할 수가 없으니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간병사들이 돌려 눕혀서 먹여주고 대소변을 갈아주고, 물은 빨대를 꽂아서 먹이고 그래요. 그래도 정신은 아주 멀쩡하지요. 정신이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자기 자신이 제일 괴롭겠지요. 지금도 한달에 병원비로 40만원씩 꼭꼭 들어가지, 우리 아저씨와 함께 가면 차비도 들지, 애가 정신이 멀쩡하니 용돈도 들어가지, 간호사들 먹을 것도 좀 해주어야지, 그 돈도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하도 불쌍하니 우리가 당장 못써도 아들에게 들어가는 돈을 아끼지는 않아요. 인생이 불쌍하잖아요?”
<권씨가 남편 전태만씨와 40년여 운영 중인 잡화점 동산상회>
<권영랑씨의 집 마당 한쪽을 가득 메운 폐지더미>
온 장 스레트가 머리를 때리면서 저는 땅바닥에 엎어져서 완전히 죽어 있었어요. 그런데 또 다시 모래가 가득 담긴 바케스가 이 어깨에 그대로 내려 꽂혔어요. 그래도 큰 후유증이 없었지요.···아직까지는 무엇인가 더 할 일이 남았다고 하나님께서 밑에서 떠받쳐서 빙신이 되지 않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2003년도에 울진읍 재래시장 장옥 공사를 할 당시 권씨는 지붕 위에서 떨어진 스레트와 모래 바케스를 맞고도 큰 상처 없이 회복된 것을 계기로 평생 남을 위한 봉사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2003년도에 큰 사고가 났었어요. 여기 울진시장 안에서 장옥 공사를 하는데 그전에는 스레트가 다 덮여 있었거든요. 그때 이 가게 처망(처마)에 앉아 있었는데, 일하는 사람이 지붕 위에서 스레트를 떨어뜨려서 제 머리에 그대로 내려 꽂혔어요. 온 장 스레트가 머리를 때리면서 저는 땅바닥에 엎어져서 완전히 죽어 있었지요. 그런데 또 다시 모래가 가득 담긴 바케스가 이 어깨에 그대로 내려 꽂혔어요. 스레트를 머리에 맞고 바닥에 죽어 있는데, 다시 바케스가 떨어지면서 어깨를 내려 쳤으니 어떻게 됐겠어요? 모래 바케스가 한반이 쩍 갈라졌어요. 그날이 11월 23일이었는데, 한겨울이었거든요. 의식을 잃었는데, 구급차에 꽁꽁 묶고 실려서 울진의료원으로 갔지요. 날씨가 추웠으니 잠바도 입고 돕바도 입고 참 많이 껴입고 있었는데, 병원에 가서 옷을 벗겨내니까 난닝구(러닝셔츠)가 푹 뚫어져 있었어요. 머리는 갈라져서 피가 철철 나고 있었고요. 그때 집에는 시어머니와 아들이 환자로 있을 때였지요. 응급치료를 받으면서 비몽사몽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안 그래도 집에 대소변을 받아내는 환자가 두명이나 있는데, 나까지 드러누우면 우리 아저씨가 환자 세명을 어떻게 보살피나? 빙신이 될 바에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정신이 퍼뜩 들더라고요. 한참을 그런 생각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었어요. 그리고는 정신을 다잡았지요. 다행히 스레트 온 장을 정통으로 맞고 모래 바케스에 맞았어도 별다르게 다친 곳이 없었어요. 병원 의사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도 저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겼지요. 그리고 이삼 일치 약을 타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는 지금까지 별다른 후유증 없이 살고 있어요. 지금도 생각하지요. ‘아직까지는 무엇인가 더 할 일이 남았다고 하나님께서 밑에서 떠받쳐서 빙신이 되지 않고 살았구나’ 하고요.”
그 이후부터 권영랑씨는 나머지 삶을 남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고 전해준다.
“저는 지금까지 배울 나이에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살지 않고 도시에 산다면 초등학교 1학년에 다시 들어가서라도 배울 자신이 있어요. 배우는데 부끄러울 게 뭐 있어요? 못 배운 게 하도 한이 돼서 애들 4명을 대학을 다 시켰어요. 큰 딸은 대학원까지 시켰고요. 지금도 울진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기회가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다 쫓아 다녀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원봉사, 요양보호사, 산모 도우미, 가정 파견 도우미, 아동 돌보미, 장애인 도우미, 이발, 방화 관리사, 수지침 자격증을 땄어요. 그런 공부를 해서 뭘 알아야 남을 도울 수 있잖아요? 그 전에 장사도 잘 안되고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는 울진 명도리, 북면 주인리, 죽변 등지를 다니면서 다섯 집의 가정 도우미도 했고, 울진의료원에서 장애인 주차 관리도 2년여 했어요.”
<권씨는 자원봉사 회장을 맡아서 일할 당시에 폐지를 수집 판매한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서 인근 지역 노인들을 대접했다>
<권영랑씨는 지금도 울진의료원에서 환자들 무료 이발 봉사를 하고 있다>
밑바닥을 기는 심정으로 진짜 힘들게 살아봐야 없이 사는 힘든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권씨는 말한다.
“장애인 부모회 교육을 포항과 울진을 오가며 받았고,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씩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어요. 이발 기술을 배워서 울진의료원에서 노인 환자들 머리도 깎아주고, 목욕 봉사를 다니기도 하고요. 목욕을 많이 시킬 때는 하루에 네 사람도 시키고, 이발은 많이 할 때는 열 명도 넘게 머리를 깎아 주고요. 예전에는 시골 동네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한꺼번에 열댓 명씩 머리를 깎아주기도 했고요. 그런 날에는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이튿날 눈을 뜨면서 다시 힘을 내지요. 어떤 때는 목욕봉사를 나가서 나이든 당뇨환자를 씻기다 보면 살이 썩어 들어가면서 지독하게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저는 언제부턴가 그런 냄새도 안 맡아져요. 어떤 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고개를 돌리기도 하지만, 저는 그럴수록 더 정성스럽게 몸을 씻겨 드리지요. 제 손길이 필요한 이곳저곳을 찾아서 쫓아다니지만 시간이 너무 모자랄 때가 많아요. 지금 막내만 결혼시키고 나면 아무것도 걸거치지(거치적거리지) 않으니, 그때가 되면 어디 요양원 같은 곳에 들어가서 남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을 겁니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남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는 게 소원이래요. 자원봉사 회장을 맡아서 일할 때는 자체 자금이 없어서 폐지를 모아 돈을 만들었어요. 우리 아저씨와 밤새도록 온 동네를 다니면서 박스 같은 폐지를 모아서 팔고, 밤새 우리 집에서 떡과 국, 잡채 같은 음식을 만들어서 각 동네를 찾아다니면서 어른들 생신 잔치도 차려주고 그랬지요. 온양리, 신림리로 찾아다니면서 그런 일을 십년도 넘게 했어요. 나이든 어른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걸 보면 오히려 제가 보람을 느꼈고, 감사했지요. 우리 아저씨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니까 그런 일도 가능하지요.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요? 집에서 남자가 안 된다고 하면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아저씨는 폐지를 주우러 다닐 때도 말없이 큰 짐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실어서 날라주었어요. 차가 없어서 자전거 짐받이에 폐지를 잔뜩 싣고 다녔거든요. 우리 아저씨께도 항상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둘 다 참 힘도 셌는데, 허리 수술을 하고 난 다음부터 힘쓰는 일은 못해요. 저는 점점 나이 들어가는 지금도 제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냥 좋고 또 보람 있어요. 여성의용소방대장도 나이가 많아서 그만둘 때까지 7년 정도 했으니 꽤 오래 했지요. 어릴 때부터 하도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으니 없는 사람들 심정도 잘 알아요. 무엇이든지 자기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지요.”
사진을 한 장 찍자니까, “얼굴도 많이 늙었고, 머리도 허연데(하얀데) 사진을 찍어서 뭐하게요? 머리가 허예도 염색을 안 하고 살아요.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면 뭐하겠어요? 앞으로도 안할 겁니다. 이런데 돈을 들여서 뭐해요?”라고 말하는 권영랑씨다.
주일과 장날이 겹치지 않으면 빠짐없이 교회에 나간다는 권씨다.
“주일과 장날이 겹치는 날이면 한사람은 교회에 나가고 한사람은 가게를 지키지요. 이제는 장사도 예전 같지 않아요. 재래시장도 사람들이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 정도는 놔두고 정비를 해야 되고, 적당하게 난전도 형성이 돼야 시장 안으로 연결이 되는데... 겉모양만 살려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도 순리대로 열심히 장사도 하고 봉사도 해야지요.”라고 말하는 권영랑씨다.
<남편 전태만씨와 울진시장 안 골목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