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반점 최원택씨가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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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에 자장면(짜장면)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
요즘처럼 외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때에는 평소에는 먹을 수 없고 특별한 기념일에나 맛볼 수 있었던 귀한 음식이 짜장면이었다.중국집에서 춘장과 기름을 섞어서 볶아낸 짜장을 면발위에 얹어서 주는 짜장면은 그 특유의 향과 맛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끌어 당겼다.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면 중국집은 가장 대중적인 면 요리인 짜장면을 먹으러 몰려드는 손님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가난했던 시절 금세 배고픔을 달래 주었던 ‘곱빼기’, 조리하는 시간이 짧아서 우리나라의‘빨리빨리’문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던 짜장면. 중국 산동지방의 음식인 짜장면(작장면, 炸醬麵)은 1882년 임오군란 다음해에 개항한 인천 항구에 중국 청나라 출신의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자신들의 고국에서 먹던 것처럼 국수에다 볶은 춘장을 비벼먹기 시작하면서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진다.
짜장면은 그 후에 6.25 전쟁 등을 겪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에 의해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과다한 기름과 향신료를 대폭 줄이고, 양파를 듬뿍 넣어서 단맛을 강화하고, 감자나 당근을 새로운 재료로 사용하는 등으로 상업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 등 우리나라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가장 대중적인 음식인 짜장면의 인기도 이제 예전 같지만은 않다.
곳곳에서 생겨나는 서구식 패스트푸드점과 각종 마트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라면 등 면 종류를 표방하는 다양한 종류의 인스턴트 음식 재료들로 인해 이전에 누렸던 특수한 호황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짜장면은 여전히 소비자 물가지수(CPI)를 산정하는 품목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일본 나가사키가 고향으로 알려진 짬뽕보다 일찍 선보였던 만큼 변함없이 서민들의 입을 즐겁게 해 주는 일등공신으로 대우받고 있다.
어머니의 개가, 중국인 의붓아버지와의 만남
죽변면 시장 안에 들어서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부산반점’이라는 상호의 중국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죽변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물론, 이리저리 일자리를 따라 옮겨 다니는 노동자나 타지 어민들 사이에서까지‘죽변면의 원조 짜장면 집’으로 기억되던 중국집 ‘부산반점’.
젊은 시절부터 중국 산동지방 출신인 의붓아버지로부터 중화요리 기술을 배워 죽변에서만 40여년 반점을 운영해온 최원택(65세)씨는 경주시 감포읍에서 최만용씨와 김봉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주 감포가 고향이지요. 딸 넷에 아들 하나, 5남매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나가 3명이고 밑으로 여동생이 한명 있어요.
4살 되던 해에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났고 한두 해 뒤에 어머니께서 중국 산동 출신의 왕한의라는 분과 개가(改嫁)를 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제결혼을 한 셈이지요.”
최씨가 어릴 때 어머님이 개가하여 의붓아버지가 된 왕씨는 울진으로 올라와서 울진 읍내의 옛 삼오정 식당 건너편에 위치하던‘신영춘’이라는 반점에서 주방장으로 일을 했다.
매일같이 먹고 살 한끼를 걱정하던 시절, 최원택씨는 어머니와 함께 의붓아버지가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는 울진으로 올라온다.
“참 힘들고 고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내 나이가 6~7살되던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울진으로 올라왔지요. 그때 큰 누나는 이미 시집가고 없었고 둘째 누나와 셋째 누나, 여동생은 남의 집으로 식모 일을 하러 들어갔어요. 무엇보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 절실하던 때였으니까요.”
어린 나이에 울진으로 올라온 최씨는 옛 삼오정 식당 자리에서 수년간 살게 된다.
“삼오정이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이었어요. 의붓아버지가‘신영춘’에서 주방장으로 일할 때 우리 가족은 삼오정 식당 자리에 있던 가정집에서 세를 얻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집을 사서‘쌍춘원’이라는 반점을 개업하고 장사를 시작하게 된 거지요.”
최원택씨는 울진으로 올라와서 울진초등학교를 1년 동안 다니다가, 평소 친분이 있던 주변 사람 소개로 강릉시 홍제동에 위치한‘강릉 화교(華僑) 소학교’를 거쳐서 부산 초량동에 소재한 화교 중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본토 출신 중국인에게 개가하셨기에 내 국적도 중국으로 돼 있어서 화교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중국 본토에서 다닐 계획을 세웠었는데, 마침 그때 의붓아버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어요. 그 후에도 살아오면서 계속 중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10여 년 전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꾸었지요.”
스무살 때 의붓아버지 왕한의씨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최씨는 1~2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직접‘쌍춘원’을 꾸려 나간다.
의붓아버지의 중화요리 만드는 과정을 수년 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씨는 이미 식사류와 요리류 등 중화음식 만드는 기술을 종류별로 모두 습득하고 있었기에 가게를 운영해 나가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사실 중국집에서 만들어내는 식사나 요리를 배우는데 특별한 재능은 필요 없습니다.
일류 호텔 주방장이라면 모를까, 대부분 지역 주민들을 상대하는 일반 중국집은 신선한 재료를 골라서 그저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정성껏 간을 맞춰 조리하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간’입니다. 온갖 종류의 식사류와 요리류에 따라‘간’의 정도가 모두 틀리니까, 주방장은‘간’을 제대로 계산해야지요. 주방장의 머리와 손끝에서 ‘간’의 정도가 결정되고, 또 그것이 음식의 생명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중국집에서 최고로 신경 쓰는 것은 매일 아침 짜장을 볶는 일일 겁니다. 식용유와 춘장을 반반씩 넣고 중간 불에서 계속 저어주면서 장을 볶는데, 센 불에 급하게 볶으면 탄내가 나고, 덜 볶으면 떫은맛이 납니다. 춘장 볶는 기술이 짜장 맛을 내는 핵심이지요.”
결혼 후 개업한 ‘근향관’과 ‘진영반점’시절
최원택씨는 21살에‘쌍춘원’에 고춧가루를 납품하던 재료상의 소개로 죽변면 화성리 송정마을에 살던 1년 연상의 아가씨 김영숙(66세)씨와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꾸몄다.“수년 동안 고춧가루를 대주고 지켜보면서 성실하다고 생각됐는지 집사람의 처이모가 결혼을 중매한 것이지요. 21살에 결혼하고 난 다음 한두 해 더‘쌍춘원’을 운영하다가 죽변으로 이사했습니다. ‘쌍춘원’은 어머니께서 계속 맡아서 운영했지요. 어머님은 1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결혼하고 죽변으로 들어온 최씨는 현 면사무소 옆쪽에 가게를 얻어 ‘근향관’을 개업했다.
“처음 개업할 때 어머니께 5만원, 장모님께 5만원 빌려서 10만원으로 장사를 시작했어요. 5만원을 집세로 주고 나머지 5만원으로 그릇과 재료를 준비해서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최원택씨는 처음 개업한 ‘근향관’에서 돈을 꽤 벌었었다고 말한다.
“개업할 당시에 죽변만 해도 중국집이 서너 군데 더 있었는데도 장사가 잘됐어요. 개업 할 때 짜장면 한 그릇 값이 70원 했는데도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근향관을 개업하고 3년 동안 돈을 번 최씨는 가게를 현 죽변파출소 옆 골목 초입으로 확장 이전한다. 최씨와 부인 김씨는 확장 이전해서 개업한 두 번째 가게인 ‘진영반점’ 시절 상당히 어려웠다고 기억한다.
“처음‘근향관’을 개업해서 3년 동안 착실하게 번 돈을 ‘진영반점’에서 1년 동안 몽땅 까먹었습니다. 자리가 나쁜 것인지, 가게 이름이 나쁜 것인지 음식 맛은 달라진 것이 없을 텐데 도무지 손님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1년 만에 또 자리를 옮기게 됐지요.”
‘부산반점’개업, 짜장면 곱빼기 한그릇에 250원
‘근향관’에서 3년간 힘들여 번 돈을 ‘진영반점’에서 1년 동안 모두 날린 최씨는 다시 어머님에게 20만원을 빌려서 현재의 ‘부산반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최씨는 세 번째로 개업한 ‘부산반점’자리 한곳에서만 39년 동안 한 종류의 장사를 지속했다.
“원래 현재 ‘부산반점’자리는 ‘부산 피복점’이 있던 곳이었어요. 우리가 가게를 얻을 당시‘부산 피복점’이 때맞춰 문을 닫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세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면서 전에 사용하던 이름 그대로‘부산반점’이라는 상호를 사용하게 된 거지요.”
항구 가까운 곳으로 가게를 옮겨 내·외지에서 몰려드는 어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 좀 더 나을 것이라는 최씨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고 그대로 적중했다.
“부산반점을 개업한 첫해에는 별다른 손님이 없더니 다음해부터는 홀 손님은 물론이고, 음식 주문이 정신없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오징어가 엄청 많이 잡혀서 항구가 흥청거릴 때였는데, 어민들을 상대로 몇 년 동안은 돈을 말 그대로 끌다시피 했어요. 부산반점 개업하고 3~4년 동안은 정말 왕창 벌었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앞에 찬 전대에 꽉꽉 들이찬 돈을 비워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최씨는 ‘부산반점’을 개업하고 몇 년 동안은 제시간에 앉아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다고 술회한다.
결혼 후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세 번째로 개업한 ‘부산반점’이 호황을 누려 최씨는 불과 1년 만에 세를 얻어 들어간 ‘부산반점’건물을 구입하게 된다.
최씨는 ‘부산반점’을 개업할 당시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 값이 25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요즘과는 많이 달랐던 그 당시 중국집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들려준다.
“짜장면 곱빼기 네 그릇을 팔면 천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재료상에서 ‘쇼팅’이라 불리는 기름을 팔기는 했었지만 비싸서 그걸 사용할 수는 없었어요. 그 대신에 재료상에서 돼지비계를 구입하여 껍데기를 벗긴 다음 프라이팬에 달궈 기름을 내서 짜장이나 야채를 볶아서 맛을 냈지요. 그 맛은 지금 중국집에서 사용하는 식용유가 절대 쫓아갈 수 없지요. 마냥 고소한 중국 음식 특유의 맛은 돼지비계 기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돼지비계에서 짜낸 기름을 사용하면 짜장면의 면발도 훨씬 쫀득거려 맛이 유별납니다.”
나무 배달가방, 연탄 화덕, 사기 그릇...
흔히 우리들은 중국집 배달원을 가리켜 ‘철가방’으로 부르며 약간은 비하하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철가방이라는 호칭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들에게 배달할 때 들고 다니는 가방이 철제 제품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배달원의 또 다른 이름 ‘철가방.’ 그러나 ‘철가방’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최씨가 ‘부산반점’을 개업할 당시만 하더라도 철가방이나 플라스틱 가방이 공산품으로 생산되기 훨씬 전이어서 직접 목재를 가공한 다음 배달 가방을 제작해서 사용해야만 했다.
“그때는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다들 나무를 이용하여 직접 배달 가방을 만들어서 들고 다녔어요. 당연히 엄청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이용하여 배달하는 게 아니라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들고 배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무 가방에 보통 짜장면 두 그릇 정도밖에 담지 못했습니다. 주문이 많으면 나무가방 서너개를 리어카에 실어 끌고서 배달을 다녔어요. 걸어가기에 조금 멀다 싶으면 자전거를 타고 배달 다니기도 했고요. 여름 장마철이라도 되면 나무 가방이다 보니까 곰팡이도 피고, 장시간 들고 다니면 물을 머금어 점점 더 무거워지고는 했었습니다. 또 떨어뜨리면 부서지고 안에다 음식이라도 쏟으면 금세 얼룩이 져서 청소하기도 불편하고, 그렇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불편했던 것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처음 중국집을 개업할 때만 하더라도, 요즘 중국집에서 사용하는 화력 좋은 석유나 가스버너가 아니라 나무를 때서 짜장과 야채를 볶고 면을 삶았다.“처음에는 나무 화덕을 사용하여 모든 음식을 조리했습니다. 요리를 할 때 사용되는 장작의 양이 결코 만만한 게 아니어서, 그때는 중국집들마다 별도로 나무를 재어 놓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근처에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뒤에 연탄 화덕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 당시 군부대에서 주로 사용하던 31공탄을 사용했는데, 화력이 세지 않을 때는 멀쩡한 연탄을 뭉개서 주먹만큼씩 따로 뭉쳐서 사용하고는 했어요. 그 다음에 석유버너가 나왔고 또 가스버너가 나왔지요. 요즘이야 정말 편리하지요. 화력 세지, 깨끗하지.”
최씨가 반점을 운영할 초창기만 하더라도 플라스틱 그릇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전이어서 식당에서는 모두들 사기그릇을 사용했다.
“사기그릇만큼 불편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아무리 조심해서 다뤄도 툭하면 금이 가고 이빨이 빠지고 하는데, 너나 나나 한국 사람들은 이빨 빠진 그릇에는 물 한모금도 제대로 받아먹지 않잖아요? 손님들이 음식 먹을 때 조금만 부주의해도 그릇이 깨지고 금가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금가거나 이빨 빠진 사기그릇을 버리고 새로 또 장만하고는 했습니다. 참말로 그릇 많이 버렸습니다.”
혼분식 장려운동... 닭튀김 ‘팔기유’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던 60, 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쌀이 자급자족이 되지 않자 정부차원의 대규모 혼분식 장려운동이 펼쳐졌다.
그때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해서 보리쌀이 섞이지 않은 쌀밥만싸온 학생들을 혼내고는 했다.
각급 관공서와 각종 회사의 구내식당에서는 쌀만으로 밥을 짓지 못하게 했고, 정부에서는 절미(節米) 운동으로 밀가루가 쌀보다 영양이 풍부하다는 분식 예찬론을 펴며 전 국민이 혼분식을 생활화할 것을 법적으로 강제했다.
“혼분식 장려 운동이 한창일 때는 반점에서도 당연히 쌀밥을 만들어 팔수가 없었어요. 손님들이 짬뽕밥을 시켜도 밥알 대신 밀가루를 옹심이처럼 뭉쳐 만들어 밥 대신 넣어서 팔고는 했습니다. 볶음밥을 시켜도 쌀과 보리를 반반씩 섞어서 팔았어요. 요즘 관청에서 실시하는 위생검사처럼 공무원이 정기적으로 혼분식 검사를 나왔는데, 쌀밥을 팔다가 적발되면 일주일이나 보름씩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모두들 배가 고팠던 시절이라 혼분식이라도 맛있기만 했지요. 거기에 더해 짜장면 하나를 만들어도 요즘처럼 기계로 뽑아내는 끈기가 없는 면발이 아니라, 장시간 손으로 두드리고 뭉치고 펼치기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손 면이라서 한맛 더했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요즘 갖가지 이름으로 선보이는 치킨집이 없을 때여서 중국집에서 닭을 튀겨서 팔았다.
“그때도 중국집의 메뉴는 요즘과 비슷했습니다. 깐풍기, 탕수육, 라조기 등의 요리류와 짜장면, 짬뽕, 볶음밥 등의 식사류가 있었어요.
그런데 팔기유라고 불리던 요리가 있었는데 닭을 여덟 조각내서 돼지비계 기름에 튀긴 것이지요. 맛은 요즘 치킨 집에서 튀겨주는 닭 맛과 비슷했는데, 그때만 해도 치킨집이 없을 때였으니까 팔기유를 찾는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 3대째 중국집 가업 이어
누가 뭐래도 천생 중화 요릿집 주방장인 최원택씨는 2년 전 일선(?)에서 물러났다.
“4~5년 전에 돈 관리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맡겼고, 2년 전부터는 주방장일도 한 손 뗐습니다. 평생 중화요리 주방장을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한발 물러나니 시원함이 아니라 서운함이 앞서더군요. 주방 일에서 한 손 떼면서 평생 즐기던 담배까지 끊고 나니까 더욱 무료합니다. 심심함을 참다못해서 어떤 때는 남의 집 식당으로 들어가서 주방장 일을 다시 해볼까하는 궁리를 해 보다가는 혼자 그냥 웃고 맙니다.”

최원택씨는 부인 김영숙씨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현재 맏아들 경철(43세)씨와 둘째 아들 경배(41세)씨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각각 죽변에서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다. 죽변 시장 입구에서 한때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반점의 상호인 ‘쌍춘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경철씨는 주방 일을 완전히 익혀 성업 중이고,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으로 유학 갔던 둘째 아들 경배씨는 본토 아가씨와 결혼하고 귀국하여 얼마 전부터 아버지 최원택씨가 평생에 걸쳐 운영하던 ‘부산반점’ 자리에서 ‘오렌지 반점’으로 상호를 바꾸고 영업 중이다.
지역에서는 극히 드물게 최씨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3대째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국집의 전통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스물두 살에 시집온 이후 남편으로부터 중국집 주방 기술을 배워서 어디 가더라도 빠지지 않을 솜씨를 보유한 최원택씨의 부인 김씨는 현재 둘째 아들 경배씨가 운영하는 식당의 주방장을 맡고 있다.
아내가 급한 볼일이 있어 가게를 비울 때면 지금도 여전히 주방에 들어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짜장과 야채를 볶고, 프라이팬을 돌리는 최씨는 평생 주방에서 일만 하느라고 남들 다 배운 화투, 바둑, 장기 등의 잡기를 배우지 못한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며 웃는다.
잡기는 배우지 못했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최씨는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장년축구회의 최고 연장자로서 운동장을 뛰고 있고,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동년배들과 어울려 근교에 위치한 산들로 등산을 다니며 소일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각 동네 골목 어귀쯤 하나씩 내걸린 ‘~루’, ‘~성’, ‘~관’, ‘~반점’ 등의 중국집 간판들.
그 중국집을 지날 때면 항상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짜장면은 늘 가장 먹고 싶은 별미 중의 하나였다.
일년에 한번이나 두 번쯤 아주 특별한 날에 부모님을 졸라 중국집으로 들어서면 수타식으로 내리쳐서 뽑아 놓는 쫄깃쫄깃한 면발위에 춘장을 볶아 만든 까만 짜장이 얹어졌고, 녹색 완두콩이라도 두어 개 곁들여지면 최고로 완벽한 이색적인 먹을거리를 맛볼 수 있었다.
음식이 귀하던 시대를 살아오면서 짜장면을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그 특유의 냄새와 맛이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일생을 지배한다.
기억속의 지배는 아주 강력한 것이어서 살아가면서도 ‘중국집~’하면 가장 먼저 짜장면이 연상되고, 우리의 토종 먹을거리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밀려드는 수입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넘쳐나도 짜장면은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동시대를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먹을거리를 대변하며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다.
짜장면은 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조금은 특별했던 어떤 장소와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을 지니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추억속의 음식으로 자리잡아가는 짜장면이지만, 아직까지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곳에서 편리하고 쉽게 맛있는 한 끼를 해결해주는 짜장면은 무엇보다도 음식 고유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비록 졸업식과 입학식, 어린이날, 생일날 등을 기념하는 영광의 자리는 서구식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에 자리를 양보했지만, 언제까지나 짜장면은 동시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의 한가지로 그 자리를 지키게 될 것이다.









