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白碑)’ 앞에 서서
기사입력 2011.12.15 12:05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의 소나무 숲 가운데 한 무덤을 지키는 낯선 비석이 있다. 호패처럼 생긴 비석에 아무런 내용도 없이 단 한 자의 글자도 새기지 않아 붙여진 이름, 이른 바 ‘백비(白碑)’.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이 무덤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 명종 때 청백리로 유명한 선비 박수량(朴守良, 1492~1554)이다. 1513년(중종 8)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아가 나주목사, 좌찬성, 호조판서, 중추부사를 지낸 뒤 64세에 병으로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있었던 38년 동안 가는 곳마다 많은 치적을 쌓아 유림들 사이에서도 훌륭한 목민관은 물론이요 학자로서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두어 칸 집 한 채 없이 평생을 지냈고 죽은 뒤에도 남은 양식이 없어 가족들은 장례마저 치를 수 없었다.
이에 대사헌 윤춘년이 임금께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포상을 청했다.
명종은 그의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이다’ 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를 것을 지시하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碑)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와 함께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을 ‘백비(白碑)’라고 부르게 하였다.(명종실록 1554년 1월 19일일조)
연산군 때 사간(司諫)이었던 정붕(鄭鵬, 1467~1512)은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영덕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다가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정붕의 인품을 높이 사 그를 관직에 등용하고자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의정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의 주선으로 청송부사에 임명되었다. 성희안은 정붕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어느 날 성희안은 청송 땅에서 나는 잣과 꿀이 별미라는 말을 전해 듣고 정붕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면서 청송에서 나는 유명한 잣과 꿀을 좀 구해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얼마 후 정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답이 왔다.
“잣나무(栢)는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벌꿀(蜜)은 백성들의 벌통 속에 있으니 부사로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栢在高峰絶頂 蜜在民間蜂筒中 爲太守者 何由得之).”
영조 때 김수팽(金壽彭)은 호조(戶曹)의 하급관리인 서리(胥吏)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번은 급한 결재가 있어 판서(判書)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침 판서는 손님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던 중이었다.
김수팽이 마당 한가운데 엎드려 큰 소리로 용건을 말하고 결재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바둑만 두었다. 반나절을 기다려도 판서는 결재해 줄 기미도 없이 계속 바둑만 두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김수팽은 벌떡 일어나 바둑을 두고 있는 마루로 뛰어올라 바둑알을 손으로 쓸어버리고 바둑판을 엎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엎드려 아뢰었다.
“저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목을 베이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잠시도 늦출 수 없고 하루도 멈출 수 없는 것이옵니다. 대감께서는 속히 결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서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바둑판을 구석으로 밀어놓고 서류에 결재를 하면서 말했다.
“자네도 바둑을 두어보게. 두던 바둑을 멈추고 한 눈 팔기가 매우 어렵다네. 거기 누구 없느냐? 이 버릇없는 서리에게 술이라도 한 잔 주거라.”
한 번은 영조가 한밤중에 내탕고(內帑庫, 궁궐의 금고)에서 급히 2만 냥을 지출하여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를 들은 김수팽은 일이 아무리 급해도 절차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였다.
여기저기 소속 부서장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결재를 받다보니 어느새 새벽녘이 되었다. 김수팽이 궁궐로 돌아오자 앞서 2만 냥을 들이라는 명령이 취소되었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영조가 밤중에 한 궁녀에게 빠져서 분위기에 휩쓸려 2만 냥을 내리려고 했던 것을 날이 밝고 차분히 생각한 끝에 명을 거두었던 것이다. 후에 영조도 김수팽이 늑장을 부린 꾀를 전해 듣고 잘했다며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서리는 품계 상으로는 비록 낮은 직위였지만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관청의 장(長)이나 고위 관리들은 행정의 방향과 요지를 결정할 뿐이었고, 그 구체적인 집행과 실무는 하급관리인 서리의 몫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아전들의 역할이 올바르게 수행되어야 했다. 그런 만큼 서리의 업무는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을 포함한 공직자의 부정부패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국한된 비리가 아니라 중앙정부 고위공직자에서 지방자치단체의 하급공직자에 이르기까지 그 분포도 전방위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출범한 이후 부패신고사건 처리와 비리공직자 가운데 지난 3년 동안 부패신고로 비리행위가 적발돼 각종 징계를 받은 사람은 형사처벌 675명을 포함해 모두 1,187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지난 3년간 300여 건의 공직자 비위사건을 처리했는데 이 가운데 사업비 지출내역 부풀리기 등을 통한 정부보조금 횡령 사건이 전체의 29%인 90건으로 가장 많았고 관급공사 공사비 편취 50여건, 국책연구 연구비 횡령이 30여건, 건축 등 인허가비리사건 20여 건 등의 순이었다. 이를 통해 지난 3년간 불법적으로 사용되거나 손실을 본 공공기관의 예산은 모두 721억 원이나 되었다.
거기에다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반대를 하는데도 자신들의 세비를 과감(?)하게 인상하는 배짱 좋은 지자체 의원들까지 포함하면, 최근 우리나라 공직사회는 전체가 거대한 복마전이라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문제는 공직자의 비리는 점점 늘어나는데 반해 처벌은 가벼운 솜방망이에 그친다는 점이다. 금품 수수나 공금을 횡령해도 징계는 ‘품위 손상’이나 ‘복무규정 위반’이 고작이다. 공직부패는 그 뿌리가 깊고 구조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정부는 발본색원할 때까지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사정에 나서야 한다. 영구 퇴출과 같은 극약처방 없이는 비리를 뿌리째 뽑아낼 방법은 없다고 본다. 규제를 없애고 권한을 분산하는 등 획기적 대책도 나와야 할 것이다.
조선 초 맹사성, 황희와 함께 선초삼청(鮮初三淸, 조선 초기 세 사람의 청백리란 뜻)으로 칭송받았던 우의정을 지낸 류관(柳寬, 1346~1433)은 울타리조차 없는 낡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나라에서 받은 녹(祿)은 대부분 마을에 다리를 놓거나 길을 넓히는 데 썼다. 임금이 어찬을 내리면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고 귀한 하사품도 모두 나눠주었다. 장마 때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우산을 펴 비를 막으며 부인에게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지만 이마저 없는 백성들은 어떻게 비를 피할까?”하며 걱정했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서는 다른 준비가 있겠지요.”라고 쏘아 붙이자 류관은 그저 하늘을 보며 껄껄 웃었다고《필원잡기(筆苑雜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살던 서울 창신동의 집을 ‘우산각(雨傘閣)’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야말로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안보를 튼튼히 하고 나라경제를 살리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가 밤잠을 설치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아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지 정말 억울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고위 공직자가 사석에서 풀어놓은 하소연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의 진심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일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방향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오만이요 독선일 수밖에 없다.
전국시대 학자인 양주(楊朱)에게는 포(布)라는 이름의 아우가 있었다. 그가 하루는 흰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가 비를 맞고는 젖은 옷을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문 앞을 지키던 개가 주인도 몰라보고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화가 난 그는 몽둥이를 집어 들고 개를 때리려 했을 때 형 양주가 마침 나타났다. 자초지총을 듣고 난 양주는 동생을 타 일렀다.
“그것이 어디 개의 잘못이냐? 날은 어두운데다가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검은 옷으로 나타나니 당연히 개는 이를 분간치 못할 것이고 그래서 짖은 것이니 그 원인 제공은 아우 네게 있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우화다. 상황의 변화에 대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그 출발점에 있다. 즉, 대부분의 경우 원인 제공은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이유를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진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그 원인을 찾으라는 교훈인 것이다.
청렴과 진정성이 의심 받고 있는 사회는 결코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아니다. 좀 더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기이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패해서 구린내가 온 산천을 뒤덮고 있는 것과 같은 요즈음에 우리는 청렴한 선비정신을 가진 인물을 그리워하게 된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것은 오직 청백뿐이니, 대대로 끝없이 전해지게 하라(吾家長物唯淸白 世世相傳無限人).’
사회를 이끌어가는 공직자의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청백리 류관이 그의 자식들에게 남긴 유훈을 기억할 일이다.
오늘 나그네는 여행지의 시골 소나무 숲 서산에 걸린 햇살을 받으며 외롭게 서 있는 백비(白碑) 앞에 서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공직자로서 지킨 청렴의 절개로 역사에 기록된 이름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이 지녔던 목민관의 참뜻을 생각한다.
<저작권자ⓒ빠른뉴스! 울진뉴스 & 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BEST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