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정미소 이원철씨가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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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요즘은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르다. 이러다가는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른 날이 곧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길을 다녀보면 도로공사, 건축공사, 교량공사, 포장공사 등이 얼마나 많은지 울진군은 언제부턴가 항상‘공사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없던 길이 뚫리고, 없던 다리가 생기고, 없던 건물이 높이를 다투며 생겨 몇 년 객지라도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사람들은 고향땅에서조차 길을 헷갈리기 일쑤다.
빠름과 속도에 치여 다들 지쳐 가는데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풍경 하나를 떠올린다.
정미소(精米所-방앗간)는 절구와 디딜방아, 물레방앗간의 뒤를 이어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기계 방앗간으로 농민들이 수확한 곡식을 찧는 곳이다.
거대한 기계들이‘피대(벨트)’의 힘을 업고 돌고 또 돌아가면서 농민들이 싣고 온 쌀과 보리, 서숙(조), 기장, 옥수수를 빻아 주는 곳.
팽팽하게 힘줄을 곤두세운 피대에 물려 끊임없이 돌아가는 발동기의 요란한 소리와 자욱한 먼지, 부산스러운 움직임 속에 누런 곡식이 하얗게 둔갑하는 마술의 공간.
농촌에서 나고 자란 40대 이상은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소달구지나 리어카를 이용하여 정미소로 옮기고,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나락이 쌀이 되어 나올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렸던 기억들이 자리할 것이다.
도정기(搗精機-정미기)의 최첨단 기계적 메커니즘에 순응하면서 높게 때로는 낮게 튀어나온 기계 장치들과 피대가 걸린 원형 축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돌고 돌며 쌀을 찧던 정미소. 쌀 포대에서 쏟아진 곡식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돌과 뉘가 골라지고, 껍데기가 벗어지고, 겨가 빠지고 깎아지면서 광택을 낸다.

시골 한구석에 자리 잡은 정미소는 주변의 나지막한 집들과는 대조적으로 외부를 함석이나 나무판자로 막고 덮은 거대한 외형을 지녀 서 마치 초현대적인 건축 스타일을 연상시켰다.
정미소의 내부는 당시의 상식을 뒤엎는 구조의 의외성과 자유분방함에 항상 주눅이 들게 했다.
예전 각 동리마다 자리 잡은 정미소는 그 동네의 상징이었고, 수확의 흥겨움에 더해서 숱한 동네의 대소사가 오고가던 마을 공동체의 정겨운 구심점이었다.
그렇듯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정미소가 자가 도정 설비 보급 등 산업화의 물결 속에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시골에서도 쉽게 찾기 힘든 곳이 되고 말았다.
울진초급중학교 졸업 후 제재소 서기로 취직
원남면 매화 시장 안에 거주하는 이원철(李源喆. 75세)씨는 매화리에서 태어나서 평생 한곳에서 고목처럼 뿌리를 박고 살아오며 40여년 정미소를 운영해온 토박이다.
이씨는 본관이 진성(眞城)으로 5대조가 매화리 나마실(那阿谷)에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했고, 퇴계 이황 선생이 자신의 15대조가 된다며 선조들 자랑으로 말문을 연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기 한달 보름전인 7월 1일에‘매화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이원철씨는 당시로서는 드물게‘울진공립초급중학교(현 울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초급 중학교라고 해서 현재 울진향교안에 학교가 있었어요. 지금의 중학교처럼 3년 과정이었는데, 전에 울진군의 내무과장을 지냈던 최구소씨가 그때 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창이지요. 그때만 해도 원남면 전체에서 울진 초급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매화에서 근남면 구리재를 넘어 걸어 다녔지요.”
1948년 7월 16일 열일곱 살의 나이에 울진 공립 초급 중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제재소에 서기로 취직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침을 먹고 나면 당장 점심을 걱정해야 할 만큼 먹고 살기가 힘들 때로,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어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건 대단한 학력이었다.
“초급 중학교를 졸업했으니까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지, 울진 제재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울진 제재소를 경영하던 장덕열씨가 내 생질(甥姪)이 됩니다. 그래, 울진 제재 공장에 서기로 들어갔지요.”
이씨는 울진 제재공장에서 8년 정도 일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부산에서 보내게 된다.
울진에서 생산되는 우량한 목재를 싣고 부산 상인들에게 팔러 다니는 것이 그가 맡은 중요한 업무였기 때문이다.
“울진 제재소에서 일할 때 한달에 20일 정도는 부산에서 생활했고, 10일 정도는 울진에서 지냈지요. 그때 울진에서 생활한 시간은 얼마 안됐습니다. 그 시절 울진에서 베어낸 목재를 싣고 부산항에 있던 목재상들에게 팔러 다녔어요. 재미도 있었지요. 울진 출신들 서너명이 목재를 싣고 부산을 오고 가면서 부산항에서 선적과 하역을 도맡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을 호령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씨는 그 당시에는 울진군 내에 목재소도 흔했고, 부산까지 목재를 팔러 다니는 울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특히 죽변면의 전무호씨가 운영하던 회조점((回漕店-해운업자와 하송인(荷送人) 사이의 화물 운송에 관한 일을 하는 상점))은 목재 보관소를 크게 했었고, 대한통운이라는 운송업체도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오죽 울진 목재상들이 많았으면 부산 보수동 골목에는 울진 사람들이 항상 묵어가는 하숙집까지 따로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씨는 부산으로 목재를 팔러 다니던 시절에 부산 목재상들을 골탕 먹이던 방법을 살짝 얘기해준다.
“목재는 나무의 좁은 부분인 말구(나무의 윗부분)를 자로 재서 재적을 산출하지요. 그런데 울진에서 목재를 실을 때는 칠사팔립(七捨八入)으로 계산하고 부산에 가서는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계산을 해서 목재상에게 넘기게 됩니다. 당연히 목재 값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또 그렇게 남는 돈은 목재를 팔아넘기는 우리들 몫이 되고는 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하지요. 부산에 가서 노동자들을 부리는 작업반장들에게 비싼 술 한번 사겠다고 은근슬쩍 눈치를 주면, 목재상이 정신이 없게끔 일부러 시끌벅적 소란을 떨어가며 목재를 하역합니다. 그럴 때 인부들에게 눈 한번 끔뻑 하고 나서는 말구도 쟀다가 벌구(나무의 아랫부분)도 쟀다가 그러는 거지요.”
나무는 윗 둥치인 말구를 재서 재적을 계산해야 하는 것인데, 넓은 아랫 둥치인 벌구(원구)와 말구를 눈치껏 번갈아가면서 자로 재어 재적을 산출하니 차이는 당연히 생기는 것이고, 그런 방법을 쓰면 목재 팔러 부산을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비싼 양복 한 벌 값이 일행들에게 떨어졌었다고 이씨는 당시의 추억을 떠올린다.
“인부들을 부리는 작업반장들과 손발이 잘 맞아야 했어요. 용돈 벌이 삼아 그런 장난을 치고는 했는데, 고향사람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부산의 돈 많은 목재상들이 목재를 조금 더 비싼 값에 사는 셈이었지요. 그때가 아마 스물네다섯살 때였을 겁니다.”
결혼 후 정미소와 제재소를 동시에 운영
스물여섯 살에 이씨는 평해읍 월송리에 사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그때는 당연히 중매로 결혼을 했지요. 그때 백부님께서 울진양조장의 주식을 가진 주주였는데, 처 백부도 울진양조장의 주주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당신 조카들의 혼사얘기가 오갔고 중매를 통해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 백부님은 후에 주주로서 매화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매화양조장은 수질이 좋아서 술맛도 참 좋았고 또 잘 팔렸습니다.”
이씨는 10여 년 전 앞서 세상을 떠난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현재 모두 출가하여 타지에 나가 살고 있고, 셋째 아들만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1959년 9월 15일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사라호 태풍이 지나가고 난 이듬해 이씨는 원남면으로 들어와서 직접 정미소와 제재소를 겸한 공장을 운영하게 된다.
“정미소를 시작했을 때가 아마 스물여덟 살 때 일겁니다. 처음에는 정병기씨라는 사람과 동업을 하면서 제재소와 정미소를 함께 겸했었어요. 제재소야 오랜 기간 동안 경험을 쌓은 뒤라서 너무도 손에 익은 일이고, 당시에는 온 동네마다 정미소가 생길 정도로 정미소도 굉장히 번성할 때였지요. 아버님도 동업으로 정미소를 한 적이 있어서 정미소도 나에게는 꽤나 익숙한 일이었어요.”
제재소와 정미소를 동시에 경영하기 시작한 이씨는 채 3년이 못돼서 제재소는 그만 두게 된다.
“1961년 5.16혁명 이후에 임산물 질서가 제대로 잡히면서 벌채를 상당 부분 금하게 되고부터는 원 자재인 목재를 구하기가 무척 힘들게 되었어요. 목재로 쓸 나무를 구하기는커녕 전 국토를 녹화한다고 정부가 앞장서서 계몽을 했고, 온 국민들이 나서서 헐벗은 산에 나무 심기에 바빠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돈 벌어 기계 교체하기 바빠... 그리고‘탕탕 방아’의 추억
이씨가 처음 정미소를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원남면에서만 12군데의 정미소가 성업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정미소에 설치된 기계가 고장 나기 일쑤였고, 몇 년 안가면 성능 좋은 신형 기계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돈을 벌기는 했어도 새 기계로 교체하기에 바빠서 막상 큰돈은 벌지 못했다”고 이씨는 말한다.
또 그 당시에는 허가업체인 정미소를 상대로 말(斗), 되(升) 등의 도량형기(度量衡器)나 도정요율(搗精料率)에 대한 단속도 상당히 심했다.
“돈을 조금 벌어봐야 새로 나오는 기계를 들여 놓기에 바빴습니다. 점점 세월이 지나면서 영업이 저조하여 유지가 안 되니까 이곳저곳에서 정미소를 관두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나는 시설 개선에 계속 투자하면서 지금까지 끌고 나왔지요. 관청의 단속도 말도 못하게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쯤에 양곡 가공협회가 결성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각 정미소마다 정확한 요율을 적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산골에 서너 집씩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사람들은 기억한다.‘탕탕 방아’의 추억을......
이씨도 처음 정미소를 시작했을 당시‘탕탕 방아’를 찧어주러 무거운 기계를 둘러메고 원남면 인근 산골 마을을 돌아다니던 아련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 그걸 탕탕 방아라고 했었지요. 추수가 끝나고 난 다음 정미소가 한창 바쁘고 나면 발동기와 피대, 정미기를 지고 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차도 잘 다니지 않는 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지게나 목도를 이용하기도 했고, 정 이동하기 힘든 곳은 발동기를 분해해서 지게에다 지고서 옮겨 다녔어요. 후에는 달구지를 이용하기도 했고...... 그렇게 한 3~4년 다녔나 봅니다.”
이씨가 정미소를 시작할 초창기에 경상북도에서 정한 도정요율이 100kg에 6kg(쌀 3되 분량)이었다고 한다.
현재 100kg 쌀 한가마니를 찧어주는 도정료가 봉두(산봉우리처럼 가득하게 올려 쌓은 되) 3되고 80kg에 평두 3되니까, 실제 당시에 정해진 도정 요율이 아직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쉬운 일이 어디 있을 까만은 이씨는 요즘 정미소 운영하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정미소에 가만히 앉아서 농민들이 곡식을 가지고 오면 찧어주는 것에서 그쳤지만, 지금은 전화연락이 오면 서면과 평해까지 나가서 곡식을 직접 싣고 와서 찧고 난 다음에는 그 집으로 다시 배달까지 해 준다고 한다.
“한때 자가 도정 시설이 급속도로 보급되던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전기요금, 기계 감가상각비 따지면 차라리 정미소에 와서 곡식을 찧어가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히지요. 자가 도정 시설이 갖춰진 집에서도 이젠 정미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미소도 다시 나아지겠지요.”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풍구’의 풍량 조절 방법
이씨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도정 공장에 비해‘매화정미소’가 찧고 난 다음에 더 많은 양의 쌀이 나온다고 자랑이다.
“정부 도정 공장은 40kg 한포를 넣으면 최하 28kg의 쌀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내 공장에서는 40kg 한포를 도정하면 30kg이 나옵니다. 도정하고 난 다음에 보다 많은 양의 쌀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기술이지요. 같은 무게의 벼 포대를 넣을 때 단 한줌이라도 더 많은 쌀이 나와야 합니다. 한두 포대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한꺼번에 많은 벼를 찧을 때는 엄청난 양이 차이가 납니다.”
평생 정미소를 운영해온 이씨가 10여 년 전 새 기계를 들이고 난 다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기술이 도정기계의 풍량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도정작업을 하는 정미소 설비는 얼핏 간단해 보이면서도 꽤나 복잡한 기계적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투입구에 넣어진 벼는 정선기(精選器)와 석발기(石拔機-벼에 섞인 돌을 골라내는 기계), 현미기를 거쳐 아래 풍구(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등을 바람으로 날려서 제거하는 기구)와 공중 풍구(윗풍구)를 통과한다.
그 다음에 정미기를 거치면서 껍질이 깎이고, 분리기를 거치면서 깎인 나락과 덜 깎인 현미가 별도로 분리되어 정미기로 되돌아온다.
정미기로 되돌아온 벼를 연마기를 거치게 하면서 싸라기와 쌀알을 걸러주면 도정 작업이 끝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벼는 정미기를 4번 거쳐야 반짝반짝 윤기 있게 빛이 나는 쌀로 거듭나는 것이다. 벼를 도정하고 난 다음 얻게 되는 쌀의 양은 바람으로 쭉정이와 겨 등을 제거해주는 풍구의 회전수가 결정한다.
풍구의 바람이 약하면 쭉정이나 먼지와 겨가 제대로 날려가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바람이 너무 세면 쌀알까지 겨나 쭉정이로 분류되어 날아가 버려서 그만큼 도정된 쌀의 양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겨를 불어내는 풍량의 정상속도가 50이라고 가정할 때, 풍구의 회전 속도를 60이나 70에 맞춰버리면 겨에 쌀까지 휩싸여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양이 줄어듭니다. 보통 정미소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공장에서 출하될 당시에 쌀이 깨끗하게 도정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풍구의 바람이 세게 조정되어 있습니다. 쌀을 찧으러 온 농민들이야 알 턱이 없지요. 양이 줄어도 곡주(穀主)는 모릅니다. 풍량을 적절하게 조정하지 않으면 아까운 쌀 다 날려버리게 되는 거지요. 풍구의 회전속도를 정확하게 조정해야 되는데, 울진군 내에서 그걸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모르긴 해도 나밖에 없을 겁니다. 그건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경력에 따른 노하우가 절대적이지요.”
객지 떠돌던 셋째 아들, 고향 돌아와 가업 이어
5~6년 전부터는 고향에서 학교를 마치고 집을 떠나 객지에서 트럭운전 기사를 하던 셋째 아들 이동문(38세)씨가 집으로 들어와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도정공장 허가에 제분업 허가까지 겸하는 ‘매화 정미소’를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경영하면서 곡식 도정은 물론이고 송편, 찹쌀떡, 기지떡, 약밥도 만들어 팔고, 참기름과 들기름도 짜준다. 이동문씨는‘매화 정미소’에 자랑거리가 두가지 있다고 귀띔한다.
그 하나가 빠른 시간 안에 보리를 찧는 정맥기(精麥機)요, 또 다른 하나는 힘들이지 않고 한꺼번에 쌀 2포대씩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곡식 포대 상차 전용 1톤 트럭이다.
보리를 도정하는 과정은 벼를 도정하는 과정보다는 단순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보리는 쌀에 비할 때 껍질이 훨씬 단단해서 정맥기를 12번 거쳐야 한다. 수확된 보리는 투입구에 보리를 넣고 난 다음에 돌을 골라내는 석발기를 거쳐 3대의 정맥기를 통과시키면서 4번 왕복을 시켜야만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대부분의 정미소가 보리를 찧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데 비해‘매화 정미소’의 보리 도정 설비는 250마력의 버스 엔진으로 정맥기 3대를 동시에 가동시켜서 순식간에 투입구에 넣어진 보리가 알곡상태의 보리쌀로 쏟아져 나오게 한다.
이동문씨의 두 번째 자랑거리는 곡식 포대를 집어 올려주는 크레인이 장착된 1톤 트럭이다. 외양은 일반적인 소형 크레인 차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은데, 크레인 붐대 끝에 매달린 집게발이 곡식포대를 들어올리기 알맞은 모양으로 주문 제작되어 있다.

무거운 곡식 포대를 들어 올리다가 몇 번이나 허리를 삐끗한 경험 때문에‘한림’이라는 회사를 통해 특별하게 주문 제작한 크레인은 한꺼번에 300kg의 중량물을 들어 올릴 수 있어, 지금도 이동문씨가 고객들의 집에서 곡식 도정을 주문받거나 배달할 때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40여년 정미소를 운영해온 이원철씨는 손으로 만져만 봐도‘잘 건조됐다, 또는 나락이 눅어서 안 된다’를 단박에 알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만큼 도정과정은 물론 밥맛 또한 곡식의 수분함량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덜 건조된 벼를 가지고 정미소를 찾아오는데, 쌀의 수분함량은 12.5퍼센트에서 13퍼센트 정도가 가장 이상적이다.
이보다 수분함량이 많으면 껍질이 덜 벗겨져서‘미’가 많이 나오고, 수분함량이 정말 많을 경우에는 뭉쳐져서 떡 같은 상태가 돼 버린다고 이씨는 전한다.
이씨는 살아오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쪼들렸을 때가 매화종합고등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추진위원장을 맡았을 때라고 회고한다.
“79년부터 82년까지 매화종고를 설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위원장을 맡아서 일했어요. 경북도 교육청은 물론이고 문교부까지 수차례 오가면서 설립 인가를 허락받아서 매화종고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때가 경제적으로 참 어려웠어요. 몇 년 동안 일은 일대로 못하고 이곳저곳 바쁘게 쫓아다니느라고 돈은 또 돈대로 썼지요. 오죽했으면 돈에 쫓기다 못해 결국 논까지 세마지기 없앴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제 와서는 입학할 학생들이 없다고 폐교라니......”
평생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농민들과 애환을 함께 한 이원철씨는 지나온 삶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정미소라는 직업을 선택했기에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성실하게 일했고 남에게 욕 얻어먹을 일 하지 않으며 지금껏 살아왔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정미소는 사양산업이라고 말하면서도, 농사가 있는 한 정미소가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믿기에 뒤늦게 아버지의 가업을 잇겠다며 고향으로 돌아온 셋째 아들도 믿음직스럽다.
일평생 정미소와 고락을 함께 해온 이씨의 마지막 말이 여운으로 남는다.
“도정하는 데는 첫째가 신용이요, 둘째가 곡식 한알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도정료로 돈보다는 쌀을 받고 있으니 집에 쌀 떨어질 일이야 없겠지요......”/이명동기자(uljinnews@emp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