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출신 이신자 작가,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장
-
울진군이 고향으로 서울대학교 미대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하고 덕성여대 교수와 학장 등을 역임한 후 1997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인 이신자(李信子. 77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작가를 11월 19일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JW메리어트 호텔 커피숍에서 지역 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만났다.
일정시대에 울진에서 태어난 이신자 작가는 울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교육열에 힘입어 서울로 상경, 울여자상업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덕성여대 예술대학교 초대 학장을 역임한 예술계의 산 증인이자 원로이며, 한국 섬유예술계의 역사를 이끌어온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신자 작가에 대해 미술평론가들은 ‘섬유예술가로서 활동해온 50여 년 동안 작품의 재료와 기법 면에서 끊임없는 실험적 모색과 시도를 천착(穿鑿)해오고 있다’고 평가한다.
미술비평가 김윤섭씨는“작품의 밑바탕이 되는 소재를 다양하게 선택하여 새로운 창의력을 시연해내는 뛰어난 능력 가운데, 작품 전반의 기법을 차지하는 태피스트리(Tapestry)는 실(絲)이 가진 고유의 재질감을 최대한 살린 그라데이션의 시도부터 천을 세로로 짜는 슬릿(slit)패턴이나 주름으로 마무리하는 드레이프(drape) 등 실과 천이 만들어내는 염직의 여러 기법들을 도입하고 있고, 그것은 결국 작가의 실은 팔레트이자 캔버스이니,‘물감과 붓을 대신해 실로 그림을 그리는 격’일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작가가 그려내는 자연의 모습은 왈츠의 감미로운 음률과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그것을 동시에 잉태하고 있다”면서,“한낮의 붉은 열정을 토해낸 태양의 정염과 열정을 마시고 취해버린 강물의 노을빛, 어두운 음기의 그늘을 밀어 내려는 듯 새로운 빛을 출산하는 새벽녘‘여명’의 울림, 수줍게 내려앉은 편편한 산허리에 용트림이라도 하는 듯 당당한 기운의 흐름을 포착한‘산의 정기’등 이신자 선생의 태피스트리는 자연을 엮어내는 서사시와도 같다”고 극찬한다.
이신자 작가는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장을 맡고 있다.
1954년에 개원한 대한민국예술원(大韓民國藝術院)은 국내·외에 대한 예술가의 대표 기관으로서 예술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과 건의, 예술창작활동의 지원, 국내·외 예술 교류 및 예술행사 개최,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여와 각종 예술 진흥에 관한 사항을 맡고 있다.
국가기관으로써 예술의 향상과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된 예술원은 문학, 미술, 음악, 연극·영화·무용 등 4개 분과로 구성되어 있고, 현역 예술인이면 누구나 평생에 한번쯤은 회원을 꿈꾸어보지만, 자기 분야에서 당대 최고가 아니면 절대 회원이 될 수 없는 영예로운 자리이기도 하다.
전국적으로 단 한명의 예술원 회원도 배출하지 못한 시·군이 수두룩한데 울진군은 역사상 2명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배출했다.
울진읍 말루동 출신의 유영국(劉永國) 화백 또한 1979년부터 예술원 미술분과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11월 작고했다. 유영국화백은 물론, 지금도 창작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 이신자 작가는 각각 자신들의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로서, 서울은 물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그들의 고향 울진에서는 이름마저 생소하다.
동해안 오지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으로 불모지에 다름없던 한국 섬유 예술계를 일구어 부흥시킨 장본인으로써 한국 섬유 예술의 발자취와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작가의 예술적 지론은“나에게 있어서 경사(經絲-날실)는 캔버스이고 위사(緯絲-씨실)는 물감”이라고 한다.
이신자 작가는 오래전 모 일간지를 통해“과외공부가 없던 시절이라 학교 책가방을 집에 팽개치고 달리는 곳은 언제나 바다였으니 억세게 재수 좋다고나 할런지!...... 그래서인지 나의 화제(畵題)에는 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바다는 내게 있어 어머니의 품과 같이 포근하고, 따뜻하며 한없이 넓은 미소를 지어주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며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 울진에 대해 애정과 그리움을 표현한 바 있다.
또 2004년 9월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나의 작품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모티브는 자연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삼았으며, 이는 과거 기억의 공간속에 내재된 자연의 아름다운 형태와 그리운 고향의 이미지를 풍부하게 나타내고자 함이다.
세월이 흘러도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은 나에게 있어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을 이루게 하는 본능적인 모체로 되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쩌면 날실을 베틀에 걸어 캔버스를 만들고, 갖가지 재료의 씨실을 물감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이작가의 작업은 어린 시절 고향의 산과 들판, 바다를 뛰어다니며 무의식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아련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풀어 헤쳐 나가는 과정이 아닌지......
끝내 예술이란 한 작가가 살아온 삶의 진솔한 고백일 수 밖에 없겠기에, 이신자 작가의 결코 식을 줄 모르는 예술혼은 고향 울진의 파도소리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이름 없는 들풀을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언제 고향을 떠났나?
일정시대에 울진 읍내의 신사(神社-현재 월송공원) 아랫동네에서 3남4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나 월변에서 울진초등학교를 다녔다.
부모님께서는 원래 강원도 양양 분들이셨는데, 아버님(이철제)이 공무원으로 당시 강원도에 소속돼 있던 울진군청에 근무하셨다. 울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울진은 대단한 궁촌이어서 서울로 진학하는 친구들이 무척 드물 때였다. 15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지난 7월에 사망한 소설가 구혜영씨가 초등학교 때의 친구로 기억에 남는다. 구혜영씨가 어떻게 울진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년 정도 함께 다니면서 친구로 지냈다.
유년시절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추억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씩 울진 집으로 내려가려면 대구를 거쳐 영덕방면으로 갔다. 아침 일찍 차를 타더라도 하루만에는 울진에 도착할 수 없었고, 중간쯤에서 1박을 한 다음 이틀씩 걸려서 집을 오가던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만 마치면 온통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바다로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리고 울진 읍내 연호정 옆 솔밭에서 송이버섯을 두어개 땄던 기억이 특히 강렬하다. 지금도 송이버섯 얘기가 나오면 나도 어릴 적 송이버섯을 직접 따 본적이 있다며 자랑한다. 그때만 해도 연호정 인근에는 송림이 많이 우거져 있었다.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는 재능이 있었던지 일정시대에 울진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소학생 신문에 그림도 실리고,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도 타고 했다. 서울여상 3학년 때 서양화가였던 임직순 선생님께서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대학에 가서 미술을 전공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애초에 상과대학에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권유에 힘입어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판단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상과대학을 졸업했더라면 평생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거나 은행창구에서 돈이나 헤아리다가 정년을 맞지 않았겠는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던 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전시연합대학 임시 교사에서 공부했다. 사실 전쟁 중에는 다들 제대로 그림공부를 할 여유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 이순석 교수의 지도로 디자인 공부를 했다.
2002년 작고한 유영국화백도 울진 출신인데 교류가 있었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말로(말루)’에 친한 친구가 있어서 자주 놀러가고는 했었는데, 그 친구가 유영국화백의 조카였다. 그 집에서 나무판자 등의 소재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많이 봤다. 당시 유영국화백은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술원 회원이 되고부터는 유화백을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유화백은 우리 오빠와 친구였는데, 만날 때마다 오빠는 요즘 잘 지내는지를 묻고는 했다.부군께서도 화가였는데...? 또 가족관계는...?
1955년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미대 1회 졸업생 선배인 목불(木佛) 장운상(張雲祥)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강원도 춘천이 고향으로 서울대 미대에서 전통회화를 전공했는데, 특히 미인도를 잘 그렸다. 지난 82년 작고했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다. 큰딸(장미연)은 동덕여대 교수로 금속 공예가이고, 둘째 딸(장미혜)은 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셋째 딸(장미경)은 경희대 교수로 일러스트 작가이다. 막내로 태어난 아들(장상건)은 프랑스에 유학하여 스테인드글라스를 전공했는데, 인천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현재 명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을 맡고 있다.
상설전시관을 지어서 울진 출신 유영국화백의 작품 몇 점이라도 기증받아 전시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지역 문화인들이 다수 있다. 울진군에서 미술과 공예 등 예술과 관련한 상설전시관을 만들게 되면 작품을 기증할 수 있나?
많은 수의 작품을 기증하지는 못하겠지만 몇 점은 할 수 있다. 다만 상설 전시관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레벨이 비슷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어야 기증할 수 있다. 유영국화백의 장녀가 현재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울진군 담당자들과 울진에 거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의지만 있다면 유화백의 작품 몇 점 기증받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울진군에서 미술과 관련한 각종 기획전을 개최할 의향이 있다면 최대한 도울 수 있다. 예술의 각 분야를 막론하고 신인이나 중진을 포함한 원로들까지 소개시켜 줄 수 있다. 울진에서도 각 분야별 전시회가 자주 열려야 주민들이 문화적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을 전공하고 싶은 고향 후배들에게 한마디...
고향 울진을 생각하면 그저 기분 좋고 흐뭇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면서 울진 촌놈이라고 많이 무시당했다. 그것을 뛰어 넘으려고 남들 쉴 때 공부하고 그림 그리면서 많이 노력했고 그런 만큼 힘들고 고단했다. 울진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여자애가 서울미대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남자들을 제치고 동창회장을 10년 동안 맡았다.
서울미대 동문 가운데 여자로서 예술원 회원이 된 것도 내가 처음이다. 어떤 분야든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꿈을 이루게 된다. 나는 요즘도 집안에 직조기를 들여놓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하루 평균 2시간 정도는 작업에 몰두한다. 예술의 길이란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술을 전공한 것이 큰 다행이다. 음악이나 무용은 나이 들면 못하지 않는가?<이신자 작가 약력>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 출품(국립현대미술관)/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집행위원 출품(디자인 포장센터 전시관)/대한민국 공예대전 운영위원(1984, 86, 87, 91, 94)/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 초대 출품(국립 현대미술관)/Art to Wear전 초대출품(국립 현대미술관)/대한민국 공예대전 심사위원장/현대미술초대전 출품(국립 현대미술관)/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예술의 전당 개관 기념전 초대 출품/서울시 섬유미술제 운영위원장, 출품(서울 시립 미술관)/문화재 전문위원/‘95 미술의 해’조직위원/일본 현대 공예전 초대 출품(일본 동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창회장/한국 현대공예 15인전 초대 출품(미국 피츠버그 미술관, 노던 애리조나 미술관)/예술원 미술전 출품(예술원)/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국립현대미술관 작품 구입 심사위원, 운영 자문위원/COMPARAI SONS(PARIS LART ACTUEL) 출품/대전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 초대 출품/청주 국제 공예 비엔날레 초대 출품, 심사위원/살롱 그랑 애존느 초대전 출품(Paris)/동아공예대전 운영위원/대한민국 공예대전 운영위원장/CROSSINGS 2003:KOREA-HAWAII 초대 출품(Honolulu Academy of Art)/제5회 7회 국전 문교부 장관상 수상, 제6회 8회 국전 무감사 특선/제1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1966)/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1995)/은관문화 훈장(1999)/예술원상 수상(2002)/현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장, 우덕갤러리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