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울진읍 말루 '유부자(劉富者) 고가(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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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인접하여 울진읍 남대천을 경계로 수산리의 비래봉(飛來峰)이 우뚝하고, 관동팔경인 망양정이 바라보이는 곳, 그곳에 말루(抹褸)라는 이름의 작은 동네가 있다.
말루 마을의 개척사는 알 길이 없지만 1600년경에 마을 앞 냇가에서 발견된 나무토막에 지로(旨老)라는 기록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지로동(旨老洞)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에 울진현(蔚珍縣)의 객관(客館) 동편에 목재(木材) 누정(樓亭) 2칸이 있었는데 마을 가까이에 있어서 마을 이름을 말루(抹褸)라 부르게 되었다고 울진군지는 기록하고 있다.
말루에는 됫섬골과 개골동이 있는데, 됫섬골은 예전부터 토지가 기름져서 곡식이 잘 자라 1되의 씨앗을 뿌리면 1석(石)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기에 됫섬골이라 불렀다 한다.
그렇듯 땅이 기름지기로 이름났던 말루마을에 이조(李朝) 헌종(憲宗) 11년(1845년)에 태어나서 30대 젊은 나이에 만석의 재산을 일군 유부자(劉富者)의 고가(古家)가 자리하고 있다.
울진읍 읍남 2리 216번지, 말루동 서쪽 골안의 나지막한 야산에 둘러싸인 오목한 곳에 자리 잡은 유부자 고가는 말 그대로 골안에 자리 잡고 앞으로는 곡간의 뒷산골이 비옥한 말루 앞들까지 연결되는 그 시작 지점에 있다. 2미터에 가까운 흙 담장을 들어서면 300여평의 바깥마당이 넓게 자리하고, 마당 오른쪽에는 방앗간과 방 1칸, 소죽 끓이는 부엌이 있던 곳간이 자리 잡고 있다.
또 왼쪽에는 예전에 사용하던 소 외양간과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正寢-윗채)은 바깥마당의 북쪽에 위치한 ㅁ자형 겹집으로서,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위세 있어 보이는 웅장한 기와집이다.
평면은 전면 오른쪽에 낸 두짝 널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안마당이 나오고 안마당 뒤쪽으로는 넓은 대청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청 오른쪽의 우익사(右翼舍)는 윗방, 안방, 정지 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대청 왼쪽의 좌익사(左翼舍)는 샛방, 샛방 정지, 사랑방, 사랑마루 순서로 이어지며, 안마당 앞쪽에는 도장을 두었다.
곳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우진각 기와집으로 정침 사이에 쪽문을 달아서 드나들게 되어 있다.
2004년 울진군의 문화재를 일괄적으로 조사하여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제작한 경북도 문화재 연구원은 유부자 고가와 관련하여“평면구성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청 한편에 판벽을 쳐서 만든 작은 뒤주가 설치된 점과 대청을 앞쪽으로 반칸 확장한 점이 특이하다”며,“우익사 우측으로 정지를 포함하여 주부의 일상 공간과 연결되는 옆 마당으로 외부와는 어느 정도 폐쇄성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울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 아득한 전설로 기억하는 이름, 말루 유부자.
지금으로부터 131년 전에 태어나서 나이 30대에 만석이나 되는 엄청난 부를 일구어낸 유재업(劉載業)으로부터 시작된 만석꾼의 흔적은 아직까지 유부자집 곳곳에 그득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6천여평의 대지위에 흙과 돌을 사용하여 400여평 넓은 마당을 둘러친 기와를 인 토담과, 무거운 기와를 받치고 선 아름드리 황장목으로 깎아 세운 대들보, 집안에 들어서면 네모난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기와지붕의 고운 선들 구석구석은 한때 떵떵거리고 살던 유부자집의 잔영을 간직하고 있다.
유부자라는 이름을 알린 유재업이 부(富)를 이룩한 것은 그의 나이 30대였던 1870
년대 후반으로 알려진다.
강릉 유씨(江陵劉氏)로 강원도 원주에서 울진으로 낙향한 유열(劉烈)의 맏아들로 태어난 유재업은 30이 될 때까지는 산을 나다니면서 산짐승이나 사냥하고 아버지 유열에게서 풍수지리를 익히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전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동안 배운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미리 점찍어둔 천하(天下)의 명당(明堂)에 아버지를 모시게 되고, 그 명당 덕분에 그가 큰 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재업이 천하의 명당을 얻는 과정 또한 가히 전설에 가깝다.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린 어느 해 겨울에 유재업이 산을 헤매면서 산짐승을 찾아다니는데, 어디선가 황소만한 노루 한 마리가 갑자기 뛰어나와 도망을 쳤다.
온통 흰 눈으로 덮인 산속을 정신없이 노루를 쫓아가는데, 어디쯤에선가 전혀 눈이 덮이지 않은 두세평 넓이의 잔디밭이 눈에 띄었고 재업은 겨울에도 땅속이 따뜻하여 얼지 않는 그곳이 바로 천하 명당이라고 직감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유재업은 지난 겨울에 발견한 그 명당에 혹시 다른 사람이 먼저 묘를 쓸까 싶어서 가묘(假墓)를 쓰게 된다.
그리고 유재업은 성류굴 맞은편의 근남면 수곡리에 묻혀 있던 아버지 유열의 묘를 서둘러 이장한다.
이장하면서도 유재업은 혹시 누가 명당자리를 탐낼까봐서 엿장수로 변복을 하고 수습한 아버지의 뼈를 엿판 밑에 깔고서 옮기는 치밀한 면모를 보인다.
유재업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선산은 현 북면 두천리에 있으며, 지금까지도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천하길지로 알려지는 그 묘소를 한번은 꼭 둘러봐야 하는 필수 코스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버지를 천하 명당으로 이장한 유재업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수곡리에 6칸짜리 집을 마련하고 남은 돈 1백냥을 손에 들고“천하 명당에 아버지를 모셨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이 순조로울 거다”고 확신하면서 무작정 장삿길에 나선다.
집을 떠나 장삿길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유재업은 우연한 기회에 다른 장사꾼들로부터 “일본과의 무역길이 열려 멸치장사를 하면 이문이 많이 남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울진읍 온양리에서 원남면 오산리에 이르는 바닷가의 멸치를 몽땅 사들인다.
멸치를 사들인 재업은 배를 전세 내어 부산으로 내려가서 가득 싣고 간 멸치를 팔아 단 한번에 수천냥의 큰 이문을 남기게 된다.
천하 명당에 아버지를 모신 때문인지 뱃길 또한 부산으로 내려갈 때는 샛바람이 불었고, 울진으로 되돌아올 때는 동남풍이 불어 뱃길을 도와주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단 한번의 장사로 일확천금을 손에 거머쥔 그때부터 울진 지역 사람들은 유재업을 일러 ‘유부자’라고 부르게 된다.
이때 번 돈으로 현재 읍남 2리 말루에 위치한 집을 사들인 유재업은 때를 같이하여 인근의 논밭들을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한다.
천석꾼이 된 유재업은 당시에는 최고가 어종으로 대우받던 청어장사로 다시 한 번 떼돈을 벌게 된다.
몇 년 동안 울진 앞바다는 흉어가 지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재업은 기성면 구산리의 9개 어장 주인들과 단 하루 동안에 잡히는 청어만 계약하였는데, 그날 유재업이 계약한 어장에서만 청어가 가득 잡혔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청어를 사려고 전국에서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는데, 그때 유재업은 청어를 팔아서 수만냥을 벌어들였고 엽전꾸러미를 꿰는 데만 몇날 며칠이 걸렸다고 전한다.
유재업은 멸치와 청어 장사 딱 두 번으로 수만금을 벌어들인 뒤 더 이상 장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땅 사들이기를 반복하면서 해마다 수천석의 쌀을 곳간 가득히 채워가며 본격적으로 거부의 길로 들어선다.
지금까지도 지역의 나이든 노인네들은“울진군 안에서 유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던 때가 있었지...”라며 그때를 회상한다.
그 당시 유재업은 울진군뿐만 아니라 경주시 안강읍, 봉화군, 경남 마산 등지에 수백마지기씩의 논밭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해져 온다.
‘유부자’라는 명성을 만든 유재업이 죽고 난 다음에 그가 평생에 걸쳐 축적한 엄청난 부는 그의 맏아들 유문종(劉文鍾. 1866~1951)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벼슬은 조선 고종 때 종구품(從九品)인 참봉(參奉)에 머물렀지만 강릉군수(江陵郡守)도 사양했던 것으로 알려지는 유문종은 매 해마다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긴 행렬을 이루면서 바리바리로 밀려드는 곡식을 부산 등 대도시로 내다 팔아서 아버지 유재업이 이룬 부에다 몇 천석을 더 보태며 부를 불려 나간다.
논밭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이 오죽 많았으면 울진읍내에서 말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추수를 끝낸 다음 곡식을 싣고 유부자집으로 향하는 소작인들의 우마차행렬이 저 멀리 근남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올까. 아들 문종이 살림살이를 맡았을 때는 나라 안팎이 한창 어수선할 때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12월 서면 불영사에 임시 사령부와 훈련소를 설치하고 군대조직을 편성해 나가던 신돌석(申乭石) 의진(義陣)에 군량미로 쌀 2백 섬도 공급하고 가난한 이웃 주민들에게는 곳간을 열어젖히고 아낌없이 곡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유문종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거금 일천원(당시 소 1마리가 시가 20원)을 기증하여 울진읍내에 제동(濟東)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뜻을 두었는데, 가난한 집 아이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제동학교는 1939년 폐교되었다.
일 년 내내 숙식을 원하는 과객이 끊이지 않을 만큼 인심이 후했던 유부자집의 부(副)도 끝내 3대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유문종의 맏아들 유영준(劉永峻)이 손댄 어업과 광산업이 연이어 실패를 거듭했고,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실시된‘농지개혁’이라는 토지개혁 제도를 겪으면서 소유한 땅을 대부분 내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말루 유부자집은 유영준의 맏며느리인 박송자(78세)씨가 지키고 있다.
박씨는 지금은 비무장지대가 되어버린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원산의‘루씨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6.25사변이 나자말자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다.
당시 박씨의 아버지는 강원도 묵호 운수국의 고급간부였고, 박씨는 춘천 봉의초등학교와 삼척초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던 중 중매를 통해 유부자집으로 시집을 왔다.
작고한 남편 유상욱(劉相旭)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 중앙대학교 법대 3학년 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면서 귀국했다.
한때 그는 국군에 투신하여 계급이 중위까지 올랐으나 군을 제대하고 고향 울진에서 잠시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박씨가 21살에 유부자집으로 시집올 당시 시아버지 유영준은 세상을 떠난 지 8년이나 지났고, 시할아버지 유문종도 3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박씨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신 뒤에 원남면 매화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울진초등학교와 근남면 노음초등학교를 오가며 20여 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을 맞았다.
박송자씨는 유문종씨의 셋째 아들이자 그녀의 작은 시아버지로서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로 불리는 유영국(劉永國) 화백 얘기를 빼놓지 않는다.
국내에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도입한 선두 주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유영국화백은 30대에 만석꾼 부를 일구어낸 유재업의 손자요, 유문종의 4남 가운데 셋째로 1916년 태어났다. 그는 일본 도쿄문화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 서양화과 교수 등을 거쳐 1983년부터 2002년 작고할 때까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지냈다.
해마다 가을이면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곡식 가마를 마치 누각처럼 쌓아놓았다고 해서 말루(斗樓)로 불렀다고 전해져오는 말처럼, 한때 울진 지역에서 최고 부자 소리를 들었던 말루 유부자의 막대한 부는 2대에 그쳤다.
그러나 여전히 말루 유부자집에 가면 위세 높고 인심 후하던 유부자의 자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이라 했던가? 만석꾼의 재물을 일구어 국가를 위하고 이웃들에게 널리 베푼 유부자, 2대에 걸친 유부자 집안의 후덕함이 발복하여 앞으로 후손들에게는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이명동기자(uljinnews@empal.com)미니인터뷰 '유부자집 33대 종부 박송자(78세)씨'

▲ 400년 이상의 역사를 인정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려 했지만 반대했다는데
그동안 울진군에서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몇 번 찾아왔었다. 그러나 집 수리비 명목 등으로 지원되는 금액 못지않게 개인의 재산상 권리가 상실되는 부분 때문에 반대했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까 토담이 군데군데 자주 무너지고는 해서 수리를 거듭해왔는데, 몇 년 전 매미 태풍 때 담 일부가 허물어지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고칠 엄두가 안 나서 그냥 두고 야산을 정원 삼아 쓰고 있다.
▲ 약 60년 전 이집으로 시집온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마당을 들어서서 만나는 왼쪽 대나무 숲속에 원래 방 2칸에 부엌 하나가 딸린 별당이 있었고, 시집올 당시 머슴 대여섯 명과 여종 하나가 일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인민군 수백명이 이 집에다 본부를 차려놓고 3개월여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윗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수많은 귀중품과 중요한 서적들이 없어졌다. 여자 종도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불쌍하다고 데려갔다. 인민군이 주둔할 당시에 우리 가족들은 건너편에 살던 첫째 작은 시아버님(유영숙) 가족들과 근남면 수곡리의 먼 친척집으로 피난 가서 지냈다.이 집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서 정·관계에 진출한 사람들도 많다. 형제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광준씨와 김명윤씨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 이 집은 유영국화백의 생가이기도 한데, 기억에 남는 일은
시할아버님인 유문종 어른은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각각 영준, 영숙, 영국, 영진이다.
유영국화백은 둘째 작은 시아버님이 되신다. 일본에 유학하고 난 다음 6.25 전쟁 통에는 한동안 울진에서 살았다. 죽변면에는 유영국화백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직접 운영하던 양조장도 있었다. 처음에는 막걸리만 만들어 팔다가 뒤에는 소주도 만들어 판매했는데 소주 이름이‘망향(望鄕)’이었다. 소주 이름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생각한다’는 뜻을 가진 ‘망향’으로 지을 만큼 유화백의 고향사랑은 각별했다. 그분의 그림을 봐도 고향 산천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은가?
2002년 유화백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이곳에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동네 전경과 자신이 태어난 생가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올라갔다. 요즘도 유영국화백의 부인인 작은 시어머님이 자주 전화를 주신다. 각종 제사 때에는 절대 잊지 않고‘혼자 수고가 많다’며 전화해주고,‘나와 자네가 죽으면 더 이상 유부자 집 내력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자조적인 말씀도 하신다.
다른 건 몰라도 시집와서 살아보니까 유씨 집안사람들 마음씨 하나만은 모두 어질더라.
유씨 집안의 맏며느리로 들어와서 아들 셋, 딸 셋을 두었는데 모두들 밖에 나가 살고있고, 아마 이 집안의 종부도 내가 마지막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