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산하(山河)
기사입력 2012.06.2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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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록산과 사사명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이른 바 ‘안사의 난(755~763년)은 강성했던 당(唐) 왕조를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9년여에 이르는 전란 동안 890만 호에 이르던 가구 수가 293만 호로 줄어들었다. 한 가구에 5명을 기준으로 해도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된 대재난이었다.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杜甫, 712∼770)도 이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번 과거시험에서 모두 낙방하고 실의와 가난 속에서 생활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군대의 창고를 관리하는 하급직 벼슬을 얻어 가족을 데리러 봉선현(奉先縣, 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에 갔는데 집을 들어서는 순간, 들떠 있던 그의 마음은 가족들의 통곡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굶주림 때문에 자식을 잃는 비참한 일을 당한 것이다. 두보는 시를 지어 애끓는 마음을 달랬다. “문에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린 자식이 이미 굶어 죽고 말았구나(入門聞號咷, 幼子饑已卒.)”. 그의 나이 44세(755년 11월) 때다.
그리고 곧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전란을 피해 방랑길에 나섰다. 이듬 해 그는 가족을 안전한 곳에 피난시켜놓고 혼자 다시 길을 나섰다. 당 왕실에 가담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도에서 그만 반란군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관운이 없었던지 왕실의 군대에 합류한 뒤에도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년 반이 흐른 뒤 그는 가족이 있는 곳을 찾는다. 전장 터로 떠난 가장(家長)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가족들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가 남긴 시, 강촌삼수(羌村三首)에 전해진다.
“… 아내와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더니 놀라움이 가시자 눈물을 닦는다.(妻孥怪我在, 驚定還拭淚) …”
사립문을 들어서는 가장을 보고도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놀란 눈을 뜨고 숨을 멈춘 가족들, 그리고는 재회의 기쁨에 눈물만 흘리고 서있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그려진다. 전란으로 인한 가족의 이별과 상봉, 아픔과 감격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 후에 우리 사회에서 한 때 크게 유행했던 “향기 품은 군사우편”이라는 노래가 있다.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아든 님 소식은 능선의 향기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중략) … 전해주던 배달부가 사립문도 못 가서 북받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라는 가사에 가슴을 녹이는 곡조가 어울려 전쟁 직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국민가요의 하나다. 물론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는 애창가요이기도 하고.
전쟁 통에 어느 날 난데없이 날아든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들고, 멍한 가운데에서도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과 안도. 그리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는 아낙의 모습에서,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전장 터에서 살아 돌아온 두보를 맞이하는 그의 가족들의 심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62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고(故) 김용수 일병과 이갑수 일병. 차디찬 북한 땅에 묻혀 있던 우리 국군 용사 열 두 분의 유해가 머나먼 길을 돌아 마침내 꿈에도 돌아가고 싶었던 고국의 품에 안겼다.
김용수, 이갑수 일병과 열 명의 무명용사들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던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산화했다. 18세의 나이로 학도병에 입대한 고(故) 김용수 일병은 “형님 저는 나라를 지킬 테니 형님은 집을 지키시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전선으로 떠났다. 그의 아버지 고(故) 김인주(1892-1944) 선생 또한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에 투신해 순국하신 애국지사로 부자가 대를 이어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
고(故) 이갑수 일병은 34세의 늦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뒤로 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헤어질 때 일곱 살과 네 살이던 두 아이는 긴 세월 동안 애타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기다렸고, 어느덧 60대의 백발이 되어 오랜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흐느끼며 아버지를 맞이했다.
북한에 있는 6.25전쟁 국군전사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과 군 최고 지휘관들은 스물 한 발의 조포로 최고 의전을 갖춰 호국용사들을 직접 맞이하고 거수경례로 영면의 길을 엄숙히 전송했다. 아직도 북녘 땅에 묻힌 수많은 호국용사들의 넋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최고 통수권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이들을 정중하게 최고의 예우로서 맞아들이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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