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째 80년 동안 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연국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4.01.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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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직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노동과 생활풍속, 습관 등을 통하여 우리의 멋과 아름다움,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토종문화와 기층문화, 그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몫이었다. 고스란히 예전 방식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토종문화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사람들,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 누구나 다 알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일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 직업적 방편으로 먹고 살다보니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점점 잊혀 가는 것들이 정작 내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어느덧 사라져간 예전의 생활방식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전통사회의 개념으로 본다면 ‘서민속의 서민’으로까지 표현할 수 있을 그들의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현장을 잠시 기웃거려 본다.
※울진 지역의 고유 사투리는 느낌과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사용했다.
언제부터인지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만큼 동네 이발소가 많이 줄어들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찾아가는 이발소는 늘 신기하면서도 설레던 곳이었다.
아이들이 이발소에 가면 어른들이 앉는 의자 팔걸이 위에 좁은 널빤지를 걸치고 그 위에 앉도록 해서 이발사의 눈높이에 키를 맞추었다.
더부룩하게 자라있던 머리카락은 이발사가 수동식 바리깡(이발기)을 대고 손을 척척 움직이면 금세 짧게 잘려져 나갔고, 사가사각 가위질 소리 몇 번에 단정하게 정돈되어 갔다.
하얀 가운을 걸친 이발사 아저씨와 한쪽에 걸어놓은 가죽 허리띠에 슥슥 면도칼을 갈던 모습, 물 조리개를 이용하여 머리를 감겨주던 모습, 바닥 이곳저곳에 수북하게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 이발소 특유의 비누냄새와 스킨로션 냄새가 풍기던 풍경을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비자들의 헤어 디자인 욕구는 점점 다양해졌고,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유행 풍조에 앞서가는 미용실에 등 떠밀려 동네 남성들의 사랑방 역할을 겸하던 남성 전용의 이발소는 아예 사라지거나 뒷골목으로 밀려났다.
그런데도 2대에 걸쳐 80년이라는 세월동안 변함없이 ‘강원이발관’이라는 상호를 고집하며, 오늘도 이발 기술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가위소리를 멈추지 않는 곳이 있다.
조부모(祖父母)와 부모(父母)가 함께 촬영한 옛날 가족(家族) 사진
아버지는 왜정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관서기술고등학교(関西技術高等學校)를 졸업했어요. 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식으로 이발 기술을 배워 오셨지요..... 울진이 강원도였던 그때에 이용사 면허시험관까지 했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 본토로 건너가서 이발 기술을 배워온 고(故) 김용순씨가 1930년대 ‘강원이발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후 40년 동안 이발을 하다가 은퇴했고, 부친의 뒤를 이어 또 다시 40년 동안 이발사로 살아오고 있는 김연국(金演國. 62세)씨는 울진 읍내 토박이다.
“원래 이곳 옥계동에서 태어났어요. 요 바로 우엣(위)집에서 나서 앞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까지 세 번을 옮겨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향(貫鄕)은 강릉(江陵)이고요. 윗대가 울진으로 들어온 지 200년 정도 됐어요. 6대 조상이 울진으로 옮겨와서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지요. 부모님은 슬하에 6남 4녀를 두셨어요. 위로 형님 세분과 누님 두 분이 계시는데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리 잡고 살고 있습니다. 연기(남. 79세. 미국 거주), 윤희(여. 77세. 미국 거주), 연백(남. 73세. 미국 거주), 정희(여. 70세. 미국 거주), 연찬(남. 66세. 미국 거주)이 그들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태어났고요. 아래로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어요. 연규(남. 59세. 서울), 연각(남. 57세. 서울), 계숙(여. 54세. 울진), 은숙(여)이 있어요. 막내 여동생은 부산으로 시집가서 살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고요. 어릴 때야 다 그렇지만 형님, 누나, 동생들 할 것 없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싸우기도 하면서 그렇게 정이 들었지요.”
김씨의 부친 고(故) 김용순씨는 일제강점기 당시 울진에서는 드물게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식 이발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왜정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관서기술고등학교(関西技術高等學校)를 졸업했어요. 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식으로 이발 기술을 배워 오신 것인데, 내가 어릴 적에 사진을 본적이 있어요.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식 이발 기술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울진이 강원도였던 그때에 이용사 면허시험관까지 했어요. 왜정시대에 일본까지 건너가서 이발 기술을 배워온 사람이 흔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말씀이, 그때 의사 교육을 받았으면 의사 면허를 딸 수도 있었는데 의사 교육 대신 이발 기술을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이발사 수입이 좋았을 때입니다. 지금이야 쌀값이 싸지만, 당시만 해도 하루 이발을 하면 쌀 두가마니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었다고 해요.”
김연국씨는 얘기 끝에 부친이 어린 시절을 울릉도에서 보냈다면서, 울릉도의 토종 새인 ‘꺾새’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버지 역시 나면서부터 아주 어려운 시절을 겪어 왔더라고요. 나라 전체가 배고픔을 숙명으로 여길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도 했겠지만요. 아버지는 어린 시절을 울릉도에 살고 있던 누나 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상 고향 울진에 대한 향수, 형제자매들에 대한 향수가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고기 잡던 울릉도 사람들이 돈도 잘 벌고 하니까 육지에 있는 사람한테 장가를 들었답니다. 그래서 고모가 울릉도로 시집을 가서 살게 된 거고, 아버지도 살기가 원체 어렵다보니 울릉도로 건너가서 누나 밑에서 밥을 얻어먹은 거지요. 아버지는 철 든 후에 울릉도에서 나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해요. 아버지가 해준 얘기인데, 울릉도에는 ‘꺾새’라는 새가 있었다고 해요. 여름철에 여럿이 모여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장대를 휘두르면 꺾새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새를 모닥불에 구워 먹었고요. 지금은 울릉도에 그 새가 없다고 해요. 이제는 멸종됐지만 독도에 강치가 있었듯이, 울릉도는 꺾새가 아주 유명했다고 합니다.”
김씨가 전해주는 울릉도의 꺾새는 ‘깎새’가 와전된 말로, 깎새는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만 해도 섬에 많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울릉도에는 ‘깎깨등’이라는 곳이 있는데, 예전에 이 산등성이에 깎새가 많이 살아서 처음에는 ‘깎새등’이라고 부르다가, 산등성이의 생긴 모양이 깎아놓은 듯 가파르다고 해서 언제부턴가 깎깨등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전한다.
강릉 김씨 종조봉양에서 당시 강원일보 김운영 영동지사장(왼쪽),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왼쪽 두번째)과 함께
강릉 김씨(江陵 金氏) 종조봉양서 헌관으로 제를 봉행할 당시(오른쪽)
그때 돈 이천 원이면 울진 읍내의 목 좋은 곳에 위치한 건물 한 채를 사고도 남았다고 해요. 근남 들판의 좋은 논도 열두 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하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군(軍) 기갑부대 중대장을 하던 큰형님은 박정희 장군의 군사 혁명 이후에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김연국씨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후까지 늘 수입이 풍족했던 아버지였지만 앞날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었다고 아쉬워한다.
“부모님께서는 이발 수입이 너무 좋다보니 앞으로 닥쳐올 어려운 때를 대비하지 않고 안일하게 생활한 것 같아요. 하루하루 살림이 불어나는 게 보이니까 이발만 해도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지금으로 따지면 돈 가치가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왜정 시대에 아버지는 이천 원짜리 적금을 세 개나 넣었다고 합니다. 그때 돈 이천 원이면 울진 읍내의 목 좋은 곳에 위치한 건물 한 채를 사고도 남았다고 해요. 근남 들판의 좋은 논도 열두 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하고요. 적금 세 개면 육천 원인데, 이천 원으로 집 한 채 사고, 이천 원으로 논 열두 마지기를 샀는데, 나머지 이천 원은 적금을 탈 무렵에 해방이 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주지도 않고 그냥 들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들고 가버린 돈이 엄청날 거라고 생각돼요. 젊은 시절에 아버님께서 어떤 기회가 되면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그나마 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거지요.”
김씨는 자신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이미 가세(家勢)가 상당히 기울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거기에 더해 대학을 졸업하고 군(軍) 기갑부대 중대장을 하던 큰 형님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정변(軍事政變) 이후에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떠났다.
“큰 형님은 울진 시골에서는 드물게 그 시절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대학을 나와서 군 기갑부대 중대장을 했습니다. 큰형님은 박정희 장군의 군사 혁명 이후에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큰 형님은 자신이 모시던 장군의 역쿠데타에 가담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박정희 장군이 정변에 성공하자, 곧장 미국으로 쫓겨서 들어간 셈이지요. 세월이 지나니까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네요. 미국으로 건너가서 어렵사리 기반을 잡은 큰형님은 후에 형제자매들을 하나둘 미국으로 초청해서 불러 들였고요. 나에게도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들어가지 않았어요. 용기가 없었던 거지요. 5.16 쿠데타가 1961년에 일어났으니까 그게 벌써 52년 전 일입니다. 내가 올해 육십둘이니까 그때 나이가 열 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큰형님은 그 당시에 서른에 가까웠으니 세상을 움직이려고 할 나이였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형님으로부터 박정희의 쿠데타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민주화가 진행되고 난 다음이었어요. 언제 한번 형님이 한국으로 나왔을 때 쿠데타 얘기며, 미국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황을 이것저것 말해 주었지요. 그전에는 그런 얘기를 공공연히 할 수도 없었고,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이 왜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지도 몰랐어요.”
한번 기울어버린 집안의 가세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펴지지 않았다.
특히 집안의 맏이인 김씨의 큰 형님을 공부시키려는 부모님의 일념은 대단했고, 그럴수록 가세는 점점 기울어가면서 온 가족을 더욱 버겁게 했다.
“아버지께서 여러 식구를 거느린 힘든 살림살이를 꾸리면서도 큰 형님을 어렵게 공부시킬 때는 ‘나중에 맏이가 잘되면 동생들을 챙겨주고 뒷바라지도 해줄 것이다’하고 판단했겠지요. 하지만 큰형님은 평소 동생들에게 ‘너희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각자의 살길을 찾아라’고 말했어요. 아버지의 계산은 처음부터 빗나가고 있었던 겁니다. 연세가 들면서 아버지의 수입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큰 형님 대학 공부를 위해서는 그동안 장만해 두었던 살림살이를 하나둘씩 처분해서 학비를 올려 보내야 했습니다. 사정이 그랬으니 나머지 형제들은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형님 공부시킨다고 아버지도 어려워졌고, 큰형님은 또 배웠으면서도 그 세계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그러니 가족 모두가 어려워지며 뒤틀리기 시작한 거지요. 더군다나 큰형님이 쫓겨 가다시피 미국으로 떠나고 나니까, 그 누구도 길을 찾을 수가 없어진 겁니다. 집에 남은 식구들은 제각각 스스로 모든 걸 깨닫고 배우고 그렇게 살아나가야 했어요. 암울한 시절이었지요”
어떤 장사든지 주인이 젊을 때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더욱이 지금처럼 노후 보장이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의 살림을 줄이면 안 되는 거였지요..... 아버지는 큰아들 하나 공부 시킨다고 집안 살림을 없애면서 뒷바라지를 했는데, 막상 나이가 들고 보니까 집안에 남아 있는 게 없었던 거지요.
김연국씨는 아버지의 처세(處世)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를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데 있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어떤 장사든지 주인이 젊을 때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연세가 들면서 아버지의 이발 손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어릴 때 이미 아버지는 연세가 상당히 많았고요. 더욱이 지금처럼 노후 보장이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의 살림을 줄이면 안 되는 거였지요. 그것을 절대적인 교훈으로 삼아야 돼요. 아버지는 그런 이치를 몰랐습니다. 큰아들 하나 공부 시킨다고 집안 살림을 없애면서 뒷바라지를 했는데, 막상 나이가 들고 보니까 집안에 남아 있는 게 없었던 거지요. 집안 형편을 봐가면서 적당히 도움을 주었어야 형님도 형님대로 살고, 집안도 집안대로 살아남는 것인데요. 끝내 아버지가 큰형님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바람에 남아 있는 식구들은 무지하게 힘들어진 거지요. 살아가면서 앞으로 언젠가 닥쳐올 어려움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내가 집사람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부분이 그런 거지요. 저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넉넉할 때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항상 어려울 때를 대비해 왔어요.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조금씩 아껴서 준비하는 자세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던 거지요.”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낸 김연국씨는 지금까지도 피감자와 오징어 창자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전한다.
어릴 때 겪은 어떤 단편적인 경험은 그 기억이 하도 강렬해서 평생을 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 시절에 먹고 살던 형편이야 말해서 뭐해요? 어렸을 때는 배가 고프니까 축 늘어져서 누워 있을 때가 많았지요. 한 날은 어머니가 어디서 피감자를 구해 왔어요. 배고픈데 먹으라면서요. 그걸 삶아서 껍질을 벗겨 먹었는데 그만 픽 쓰러지고 말았어요. 피감자에 약한 독이 있는 모양입니다. 촌에서 소죽을 끓일 때 피감자를 삶아 먹으면 맛있다고 그러는데, 그건 평소 배부른 사람들이 먹을 때 얘기지요. 빈속에 피감자를 잔뜩 먹었으니 굶주렸던 속이 견디지를 못한 겁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나는 지금까지도 피감자를 먹지 않아요. 오징어 창자도 안 먹어요. 어머니가 죽변까지 들어가서 오징어 배를 따주고 창자를 얻어 와서 삶아주고는 했습니다. 텅텅 빈속에 기름진 오징어 창자가 들어가니 어떻겠어요? 먹고 나면 얹히고(체하고) 물리고(짓질리고) 그랬지요. 오징어 창자로 요리한 음식은 따뜻한 밥반찬으로 조금씩 먹어야 하는데, 그걸 밥 삼아 먹었으니 물릴 수밖에 없지요. 어떤 때는 두부 비지를 구해서 밥 삼아 먹고는 했어요. 아버지의 이발소는 손님이 줄어들고, 사는 게 참 피곤했지요. 집안에 논밭이라도 있어야 식구들 먹을거리가 자급자족이 되는 건데, 그때는 이미 논밭전지도 다 남에게 넘어가고 난 다음이었어요. 아버지께서야 평생 이발 손님이 있어서 형편이 늘 같을 줄 알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즈음에 아버지는 늘 ‘인생은 풀잎에 앉은 이슬과 같다’고 하셨어요. 자조적인 말씀이었겠지요.”
김연국씨는 열 몇 살 때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무작정 가출했던 적이 있다며 웃는다.
김씨의 가출은 십대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인 당일치기의 호기로 끝난다.
“열 몇 살이 겨우 넘었을까 말까한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도망을 친 적이 있어요. 하도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무작정 객지로 나가서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새벽 일찍 집을 나와 걸어서 도망을 쳤는데, 멀리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강원도 호산 어디쯤까지 올라갔었는데, 온종일 쫄쫄 굶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지요. 배도 너무 고팠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의 얼굴이 눈에 밟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젊은 시절부터 운동을 즐긴 김연국씨는 축구, 테니스, 탁구에 이어 지금도 수준급의 배드민턴 실력을 자랑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집 바로 뒤 월송공원에 매일 올라갔어요. 울진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크든 작든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어요. 주로 시집을 들고 가서 읽고 외우고, 내 몸을 무지하게 괴롭히면서 태권도와 격투기 같은 운동을 아주 열심히 익혔습니다. 마땅하게 배울 곳이 없어서 책을 보면서 운동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게 됐지요. 내 몸을 보신할 수 있을 정도는 됐지만 더 이상 진척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좀 많이 만나고 사귀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 체력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고 싶었거든요.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운동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축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축구도 나이가 드니까 너무 격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테니스를 배우면서 사람들과 어울렸어요. 그 다음에는 탁구도 배웠고, 근래에는 배드민턴을 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생활체육회 경북도지사배 60대 A조 경기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협회장기 대회에 나가서 준우승을 했고요. 그러고 보니 60대에서는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것 같아요. 40, 50대 친구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고요. 돌이켜보면 운동을 즐기면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맥도 넓히게 됐으니 인생에서 운동이 준 도움이 상당하지요. 바둑도 독학으로 배워서 꽤 두는 편입니다. 인터넷에 아마 4단으로 돼 있으니까 독학한 거 치고는 얼마간 일가를 이룬 거고요. 장기도 아마 4단의 실력입니다. 혼자 문학책을 보면서 가끔은 시도 긁적거려 보고 있어요.”
김씨는 살아보니까 배고픈 설움보다 더한 것이 못 배운 서러움이더라고 말한다.
“형편이 어려워서 많이 배우지 못했어요. 육성회비도 제대로 내지 못할 형편인데 어떻게 학교를 다니겠어요? 그래도 살면서 옥편과 백과사전을 뒤적이면서 그때그때 궁금한 것들을 스스로 해결해 왔어요. 배움의 한 때문에 늘 책을 곁에 두고 공부를 해 왔지요. 살아보니까 가난해서 배고픈 설움보다 훨씬 더한 게 배움에 대한 설움이었어요. 배고픈 거야 당장 한 끼를 넉넉하게 먹으면 쉽게 해결되는 거지만, 배움에 대한 설움은 책 한권 본다고 금방 해결되지 않거든요. 언제부턴가 옥편과 대사전을 늘 옆에 두고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보고 하는 일이 습관이 돼 버렸지요. 대사전을 찾아보다가 안 되면 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배움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었어요. 시나 소설 같은 문학책도 도서관을 다니면서 참 많이 읽었어요. 문학책을 읽으니까 감성적인 부분도 순화가 많이 되고, 평소 말하는데 있어서도 표현력이 상당히 늘어나더라고요.”

김연국씨는 스물여덟에 기성복과 구두를 외상으로 장만해서 읍내 2구 마을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시장에 가서 외상으로 기성복을 사 입고, 구두도 한 켤레 사 신었습니다. 읍내 2구 시장 안에 있던 마을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분가하고 나서 집사람이 오십만 원 짜리 적금을 넣겠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오십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하루하루 벌어서 오십만 원짜리 적금을 넣느냐면서요.
김연국씨는 스물여덟 살에 중매를 통해 두 살 연하의 서면 소광리 처자(處子)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스물여덟인가에 중매로 결혼을 했어요. 당시에는 늦은 나이였지요. 처가는 서면 소광리고요. 아버지 친구 분이 그곳에 훈장으로 계셨는데, ‘이곳 소광리에 괜찮은 처자가 있으니 자네 아들하고 한번 연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나’하고 아버지께 제안을 한 겁니다. 나는 그때 변변한 구두 한 켤레 없었고, 양복 한 벌 없었고, 바지라고 해봐야 예비군 군복밖에 없었어요. 이발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의식주를 해결해 줄 가장 기본이 돈인데 말입니다. 또 젊었고 문학책에 빠져 있다 보니 이 사회에 대한 반항기도 상당했고요. 덜 된 인간이 집사람을 만나서 인간이 된 겁니다. 돈도 결혼해 살면서 알게 됐어요. 집사람 이름은 이금자(李今子)인데 본관이 평창(平昌)입니다. 집사람과 경묘(남, 35세, 울진), 경미(남, 32세, 울진) 아들 둘을 두었어요. 큰 아들은 결혼했고요.”
김씨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울진 읍내 시장 안 마을회관에서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우여곡절을 거친 다음이었다.
“집사람을 처음 만나던 때만 해도 서면 소광리로 향하는 도로가 비포장이었습니다. 소광리 입구인 대광천 다리까지 덜컹거리며 먼지 나는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서부터 걸어서 소광리로 들어갔어요. 그 도로 사정도 지금과는 달라서 여러 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처가 될 집에 도착했지요. 저녁 무렵에 마을에 도착하니까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데 참 아름답다고 느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런데 명색이 첫선 보러 가는 사람이 예비군 바지에 티 하나 걸치고 갔으니 몰골이 어땠겠어요? 사는 게 원체 어렵다보니 처음 만난 저 사람에게 이런저런 거짓말을 하고 돌아왔는데, 어느새 이년 정도가 훌쩍 지나 버렸어요. ‘내가 사는 울진읍에 와봐야 고생만 하니, 곧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살겠다’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아버지에게 ‘곧 그 집에서 연락이 올 것’이라고 또 거짓말을 하게 됐지요. 결국 이년 정도가 지났고, 기다리다 못한 아버지가 직접 소광리로 올라가서 결혼 날짜를 받아 왔어요. 나하고 이년 차이 나니까, 결혼할 때 집사람 나이가 스물여섯인가 됐어요. 집사람도 혼기가 꽉 찬 나이였지요. 결혼식 날은 다가오는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시장에 가서 외상으로 기성복을 사 입고, 구두도 한 켤레 사 신었습니다. 읍내 2구 시장 안에 있던 마을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기성복이나마 나는 양복을 입고 집사람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식으로요. 예전에 도의원을 하신 주기돈 선생님이 주례를 섰는데,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었지요.”
결혼하기 전에 김씨는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짝사랑만 하던 이웃집 아가씨가 있었다고 전해주며 웃는다.
“이발을 하다가 잠시 시간이 나면 이웃집 처녀가 잠시만 오라고 손짓을 해요. 가보면 그 당시에는 귀하던 라면을 끓여놓고 먹으라고 하곤 했지요.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데, 그때만 해도 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다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아가씨에게 별 마음이 없었어요. 그때 이웃집의 다른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막상 말 한마디 변변히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섬섬옥수로 너무 고운 아가씨였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꽤 오랜 시간을 끙끙 앓기만 했어요. 행동도 곱고 얼굴도 곱고 그랬어요. 먼발치서 바라만 봐도 살살 녹았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겁니다. 언젠가 내가 이것도 고백이라고 집사람에게 얘기했으니 내력을 알지요.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도 젊은 시절 그렇게 지고지순했던 감정이 있었구나’ 생각되면 지금도 애틋합니다. 그 아가씨에게 고백 한번 못해봤는데 어느 날 문득 시집을 가 버렸어요.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 풋사랑은 또 그런 묘한 면이 있는 모양이지요.”
김씨는 없는 집안에 시집와서 고생을 한 아내의 마음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일이 늘 미안하다며, 남은 인생은 아내를 위해 살겠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서 이만큼이나마 살림을 일군 것이 다 집사람 덕입니다. 저 사람이 너무도 고맙지요. 나야 운동 좋아하고 책읽기나 즐기면서 하루 세끼만 먹으면 만족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집사람이 시집을 와서 엄청시리 고생을 했어요. 우선 내 성격이 여자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지 못했어요. 더욱이 시부모에 시동생에 시누이까지 가족이 여럿이었으니 마음고생이 또 오죽했겠어요? 지금은 아주 후회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만 해도 여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같으면 여자들이 다 도망가고 없을 겁니다. 누가 그렇게 살겠어요? 형님들이 모두 미국 건너가고 사실상 내가 맏이 역할을 했고, 집사람은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결혼하고 나서도 내내 어려웠지요. 보태주는 사람은 없고, 저 사람은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나는 나대로 운동하네 하며 저 사람 마음을 챙겨주지도 못했고요. 앞으로 남은 인생은 진심으로 저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식구가 살다보니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또 내가 이발해서 벌어들이는 수입 전부를 부모님께 드리고 우리가 생활비를 타서 썼어요. 그러다보니 도대체 저금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었어요. 어느 날 집사람에게 ‘차라리 우리가 분가(分家)해 살면서 매달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자’고 제안 했지요. 애들 둘을 데리고 월 십만 원짜리 사글세방을 얻어서 나왔습니다. 저 사람은 하루 번 걸 저금해서 한 달을 계획하고, 한 달을 모아서 또 일 년을 계획하는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모님의 생활 방식은 달랐습니다. 분가하고 나서 집사람이 오십만 원 짜리 적금을 넣겠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오십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하루하루 벌어서 오십만 원짜리 적금을 넣느냐면서요. 그러나 집사람은 알뜰히 쪼개 쓰면서 오십만 원짜리 적금을 끝내는 거였어요. 그랬더니 십만 원짜리 방이 오십만 원짜리 방이 되고, 또 백만 원짜리 방이 되고 그랬습니다. 수입을 전부 집사람에게 맡기고, 집사람은 적금을 넣으면서 부모님 용돈은 용돈대로 드리고, 애들 공부시키고, 집도 새로 짓고 그랬어요. 적게 벌어도 멀리 내다보고, 한눈 안 팔고, 그런 점이 집사람의 큰 장점입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살자는 게 집사람의 인생철학이거든요.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남들이 팔불출이라고 욕할까봐 겁이 나기도 합니다.”
이발에 인생이 담겨 있고, 교훈이 있고, 경제가 있고, 기회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강원이발관의 역사가 80년이나 이어지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책임감도 저절로 생겼어요.....아버지 대부터 변함없이 이발소를 찾아오는 아흔 여섯 된 손님도 있습니다. 오륙십년 된 단골들은 꽤 있고요.
십대부터 부친이 운영하는 ‘강원이발관’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이발 기술을 익힌 김씨는 이십대 초반에 이발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발은 십대부터 했어요. 아버지의 이발관에서 자연스럽게 이발 기술을 접했거든요. 이용사 기능 자격증은 이십대 초반에 취득했고요. 아버지를 도와서 이발을 해 왔으니까 별도로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어요. 대구까지 올라가서 이용사 학과 시험인 공중위생학, 일반 상식에 이어 기능을 테스트하는 실기 시험을 쳤습니다. 한번 만에 합격했어요. 그때는 학과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다음에 실기시험을 보러 올 때 모두들 머리를 꼭 길러서 오라고 했어요. 그러면 실기 시험 당일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교대로 이발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을 감독관이 지켜보면서 실수는 하지 않는지, 정해진 시간 안에 머리를 깎을 수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합격, 불합격 여부를 결정했지요. 자격증을 따고 나서 내가 본격적으로 이발소를 운영하기 시작하자 아버님은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때부터 나 혼자 죽 이발소를 운영해오고 있지요. 하기야 내가 많이 배웠더라면 아버지 가업을 이어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그런 과정들이 모여서 80년의 강원이발관 역사를 이룬 겁니다.”
김씨는 이발 기술의 가장 기본인 바리깡 사용과 가위질을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배운 정밀한 일본의 이발 기술을 현실적으로 백퍼센트 발휘할 수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바리깡이나 가위질 같은 이발 기술은 아버지에게 직접 배웠어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는데도 그 기술을 다 활용하지 못해요. 기술을 다 발휘하려면 하루에 손님을 몇 명 받지도 못할 테니까요. 일본 이발은 우리나라 이발에 비해 수준 자체가 틀려요. 이발 기술 자체가 정밀해서 시간을 한없이 잡아먹어요. 그러다보니 손님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게끔 정성을 다해서 머리를 다듬는 대신, 시간은 단축하는 방향으로 이발소를 운영해왔어요. 머리를 자르고, 면도를 하고, 감겨 드리고 나서 거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손님의 표정을 살피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이발에 만족하는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지를요. 이발은 무엇보다 손님이 자기만족을 해야 하는 거지요. 손님이 오케이 할 때까지 이발사는 머리를 만져야 하는 겁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김씨의 부친 고(故) 김용순씨는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에 ‘강원이발관’이라는 상호로 처음 문을 열었다.
강원이발관은 김씨의 부친 대에서 40년, 김씨 대에 와서 또 다시 40년을 운영해오고 있으니 장장 80년이라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국내에서도 유례를 쉽게 찾아보기 힘들만큼 긴 역사를 자랑한다.
“왜정시대인 1930년대에 아버지께서 ‘강원이발관’이라는 이름의 이발소를 시작했고, 대를 이어 내가 지금까지 이발소를 운영해오고 있으니, 최소 8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셈입니다. 강원이발관이라는 상호도 변함없이 유지해오고 있고요. 아버지께서는 처음에 지금 국제다방 자리에서 이발소를 하다가 다시 종로서점이 있는 자리로 옮겼다가, 맨 나중에 지금 이 자리로 옮겨 오셨어요. 나는 이발을 통해 인생의 길을 찾았어요. 이발에 인생이 담겨 있고, 교훈이 있고, 경제가 있고, 기회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강원이발관의 역사가 80년이나 이어지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책임감도 저절로 생겼어요. 나를 좋아하고 또 나를 믿고 이발소를 찾는 다양한 계층의 손님들을 대하면서 개인적으로 교훈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변함없이 강원이발관을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항상 고맙지요. 이발사라는 직업에 후회가 없어요. 일 자체가 즐겁습니다. 수입이 적은 날은 책을 뒤적이며 공부할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수입이 나을 때는 손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편이지요. 보통 열한시가 넘어서 자고, 아침에는 평균 여섯시면 일어납니다. 일찍 일어나서 자유로운 시간에 집사람이 농사 조금 짓는 것도 도와주고, 운동도 하고 그럽니다.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는 거의 이발소 안에서 생활하고요. 이발사를 안했으면 무엇을 했겠다 하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습니다. 어릴 때 한의학을 공부해서 한의사를 해보라고 권유하는 사람은 있었는데, 아마 내가 용기가 없어서 못한 것일 테지요. 이발하면서 큰돈은 못 벌었지만 밥은 먹고 살았어요.”
40년이나 이발소를 운영해왔으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없을 리 없는 김연국씨다.
“이발을 처음 배울 때 어떤 손님이 와서 눈썹을 밀어달라고 했어요. 몇 번이나 눈썹을 밀어달라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그래도 손님은 계속 눈썹을 밀어 달라고 했어요. 가죽 혁띠(혁대)로 날을 잘 세운 면도기로 눈썹을 보기 좋게 밀었지요. 그런데 그 손님이 거울을 보자말자 난리가 난겁니다. 사실은 눈썹을 보기 좋게 다듬어 달라는 소리였는데, 몇 번이나 확인해도 계속 밀어달라고만 했으니 나는 그냥 밀어버렸건 거지요. 눈썹도 잘 생기고 얼굴도 잘 생긴 손님이었는데 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 손님은 한동안 밀어버린 한쪽 눈썹에 반창고를 계속 붙이고 다녀야 했어요. 특히 눈썹은 머리카락과 달라서 완전히 자라는데 한참 걸리잖아요? 또 한 번은 콧수염을 멋있게 가꾼 손님이 와서 콧수염을 다듬어 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어른들이 콧수염을 보기 좋게 많이들 기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쪽을 다듬으면 저쪽이 짧아 보이고, 또 저쪽을 다듬고 나면 이번에는 이쪽이 짧아보이고는 했습니다. 결국 그 손님의 콧수염이 일본 사람들처럼 코밑에만 조금 남아있게 된 겁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때는 얼마나 미안하든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또 하루는 어린애가 혼자 이발소에 와서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집에 가서 엄마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다시 와서도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어요. 말 그대로 싹 밀었지요. 그런데 이발이 끝나고 나서 거울속의 자기 얼굴을 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집에 가서 엄마를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꾀를 냈지요. 머리가 금방 자라는 신통한 약이라면서 면도 후에 어른들이 바르는 스킨을 머리에 듬뿍 발라주고, 이삼일만 지나면 머리가 금방 자라게 된다고 달래서 보냈어요. 애들이야 하루 이틀 지나면 금세 또 잊어버리니까요. 단골 손님요? 아버지 대부터 변함없이 이발소를 찾아오는 아흔 여섯 된 손님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변함없이 강원이발관을 찾아주시는 고마운 분들이지요. 오륙십년 된 단골들은 꽤 있고요.”
아버지 말씀이 이발을 하면 돈은 못 벌어도 밥은 먹고 산다고 하셨어요. 또 이발하는 속에서도 얼마든지 인생을 찾을 수 있다고도 하셨지요.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이 좁은 울진에서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으면 이발하는 놈이 테니스 친다고 욕을 했어요. 지금 없는 사람이 골프 치는 것보다 더 욕을 얻어먹었어요. ‘이발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발하는 놈’이라고 공공연히 뒤에서 수군거렸어요.
김연국씨는 살아오면서 최고로 잘한 일이 아내를 만난 일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이 울진읍 고성리 가원동을 연결하는 ‘가원교(佳原橋)’를 놓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녔던 일이라고 전한다.
가원교를 신축하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복잡하고 길었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은 집사람을 만난 것이고, 또 가장 보람이 있었던 일이 고성리 가만(가원동) 건너가는 가원교 다리 놓은 일입니다. 한 30년 전에 가원교 마을 안쪽에 농가를 한 채 샀습니다.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게 되면 집사람과 조용하고 전망 좋은 곳에서 작은 밭뙈기나 일구면서 여생을 보내자 싶어서요. 집을 사고 보니 길이 없는 맹지(盲地)였어요. 동네 자체가 연결되는 길이 없는 곳이었지요. 동네를 출입하려면 다리가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추진하려니까 동네 사람들이 호응을 안 하는 겁니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숱한 기관에 청원을 하고 졸라도 놓지 못한 다리를 어떻게 마흔둘밖에 안된 이발이나 하는 당신이 엄두를 내느냐 뭐 그런 것이었어요. 내가 그 동네로 퇴거를 하지 않았으니까 직접 청원을 하지는 못하고, 다른 유력한 사람의 이름을 빌리려고 했는데 아무도 이름을 빌려주지 않는 겁니다. 애초부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니까 괜히 힘 빼지 말라는 거였어요. 관선 군수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고, 모두가 비협조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신밑(학마을)에서 이름을 빌려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때 구장을 하던 주승용씨라는 키가 조그마한 사람이 대표로 이름을 빌려주었습니다. 천고개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최중광이라는 사람과 가만에 사는 서동수라는 젊은 사람도 이름을 빌려 주었어요. 다들 나를 믿고 이름 석 자를 선뜻 빌려주었던 겁니다. 그렇게 청원서를 만들어서 이학원 국회의원도 만나고, 군의장도 만나고, 군수도 만나고, 도의원도 만나고 그랬어요. 또 그때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김광원씨도 만났지요. 젊었을 때니까 용기도 있고, 배짱도 있었어요. 당시 나는 읍내1리 청년회를 창립하고 청년회장을 하고 있을 때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우선 설계를 해야 예산을 세우든지 어떻게 할 텐데, 울진군에서 가원교 교량 설계를 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머리를 썼지요. 1993년도에 성류굴 앞 다리와 호월리 다리를 놓았는데, 그해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싹 떠내려 간 일이 있어요. 그 일을 들먹이면서 울진군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습니다. 가원교 다리 설계를 해주지 않으면, 그 일을 문제 삼아서 상급 기관에 감사도 청구하고, 신문사에 자료도 보내서 일을 크게 만들겠다고요. 그러면서 이왕 설계를 할 거면 다리를 크게 설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고 나니 이틀 만에 가원교 설계가 나오더라고요. 그 길로 기성에 있던 김광원씨를 찾아가서 설계를 던져주고 와 버렸어요. 당시에 국회의원에 출마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김광원씨가 경상북도 부지사 출신으로 경북도에 인맥이 많고, 한나라당 울진군 위원장을 하면서 힘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결국 김광원씨가 경북도에 올라가서 부탁을 하고 예산 2억 원을 울진군으로 가져왔습니다. 2억 원이 울진군으로 내려오고 나니까, 절대 안 된다고 하던 울진군에서도 서두르기 시작했어요. 1994년도부터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시작한 가원교 교량 신축이 1년 동안의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95년 공사에 착공하게 된 것입니다.”
총 11억여 원의 예산을 들여서 1995년 6월에 착공한 가원교는 2년간의 공사를 거쳐서 1997년 6월에 준공됐다.
“공사가 끝나고 준공식을 하게 됐어요. 공사업자가 떡과 수건을 준비했습니다. 가원동 마을회관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내가 사회를 보면서 먼저 준공식 비용을 겸해서 동네 발전기금으로 십만 원을 선뜻 내놓았어요. 그러고 나니 눈치를 보던 공사업자며 동네 사람들이며 하나둘 돈을 내놓기 시작했어요. 최하가 십만 원씩을 냈는데, 그 자리에서 금세 오백구십만 원이라는 큰돈이 모아졌어요. 다리를 신축하는데 수고한 사람들에게 감사패도 전달됐어요. 김광원 국회의원, 전광순 군수, 주기돈 도의원에게 감사패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울진 장씨 종친회에서 나에게 감사패를 가져왔어요. 월계서원이 있어서 그동안 다리를 놓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못 놓은 다리를 내가 쫓아다녀서 놓을 수 있게 됐다면서요. 안 받는다고 계속 우기다가 결국 나를 믿고 이름을 빌려 주었던 주승용씨를 포함시키면 받겠다고 해서 함께 감사패를 받았어요. 그때 주승용씨는 이미 지병으로 세상을 달리했을 때였습니다. 또 가원동 주민들도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뒤늦게 감사패를 만들어 주었고요. 힘이 있는 선출직들도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가원교 신축을 힘이 미약한 이발사가 쫓아다니면서 성공시킨 거지요. 세상의 모든 일 뒤에는 늘 그렇게 교훈적인 사실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김씨는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이발사를 노가다(막일)중의 상노가다나 하는 사람쯤으로 우습게 치부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말하며 웃는다.
“아버지 말씀이 이발을 하면 돈은 못 벌어도 밥은 먹고 산다고 하셨어요. 또 이발하는 속에서도 얼마든지 인생을 찾을 수 있다고도 하셨지요.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이 좁은 울진에서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이발하는 사람이 얼분(알분, 알은체)을 떨고, 테니스도 치고, 축구도 하고, 문학 책을 들여다보고 그랬으니 노가다 중의 상노가다가 이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소리를 했어요.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으면 이발하는 놈이 테니스 친다고 욕을 했어요. 지금 없는 사람이 골프 치는 것보다 더 욕을 얻어먹었어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테니스냐고 쑥덕거렸고, 더군다나 이발하는 놈이 무슨 테니스냐고 했어요. ‘이발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발하는 놈’이라고 공공연히 뒤에서 수군거렸어요. 지금이야 모두들 직업을 가리지 않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그러지만, 내가 이십대 때만 해도 사람들이 뒤에서 ‘이발이나 하면서 떤다’느니 하는 얘기를 종종 했습니다. 벌써 사십년 전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했겠다 하면서 지금은 웃고 맙니다. 지역이 좁아서 그런 거지요. 지금은 모두들 좋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요. 사정이 그러했지만, 나는 떳떳이 열심히 노력해서 가족들과 먹고 살았고,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행동 안하면서 살아 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고소고발 안하면서 내가 손해를 보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스스로 참으면서 남을 용서하려고 노력했어요. 젊어서 견디기 힘들었던 일들도 나이가 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트이면서 점점 견딜만 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때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생각해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 일로, 절대로 하루아침에 사람의 인상이 좋아지는 건 아니지요.”

가원동(佳原洞) 고택(古宅)에 가면 즐거워져요. 그 집으로 찾아가는 것 자체가 기분을 들뜨게 합니다.....‘사족(蛇足)’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뱀을 다 그리고 나서 애초부터 뱀에게는 있지도 않은 발을 필요 없이 그려 넣는다는 뜻이잖아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사족과 같이 쓸데없는 행위를 해서 도리어 인간관계나 어떤 일을 잘못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산촌에 석양빛 물들면 / 노송 숲 사이로 두루미 / 엄마 품속으로 찾아들고 / 모락모락 피는 연화 / 그 임 사랑의 노래 부르는 곳 / 꿈속에 그리던 언덕이라 / 여로에 지친 내 육신 / 풀어놓은 종착역 / 가원의 고택이라네.」
-‘가원 고택’...김연국 詩.
천생(天生) 이발사인 김연국씨는 삼십년 여전에 구입한 울진읍 고성리(古城里) 가원동(佳原洞) 고택(古宅)을 지난 여름에 말끔히 수리하고 새롭게 단장해서 현재 전통 한옥 체험 민박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젊었을 때 등산을 좋아했는데 우연히 고성리의 그 고택이 눈에 띄었어요. 계속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결국 삼십년 전에 그 집을 샀어요. 구입한 다음에 부모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서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아버지께서는 십몇 년 전에 여든일곱으로 돌아 가셨어요. 어머니께서는 삼사년 전에 아흔 다 돼서 돌아 가셨고요. 두 분 다 장수하신 편이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미국에서 형님들도 다 들어와서 장사(葬事)를 치렀고요. 부모님이 사셨으니까 계속 집을 관리해왔지요. 집이라는 게 사람의 훈기가 없으면 금방 삭거든요. 그런데 옛날 고택이다 보니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퇴락하는데, 제대로 수리하려고 마음먹어도 비용이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다행히 경상북도의 ‘전통 한옥 체험 숙박 사업’이라는 정책을 알게 됐고, 칠팔십 프로 보조를 받아서 그 집을 전면 수리하게 된 겁니다. 작년 시월에 사업 보조 신청을 하고 금년 사월에 승인을 얻어서 유월 달에 공사를 시작했어요. 지난 팔월 말에 공사를 다 끝마쳤고요. 수리를 계속 벼르고 있다가 자부담이 크지 않은 좋은 기회를 만난 셈이지요. 가원동 고택에 가면 마음이 즐거워져요. 그 집으로 찾아가는 것 자체가 기분을 들뜨게 합니다. 내가 죽고 나도 어느 누군가가 그 집을 원형 그대로 계속 유지해 갈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기분이 좋아지고요.”
평생 운동을 좋아했고, 술 담배는 입에 대지 않으면서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온 김씨지만 칠 년 전의 대장암 수술은 세상을 관조하는 김씨의 시야각을 한 번 더 넓히는 계기가 됐다.
“칠 년 전에 대장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했어요. 말기라고 했는데 모두의 도움 덕분인지 후유증 없이 완쾌되었습니다. 그때 이발소를 다른 기술자에게 육개월 정도 맡겨두고 서울까지 병원을 오가면서 치료를 받았어요. 항암 치료를 받느라고 이발소를 남에게 맡겨 두었는데 영 안 되겠더라고요. 아무래도 주인만큼 정성스럽게 할 수는 없는 거지요. 대장암을 치료하고 난 다음부터는 더 정성스럽게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게 되었어요. 양보도 더 많이 하고, 남의 칭찬도 많이 하고요. 모든 일을 즐겁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 있어요? 남들이 나를 도와주니까 모두들 사는 거지요.”


김씨는 대장암 수술 후부터 ‘사족(蛇足)’이라는 단어와 ‘여행이 끝나는 날’이라는 말을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의 화두(話頭)처럼 끌어안고 살아간다고 전해준다.
“살면서 실수를 적게 하자는 뜻에서 ‘사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뱀을 다 그리고 나서 애초부터 뱀에게는 있지도 않은 발을 필요 없이 그려 넣는다는 뜻이잖아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사족과 같이 쓸데없는 행위를 해서 도리어 인간관계나 어떤 일을 잘못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죽을 때 부끄러움 없이 살았노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 또한 참 힘든 일이지요. 어릴 때는 철모르고 살았지만, 철이 들고 나서는 ‘여행이 끝나는 날’이라는 것을 내 인생의 주제로 삼았어요. 사람들은 보통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면 괴로울 수도 있지만 어차피 사람이란 한번 왔다가 결국 또 누구나 가는 것이니까 그런 걸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거지요. 사람은 평생 여러 가지 종류의 여행을 합니다. 살다보면 숱한 희로애락을 다 겪는데, 정작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많이 없어요. 여행이 끝나는 날을 대비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늘 하고는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것도 못돼요. 나 역시 먼지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사람이고 인생이지만,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 작으나마 긍정적인 흔적은 남기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명동 기자 uljinnew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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