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 박종두씨가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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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이나 수학여행 또는 여행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 필름을 동네 사진관에 맡겨 놓고 며칠씩 기다리다가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바라보던 일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한껏 폼을 잡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항상 남은 필름 숫자를 계산하던 일, 카메라가 없어서 여행을 떠날 때면 동네 사진관에서 오천원이나 만원을 주고 소형 카메라를 빌려서 떠나거나, 관광지에서 막상 필름을 갈아 끼울 줄 몰라서 전문 사진사에게 부탁하는 이들도 더 이상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기껏해야 일년에 한두번 집안이나 단체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진사를 부르거나 다들 우르르 사진관으로 몰려가서 어색한 모습으로 사진 한판 찍는 일도 주변에서 접하기 힘들게 되었다.
6~7년 전부터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일명‘디카문화’가 왕성하게 꽃을 피워 왔고, 그것은 단순하게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여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나아가 그렇게 생산된 사진을 매개체로 하여 일상적인 문화에 더해 비일상적인 문화까지 아우르는 전혀 새로운 커뮤니티의 구축을 이루어 내고 있다.
심지어 수천, 수만 개의 인터넷 디지털 카메라 사이트를 비롯하여 휴대폰에까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출시되기 시작한 소위‘폰카’의 등장으로 인해‘디카문화’는 가히 사진의 홍수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디카문화’는 어느새 이 시대의 신종 문화코드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멀티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가장 먼저 동네 사진관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와 카메라 폰의 등장은 이미지 정보를 무한대로 재생산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고, 그에 따라 동네 사진관은 어린 시절 흑백영화를 상영하던 낡은 극장 정도의 추억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와 함께 디지털 카메라와 프린터가 아무리 지천으로 보급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제대로 된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찾고 있고, 멋들어지게 액자에 끼워 넣을 대형 사진 또한 디지털 카메라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의 화질과 질감을 쫓아오기에는 아직 멀어 보인다.
외삼촌 사진기로 장난삼아 찍어본 것이 시작
죽변면에서 신성사진관을 운영하는 박종두(65세)씨는 원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가 고향이다.
박씨가 세상에 태어나서 사진기를 처음 만져 본 것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당시에 외삼촌이 죽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한일사진관이라고 현재 죽변우체국 자리에 있었습니다. 중학교 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죽변 외삼촌 집에 놀러 왔다가 사진기를 처음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에게 어렵게 허락을 받고 장난삼아 찍어보고는 했었는데, 외삼촌께서 사진 찍는데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하더군요.”
박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2년여 정도 고향에서 부모님 일손도 돕고 하면서 소일하다가, 외삼촌의 권유에 따라 한일사진관이 있는 죽변으로 내려오게 된다.
“외삼촌이 연락을 해 와서 죽변으로 내려오니까, 앞으로 사진관이 꽤 장래가 있는 직업이니 사진기술을 한번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외삼촌께도 사진관을 물려줄 만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영 재능도 취미도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비록 시골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외삼촌은 당시에 일본까지 건너가서 사진 기술을 배워 오신 분이었어요. 그만큼이나 당시만 하더라도 수동카메라 조작에, 흑백필름 현상과 인화 등 사진과 관련한 기술은 아무나 선뜻 배우기 힘든 고급 기술이었습니다.”
박씨는 외삼촌 밑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배워 나갔다.
당시는 칼라필름이 개발되기 전이어서 아날로그 사진기의 필름으로 흑백필름만 사용됐다.
요즘 대중을 이루는 칼라필름과는 달리 흑백필름은 오로지 빛에 의한 흑과 백의 명암만으로 사진 전체의 윤곽과 품질이 결정되기에 훨씬 융통성이 떨어진다. 그런 만큼 사진을 찍을 때도 빛을 최대한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했고 그런 만큼 특별한 섬세함과 예술적 기질이 필요했다.
대신 빛과 전체적인 구도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서 제대로 찍고, 각 필름의 특성에 부합하는 현상과정을 거쳐서 인화하고 나면 말 그대로 최고의 작품사진으로 태어났다.
“처음 사진 기술 배울 때 다른 사진사들에 비해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외삼촌 밑에서 처음 시작했으니까 남들보다는 자상하게 세세히 알려주었고...
또 외삼촌이 일본까지 가서 배워온 기술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남들보다 빨리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사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수동이었고, 자기가 찍은 사진을 자기 손으로 현상하고 인화했으니까 꽤나 복잡한 기술을 배우기는 했지요.”최고의 기술은 연필을 이용하는 수정작업
“사진관을 찾아오는 손님들 사진도 찍어주고, 현상과 인화도 해 보고, 각종 사진기의 특성도 배우고 하는 도중에 덜컥 외삼촌이 돌아가셨어요. 그때가 마침 흑백사진의 수정 기술을 배울 때였습니다. 수정작업은 흑백필름을 현상하고 난 다음에 연필을 이용하여 인물의 일부분을 미세하게 고치는 작업인데, 수정하고 난 다음에 사진을 인화해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진이 되고는 했지요.”
현상 단계에서 오로지 사진사 개인의 기술로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뀌게 되는 수정작업은 사진 작업 가운데서도 최고의 기술로 꼽힌다.
요즘처럼 디지털로 수십장 찍고 난 다음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은 손쉽게 삭제하는 시스템이나 보정하는 프로그램이 나타나기 전이었으니, 말하자면 수정작업은 요즘 활용도가 높은 이미지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알아서 해 주는 일을 수작업으로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을 일컫는다.
“연필로 수정작업을 가해서 얼굴의 보기 흉한 점도 없애주고, 흉터도 가려주고 뭐 그랬습니다. 누구나 자기 얼굴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나오는 것을 좋아하니까 손님들 개개인의 주문에 따라 다양한 수정작업을 해 주었지요. 아마 인근에서 수정작업을 배운 사진사가 흔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이지 수정작업은 그 배움이 끝이 안보이던 어렵고 고단한 작업이었습니다.”

사진사 박씨는 한창 기술을 배우는 도중에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흑백사진 수정기술을 백퍼센트 익히지 못했다며 내내 아쉬워한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박씨는 울진 읍내에서 성업 중이던‘연호사진관’으로 자리를 옮겨 채 모자라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연호사진관은 현 울진시장 안의 축협 앞에 있었어요. 한 2년 정도 근무했었나...?
외삼촌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미처 배우지 못한 기술들을 또 부지런히 배웠지요.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사들마다 흑백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기술이나 방법, 수정 작업 방법 등의 노하우가 모두 조금씩이라도 차이가 있어 다양한 기술적 노하우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 제대 후 개업한 시대사진관, 그 시절
2년 가까이 연호사진관에서 일하던 사진사 박씨는 징집영장을 받고서 군에 입대하게 된다. 입대하기 전에 사회에서 수년간 갈고 닦은 사진 기술이 있었지만, 군대에 가서까지 굳이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아서 박씨는 통신병으로 생활했다고 말한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9사단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제대를 1년 정도 남겨둔 시점에 정부정책으로 월남파병이 결정되어 병력을 모집했는데, 그때 양평에 있던 6사단으로 옮겨 제대를 했어요. 당시에 제대가 1년 이상 남지 않은 군인은 월남파병에 강제 동원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월남은 가지 않았지요. 그리고 김신조 등 남파 공작원 침투 사건으로 인해 남들보다 군 생활을 조금 더 했던 기억이 있네요.”군을 제대한 박씨는 원덕읍 호산리 고향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죽변으로 내려온다.
죽변으로 내려온 박씨는 군 입대 전에 배운 기술을 활용하여 먹고 살아야겠다 싶어서 직접 사진관을 운영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도 배운 게 사진기술이어서 사진관 개업이 제일 만만하더라고요. 현 죽변면사무소 옆쪽에 가게를 얻어서 시대사진관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사진관을 개업했습니다. 시쳇말로 처음으로 사장이 된 거지요. 그때 죽변에는 시대사진관 말고도 사진관이 한두 군데 더 있었습니다.”
시대사진관을 개업하고 난 다음 2년 정도 지나 이제 장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싶을 즈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나서 사진관의 일부 기자재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갑자기 불이 나서 사진관 비품 일부를 잃고 난 다음에 주변에서 한문을 많이 아는 어느 분에게 물었더니,‘시대’라는 이름이 불을 포함하여 뭔가를 계속 기다리게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서 좋지 않다면서 다른 이름의 상호를 권하더군요. 어쨌든 이름이 좋지 않아서 불이 났을 수도 있다니까 이름을 바꾸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분이 새로 시작한다는 뜻을 지닌‘신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신성사진관’이라는 이름을 써 오고 있습니다.”
결혼에 이어 현재의 신성사진관 자리에 터 잡아
불이 나고 난 다음 현 죽변우체국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계속 사진관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다보니 박씨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이 되었다.
서른 살에 박씨는 대구에 살던 아가씨를 중매로 만나 가정을 꾸리고 또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당시에 사진관이라는 곳은 젊은 아가씨들도 분단장하고 사진 찍으러 많이 들를 때였고, 사진사 또한 첨단 기술을 가진 것쯤으로 인식되어 호감을 보이는 아가씨나 중매를 주선하겠다는 분들도 주변에 여럿이 있었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지요. 그때 바로 위의 형님이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결혼을 한창 재촉할 때쯤 형수님이 대구 달서구에 살던 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죽변에서 대구를 가려면 완행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덜컥거리며 여덟 아홉 시간씩 걸렸어요. 그때 대구에 올라가서 집사람을 처음 봤는데 우선 나보다 키도 크고 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대구를 오가면서 몇 번 만나고 나서 결혼을 했지요.”
박씨는 다섯 살 연하의 대구 아가씨를 만나 죽변에서 살림을 하면서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결혼하고 난 다음에도 박씨는 죽변우체국 옆에서 현 죽변 파출소 옆으로 잠시 동안 한번 더 자리를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사진사 박씨는 현재의 신성사진관 자리에 터를 잡은 지가 30년쯤 되었다고 기억한다.
사진 값으로 쌀과 보리쌀을 받던 때도
30년 전만 하더라도 사진관에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사진 값으로 쌀이며 보리쌀을 갖고 오기도 했다고 박씨는 술회한다.“촌에 사는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도 어디 돈이 나올 데가 있습니까? 그러니 쌀도 갖고 오고 다른 잡곡도 갖고 오고, 미역이다 다시마도 갖고 왔어요. 웃으며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그때는 각박한 요즘과는 달리 정이 넘치고 또 멋이 있었지요.”
사진사 박씨는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돈도 꽤 벌었었다고 말한다.
“돈은 흑백사진 할 때, 수동으로 사진을 찍을 때 그나마 벌었습니다. 칼라 현상기가 나오고 나서부터는 회사 좋은 일 다 시키고 있는 셈이지요. 칼라 현상기를 구입하여 설치하게 되면 그 기계에 맞는 현상, 인화약품이며 인화지며 다 사 써야 하는데 결국 현상기 회사가 돈을 다 갖고 가는 꼴이지요. 특히 일부 시골 사진관들이 경쟁하듯이 디지털 인화기까지 갖추는 모양이던데 한 장에 이삼백원씩 하는 사진 인화해주고 거의 1억원씩 하는 기계 값을 언제 다 뽑을 수 있겠어요......?”
박씨는 그동안 사진관 말고도 인접 분야인 예식장사업을 서너번에 걸쳐 함께 겸해 오다가 몇 년 전에 관두었다.
“예식장을 하면서 돈을 좀 모았습니다. 예전에는 예식장도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어요. 예식장은 사진과 비디오 촬영뿐 아니라 드레스며 음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루 이문이 남습니다. 그전에 잠깐씩 하다가 마지막으로 90년 8월에 시작해서 한 10년 가까이 운영했던 것 같네요. 그런데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니까 결혼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그나마 다들 시설이 좋은 곳으로 몰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 관두게 되었지요.”
수년전부터 외아들 흥수씨가 사진관 운영 중
사진사 박씨는 7~8년 전부터 사진관 운영을 외아들 흥수(35세)씨에게 맡기고 있다.
“이 사진관이 평생 내 일터였는데 허전하기도 해서 아들과 함께 사진관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가 아닌 아들 녀석이 사진관을 계속 운영해 나가게 되겠지요.”
사진사 박씨는 남들이 다 치는 고스톱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 요즘 그는 붓글씨 연습을 소일거리로 삼고 있다.
붓글씨를 쓰기 시작한지 10여년이다 보니까 필력도 붙고 해서 각종 공모전에서 입선도 여러 번 했다.
얼마 전에는 울진봉평신라비 서예대전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사진사 박씨는 뭐니 뭐니 해도 젊은 사람들에게나 나이든 사람들에게나 취미 중에서는 서예가 으뜸이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고스톱 같은 잡기는 성미에도 맞지 않고 해서 처음부터 배우지를 못했어요. 10년 전부터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는데 내 성격에 딱 맞는 취미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울진 읍내의 윤현수 선생께 배우기 시작했는데, 수년전부터 죽변 라이온스 클럽에 출강하는 박영교 선생께 배우고 있습니다. 큰딸을 시집보낼 때 한지에 반야심경 전문을 써서 여덟 폭 병풍으로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이름을 떨치는 서예 대가의 글씨가 당연히 앞서겠지만, 서투른 솜씨라도 아버지가 직접 써준 글씨가 훨씬 더 가치 있겠다고 생각되어서요......”
중학교에 다닐 때 우연히 외삼촌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수동 흑백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본 것이 인연이 되어, 평생 사진 찍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진사 박씨는 지금 돌이켜 봐도 후회되거나 아쉬운 점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옛 어른들 말씀에 한 우물을 파라고 했잖아요? 지금 돌이켜 보면 지나친 만족도 지나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요. 평생 정직하게 사진 찍는 일을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왔고, 이웃들과 원수진 일도 없이 더불어 살아왔기에 웃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가족은 물론이고 주위 이웃들과 화합하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옛 어른들 말씀이 다시금 진정으로 다가들고 결국 다 맞는 말씀이라는 점을 실감하는 요즈음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사진은 자연 조명이 최고
한평생 한눈팔지 않고 사진사로서의 외길을 걸어온 박씨의 사진 철학 또한 간단하고 명료하다.“처음 사진관을 개업하던 40여년 전만 하더라도 지붕을 뚫어서 온실처럼 유리를 끼워 넣은 사진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는데 최적인 자연조명을 얻기 위해서였지요. 뚫어놓은 지붕의 유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빛을 반사경을 이용하여 인물의 얼굴에 적절히 비춰가면서 찍었는데, 한없이 부드럽고 은은한 결과물의 자연스러움이야 두말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렇게 자연조명을 이용하다가 뒤에 마그네슘등과 텅스텐 조명등이 나오고 전기조명에다가 현재의 이동식 플래시까지 출시됐습니다. 그러나 플래시를 터뜨리면 이미 어떤 조형물이던지 입체감을 상실하게 되지요. 인공조명을 쓴 요즘 사진이 그래서 밋밋하고 뭔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거지요. 어찌 자연조명과 비교하겠어요?”
사진사 박씨는 요즘 사진은 가짜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수동카메라를 기초부터 철저하게 습득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인물이든 풍경이든 자연스럽지 못하기에 절대 흡족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요즘 사진의 대부분은 무게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요즘 사진은 일단 멋이 없어요. 사진도 예술의 한 분야인데 이제는 그 예술적인 가치 자체부터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사진 공모전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합성한 사진 작품에 대상이 수상되었다가 뒤에 밝혀져서 수상이 취소된 적도 있잖아요? 하긴 어쩌면 사진 분야뿐만 아니라 지금의 모든 사회 제반현상들이 다 이렇다고 생각됩니다. 선명하지 못하고 가식적인 면이 너무 많아서 어떤 상황에 부닥치면 판단이 서지 않는 일이 흔합니다.”
디지털 사진은 뭔가 부족합니다
그런 그도 얼마 전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이미지 관련 프로그램인 포토샵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중이다.
“사진관이 업이다 보니까 개인적으로 싫어해도 컴퓨터를 배우지 않을 재간이 없었어요. 수년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칼라현상기 또한 컴퓨터로 구성되어 있고, 이미지 프로그램도 예전에 흑백사진을 수정 작업하던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작업이 가능하고 해서요. 그렇더라도 현재의 디지털 사진은 뭔가 부족합니다. 일단은 입체감이 없어서 밋밋해요. 색채의 예술로 불리는 사진을 희롱하는 측면이 너무 강하고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습니다.”
각 가정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디지털 카메라와 컬러 프린터가 널리 대중화되어, 이제는 간단한 장비만 갖추고도 얼마든지 사진을 즉석에서 프린터 해 내는 일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 외아들 흥수씨에게 사진관을 맡기고 또 물려줄 예정인 사진사 박씨는 걱정이다.
“이제 사진관은 증명사진이나 대형 가족사진을 찍는 사람 정도만 찾아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너무 흔해진 세상 아닙니까? 10년 전쯤 사진에 관한 강의를 어느 대학에서 들었는데, 강사가 하는 말이 10년 안에 사진관은 사양업종이 될 거라고 말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그럴 리가 없다며 의아해 했었지요. 그런데 그 강사의 예언처럼 어느 순간에 간편한 콤팩트형 자동카메라에 이어 디지털 카메라까지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더군요.”
아날로그 사진은 다만 추억과 향수의 상징인가?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카메라와 포토샵 같은 전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시대지만, 여전이 대부분의 전문 사진관 사진사들은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는 작업을 숨 쉬는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사진은 드로잉이다. 즉흥적으로 일필 일획을 그어 승부를 내는 문인화의 그것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물의 형체를 쉼 없이 쫓아가며 선 하나를 내질러 전체를 나타내는 크로키처럼 사진 또한 그런 시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간순간 꽉 찬 충만함으로 의욕적일 수 있는 것이 또한 사진 작업이다.
불과 이십년 전만 하더라도 사진기술은 첨단을 상징하는 고급기술이었고, 사진사 또한 그에 걸맞게 고급기술을 보유한 장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가벼운 디지털카메라가 아무리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이 아날로그 카메라는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날로그 카메라가 단순히 사진 결과물에서 종합 점수를 높게 받아서가 아니라, 아날로그 사진 속에는 아스라한 우리들 유년의 기억과 꿈결 같은 아름다움이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명동기자(uljinnews@emp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