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장이 표성우씨가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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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나’를 나타내는 신표로서, 분신으로서, 또 다른 나의‘자아’인 도장.
사인(sign)이 일반화된 요즘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 한두 개쯤은 항상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적힌 은행 통장을 가질 때도 도장이 필요하고, 상급학교 진학 때도, 결혼할 때도, 주택이나 땅 등의 물건을 계약하거나 구입할 때도 도장은 여전히 필요하다.
어떤 이는 도장 한번 잘못 찍었다가 전 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타인에게 도장 한번 찍어 줄 것을 아쉬운 소리로 부탁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각종 서류상에서 나의 존재를 새롭게 각인시켜 주어 내가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임을 증명해주는 도구인 도장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틈새 예술로서 인장(印章)으로도 불리는 도장(圖章)은 한국 역사에서 단군신화의 기록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하늘로부터 3개의 인(印)을 가지고 내려왔다(천부인-天符印 삼방설-三方說)”는 기록은 비록 단군신화가 단순히 신화의 차원에 머문다 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도장을 사용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에서는 낙랑(BC108∼AD313)의 봉니인(封泥印-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 두루마리를 끈으로 묶고, 그 매듭 지워진 곳에 `니(泥-진흙)'를 발라두고 그 위에 날인 한 것) 200여점이 발굴되었고, 삼국사기는‘고구려의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 무도하여 국정을 어지럽히므로 살해되니 중신들이 의논하여 8대 신대왕(新大王)을 맞아들이고 무릎을 꿇고 국새를 올리며 말하기를......’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가 건국과 동시에 국새(國璽)를 사용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신라의 안압지에서는 내용이 판독되지 않은 목인(木印)이 출토되었고, 고려와 조선 또한 인장을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도장은 권력을 상징하여 일반인들은 감히 사용할 수도 없었기에,‘수결인(手決印)’을 사용하거나,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사인처럼 행·초서로 이름을 서명하는 화압(花押)을 사용했다.
현재 대한민국 또한 국가 간의 중요 서류나 훈·포장 증서 등에 나라의 표상으로서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
도장(인장)은 전각(篆刻)과 구별된다. 도장이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전각은 중국 명나라 때의‘문팽’에 의해 승화되어 예술적 목적에서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장과 전각을 두고 어느 것이 더 상위에 위치한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도장과 전각은 애초부터 서로 목적성이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도장 또한 장인의 손끝에서 제각각의 의미로 새롭게 태어나고 우리들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장이 지닌 그러한 상징적 의미는 이후에도 결코 퇴색되거나 변색되지 않을 것이다.
눈물과 배고픔으로 배운 도장 기술
후포면에 가면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오로지 수작업으로 도장을 새기는 도장장이 표성우씨(66세)가 운영하는‘성우당’이라는 이름의 도장방이 있다.
삼율을 지나 후포 시내 쪽으로 진입하다가 일방통행 도로를 꺾어서 돌면 곧장 만나게 되는‘성우당’에서 오늘도 표씨는 수십 년 손때 묻은 조각도 대여섯 개를 이것저것 바꾸어가며 섬세하고 정교하게 도장을 파고 있다.
일평생 도장 파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칠십 고개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버렸다고 웃으면서 어렵게 말문을 여는 표씨는 원남면 오산리에서 2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네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못 쓰게 된 표씨는 동년배들에 비해 초등학교에 늦게 입학하였고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덕신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스무살 가까운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표씨는 고향에 있어봤자 살아갈 것이 뻔한 일이고 무슨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 싶어 고향을 떠나 강원도 묵호로 올라가게 된다.
당시 묵호에는 표씨의 누나와 7촌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우선 제 자신이 몸이 불편하다 보니까 그 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 못하지요. 그 당시 묵호읍 사무소 앞에 한일은행이 있었고, 그 옆에 강원여객 터미널이 있었어요. 그 터미널 바로 옆에 점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도장 기술을 배웠습니다. 5평 정도 되는 작은 점포였는데 중간을 가로지르는 칸막이도 없이‘삼광당’이라는 도장방과‘임학사’라는 상호의 사진 재료상을 겸하는 사진관이 함께 세를 얻어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손재간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던 도장장이 표씨는‘삼광당’에서 정식으로 도장 기술을 배웠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도장을 파는 기술 또한 도장이 될 재료인 인면(印面-도장의 글자를 새길 면)을 사포를 이용하여 다듬고, 인고(印稿-도장에 새길 글자를 쓰는 것)를 한 다음 글자를 거꾸로 운도(運刀)하고, 수정(修正)을 가하고 난 다음 검인(鈐印-새긴 도장에 인주를 찍어 제대로 글자가 새겨졌는지를 확인하는 것) 하는 등 복잡하고 섬세한 여러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이 경우에도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수정과 검인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도장을 완성하게 된다.
흔히 스탬프라 부르는 고무인(고무도장) 또한 고무판에 붓글씨를 쓰서 탁본하고 이어 고무판을 뜨는 공정까지 꽤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친다. 표씨에게 도장 기술을 가르쳐준 김광회씨는 일본에서 도장방을 운영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귀국하여 묵호에서 도장방을 차린 기술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도장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은‘삼광당’ 주인이던 김광회씨라는 사람이었고, 김만송씨라는 사람과 동업하고 있었습니다. 한 3년 가까이 기술을 배웠지요. 처음 2년 동안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도장방 홀에서 의자를 겹쳐서 쌓고 자거나 사진관 암실의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하고는 했습니다. 일을 배우는 동안은 숙식을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이었기에 먹고 자는 일을 항상 고민해야 했습니다.”
표씨의 누나는 표씨가 일하던‘삼광당’에서 2km 쯤 떨어진‘논골(안묵호)’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도장 기술 배울 때의 힘들고 서글펐던 점은 말로 다 못합니다. 누나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앞을 가립니다. 일하다가 밥 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누나 집까지 절룩거리며 힘들게 걸어가서 밥을 얻어먹고는 했습니다. 어떤 때는 도장방 가까운 곳에 위치한 7촌 아저씨 집에 가서도 한번씩 밥을 얻어먹고는 했어요. 밥 얻어먹으러 절룩거리면서 힘들게 오가는 동생을 바라보며 누나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삼일 동안만 밥 얻어먹으러 가지 않으면 동생이 걱정되어 찾아오고, 누나도 힘든 살림에 조카를 시켜 고구마 같은 먹을거리를 가져다주고는 했어요.”
하루 일당 100환은 자장면 한 그릇 값
‘삼광당’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참으면서 2년 정도 배우고 나니까 도장 새기는 기술에도 자신이 붙었고, 그제야 주인이 표씨의 기술을 인정하여 하루에 100환씩의 임금을 주었다.
그러나 자장면 한 그릇 값이 100환이었을 때니, 표씨가 하루 일당으로 손에 받아든 돈은 겨우 식사 한끼만 해결되는 아주 보잘것없는 금액이었다.
“그때 도장방 건너편에‘천흥루’라는 중국집이 있었습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00환씩 하던 때였으니까, 하루 온 종일 도장 파고 받은 돈 100환으로 달랑 자장면 한 그릇 사 먹기는 너무 아까웠어요. 자장면 한 그릇의 양이야 뻔한 것이니 그걸 사 먹어봐야 성에 차지도 않았지요.”
하루 일당으로 자장면 한 그릇밖에 사 먹을 수 없던 표씨는 자장면 대신에 고구마를 사서 밤새 난로에 구워 먹기도 했다.
“그때 국화빵이 20개에 100환이었고, 고구마 1근이 70환이었어요. 자장면 한 그릇으로는 성이 차지 않으니까 겨울이면 고구마를 사서 가게에 설치되어 있는 난로에 구워 먹으면서 배를 채웠습니다. 100환이면 고구마 1근 반을 살 수 있었지요. 긴 겨울밤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면서 배를 채우고 나면 어느새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고는 했어요.”
도장장이 표씨는 뼛속을 에이는 강원도의 겨울밤에 가게 난로 옆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입고 있던 누비옷이 난롯불에 눌어 붙으면서 한쪽 어깨에 심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 흉터는 아직까지도 표씨의 어깨에 진한 얼룩으로 남아 젊은 시절 고단함과 서글픔을 웅변하고 있다.
동년배들보다 5~6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스무살 가까운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표씨는 도장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 따로 글자 공부를 해야만 했다.
문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도장 작업을 하다 보니 한글은 물론 한문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한문 도장을 새겨달라고 주문하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문 도장을 원했지요. 도장이라는 것이 한글이든 한문이든 글자를 알아야 팔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루 100환씩 받게 된 일당에서 몇 환씩 남겨서 중앙통신강의를 공부했지요. 돈을 주면 통신강의 책자를 보내왔는데 잠을 아껴서 악착같이 글자 공부를 했습니다.”
힘들게 한끼 밥을 해결하면서 가게에서 쪼그리고 자는 일을 반복하기를 2년, 거기에다 자장면 한 그릇 값밖에 안 되는 돈 100환씩을 일당으로 받으며 1년을 더 보내고 난 다음 도장장이 표씨는 묵호를 떠나 고향 원남면으로 돌아오게 된다.
묵호를 떠나 후포로... '삼광당' 개업
표씨는 당시에 묵호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일대 사건이 생겼었다고 말한다.
“10월 달인가, 11월 달인가 태풍이 엄청 심하던 날 밤이었습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고 창문이 덜컥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하도 일이 피곤했던 터라 세상모르고 잠들었어요. 날씨가 쌀쌀해서 가게 의자에서 안자고 옆에 붙어있는 사진관 암실서 잠을 잤어요. 그런데 밤새 도둑이 든거지요. 새벽에 깨어보니까 캐논, 아사히 펜탁스 등 평소 출사원(出寫員)들이 사용하던 카메라 7~8대와 독일제 확대경 등 사진관 기자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때만 해도 카메라는 엄청 고가로서 귀중품 취급을 받던 때니까 정말 엄두도 내지 못할 금액의 제품이 없어진 것이지요.
묵호극장 앞 오거리에서 강릉 쪽으로 5백 미터쯤 올라가면 경찰서가 있었는데, 새벽에 깨어나서 신고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 가보니까 밤새 역전 주위의 여인숙 등‘삼광당’인근에서 십여 군데 이상이 도둑들한테 털렸다고 경찰이 말했습니다. 도난신고 접수를 받은 담당 경찰이 하는 말이 태풍으로 비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밤 창문 틈으로 마취약을 불어 넣고 난 다음에 범인들이 도둑질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해 주더군요. 다른 가게들은 액수가 더 컸는지 사진관에 도둑든 건 피해액수가 작다고 신경도 안쓰는 눈치였어요. 말이 좋아 묵호를 떠난 것이지, 그때 도난 사건으로 인해 아무 대책 없이 쫓겨 난 거지요.”
도장장이 표씨는 3년 동안 말 그대로 미운 정 고운정이 다 들었던 묵호를 떠나 고향 원남으로 돌아온다.
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표씨는 원남을 떠나 후포면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후포에서 도장방을 운영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당시 아버님이 동림수산에서 경영하는 정치망 어선의 어로장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후포로 오게 된 것이지요. 후포에 와서 동림 통조림공장 앞에 도장방을 개업했습니다. 동림 통조림은 그 후에 유동물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묵호에서 일을 배웠던 가게인 ‘삼광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처음으로 내 가게를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표씨가 처음‘삼광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던 가게는 현 위치에서도 불과 5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결혼, 그리고 '성우당' 시절

‘삼광당’시절을 2~3년 보내고 난 다음 표씨는 연애로 만난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살림을 꾸렸다.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신접살림을 차렸어요. 저는 불구지만 정상인을 아내로 얻었지요. 결혼할 당시 주변에서는 처가가 잘사는 집이라고들 했는데, 장애인인 제가 연애결혼을 해서 딸 넷,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장인, 장모님께 나쁜 사람입니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그저 장인, 장모님이 곱게 기른 딸을 주어서 고맙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내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장인, 장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만약 내 딸들이 장애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나는 어떨까 생각하니 아직은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여전히 장인, 장모님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곱고 마음씨 좋은 아내를 얻은 표씨는 도장방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삼광당’이라는 가게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따서‘성우당(性佑堂)’으로 바꾸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성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도장 파는 일을 계속하면서 표씨는 점점 더 도장 새기는 일이 힘들어 지더라고 말한다.
“그전에는 도장 파는 것 하나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힘들고 어려워지더군요. 지인용(智仁勇- 슬기와 어짊과 날램)을 갖춘 도장을 파야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도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부도가 나면 혹시 내가 새긴 도장에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고 자책하고...... 도장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고 마음으로 파면 절대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을 텐데 하는......”
표씨는 그때부터 인감도장으로 사용하려고 값비싼 도장을 찾는 손님들이 오면 인감은 싼 막도장 같은 것으로 하라고 조언해주는 습관이 생겼다.
인감은 보증을 서거나 물건을 팔아 넘길 때 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다 부정적인 일에 많이 사용하는 것인데, 왜 도장방을 찾는 손님들은 굳이 비싼 재료를 인감도장으로 선택하는지 그는 여전히 의문이다.
오히려 자주 사용하는 막도장이 그는 비싸고 고급스러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직도 손님들 대부분은 인감도장으로 고급 재료를 찾는다.
“고급도장을 새기는 값비싼 재료는 앞뒤가 없습니다. 고급도장을 팔 때 앞뒤를 찾아 살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도장으로 보증을 잘못 서서 친척이나 친구와 평생 원수로 지내지는 않을까, 다른 흉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도장 하나를 새겨서 통장을 만들고 돈을 착실히 불려 나가는 사람도 있고, 보증 한번 잘못 서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보증 서줄 도장 새기러 왔다가 제 충고를 듣고 보증을 서 주지 않았는데, 뒤에 큰 손해를 모면하고 난 다음 소주 한병 들고 저를 찾아와서 고맙다고 말하면 한평생 도장 파는 사람으로서 그보다 더 큰 보람과 행복이 또 있겠습니까......”
90년대 초반까지는 도장방도 호황 누려
표씨가‘성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도장을 새길 당시에 도장 하나 파주는 값이 150원에서 300원이었다.
꾸준히 도장방을 찾아오는 손님은 하나둘 늘었지만 도장만 파서는 별로 돈이 되지 않아서 표씨는 둘째딸을 낳고 난 다음 시계기술을 배우게 된다. “애들도 생기고 뭔가 도장방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시계기술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가게 한쪽에서 저는 도장을 파고 아내는 만화방을 했었는데 만화방 수입이 꽤 괜찮았어요. 결국 아내의 만화방 수입으로 도움 받아서 부산으로 내려간 것이지요.”
부산진역 앞쪽에 자리한 BB예식장과 보림극장 옆에 위치한‘부산시계전문학원’에 입학한 표씨는, 다른 학원생들이 학원 수업을 마치고 놀러갈 때 남포동과 창신동 일대의 시계방을 두루 찾아다녔다.
시계방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헌 시계를 30원에서 150원 정도에 구입하여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표씨는 3개월 속성반을 1개월 만에 끝마치게 된다.
“한동안 도장방과 시계방을 겸했는데 그나마 수입이 늘고 형편도 많이 나아졌어요. 그러나 몇 년 뒤 시계방 수입도 시원치 않아서 관두었지요. 성우당을 처음 개업할 당시에 마축항 쪽에도 도장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도장방도 90년대 초반까지는 괜찮았지요. 어떨 때는 일거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밤이 왜 생겼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사경 헤맨 후에 불교에 귀의
도장장이로 살아오는 가운데 세월은 흘렀고, 지난 2000년 3월 표씨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경험을 했다.
일평생 장애자인 남편을 사랑하며 살아온 부인이 아침에 화장실에서 나오던 중 거품을 물고 방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뇌졸증이었지요. 그때는 정말 하늘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습니다. 다급한 가운데서도 제가 평소 배운 수지침으로 간단한 응급조치를 취했고, 때마침 집에 와 있던 맏딸이 119를 불러 포항 병원으로 내달렸어요. 불편한 몸으로 따라가지도 못하고 아내를 실어가는 119차량에 내 영혼까지 실어 보냈습니다. 그때 작은 딸애가 포항 선린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죽고 살 확률이 반반이었던 상황이었고, 다행히 깨어나더라도 한평생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에 표씨는“신이 있어 자비를 베푼다면 제발 아내와 내가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간절한 비나리가 효험이 있었던지 부인은 며칠 후에 깨어났고, 6년이 지난 지금 표씨의 부인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부인이 사경을 헤맸던 그 일로 인해 표씨는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를 관두고 불교에 귀의했다.
“오죽 표성우가 불쌍했으면 보이지 않는 큰손이 아내를 살려 보냈을까 생각합니다. 아내는 평생 부처님께 남편과 자식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고, 그런 아내를 부처님께서 살려 보내 주었다고 믿게 되었는데 어찌 부처님께 합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장 재료는 상아가 첫째요, 벽조목이 둘째도장장이 표씨는 도장을 만드는 재료인 인재(印材) 가운데 최고는 상아(象牙)라고 잘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코끼리 어금니인 상아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한 부분이었던 만큼 생명 있는 물건입니다. 상아도장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상아에 인각을 해서 인주를 묻히고 나면 인주가 상아 속으로 배어서 도장 위쪽으로 깊게 스며들지요. 일단 어떤 사람의 이름을 파고 나면 두 번 다시 갈아내고 난 다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새길 수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이름 석자가 문신처럼 깊숙이 배어있는 인재를 갈아내고 그 위에 다시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싶어하겠어요? 상아로 새긴 도장은 최초에 자기를 소유했던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아도장은 평생 그 도장 주인의 부와 명예를 불러들이는 것이지요.”
인재 가운데 상아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벼락 맞은 대추나무인 벽조목(霹棗木)이라고 표씨는 말한다.
벽조목은 예부터 사람이 몸에 지니고 있으면 요사스러운 기운이 범접하지 못한다하여 부적이나 도장 재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벽조목은 칼로 때려도 갈라지지 않고, 같은 크기의 일반 대추나무 3개의 무게와 맞먹는 만큼 물에 뜨지 않고 가라앉습니다. 벼락을 맞는 순간 나뭇결이 없어지고 무게가 무거워지는 등 뭔가 재질 자체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겠지요. 그렇게 변화되면서 생겨난 어떤 힘이 사악한 기운을 쫓는 영험을 발휘한다고 전해져 오나 봅니다. 예전 어른들이 상투를 틀면서 틀어 올린 머리모양이 흩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해‘동곳’을 사용했는데, 상아나 벽조목을 많이 사용했던 이유도 그런 신비한 효과를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면서 표씨는 흥미로운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준다.
“예전에 어떤 마을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물살이 센 강물을 건너 건너편으로 피신을 했더랍니다. 마을사람들이 다 건너가고 난 다음, 끝까지 뒤에 남아 집을 지키던 어떤 종갓집 종부가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뒤늦게 강물을 건너게 되었지요. 이미 건너편에 도착한 마을 사람들이 보고 있자니 물을 건너고 있는 종부 뒤쪽으로 거센 물살에 떠밀려온 아주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그 종부의 몸에 붙어 목숨을 부지하려다가 떠 밀려나고 또 다시 붙으려다 밀려나고를 반복하더랍니다. 그런데 끝까지 구렁이는 종부의 몸에 달라붙지를 못하고 물살에 떠밀려 흔적 없이 사라졌지요. 마침내 강을 무사히 건너온 종부의 보따리를 풀어헤쳐보니 조상들이 남긴 족보를 비롯하여 상아 담뱃대, 벽조목 도장, 장신구등의 유품이 들어 있더랍니다. 결국 상아나 벽조목의 보이지 않는 신비한 기운이 요물인 구렁이가 종부의 몸에 달라붙지 못하게 한 것이겠지요......”
도장파며 음악가 함께 한 인생, 후회없어
도장은 문자의 조합에 더해 문양은 물론, 글자의 배치와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고유의 품격이 달라진다.
도장의 품격이 곧 도장을 지닌 사람의 격을 상징한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틀에 박힌 컴퓨터 글자체 몇 종류가 전부인 자동기계로 새겨지는 값싼 도장의 품격이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새겨지는 도장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컴퓨터 도장의 경우 만드는 도장장이의 정성이 배어 있지 않음은 물론, 위조가 쉬울뿐더러 똑같은 인장을 얼마든지 반복해서 만들 수 있다는 위험과 단점이 있다.
도장장이 표씨는 컴퓨터가 자동으로 도장을 파주는 기계가 도입된 지 꽤 됐지만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죽고 나면 수작업도 어지간히 대가 끊길 텐데, 죽기 전에 수작업 도장을 하나라도 더 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다못해 그 흔한 축제장 한쪽이나 할인마트에서조차 자동 기계를 이용하여 기념으로 도장을 파주는 요즘, 그만큼 도장은 흔한 것이 되었고 가치나 품위도 덩달아 떨어졌다.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오로지 손과 조각도를 이용하여 도장을 파온 표씨는 도장장이 인생에 한 가닥 후회도 없다고 말한다.
도장장이 표씨는 도장 파는 일 못지않게 기타와 아코디언 실력 또한 수준급을 자랑한다. 표씨가 작업장 겸 거실로 사용하는 방 한 구석에는 표씨의 손놀림을 기억하는 기타와 아코디언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타를 치기 시작한지는 한 30년 되나 봅니다. 아코디언은 조금 뒤에 배웠고... 요즘도 술 한잔 얼큰해지면 기타나 아코디언으로 ‘애수의 소야곡’이나‘홍도야 울지 마라’를 흥겹게 연주하고는 하지요. 젊은 시절 처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노후에 음악 속에 인생을 절반쯤 파묻고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으로 일평생을 지내야 했기에 겸손하고 성실하게 도에 넘치지 않는 인생을 살아 올 수 있었다고 믿기에, 오히려 장애 1급으로 지내온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도장장이 표성우씨.
장애인이 아니었으면 도장 파는 일이 아니라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것이 뻔한데,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표씨, 그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자신을 염려해주고 축복해준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오늘 후포에 가면 손쉬운 자동 기계를 외면한 채, 죽기 전에 자신이 직접 손으로 새긴 도장 하나라도 이 세상에 더 남기고 가겠다는 고집쟁이(?) 장인 한사람이 술 한잔 얼큰하여 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노래 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