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오시 강씨’ ‘메다데시 강씨’로 불렸던 강득용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1.10.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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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고유 영역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을 주변에서 가끔 만날 수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탄성과 함께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고 한마디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수십 수만 가지의 각종 직업 전선에는 숨겨져서 세인들에게 미처 알려지지 않은 고수(高手)가 많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어떤 업종에서든 몇십년 동안 한 가지 일에 매달려 동분서주하며 기술을 연마했던 장인정신을 물씬 풍기는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고수들의 사람 사는 모습, 또는 살아온 모습을 잠시라도 들여다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담겨있는 투박하고 진솔한 삶의 향기를 통해 인생의 지혜를 온 몸으로 잠시나마 체득하게 되는 것은 그런 고수를 만나는 사람의 행복이다.
각 업종의 소프트웨어는 뭐니 뭐니 해도 종사하는 직원들이고, 특히 직원들 가운데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기술자는 버전이 높은 소프트웨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버전이 높은 소프트웨어가 그 직종에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해당 업종의 기능이 백퍼센트 발휘되기도 하고 맥없이 다운되어 버리기도 한다.
국민학교 책 보따리를 딱 던지고 난 다음부터 제재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기술자가 톱 이빨을 가는걸 보면서 톱을 씰어 봤는데 보는 건 쉬워도 막상 해보면 안 되더라고요. 금강석으로 톱 이빨을 너무 세게 눌렀다가 이빨이 왕창 나가기도 하고.
<강씨가 하라오시와 메다데시로 25년간 근무했던 삼성기업사 제재소 옛터. 현재는 Y맨션이 들어서 있다>
평생 제재소(製材所) 기술자로 일하며 ‘하라오시 강씨’, ‘메다데시 강씨’로 불렸던 강득용(姜得用. 후포면. 79세)씨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晋州)고요, 태어난 곳은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입니다. 윗대부터 하동 청암면에서 살아왔고, 선산이 모두 그곳에 있어요. 징조부(증조부)때부터 하동군 청암면으로 옮겨와서 터를 잡고 살았고, 그 윗대는 진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윗대 조상 묘소는 전부 다 진주에 있어요. 하동, 구례, 남원, 산청, 함양군이 지리산 줄기를 따라서 형성된 마을입니다. 인근 청학동이라는 곳도 청암면 학동리의 앞 글자 한자씩을 따서 붙여진 지명이고요. 아버지는 강씨 성에 윤자 암자를 썼어요. 어머니는 경주김씨 성에 점자 인자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뚜렷한 직업 없이 산속을 헤매면서 짐승을 잡는 포수(砲手)로 생활했어요. 멋있게 산거지요. 지리산 강포수라고 불렸는데, 한번 나가면 몇 달이 지나야 집에 들어왔으니 어머니가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형제자매는 5남매인데, 형님 한분에 누님이 세분이고 내가 제일 막내입니다. 지금 바로 우에(위의) 누님 한분만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형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부모님을 후포 우리 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어요.”
일제강점기이던 1933년에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강득용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모부가 운영하던 제재소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제재 일을 접하게 된다.
“국민학교 책 보따리를 딱 던지고 난 다음부터 제재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횡천국민학교를 졸업했거든. 4학년 때인가 해방이 됐어요.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 나이가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됐을 겁니다. 당시만 해도 보통 학교에 늦게 들어갔으니 늦게 졸업했지요. 청학동 청암면 입구에서 고모부가 규모가 큰 제재소를 했습니다. 고모부는 일제시대부터 제재소를 했는데, 제재소뿐만 아니라 목화로 솜도 만들고 정미소도 하고 그랬어요. 종업원만 사오십 명이나 됐어요. 제재소에서는 학교 학생들 책상도 짜고 걸상도 만들고 일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수력으로 자가발전을 했는데, 제재를 할 때는 전기를 많이 써야 하니까 물을 많이 대고 전기만 켤 때는 수문을 꽉 잠가서 물을 조금만 댔고요. 그렇게 부자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당대에 몰락했습니다. 횡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모부 제재소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인력으로 나무를 져 나르고 그랬거든요. 인부들이 매일 나무를 져서 옮겼는데, 오후가 되면 누가 몇 다발을 가지고 왔다고 전표를 끊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해서 글을 알고 조카라서 믿을 만하니까 나에게 인부들 전표 끊어주는 일을 맡겼어요. 그런 일을 하다가 명절 때가 되면 제재 기술자들이 고향에 갔는데, 특별히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 제재 일을 내가 직접 해보면서 일을 배우게 된 거지요. 일을 배울 때야 제재를 잘못해서 나무를 못 쓰게 되는 일도 흔하고 그랬지만 신경도 안 썼어요. 배래도(버려도) 그만 안배래도 그만이었거든. 당시만 해도 목재가 참 흔할 때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기술자가 톱 이빨을 가는걸 보면서 톱을 씰어(갈아)봤는데 보는 건 쉬워도 막상 해보면 안 되더라고요. 금강석으로 톱 이빨을 너무 세게 눌렀다가 이빨이 왕창 나가기도 하고 그런 실수를 수도 없이 하면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습니다. 고모부 제재소에 3년 정도 근무하다가 다른 집으로 옮겨 가게 됐어요. 아버지와 고모부가 싸우는 일이 생겼거든요.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제재소에서 일을 시키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요. 마침 그때 하동읍내 어느 제재소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어요. 처음에는 기술자가 없는 곳에서 일을 하려니까 힘들더니 이내 일도 손에 붙고 남들도 내 실력을 알아주고 그랬어요. 그 제재소가 섬호제재소였습니다. 열여섯 살 무렵에 처음 제재 일을 시작해서 열아홉 살에 섬호제재소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자 대접을 받게 된 겁니다. 섬호제재소에서 스물세 살까지 일했어요.”
<강씨가 평해 학곡리 협동목재소에서 둥근톱 ‘마루노꾸(丸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무시 엔진을 돌려서 피대를 걸고 둥근톱을 돌려 제재를 했고, 6.25전쟁 후에는 소련제 지스 엔진을 사용했어요. 소련제 지스 엔진이 피스톤이 커서 힘이 참 좋았어요. 산판에서 제재를 하면서 나오는 나무 껍데기 같은걸 불에 태워서 목탄을 만들어서 엔진을 돌렸거든요.
강씨는 섬호제재소에 근무하면서 부인 김현자(79세)씨를 만나 결혼했다.
“22살 때 중매로 결혼했습니다. 내가 일하던 제재소와 옆의 정미소가 나중에 처백모가 되신 분의 밭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처백모되는 분이 그 일대에서는 아주 유명했어요. 엔간한 사람은 눈에 들어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나는 잘 보였나 봅니다. 일할 때는 손이 재빠르면서도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때는 인기도 많았어요. 어느 날 나보고 처백모 되신 분이 ‘강군. 질녀가 하나 있는데, 참 괜찮으니 우리 조카 사위할래?’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렇게 똑 부러지는 할마이가(할머니가) 괜찮다면 볼 것도 없겠다 싶어서 결혼을 했삐랬지(해버렸지). 먼저 사진을 교환해서 보고 처백모되는 분 집에 와서 서로 얼굴 한번 보고 그렇게 결혼을 했어요. 이름이 김씨 성에 현자라고 나와는 동갑내기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결혼 이전에 처갓집 되는 집안사람들이 내가 일하는 제재소에 와서 다들 한두 번씩 살펴보고 갔나 보더라고요.”
22살에 결혼한 강씨는 23살에 첫딸이 태어나고 일주일 만에 영장을 받아서 군에 입대한다.
“23살에 첫딸을 낳았어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영장을 받아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전후반기 훈련을 다 받고 일등계급장을 달고 영천 1205건설공병단에 투입됐어요.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영천에서 생활하기도 했지만 안동 36사단과 원주 38따라지사단 등지에 파견을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맹장수술을 받고 의병제대(依病除隊)를 했습니다.”
군을 제대한 강득용씨는 고향 인근 지리산에서 입산제재(入山製材)를 하다가 일행들과 함께 적송(赤松)이 흔한 울진으로 제재를 하기 위해 올라왔다.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원동기를 짊어지고 지리산 주변 입산 지대 현장에서 입산제재를 하다가 울진으로 올라왔어요. 그러나 지리산에는 육송이 귀했어요. 이 골짜기에서 하다가 저 골짜기로 옮겨가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자동차 엔진을 이용해서 둥근톱으로 제재를 했는데 기계가 간단했어요. 산판에서 인부들이 나무를 벌목하여 옮겨오면 묵은 밭이나 평평한 곳을 골라서 기계를 갖추고 제재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다가 저 산등 너머로 갈 때는 엔진을 삼등분으로 뜯어서 옮겨갔어요. 자동차 엔진을 사람이 지고 갈수 있게끔 분해를 하는 겁니다. 주로 제무시(GMC 트럭) 엔진을 돌려서 피대를 걸고 둥근톱을 돌려서 제재를 했고, 6.25전쟁 후에는 소련제 지스 엔진도 사용했어요. 지스 엔진이 피스톤이 커서 힘이 참 좋았습니다. 제무시 엔진과 일제 도요타 엔진은 힘이 같았고요. 산판에서 제재를 하면서 나오는 나무 껍데기 같은 걸 불에 태워 목탄을 직접 만들어서 엔진을 돌렸거든요. 그때는 자동차도 목탄을 때서 굴러갈 때였거든. 물론 휘발유로 엔진을 돌리면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요. 숯을 구워서 그 가스로 엔진을 돌리면 힘은 약하지만 돈이 적게 들었어요. 목탄을 때는 자동차 엔진은 엔진오일인 모비루(모빌, Mobil)만 있으면 됐어요. 목탄 가스가 뻘거면 점화가 잘 안되고 포르스름(파르스름)해야 돼요. 뷰다(distributor-배전기)가 일번부터 육번까지 돌아가면서 불을 폭폭폭폭 튕겨주는데, 그 불빛이 포르스름해야 된다고요. 불이 불그스름하면 픽픽거리다가 힘이 없어서 꺼져 버려요. 자동차 엔진을 옮겨 다니면서 지리산에서 한 사년정도 제재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나무를 해먹을 데가 없어졌어요. 그때 울진이 강원도였는데 함께 일하던 일진이 먼저 울진으로 들어와서 제재 일을 했어요. 울진에는 제재를 해먹을 나무가 많았거든. 겨울에 눈이 쌓여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으니 일진으로 올라갔던 동료들이 하동으로 내려왔어요. 그 이듬해 다시 울진으로 제재를 하러 올 때 나도 따라서 올라 왔습니다. 당시에는 울진에서 제재하면서 한달 버는 돈이 하동에서 일년 버는 돈만큼 됐거든요. 그때 지리산에서는 제재를 하면서 월급제로 일을 했었는데, 이곳 울진에서는 모두 돈내기(물량 따먹기)를 했어요. 한 ‘사이(才)’ 제재하면 얼마 하는 식이었으니까요. ‘사이’라는 건 목재의 부피인 용적을 구하는 예전에 사용하던 단위인데, 한 치면 약 3.03센티거든. 한치 바이 한치 짜리에 길이가 열 두자면 한 사이가 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흔히 한치 각인 ‘다루끼’라고 부르는 목재의 규격을 1 사이라고 보면 되지요. 다루끼 한 개가 한 사이라. 하루 온종일 기계를 돌리면 이천 사이 정도를 제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목재를 다루는 곳에서 전부 입방미터(세제곱미터. m³) 단위를 사용하지만 그때는 전부 사이라는 단위를 썼고, 지금도 공사 현장이나 목재를 다루는 곳에서는 사이 단위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강씨는 띠톱 ‘오비노꾸(帶鋸)’를 손질할 때는 금강석이 톱날을 씰는 것과 박자가 잘 맞아야 된다고 말한다>
<띠톱 ‘오비노꾸(帶鋸)’를 손질하는 기술자 메다데시의 작업실>
5.16 혁명 전에는 전부 다 무허가로 도벌(盜伐)을 했습니다. 산판 허가를 내면 반출증을 끊어주었는데, 오다가 검문소에 돈을 좀 집어주면 반출증을 그대로 살릴 수 있었거든. 그러니 반출증 한 장을 끊으면 다섯 차도 해먹고 여섯 차도 해먹고 그랬어요.
강득용씨는 처음 울진으로 올라왔던 1960년대 초에는 무허가 도벌이 성행할 때였다고 회상한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일 년 전쯤에 울진으로 일하러 왔습니다. 결혼을 했지만 가족을 두고 제재를 하던 동료들과 함께 올라왔어요. 그때 울진에는 입산제재를 하던 팀들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계 3대를 가지고 와서 기성면 삼산리 한 대, 방율리 한 대, 구산리 부두에 한 대를 놓고 제재를 했어요. 울진 적송은 아주 질이 뛰어났어요. 그때는 금강송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다들 적송이라고 불렀지. 육송은 결이 굵직굵직하지만 적송은 결이 촘촘합니다. 또 딴딴해서 안 갈라지고 기둥을 해놔도 틀어지질 안 해요. 송판을 해놔도 육송은 틀어지면서 돌아가는데 적송은 안틀어져요. 기성 구산리 초등학교 앞 불가(백사장)에 발동기를 놓고 제재를 하던 곳이 1공장이었고, 제2공장은 삼산리, 제3공장은 방율리에 있었어요. 구산 1공장이 내가 공장장으로 일하던 제재소였는데, 5.16혁명으로 제재소 일이 중단되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5.16 혁명 전에는 전부 다 무허가로 도벌(盜伐)을 했습니다. 정식 허가도 없이 산판을 벌이고 도벌을 하니 온 산이 모두 엉망이었어요. 마구잽이(마구잡이)로 나무를 베 제꼈으니(젖혔으니) 온 산을 아주 조지는 기지. 산판 허가를 내면 반출증을 끊어주었는데, 그게 있어야 중간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거든. 제무시로 목재를 한차 싣고 내려오면 반출증을 버려야 하는데 이걸 살린단 말입니다. 오다가 검문소에 돈을 좀 집어주면 반출증을 그대로 살릴 수 있었거든. 그러니 반출증 한 장을 끊으면 다섯 차도 해먹고 여섯 차도 해먹고 그랬어요. 그 시절이 그랬는데 뭐. 제재소 사장이 산판 허가를 내서 벌목을 하는 목상(木商)을 겸하기도 했고, 따로 목상만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랬어요. 나무를 해먹을 때는 주로 목상 따로 제재소 따로 군미(조)를 짜서 다녔습니다. 5.16혁명이 나면서 무허가 도벌이 일체 금지됐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갔던 거지요. 제재를 하던 우리 팀도 전부 해산이 돼서 뿔뿔이 흩어졌고요. 5.16혁명 후에는 산판도 전부 다 정식 허가를 내서 벌목을 했습니다. 구산에 있던 제재소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무허가로 벌채를 하고 제재를 했는데 무슨 이름이 있었겠어요?”
5.16군사혁명 후에 무허가 도벌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울진을 떠났던 강씨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울진으로 올라와서 후포면에 터를 잡는다.
“고향에 내려가 있는데, 방율에 있던 사람이 가족을 다 데리고 와서 구산리에 있던 내 공장을 점령하려고 한다고 알고 지내던 사람이 전보를 쳐서 알려주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급하게 하동에서 울진으로 올라왔습니다. 당시가 화폐개혁을 할 때였는데 그때까지 일반인들에게는 화폐교환을 해주지 않았고 장거리 여행자들에게만 1인당 5천환씩 돈을 바꿔 주었어요. 그렇게 돈을 바꾸어서 가족과 애들 셋을 데리고 울진으로 올라왔습니다. 하동에서 부산까지 하루 오고, 부산에서 첫차를 타고 평해 월송 굴미봉까지 와서 구산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기성하고 평해의 경계가 되는 곳이 굴미봉인데, 지금은 구산 쪽으로 길이 나 있지만 그때는 구산까지 찻길이 없었습니다. 올라와서는 ‘나도 가족을 데리고 왔다’ 하면서 그 제재소에서 공장장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후포에서 제재소를 하던 사장이 내가 일하는 솜씨를 보더니 함께 일을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나는 구산 제재소의 일을 끝마치면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했거든요. 후포에 신흥 제재소라고 있었어요. 사장이 안경석씨였습니다. 신흥제재소는 한쪽에서는 제재하고 다른 쪽에서는 방앗간을 운영했어요. 모터를 사용했고 피대를 요리 걸면 제재를 하고, 저리 걸면 정미소로 곡식을 찧고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한 3년 지나서 삼성기업사로 옮겼어요. 지금 용마맨션이 있는 자리가 삼성기업사라는 상호의 제재소 자리였습니다. 삼성기업사 사장은 울진군 초대 군의회 의장을 지냈던 정삼엽씨였어요. 내가 처음 삼성기업사로 갈 때는 정삼엽씨 형님이 했는데, 뒤에 동생인 정삼엽씨에게 물려준 기지. 정삼엽씨가 제재소를 그만두기 전까지 25년 동안 제재 일을 했습니다. 쉰아홉 살에 손에서 제재 일을 놨어요. 그러고 나서는 평해 학곡과 월송 등 딴 제재소에 다니면서 톱만 전문으로 만지면서 지냈어요. 후포에는 제재소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고요. 원래 후포에는 신흥제재소, 삼성기업사, 동해제재소 세 군데가 있었습니다. 동해제재소는 후포우체국 바로 앞에 있었고요.”
<강씨는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짜던 나무 고기상자도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띠톱 ‘오비노꾸(帶鋸)’를 손질할 때 사용하는 기구의 한가지>
<띠톱 ‘오비노꾸(帶鋸)’의 톱날>
기계 한 대에 ‘하라오시’와 ‘히빠리’라는 기술자가 둘 붙지요. 나무를 올려주는 사람도 있고, 받아 내주는 사람도 있고, 한쪽에서 켠 나무를 묶는 사람도 있고, 양 머리를 가지런히 잘라내는 사람도 있고.·····메다데시가 톱날을 잘 세워주어야 하라오시가 일을 하는데 쉬워요. 둥급톱은 하라오시가 자기 톱을 손질해가면서 일을 하면 되지만, 띠톱은 하라오시와 메다데시가 따로 있어요.
강득용씨는 ‘하라오시’와 ‘히빠리’ 두 명이 붙어 서서 제재를 하는 제재소에서는 일본말이 일상적인 용어로 사용됐다고 말한다.
“기계 하나에 기술자가 두 명씩 붙어요. 한 사람이 한 토막씩 제재를 하고, 또 한사람은 기다렸다가 다시 제재를 하고, 그렇게 기계는 쉬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기지. 기계 한 대에 보통 7명이 붙어서 일을 하는데 ‘하라오시’와 ‘히빠리’라는 기술자가 둘 붙지요. 하라오시는 나무를 밀어주는 사람이고, 히빠리는 반대편에서 제재하는 나무를 당기는 사람입니다. 나무를 올려주는 사람도 있고, 나무를 받아 내주는 사람도 있고, 한쪽에서 켠 나무를 묶는 사람도 있고, 양 머리를 가지런히 잘라내는 사람도 있고 여러 명이 붙어요. 기술자 두 명에 데모도가 네 명 정도 붙습니다. 기계는 발동기에 피대를 걸어서 돌렸어요. 발동기는 진일과 대동공업사에서 생산이 됐고요. 발동기에 피대를 걸고 동력을 전달해서 톱을 움직이는데, 둥근톱으로 제재를 했어요. 둥근톱은 ‘마루노꾸(丸鋸)’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둥근톱이라는 얘깁니다. 예전부터 제재소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전부 일본말입니다. 옛날에는 전부 마루노꾸로 제재를 했어요. 지금이야 ‘오비노꾸(帶鋸)’라고 부르는 띠톱으로 제재를 하고, 전자동 톱도 있지만요. 일본말로 ‘오비’라는 게 혁대를 말하는 거고, 오비노꾸는 우리말로 띠톱이지요. 나무를 켤 때 규격에 따라서 치수를 맞추는 장치가 있어요. 하라오시가 나무를 켜는 치수를 조정합니다.”
제재 기술을 얘기하는 강씨에게서 평생직장이던 제재소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자부심을 쉽게 읽을 수 있다.
“톱만 전문으로 만지는 사람을 일본말로 ‘메다데시’라고 그러거든. 한문으로는 목립공(目立工)이고. 그리고 하라오시는 우리말로 제재공입니다. 꼼꼼하고 정밀한 작업을 거쳐야 하니 톱은 아무나 손질할 수 없습니다. 잘못 이빨을 세우면 나무도 안 켜지고 나무사이에 찌고(끼고) 그렇지요. 메다데시가 톱날을 잘 세워주어야 하라오시가 일을 하는데 쉬워요. 둥급톱은 하라오시가 자기 톱을 손질해가면서 일을 하면 되지만, 띠톱은 하라오시와 메다데시가 따로 있어요. 물론 둥근톱도 간혹 자기 톱을 손질 못하는 하라오시가 있기는 했지만요. 메다데시는 하라오시가 하는 제재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라오시는 메다데시가 하는 톱 손질을 못해요. 그래서 하라오시보다는 메다데시가 기술에서는 한수 위인 셈이 됩니다. 삼성기업사에 처음 갈 때만 해도 둥근톱을 사용해서 제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띠톱을 들였어요. 둥근톱은 띠톱에 비해서 톱밥만 많이 나오고 능률이 덜 오릅니다. 한동안은 메다데시가 따로 톱을 손질하고 나는 제재만 했거든요. 그런데 대구에서 온 메다데시가 툭하면 배짱을 부리고 몇 달 있다가 일을 관두고 가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도대체 일이 안 되는 겁니다. 그때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 중에 제주도로 댕기면서 나무도 많이 하던 사람이 정사장보고 ‘차라리 메다데시를 따로 들이지 말고 여기 일하는 강득용씨를 시키소. 저 양반이면 충분히 메다데시를 해 나갑니다’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톱날을 만지는 것과 원리는 알지만 막상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둥근 톱날 손질하는 것보다 더 쉽더라고요. 톱날을 손질할 때는 금강석이 톱날을 씰는(가는) 것과 박자가 잘 맞아야 돼요. 그리고 아사리(톱날 어김) 내는 게 있어요. 둥근톱은 톱 이빨을 하나는 이리 제치고 하나는 저리 제치야 나무도 안찌고(끼고) 열도 안 나거든요. 톱날은 나무를 켜는 종류에 따라 다 다릅니다. 대각 키(켜)는 건 이빨을 세게 하고, 문살 같은 목재를 키는 톱은 따로 있어요. 그런 톱은 작지요. 그런데 띠톱은 아무 목재나 다 켤 수 있습니다. 둥근톱은 원래 새것일 때는 42인치거든. 그런데 사용하면서 점점 작아져요. 이빨이 무디어져서 자꾸 갈아내야 하니까. ‘조기대’를 대고 그것과 똑같이 이빨을 제쳐주어야 합니다. 한치 각을 밀어삐리고 나면 8푼밖에 안되지요. 톱날을 잘 세워야 뒤에 목수가 대패질을 할 일이 적어집니다. 제재를 잘해놓으면 대패질 열 번 할 걸 한두 번만 해도 되거든.”
<띠톱 ‘오비노꾸(帶鋸)’의 톱날을 손질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강득용씨>
<메다데시의 작업실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띠톱 ‘오비노꾸(帶鋸)’ 톱날>
쳇바퀴는 나무를 얇게 켜서 휘어야 하는데 톱질을 잘못해 놓으면 휘는 도중에 부러져버리거든요. 쳇바퀴를 만드는 나무는 공이 마디가 없는 뿌리 쪽 나무를 사용해서 제재를 합니다. 주로 소나무를 사용했어요.
십 수 년 전만 해도 지역에는 흔히 쳇바퀴쟁이라고 불리던 체를 가공하는 장인들이 여럿 있었다고 강씨는 전해준다.
“곡식 가루를 치거나 거르는 체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때만 해도 많았거든. 체를 만드는 둥근 쳇바퀴는 톱으로 정말 잘 켜줘야 하는데, 쳇바퀴쟁이가 딴 제재소는 안가고 나에게만 왔어요. 쳇바퀴는 나무를 얇게 켜서 휘어야 하는데 톱질을 잘못해 놓으면 휘는 도중에 부러져버리거든요. 쳇바퀴를 만드는 나무는 공이(옹이) 마디가 없는 뿌리 쪽 나무를 사용해서 제재를 합니다. 주로 소나무를 사용했어요. 나무를 제재하다가 공이가 없는 나무를 보게 되면 따로 두었다가 쳇바퀴쟁이를 불러서 원하는 대로 켜주었는데, 그때는 후포에도 쳇바퀴쟁이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또 그때는 어판장에서 사용하는 고기상자를 짜는 나무도 많이 켰어요. 삼성기업사 터가 넓으니 고기상자를 짤 나무를 제재소에서 대주면 공장 앞에서 고기상자를 짠다고 분주했어요.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고기상자를 짰는데 스티로폼 고기상자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제는 나무로 만든 고기상자도 구경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쳇바퀴쟁이들이 사용하는 소나무를 얇게 켜려면 일거리만 많고 귀찮지 돈은 안 되는 겁니다. 그래도 군말 없이 켜 주었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자랑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내 기술을 인정해주고 그러더라고요. 제재 기술자로 일하면서 다른 제재소에서 일하러 오라는 유혹도 많이 받았어요. 한번은 부산의 어느 큰 일류 제재소에서 같이 일하자는 유혹도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사람이 신의가 있어야 하는데 돈 몇 푼 더 받을 거라고 해서 그걸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큰 제재소에서 일하다가 퇴직했으면 퇴직금도 두둑이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또 제주도에서 나무를 사가는 사람이 있었어요. 여기 제재소에서 나무가 생긴 대로 껍데기만 벗겨내고 한배 가득 싣고 제주도로 가서 목재를 켜서 사용했습니다. 껍질만 대충 벗겨내는 걸 ‘망각’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서귀포의 제재소로 가족들을 데리고 같이 가자고 했어요. 지금이야 제주도가 엄청나게 발전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제주도는 육지에서 귀양 가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한번 가면 못 오는 곳처럼 여겨질 때였습니다. 그때 갔으면 또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지요.”
강씨는 후포면 삼성기업사에서 하라오시와 메다데시로 25년 동안 근무하다가 제재소가 문을 닫으면서 퇴직했다.
“삼성기업사에서 내가 메다데시를 하게 되면서 하라오시는 따로 구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메다데시 작업장인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하라오시가 서툰지 익숙한지 판단해가면서 서툰 면은 가르쳐 주기도 하고요. 공장장으로 근무하면서 종업원들의 작업 전 과정을 책임졌어요. 제재소 서기까지 6명이 근무했습니다. 서기는 목재를 사고팔고 주문을 받고 그럽니다. 주로 소나무를 많이 제재하고 이태리 뽀뿌라(포플러)도 제재하고, 나무를 가지고 오면 삯을 받고 켜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삼성기업사 정사장은 벌채 허가를 내서 산판을 벌이고 소유하고 있던 2대의 제무시를 이용해서 나무를 나르고 제재했어요. 그렇다보니 제재소가 쉴 새 없이 바빴습니다. 제재소 작업자에 산판 인부들까지 합하면 정사장이 데리고 있던 식구들이 아주 많았지요. 산판 인부들은 한사이당 얼마 해서 돈내기를 주는 경우도 있었고, 제무시 한차 싣는데 얼마 그렇게 일당으로 돈을 계산했어요. 나는 처음에는 ‘부하개’라는 방식의 프로테지로 임금을 받다가 뒤에는 월급을 받았습니다. 삼성기업사에서 첫 월급으로 8천원을 받았습니다. 제재소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서는 내가 처음 월급제로 일했어요. 바쁠 때는 통행금지가 될 때까지 일을 하다가 정사장이 파출소에 전화를 해줘서 집에 오고 그랬습니다. 지금은 제재소가 쇠퇴하는 사업이지만 그때는 일거리가 대단했어요. 내가 정삼엽 사장에게 돈도 많이 벌어주었고, 또 정사장 덕분에 적지 않은 우리 식구들도 밥 굶지 않고 먹고 살았고 그렇지요. 정삼엽씨와는 사장과 직원의 관계였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깊었어요. 나는 타고난 성격이 주인이 있다고 열심히 하고 주인이 없다고 적당히 하고 그런 게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이 없을 때 능률을 더 올렸어요. 아쉬운 건 다른 직장처럼 퇴직할 때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는 거 한가지뿐입니다. 옮기지 않고 한 직장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면 퇴직금만 해도 얼맙니까? 억대가 넘을 텐데요. 하지만 정사장도 제재소를 그만둘 때는 이미 형편이 기울어서 직원들 퇴직금을 줄 형편이 안됐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그나마 덜 서운한 거지요. 당시에는 정삼엽씨 이름 석 자만 대면 울진군에서는 알아주었습니다. 남의 일도 많이 잘 봐주었어요. 그때 떠돌던 말이 살인자도 정삼엽씨 메모 한 장이면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온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사장을 찾아왔고, 그때그때 편리를 잘 봐주었어요. 욕먹을 일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잘 대해주었습니다. 그랬으니 초대 군의회에서 최다 득표자로 의장까지 했었지요.”
<평해 학곡리 협동목재소의 띠톱 ‘오비노꾸(帶鋸)’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강득용씨>
나무를 켤 때 남아서 버려지는 나무쪼가리를 ‘피쪽’이라고 하는데, 피쪽이 덜 나려면 하라오시가 머리가 좋아야 합니다. 하라오시가 계산을 잘못해서 대중없이 나무를 자르면 제재소 사장은 그만큼 손해를 더 보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피쪽이 덜 나오도록 나무를 켜기 전에 계산을 잘 해야지요.
통나무 원목을 켜서 각종 목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의 최고 기술자인 하라오시는 누구보다 계산이 치밀하고 빨라야 피쪽을 덜 낸다고 강조하는 강씨는 이는 곧 목재 생산의 효율성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라오시는 머리가 좋아야 합니다. 이 나무를 빼고 이 나무를 넣으면 몇 치가 남고 그런 계산을 잘해야 하는 거지요. 치수 계산을 잘못하면 쓸데없이 날아가는 나무가 많으니 손해를 보게 됩니다. 나무를 켤 때 제 체수대로 켜지라고 남는 공간에 쐐기도 박고 하지만 기계의 진동 때문에 헐거워지면서 풀리니까 이따금 자로 치수를 다시 재보면서 작업을 합니다. 뒷사람이 자로 치수를 재서 틀리면 틀린다, 맞으면 맞다 손을 써서 가르쳐 줍니다. 무엇보다 나무를 켤 때는 치수가 정확해야 하니까요. 나무를 켤 때 남아서 버려지는 나무쪼가리를 ‘피쪽’이라고 하는데, 피쪽이 덜 나려면 하라오시가 머리가 좋아야 하거든. 하라오시가 계산을 잘못해서 대중없이 나무를 자르면 제재소 사장은 그만큼 손해를 더 보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피쪽이 덜 나오도록 나무를 켜기 전에 계산을 잘 해야지요. 십프로거든요. 원목은 만재인데 십프로면 천사이가 더 가고 덜 가고 그래요. 왔다 갔다 하는 돈이 장난이 아닙니다. 기술자의 능력에 따라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나무를 켤 때 손해 보는 부분이 톱밥으로 갔는지 피쪽에 떨어졌는지도 몰라요. 찾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나무를 가져 가는 것도 아닌데 수백 수천사이가 손해가 나니까요. 기술자에 따라서 막상 목재로 쓸 수 있는 나무의 프로테지가 엄청 차이가 납니다.”
목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켤 나무의 치수를 계산해내는 하라오시가 누구보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강득용씨다.
“지금이야 시멘트나 슬라브(슬래브)로 집을 짓지만 옛날에는 모두 나무로 집을 지었잖아요? 집 한 채를 지으려면 제재소에 나무를 주문합니다. 그러면 제재소 서기가 집 한 채 재목으로 기둥이 몇 개고 도리가 몇 개고, 서까래가 몇 개, 판자가 몇 개인지 칠판에 죽 적어 놓는단 말입니다. 지금은 원목이 굵으니까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작업을 해나가면 되지만, 예전에는 원목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옹이가 없는 질 좋은 것도 있고, 옹이가 많이 박혀있으면서 꼬불꼬불한 질 나쁜 것도 있고 그랬어요. 육송 원목이란 게 원래 그렇지요. 큰 나무를 가지고 작은 목재를 캐 삐리고 나서, 작은 나무를 가지고 큰 목재를 키려면 안 되지요. 나무 바깥쪽에 피가 붙고 각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기라요. 안 그래요? 큰 나무를 가지고는 작은 목재를 켤 수 있지만, 작은 나무를 가지고 큰 목재를 켤 수는 없잖아요? 원목이 한차 들어오면 원목을 봐가면서 계산을 하면서 제재를 해야 돼요. 하라오시가 머리가 좋아야 돼요. 제무시로 원목 한차를 가득 싣고 와도 막상 마음에 드는 나무는 몇 토막이 안돼요. 마음에 드는 나무는 따로 골라놨다가 재료가 꼭 좋아야 되는 문(門) 재료 같은 것으로 켜서 사용합니다. 지금은 나왕을 가지고 문을 만들지만, 문을 만들 때 문살이나 문 왁꾸(테두리)로 들어가는 나무는 쪽쪽 곧아야 하고 나무 가운데서는 제일 좋아야 돼요. 보기 싫은 무늬가 들어가도 안 되고 엇절이 나도 안 됩니다. 기둥처럼 굵은 재목이야 피만 안 붙으면 조금 질이 떨어져도 괜찮아요. 피가 붙어 삐리면 제 각이 안 나오니까요.”
<강득용씨는 22살에 결혼한 동갑내기 부인 김현자씨와의 사이에 7남매를 두었다>
제재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지도 꽤 됐다고 말하는 강득용씨는 목선(木船)을 건조하고 목재를 사용해서 집을 짓던 예전이 제재소의 최고 호황기였다고 전한다.
“제재소에서는 하라오시가 보통 책임자 역할을 겸했습니다. 하라오시 정도의 기술자면 자기 톱을 자기가 만지고 갈아서 썼거든. 줄로 씰어서 쓰다가 무뎌지면 다시 씰어서 쓰고 그래요. 제재소에서 쓰는 톱은 톱날사이의 공간이 넓어야 열을 안 받아요. 줄질을 하다가 마모돼서 뭉툭해지면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구라인다로 돌아가면서 아금(아귀)을 파서 쓰고는 합니다. 지금은 자동으로 톱을 씰어서 쓰지요. 예전에 제일 큰 목재가 사람이 죽었을 때 쓰는 관재(棺材)잖아요? 둥근톱인 마루노꾸로 관곽재(棺槨材) 같은걸 켤 때는 이쪽으로 절반을 켜고 또 반대쪽으로 돌려서 마저 켜고 그랬어요. 지금은 오비노꾸를 쓰니까 그럴 일이 잘 없어요. 지금도 평해 학곡리와 월송 화구에 가면 제재소가 있습니다. 월송에 있는 건 대동제재소이고 학곡에 있는 건 협동제재소인데, 정작 후포에는 제재소가 한군데도 없어요. 대동하고 협동목재소에서 사용하는 오비노꾸 톱날은 항상 내가 가서 손질을 해 주었습니다. 협동제재소는 작년 봄까지 내가 손질을 해 주었는데, 이제는 소형 제재소가 일거리가 없습니다. 이제는 나무집도 안 짓고, 배도 목선이 아니고 전부 다 FRP를 사용해서 건조하니까 제재소가 사양길로 접어든지 꽤 됐어요. 목선을 건조할 때 쓰이는 배 옆구리의 ‘삼’은 인치니부 두께로 킵니다. 안쪽의 ‘마쓰라’라고 하는 갈비빼(갈비뼈)는 둥근톱으로 제재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삼에 마쓰라를 붙여 나가거든요. 옛날 둥근톱은 나무를 들고 켰다 아입니까? 이리 넣었다가 저리 넣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나무를 켜는데, 하라오시가 손 조정을 까딱 잘못하면 나무를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손으로 조절을 잘못하면 통나무 한 개로 마쓰라를 세 개 켜야 하는데 한 개밖에 못 켜는 사람도 있고, 두 개도 나오는 사람도 있고 그랬어요. 예전에는 ‘뗏마’라고 하는 전마선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배 한척 모은다’ 해서 목선을 한척 만드는 일감이 들어오면 꼭 그대로 제재를 해서 목재를 대주고는 했거든. 집 한 채를 지어도 크기에 따라 목재 주문을 할 때 눈치 있는 집주인은 먼저 하라오시를 찾아와서 담뱃값이라도 집어주고는 했어요. 하라오시가 나무를 대충 켜주면 목수가 애를 먹었거든요. 제재소가 쉬는 날이면 공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다들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바닷가에서 키우던 오리도 잡아먹고 닭과 돼지도 잡아먹고 그랬어요.”
제재소에 나무차가 들어오면 나무껍질을 벗기는 칼이나 낫 같은걸 만들어서 몰려 왔어요. 그러다보니 제재소 직원들과 나무껍질을 벗기러 온 주민들 사이에 언성도 자주 높아지고 그랬습니다.
화목(火木)을 구하기 어려웠던 60~70년대에는 산판에서 나무를 옮겨오는 제무시가 제재소로 들어오면 인근 주민들이 원목의 껍질을 벗기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몰려들면서 심심찮게 직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예전에는 모두 아궁이에 장작을 땠는데 마땅히 나무를 할 만한 곳이 없었으니 땔감이 아주 귀했습니다. 더욱이 후포에서는 땔감을 하러 갈 데가 없었어요. 그러니 제재소에 나무차가 들어오면 나무껍질을 벗기는 칼이나 낫 같은걸 만들어서 몰려 왔어요. 그러다보니 제재소 직원들과 나무껍질을 벗기러 온 주민들 사이에 언성도 자주 높아지고 그랬습니다. 산판에서 제무시로 나무를 싣고 와서 하차를 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나무껍질이 많이 붙어 있는 좋은 나무를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몰려들었으니 얼마나 위험합니까? 하차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로 크레용으로 나무껍질이 많이 붙은 나무에 자기 나무라고 표시를 하고 그랬어요. 제재소 직원들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듣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나무차가 들어올 때마다 주민들과 제재소 직원들 사이에 말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 때였어요. 제재소에서 나무를 목재로 켜기도 전에 껍질은 다 없어지는 겁니다.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 입장에서는 손해였지요. 그때는 나무껍질과 톱밥까지 돈을 받고 팔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이웃사람들이 땔감을 하기 위해 껍질을 벗기는데 못 벗겨가라는 얘기는 못했습니다. 톱밥이나 나무껍질도 처음에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 주었는데, 나중에는 돈을 받고 땔감으로 팔았습니다. 떡방앗간, 이발소, 목욕탕 같은 곳에서 리어카를 끌고 와서 돈을 주고 사갔어요. 푸대(포대, 부대)에 넣어서 팔았는데 가격은 기억나지 않아요. 요즘도 돼지막에 톱밥을 넣고 있으니 돈을 받고 팔 겁니다. 요즘이야 나무를 일부러 파쇄해서 톱밥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내가 제제소에서 일했으니 우리 집은 걱정 없이 톱밥도 갖다 때고 나무도 갖다 땠어요. 겨울이면 방이 따뜻하다고 동네 어른들이 날마다 좁은 우리 집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니 밥을 한 끼 먹어도 어떻게 ‘아버지만 나와서 잡수이소’ 합니까? 국수 한 그릇이라도 항상 나눠먹어야 했거든요.”
강득용씨는 본지에서 지난 6월호 ‘우리 곁의 이런 삶’ 코너를 통해 소개했던 후포면 금잔디 의상실 강복희씨의 부친이다.
강씨는 타고난 천성이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 7남매를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애정 표현을 해보지 못했다며 차라리 웃고 만다.
“7남매를 키우면서도 나는 쉬지 않고 제재소에서 일만 했지 애들을 잘 못 봤어요. 새벽에 일 나갔다가 늦게 집에 돌아왔으니까요. 아덜(아이들) 7남매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으니 원체 식구가 많잖아요? 월급을 받아와도 생활이 넉넉할 리가 없었지요. 다행히 할마이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서 한문도 알고 일본어도 알고 해서 동네에서 계오야(계주)를 했어요. 요즘처럼 이자를 붙여서 돈을 타는 계가 아니라 생활필수품을 타는 그런 계주를 한 십 수 년 했습니다. 밀을 한가마니 사서 방앗간에서 국수를 만들면 열두 상자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열사람 몫은 돈을 받고 나눠주고 두 상자는 챙기는 그런 식이었거든. 그리고 예전에는 가구를 해도 열 개를 주문하면 소비조합에서 열한 개를 보내주었어요. 그러면 가구를 열 개 태워주고 하나는 계 오야가 챙기고 그랬습니다. 집사람도 많이 바빴어요. 그러다보니 큰딸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매일 학교에 갔다 오면 밥을 해야 했고, 우물도 멀리 있었는데 물도 두레박으로 퍼서 머리에 이고 와서 사용했고요.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복희가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말로 표현해본 적은 없지만 큰딸이 고생한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타고난 성격이 나는 칭찬에 인색하거든요. 표현을 하는 것이 참 힘들어요. 우리 때는 아덜을 키우면서도 어른들 눈치 보느라고 따뜻하게 한번 안아준 적도 없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보면 남자들이 기저귀도 들고 다니고 그러지만, 그때는 아들자식들과 목욕 한번 같이 가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살아왔어요. 예전에 제재소에서 일하던 사진도 한두 장 있었는데 살면서 다 없어졌어요. 워낙 없이 살다보니 그런 사진이 꼴도 보기 싫어진 거지 뭐. 오죽하면 할마이가 날마다 쥐꼬리 같은 월급이라고 얘기했겠어요? 그렇게 고생했던 시절의 사진을 가만 둘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복희네라고 불렸던 할마이가 이 동네에서 신용은 안 잃고 살았어요.”
일평생 하라오시, 메다데시로 불렸던 강씨는 나무 중에서는 귀목으로 불리는 느티나무가 으뜸이라고 말한다.
“제재를 하다 보면 탐이 나는 나무들도 많아요. 특히 귀목이라고 부르는 느티나무를 켜보면 결도 좋고 무늬가 너무 멋있어서 욕심이 납니다. 뿌리 쪽은 무늬가 더 기가 막힙니다. 가구를 만들어 놓으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어요. 귀목은 우선 포강(늪, 작은 연못)같은 곳의 물에 담가서 몇 년이나 삭혀요. 그리고 제재를 해야 틈이 안생기거든. 요즘이야 약품처리도 하고 찌고 해서 금세 제재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요. 나무는 귀목이 최곱니다. 그리고 판을 만드는 나무는 피나무나 은행나무가 좋고요.”
평생 정확하게 맞물려서 실수 없이 돌아가는 제재소 기계를 상대하다보니 사람들도 정확하고 실수가 없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강득용씨다.
“경우가 바르고 신용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아주 실없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상대를 안 합니다. 성격이 그렇다보니 자식들이 ‘아버지는 너무 정확한 성격 때문에 평생 제재 일을 하면서 고생을 해도 부자가 안됐다’는 소리를 들어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싫고 못하는 거야 어쩌겠어요?”
강씨는 평소 얘기하는 목소리조차 세상의 거친 세파를 온 몸으로 다 맞아온 대로 굵고 거칠다.
“기계음이 요란한 제재소 안에서 평생 큰 목소리로 이것저것 신호를 하고 지시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됐습니다. 평소에 자식들과 얘기하는데도 ‘제발 아버지 목소리 좀 낮추이소’ 하는 얘기를 자주 듣는 편이거든요. 조용조용한 사람들은 이렇게 큰 목소리로 얘기하면 싫어해요.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꼭 싸움을 하는 것 같거든.”
[이명동기자 uljin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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